온전한 믿음과 혀
<야고보서3:1~12>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할렐루야!
지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소리가 더 커졌으면 좋겠어요.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게 아멘 소리에요. 할머니, 할아버지의 기도소리를 제일 싫어합니다. 대책이 없으니까. 마귀가 여러 수를 가지고 우리한테 시험을 줄려고 다가오는데 거기에 맞싸우는 방법이 우리도 그 수에 맞추어서 뭔가 대응하려고 하다보면 마귀의 전략에 잘 넘어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냥 “아멘!” 해버리면 무슨 수를 갖고 나오든지 마귀가 대책이 없어가지고 가장 힘들어 한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준비한 설교는 온전한 믿음과 혀입니다.
[1.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오늘 광복절이기 때문에 광복절 설교를 해야 되는데, 제가 8월에는 야고보서를 한 주일에 한 장 주제를 선택해서 설교하려고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올 봄에 아마 제 평생 가장 많이 히브리서를 읽었습니다. 읽고 또 읽고 그러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등등.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야고보서를 들여다보니까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흔히 하는 대로 믿음과 행함이라고 하는 배척 점의 성경이 아니라 보완의 성경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히브리서가 믿음의 근거와 대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성경이라고 하면 야고보서는 믿음의 적용과 실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성경이다. 그래서 둘이 찰떡같은 그런 인연이라고 할까요? 관계라고 할까? 그렇게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야고보서를 택해서 지금 3주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단 한 가지가 히브리서에 나오는 그 믿음의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 그리고 그 믿음의 주님께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 그 믿음의 진정성에 대해서 야고보서가 이야기 하고 있는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길에 대해서 같이 은혜를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상반된 대답을 동시에 한다고 합니다. 혹시 이런 것이 양가의 감정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하나는 “예수를 열심히 믿읍시다.” 그렇게 말하면 “목사님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랍니다. 지금 해야 될 일들이 많고 분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간도, 열정도, 돈도 써야 될 곳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다음에 그렇게 편하게 예수를 믿은 것에 대해서 “행복하시지요?” 라고 물어보면 “목사님! 목사님이 그때 그렇게 하시면 안 됐습니다. 제가 아무리 힘들다고 그래도 열심히 주일 성수하라고 채근하셨어야죠. 아무리 내가 생활이 어려웠어도 헌금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쳐주셨어야죠. 내가 아무리 바쁘다 그래도 목사님이 자꾸 성경 공부하러 오자, 속회예배 드리자, 수련회 가자 그렇게 하셨어야죠.” 더 심한 사람은 “당신은 직무유기를 했다”고 합니다. 앞뒤가 안 맞는 이 두 가지의 말이 성도들에게서 나오는 보편적이 이야기랍니다.
여러분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그냥 일반적입니다. 여러분 한 번 스스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혹시 나는 거기에 어느 정도 부합이 되는지. 젊은 날에는 열심히 교회를 나오고, 열심히 십일조 하고 그리고 봉사하고 하는 것이 너무 버겁다는 거죠. 그리고 너무 심하게 하면 귀찮아서 도망가고 싶고 또 헌금이야기 하면 시험 들고 그런데 세월이 지난 다음에 보면 “나 뭐야? 나 지금까지 뭐했지? 내가 성령을 체험 했나? 내가 믿음이 있나?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뭐했나?”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공허함을 느끼고, 그 책임이 나를 채근하지 않은 목사에게 있다. 이렇게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2. 말과 생명]
말이 생명을 좌우합니다. 저는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아주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혀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만 보면 대단히 부정적이고 절망적이지만, 저는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혀의 문제점을 적시해놓고 “혀가 불이고, 불의의 세계고, 걷잡을 수 없는 악이 붙들고, 그리고 아주 가득찬 독이 그 안에 있고 우리의 인생의 수레와 키에 불을 질러버리는 아주 절망적인 기능을 혀가 하고 있다.”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시각에서 또 야고보서가 교회나 사상에 대한 논쟁을 하고 있는 성경이 아니라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성경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야고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혀가 이렇게 나쁘니까 문제다!” 이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 혀만 잘 다스려도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역설적인 희망을 우리에게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 수련회 기간 동안에 이명성 목사님, 김광식 목사님, 이기석 목사님, 서준원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상훈 권사님의 특강을 들으면서 참 많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상훈 권사님은 생명의 전화 원장님으로 계시는데, 생명의 전화는 호주시드니중앙교회 감리교 목사님이셨던 알란 워커(Alan Walker)목사님이 1963년도에 교회 청년의 자살을 계기로 만들었습니다. 로이 브라운(Roy Brown)이라고 하는 청년이 실직으로 인해서 자살을 하게 되었을 때에 이런 젊은이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전화를 개설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만들었고, 우리나라에는 1976년 9월 1일에 개설을 해서 1588-9191하는 전화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대화를 시도합니다.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를 아시지요? 제가 강의도 충실히 들었지만 집에 와서 몇 번이고 그 강의 자료집을 읽었는데 놀마 진 몰턴슨(Norma Jeane Mortensen)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젊은 배우였던 마릴린 먼로는 할리우드의 심벌과 같은 화려한 여인으로 등극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드러난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이면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고통이 한계에 와서 자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가 이렇게 힘들다. 내가 참 많이 힘들다.”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전화를 받은 친구가 퉁명스럽게 답변하기를 “나는 네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어. 너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 그랬다는 겁니다. 그때 이 먼로에게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라이프라인(lifeline)이 끊겼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서 전화를 손에 잡은 체 생명을 마감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생명을 죽이는 대화는 도덕적인 판단을 통해서 정죄를 하고, 사람과 비교를 해서 열등감을 심어주고, 자기의 의지나 자기의 견해를 강요해서 상대방을 억압하고, 그리고 문제가 터지면 그 문제에 나는 책임이 없다고 책임을 부정하고, 그리고 매사를 신상필벌에 의해서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는 교육적인 효과만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런 대화들은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신앙적이라도 도덕적 판단을 통해서 사람을 정죄하거나 사람을 비교해서 너는 못났다거나 이렇게 말하면 생명을 죽여 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말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대화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경청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말에 대해서 경청을 하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일지라도 공감을 해주고, 그리고 진정성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 주고, 그 사람을 존중해주면서 고정관념의 틀을 제거해주면 상대방을 살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강의를 듣고 자료집을 몇 번 읽어봤습니다. 나는 정말 사람들에게 생명을 살리고 있는 대화를 하고 있는가 하고 저 자신을 돌아다보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평소에 하시고 있는 말은 사람을 살리는 대화를 하시는 쪽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는 쪽에 서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만이 알 일이기 때문에 물음표로 던져놓습니다.
[3. 혀의 위험성]
오늘 우리가 택한 야고보서 3장의 이야기는 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고 예루살렘교회의 초대 감독이었습니다. 감독이라니까 지금 감독처럼 행정직을 말하는 게 아니고 교회를 맡고 있는 담임목사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목회를 해봤더니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못하는 것에 대한 관건은 엄청난 교리나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교인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잘 깨달아서 예수를 잘 믿었다. 또 성경에 나오는 헤브라이즘의 묵시사상과 헬레니즘의 그리스 철학사상을 몰라가지고 신앙생활이 어렵다. 이런 게 아니더라는 거예요. 또 교회의 집사, 권사, 장로의 제도, 이런 것에 따라서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실제 교인을 만나서 그 사람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느냐 하는 것을 들여다보니까 문제는 그런 교리나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제도나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신앙의 성패가 결정되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야고보가 편지를 쓴 것입니다. 1장에서는 시험의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사람 차별에서 오는, 사람의 어떤 감정이 중요하지요. 교회에서 자기가 사람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잘되고,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런 것들이지요. 그리고 3장에 와서 보니까 우리 예루살렘교회가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이것을 잘 다스려야겠다. 혀를 잘 다스려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신학대학에서 공부한 엄청난 신학사상이나 교리가 중요한 게 아니고 물론 그런 것들이 전부 무익하다 그런 게 아니지요. 교리와 장정 중요하지요. 제가 단언하건데 천국에서 예수 잘 믿다가 온 사람에게 주님께서 너 어떻게 예수 잘 믿었냐? 예 제가 교리와 장정을 다 읽었기 때문에 예수 잘했습니다. 이런 사람 없을 거예요. 의외로 간단한 거였어요.
그런데 야고보가 교인들 사이에서 있는 혀로 생겨난 문제를 보니까 이게 가관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6절부터 8절까지 혀에 대해서 야고보가 글을 썼는데. 이게 순서대로 야고보서를 설교하지 않고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설교를 했으니 교인들이 속으로 별 생각 다 할 거예요. 지난주에 우리 목사님한테 누가 말로 상처를 줬나? 우리 장로님들이 회의하다가 문제가 있었나? 교인 중에 누가 지금 쓸데없는 말을 하나? 저것은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 이런 생각할 거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야고보서를 순서대로. 다음 주에는 야고보서 4장, 그 다음에는 야고보서 5장 이렇게 제가 설교를 미리 기획을 다해놓았어요. 그러니 편안한 마음으로 성경을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야고보서 3장 6절로 8절입니다.
<야고보서3:6~8, 표준새번역> 6 그런데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마지막에는 혀도 지옥 불에 타 버립니다. 7 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인류가 길들여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8 그러나 사람의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사람의 말에는 매우 위험한 독성이 실제로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화가 났을 때에 내뿜는 그 사람의 입 기운을 유리병 속에 액화를 시켜서 놓고 그것을 다시 주사기로 뽑아가지고 쥐에다가 실험을 해봤더니 사람이 한 번 분노할 때 나오는 그 입의 독이 쥐 스무 마리를 죽였다고 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혀가 죽음에 이르는 독으로 가득 찼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의학적인 설명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가 예수를 잘 믿게 하고 싶었습니다. 교인들이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그들이 신앙생활하면서 걸리고 있는 아주 큰 문제가 뭐냐 하는 것을 들여다보니까 이 혀가 문제인 거예요. 혀가 불이고, 불의의 세계이고, 그리고 그 혀가 죽음의 이르는 독을 가지고 있고 걷잡을 수 없는 악을 가지고 있고 더구나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는 거예요. 그 말은 무슨 뜻 인가 하니 우리가 미래를 향해서 가야 되는데 이 혓바닥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불타가지고 우리가 더 이상 못가는 거예요. 우리의 혀에서 악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우리의 혀에서 독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악과 독을 받아드린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역설적 희망 ]
수련회 기간 동안에 ‘생명을 살리는 대화’라고 하는 하 권사님의 특강과 야고보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제 자신의 문제점들을 보게 됐지요. 어쩌면 야고보서를 읽고 또 읽어야 될 사람은 저 자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야고보서의 표현은 그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 희망을 준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우리의 혀를 잘 다스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나오면서 젊은 날에 바쁘기 때문에 시간도, 열정도, 헌금도 사실은 썩 잘하지 못하시지만 나이가 들면 후회한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양가의 감정은 그렇게 하면서도 밑바닥에는 예수 잘 믿고 싶은데 어차피 교회 다닐 바에야 나도 정말 신앙의 체험을 하고 싶은데, 주님을 만나고 싶은데, 한 번 예수 믿으려면 제대로 믿고 싶은데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역설적 희망을 가지고 온전한 믿음을 위한 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 그냥 주일이기 때문에 주일에 놀러 가면 자동차 사고 날까봐서, 헌금 안하면 집안이 망할까봐서 액땜하듯이 교회를 나왔다는 그런 생각이 아니시고 내가 정말 예수 한 번 잘 믿어보고 싶습니다. 나도 믿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많이 있을 것인데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라면 혀를 잘 다스리십시오.
[5.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
어떻게 다스리느냐? 우선 선생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교사와 교수가 많으신데 선생님들에게 이 말씀을 또 누가 이단처럼 선생이 되려하지 마시오. 그러니 오늘 교사직을 내려놓으시오. 이렇게 하면 그런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톰슨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교사직이나 교수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자신의 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려는 교만한 사람들을 가르킨다고 설명합니다. 야고보서가 주후 50년~6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다락방에서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세워진지 20~30년이 지났지 않습니까. 2~30년쯤 지나고 나니까 교회 안에 똑똑한 사람이 엄청 많아졌어요. 교회 안에 선생 노릇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들의 혀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선 유대교에 있다가 기독교로 온 사람들은 전통에 관해서 일가견이 있고, 유대교가 아니고 이방인 가운데에서 체험을 얻은 사람은 자신의 체험의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강조하게 되고, 헬레니즘의 철학을 배운 사람들은 철학적 깨달음을 앞세웠습니다. 솔직히 요한복음 같은 것이 플라톤의 철학사상의 기반을 가지고 철학적 언어의 로고스를 차용해서 교리를 만든 것이기 때문에 헬라의 철학을 가지고 성경을 잘 아는 체하고 이 성구의 뜻은 이 런 것이다 그러는 거지요. 또 로마의 영향력을 받은 사람들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같은 것을 읽으면 그 밑바탕이 헬라의 철학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제국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법리 같은 것이 나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는 로마의 법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로마의 법벅 논리를 앞세워 선생 노릇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저마다 잘난 척을 하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다. 이게 예수님의 마음이다. 원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이거다. 너 예수 그렇게 믿으면 안 된다.’ 그런 거지요.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선생 노릇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실제 목회를 하면서 들여다보니까 이 선생 노릇을 하려고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혀로 내뱉는 말들이 불인 것입니다. 선생 노릇하는 사람들의 혀는 불을 질러버리고 그것이 악을 내뿜고 독을 내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야보고서 3:1, 표준새번역>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르치는 교회의 감독이 되고 사도가 되었는데 여러분 선생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자기 신앙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들지 마십시오. 좀 더 쉽게 말하면 잘난 척 좀 그만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오늘 교사와 교수직을 내려놓는 것은 그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회학교 교사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전도하는 일은 계속해야 되겠지만 여기서 말한 선생은 교회 안에서 2~30년이 흐르고 나니까 저마다 자기의 지식과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들의 말이 독이 되고 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 혀에 재갈을 물리라]
또 혀에 대한 기능을 이야기하면서 “말을 부리려면, 그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야고보서3:3, 표준새번역) 그리고 배를 이야기 하면서 “거센 바람에 밀려도, 배가 아무리 커도 매우 작은 키로 조종 합니다”(야고보서3:4, 표준새번역) 합쳐서 이야기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큰 배가 작은 키로 움직여지듯이 우리의 큰 인생은 우리의 작은 혓바닥에 의해서 좌지우지가 될 수 있습니다. 말을 우리가 부릴 때에, 이 말은 언어의 말이 아니고 달리는 말입니다. 말을 부릴 때 그 말에 재갈을 물리듯이 우리의 듯의 말, 우리들의 혀에도 재갈을 물려야 그것이 우리 인생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역설적 희망은 뭔고 하니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끝까지 잘하기를 원하면 자기의 혀에 재갈을 물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지요. 부모가 자식들에게 얼마만큼 자식의 생명을 죽이는지 아십니까? 더군다나 한국적 교육은 함께 과업을 만들어내는 팀 교육이 아니라 자기 반에서 다른 놈은 다 죽여 버리고 일등으로 올라서는 교육을 하다보니까 그 일등을 하지 못하면 부모들이 가서 늘 하는 얘기가 내가 너 때문에 챙피해서, 쪽팔려서 못 살겠다. 엄마친구 누구네 아들은 말이야 이번에 몇 점을 맞았데, 그러면서 우리 자식들을 하루에도 12번씩 더 죽인데요. 이제는 정말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여러분이 아니라 목사인 저 자신이 입에 재갈을 물려야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지켜갈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7. 우리의 혀로 저주하지 말고 찬양하라]
또 하나 보다 적극적인 것은 우리의 혀로 저주하지 않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9절로 11절입니다.
<야고보서3:9~11> 9 우리는 이 혀로 주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11 샘이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 물을 낼 수 있겠습니까?
저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우리의 혀로 저주하지 말고 찬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찬양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히브리인들의 찬양은 곡조가 없는 가사 중심이었습니다. 루터는 찬양의 폭을 넓히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칼빈은 시편의 찬양만 하자고 보다 더 찬양의 가사를 좀 협소화시켰습니다. 그만큼 칼빈은 성경에 있는 시편이 진정한 찬양을 될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제가 여기서 클래식과 CCM을 비교하거나 복음성가와 부흥성가가 어떠냐? 이런 얘기를 할 의도가 없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얘기는 뭐냐 하면 왜 칼빈이 시편의 가사만을 찬양의 소재로 삼으려고 했느냐?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곡조도 중요하지만 가사가 더 중요합니다. 가사가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 나와서 특별찬송 하라고 그러면 “가사에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요. 모르는 사람들은 노래를 못하니까. 가사에 은혜를 받아라. 그렇게 알아들었어요.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그런 뜻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나중에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보니까 그게 아니고 히브리인들은 찬양을 할 때에 엄청난 음악적 곡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읊조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음악성, 곡조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편에 나오는 가사가 하나님 당신이 최고라고 하는 것을 높이는 거예요. 이것이 진짜 중요한 찬양이라는 거지요. 우리는 찬양을 할 때에 노래를 잘하려고 하는데 사실은 그 가사가, 그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최고입니다. 그런 고백이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찬양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그의 입술로 노래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최고입니다.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역사하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내 길을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높인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혀가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저주하는 혀로 쓰여지지 아니하면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진다는 거예요.
제 설교는 오늘 여기까지입니다. 초대교회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하나님이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주었습니다. 우리의 혀는 불입니다. 불의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과 죽음에 이르는 독을 품고 있습니다. 이 혀는 만약에 길들이지 아니하면 불이기 때문에 불을 다스리지 못하면 화재가 납니다. 지난주 수련회에서 자유 시간을 주었고 그때 지하실에서 영화를 상영했는데 타워라는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제가 새로운 것을 하나 알았어요. 저는 불이나면 목조건물이 위험하고 철재건물은 튼튼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타워라는 영화를 보니까 이 철근이 고열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으면 힘이 약해져가지고 콘크리트가 무너지면서 목조 건물보다 더 위험하더라고요. 목조건물은 불탄 부분만 없어지잖아요. 이 철근은 고열에 노출되니까 그냥 무너져요.
우리의 인생의 이 혀가 불과 같은데 이 불을 잘 다스리면 에너지가 되고, 전기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러나 다스리지 못하면 화재가 되잖아요. 우리의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질러가지고 내 인생을 완전히 무너지게 하는 거예요. 설화가 생기는 거지요. 내 믿음을 박살내버리는 거예요. 지금 내게서 나가는 무슨 악과 독이 다른 사람이 죽이는... 이건 전혀 제 말씀의 소재가 아닙니다. 자신의 문제, 제 자신의 문제이지요. 나를 죽이는 거예요. 내 인생의 수레바퀴를 불질러가지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이제 설교를 맺으면서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 잘 믿기 원하십니까?
정말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길 원하십니까?
정말 예수를 만나길 원하십니까?
영적인 체험을 얻기 원하십니까?
신앙생활 내가 이대로는 더 안 되겠다. 뭔가 결판을 내서 내가 예수를 한 번 제대로 믿어봐야 되겠다. 내 신앙생활에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누려봐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속에 복음에 대한 열정과 신앙에 대한 뜨거움이 다시 일어난다고 하면 자신의 혀를 다스리십시오. 혀의 재갈을 물리시고, 선생이 되려하지 마시고, 그 입술로 하나님만을 찬양하십시오. 그 입에서 악이 나오지 않도록, 그 입에서 독이 않도록, 저주하는 혀가 되지 않게 자기의 혀를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한 주간 우리의 혀를 다스리며 영적으로 충만하시길 바라고, 우리의 대화가 가정에서나 우리의 교회에서나 생명을 살리는 대화가 되시기를 원하시면 아멘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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