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시험을 참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약1:12~18) 2013-0728 주일

우순(愚巡) 2013. 7. 27. 20:55

시험을 참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1:12~18>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 오직 은혜로!]

 

 

할렐루야! 아멘!

오늘 아침 정말 아멘이십니까?

아멘 안하시는 분들은 아무 생각이 없으시지요?

아멘.(회중)

지금 아멘 하시는 분들은 진짜 아무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사람들마다 성향이 있다고 하지요?

정치에 대한 성향, 자신의 이념에 대한 성향, 취미에 대한 성향이 있습니다.

저는 목사인데 목사로서의 성향이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의 성향입니다.

사람들을 이리 저리 갈래갈래 나누어 놓고 따지는 것 보다 은혜파가 좋습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받고, 은혜를 나누고, 은혜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간혹 오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종교개혁을 할 때에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나왔습니다. 그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면죄부 문제, 성체성사 문제, 성모 마리아 숭배 문제, 이행득의 구원론 문제 등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교황 무오설에 대한 반박입니다. 교황무오설은 교황은 오류가 없다는 교리입니다. 개신교회는 성경적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며 가톨릭 교리를 반박했습니다. 목사도 오류가 있고, 감독도 오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들은 장로들은 완벽해야 된다.”, “목사는 완벽해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언뜻 보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부작용이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가 저지른 대표적인 부작용, 마녀사냥입니다. 성직자의 지적을 완벽하다고 받아 들여서 가톨릭 신부와 주교들이 지적한 사람들을 마녀라고 정죄하여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목사가 완벽하다고 교리화 하면 이단이 되고, 장로가 완벽하다고 교회화하면 관료주의 교회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들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서로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웨슬리의 말처럼 언제나 옳고 바른 것을 추구하고 완전을 지향하지만 우리들은 언제나 율법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따뜻해야 하고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살아야할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은혜는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외의 예배 형식, 예배 시간, 당회 부서업무 등은 비본질입니다. 우리의 유익과 편리를 따라 성화된 상식선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면 됩니다. 믿음의 진정성은 오직 은혜로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삽니다.

 

[2. 성화된 상식, 아디아포라 adiaphora]]

 

오직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비본질적인 것에 대하여 관용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 개혁 직후에 가톨릭의 전통 중에서 받아들일 것과 거부할 것을 결정하는 아디아포라 (adiaphora 불간섭 영역의 성화된 상식) 논쟁이 있었습니다. 신학용어 중에 디아포라 (diaphora, 규정적 원리)와 아디아포라(adiaphora, 불간섭의 영역 혹은 성화된 상식)’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규정적 원리인 디아포라(diaphora)는 강제적으로 지키지만, 성경이 간섭하지 않는 아디아포라(adiaphora)는 성화된 상식에 따라 임의로 지킨다는 뜻입니다. 좀 쉽게 말하면 디아포라는 본질이요 아디아포라는 비본질입니다. 예를 들면 예배는 본질이지만, 예배 시간은 비본질입니다. 마찬가지로, 예배 형태가 열린 예배인가 현대예배인가 하는 것도 아디아포라입니다. 찬송 자체는 본질이지만 찬송가의 형태는 아디아포라입니다. 클래식인가 복음성가인가 하는 것도 비본질입니다. 루터는 아디아포라를 넓게 해석했고, 깔뱅은 좁게 해석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종교개혁가들은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경에 규정된 원리인 본질은 강제하지만,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불간섭 영역인 성화된 상식 곧 비본질은 신앙양심을 따라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교회들과 교인들 가운데는 비본질적인 것들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봅니다. 웃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시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 아래서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행정업무에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건축물의 형태로 인하여 시험을 받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용어로 시험을 받아 믿음을 버리기도 합니다. 어이없는 일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할렐루야를 왜 반복하고 왜 아멘을 반복 하냐고 합니다. 심지어 국어학적으로 따져서 축복이란 말을 쓰지 말고 복이라고 쓰자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 지엽적인 언어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인 믿음의 진정성입니다. 믿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본질인 은혜가 더 중요하고, 그 받은바 은혜를 따라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축도를 문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식인 축원합니다를 문제 삼기도 합니다. 언어학적으로는 기원합니다로 바꾸라는 분도 있습니다. 장로교 합동측은 성경대로 있을지어다로 사용합니다. 저는 깊이 묵상하다가 이전 교회에서는 있을지어다를 사용했습니다. 성경에 있을지어다로 되어 있고, 받는 분 입장에서도 축원을 듣는 것보다 축복을 받는 것이 더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상동교회에서는 전통을 따라 축원합니다로 사용합니다. 상동교회의 역사성을 위하여 제 개인적인 성향을 내려놓은 것이지요. 소신이 없어 보이나요? 왔다갔다 하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제 결론은 본질은 중요하지만 비 본질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표현은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축원합니다있을지어다가 천국가고 지옥가는 갈림길처럼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어는 변천하고 발음도 바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구역성경을 기억하시지요? 창세기가 맞습니까? 아닙니다. 옛날 성경은 챵세긔라고 썼습니다. 전도서가 맞습니까? 아닙니다. 두음법칙이 안 되서 뎐됴서라고 썼습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맞습니까? 피터가 맞습니까? 뾰또르가 맞습니까? 페트로스가 맞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그런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본질, 복음의 본질이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이 흘리신 십자가 보혈의 피 복음이 제일 중요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큰 틀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때 성전 안에서는 성직자의 스톨 색깔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했던 일이 있습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삶의 고통 가운데서 공산주의 혁명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교회는 스톨 색깔을 두고 법적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본질, 복음의 본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진정성은 믿음의 본질은 지키고 믿음의 본질이 아닌 것은 성화된 상식을 따라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3. 시험을 참는 자]

 

이 번 주도 믿음으로 은혜 아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말씀은 시험을 참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입니다. 야보고서의 첫 번 째 말씀은 시험의 승리입니다.

 

<1:2~4>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쉬운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시험을 당했을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는 성도들은 온전해지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시험은 견딜 수 없이 아픈 것이지만,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성도를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갑니다. 시험을 당하면 온전히 기쁘게 여기셔서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서 가시길 축복합니다.

 

요즘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의 삭발이 화제입니다.

 

지난 24(현지시간) ‘Patrick’s pal(패트릭의 친구)’이라는 사이트에는 백혈병 치료로 머리카락을 전부 잃은 2살짜리 소년 패트릭과 그를 위해 삭발한 부시 전 대통령의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사진 속 부시 전 대통령은 휠체어에 앉아 패트릭을 무릎에 앉힌 채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올해 89세인 부시 대통령은 어린 패트릭의 백혈병을 응원하기위하여 삭발을 했는데, 그의 경호원들 20여명도 삭발을 하고 검은 안경을 쓴 채 패트릭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부시의 사진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한 아이의 생명을 소중이 여기는 대통령의 사랑스런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부시는 60년 전에 4살짜리 둘 째 딸 로빈을 백혈병으로 잃었습니다. 부시는 믿음으로 그 어려운 때를 이겼고, 자신의 경호원의 아들인 패트릭이 백혈병으로 투병하자 자진해서 격려의 삭발을 한 것입니다. 생존한 전직 미국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인 조지 H.W. 부시는 현재 혈관성 파킨슨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고령의 나이에 스스로도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어린 아기의 투병과 완쾌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삭발까지 감행한 일은 전 미국인은 물론 세계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스물아홉 살의 젊은 아빠가 사랑하는 딸을 잃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부모는 산에 묻고 오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합니다. 자식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는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극한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의사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교회 목사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가족이나 심지어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지 부시는 그 아픔을 60년 간이나 간직하고 살면서 견디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승화시켜 믿음으로 백혈병을 앓은 두 살 짜리 패트릭의 투병생활에 용기와 희망을 선물했습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딸의 죽음을 믿음으로 이기고 감동을 선사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황을 하는 데 약방의 감초가 시험입니다. 시험만 없으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데 번 번히 시험에 넘어집니다. 오직하면 주님도 주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겠습니까? 성도는 매일 매일 시험에 들게 하지 말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주기도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는 정확하게는 시험에 빠지지 않게또는 시험을 만났을 때 패배하지 않고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험을 만납니다. 시험을 만나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시험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때문에 유익을 줍니다. 배를 만드는 사람은 바다로 띄우기 위하여 배를 만듧니다. 바다에는 파도가 일고 풍랑이 일지만 배를 만들어 항구에 묶어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다로 내 보냅니다. 그래야 신대륙도 발견하고 고기도 잡습니다. 시험은 만나지만 이기면 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주님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의 시험만이 아닙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이 배신하고 떠나갈 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시험은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당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시험을 받으셨고, 주님도 때로는 우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5492절은 주님도 때로는 우셨다고 고백합니다.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시험은 이기면 됩니다. 어떻게 이깁니까? 시험은 참으면 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진정성입니다. 성경 중에도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믿음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양대 성경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근거와 대상이신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진정성을 말씀하고, 야고보서는 믿음의 적용과 실천을 가르치는 믿음의 진정성을 말씀합니다. 성도는 진정성을 가지고 믿는 대로 삽니다. 그 중 한 가지가 시험을 참는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참는 자는 시험을 이기고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아시나요?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흔히 5C로 결정한다고 합니다. 색상(color), 무게(carat), 투명도(clarity), 신뢰 (confidence), 그리고 깎여짐(cutting)이리고 합니다. 다이아몬드는 깎여진 면이 많을수록 고가품이 됩니다. 우리네 인생도 한 없이 깎여지고 생채기가 나지만 그게 우리 인생을 고가품으로 만들어 갑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산 성도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해와 환난으로 깎여졌습니다. 그러나 그 시현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는 금보다도 더 귀한 믿음을 만들었습니다. 흠없고 완전하여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상급을 얻도록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참으십시오. 그리고 시험을 믿음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4. 욕심 버리기]

 

시험을 참고 이기는 가장 좋은 길은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만났을 때 패배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물욕, 정욕, 권력욕, 명예욕, 심지어 먹는 식욕,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투기욕까지 온갖 욕망들이 우리들을 시험에 빠뜨립니다. 불가에서는 업보(業報)와 번뇌(煩惱)와 무명(無明)이 욕망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는 것 곧 시험에 패배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정확하게는 시험에 패배하는 것)은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시험을 이깁니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처음에 느끼는 상실 감이 배설물에 대한 상실감입니다. 아이들은 처음에 똥을 싸놓고 자기 것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똥은 버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 때 건강한 아이들은 버림에 대하여 배우게 됩니다. 어쩜 우리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버림에 대한 깨달음일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버려야 할 것을 버릴 줄 아는 것 그것은 신앙의 체험입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가장 소중한 체험입니다. 욕심은 똥입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똥입니다. 심지어 거룩한 욕심이라고 치장하는 종교적인 욕심 또한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버릴수록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시험을 성경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면허시험이나 학교 시험처럼 통과를 위한 괴정은 TEST, 욕심 때문에 당하는 시험은 TEMTATION으로 설명합니다. temptation은 헬라어 peirajo의 번역입니다. 헬라어 페이라조는 사탄이 유혹하는 시험입니다. 욕심을 이용하여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릴수록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제 욕심을 버리시고 하나님 앞에 다시 서시기를 바랍니다.

 

[5. 빛들의 아버지]

 

그리고 빛들의 아버지를 만나서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내려옵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기도합시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이 욕심을 비우고 나면 그 빈 공간에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좋은 것과 온전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욕심을 비우고 빛들의 아버지가 주시는 좋은 것과 온전한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