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더욱 큰 은혜(약4:6~10> 2013-0818 주일

우순(愚巡) 2013. 8. 21. 10:36

 

더욱 큰 은혜

 

<야고보서 46-10>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1. 하디 1903 성령한국]

 

 

할렐루야!

 

오늘은 하디 선교사의 회개와 원산 대부흥 운동을 기념하는 하디1903 성령한국주일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오늘을 하디 선교사가 110년 전에 회개하였던 것을 기념해서 감리교회 전체가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기도하는 주일로 정했습니다.

 

감리교회 본부는 세 가지의 교회를 지향하겠다고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열려진 교회(Open church), 따뜻한 교회 (Warm church), 정직한 교회(Right church)입니다주님은 우리 감리교회의 회개와 성령충만을 위하여 세 가지 말씀과 비전을 주셨습니다.

 

1) 열린 교회를 위해서는 사도행전 247절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거룩 <하나님을 향한 성결, 세상을 향한 투명> 하나님과의 소통 세상과의 소통**

 

<2: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말씀을 붙들고 거룩함을 회복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성결한 교회, 세상을 향해서 투명한 교회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과 소통하는 교회를 지향하자고 합니다.

 

2) 또 따뜻한 교회를 위해서는 요한일서 419절을 주셨습니다.

 

**자비 <성장이 아니라 따뜻함에 집중하는> **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감리교회는 자비를 회복하는 교회를 지향하기로 했습니다. 성장이 아니라 따뜻함에 집중하는 교회, 한국 교회는 70년대를 전후해서 수적인 성장을 했고, 90년대를 전후해서 대형 건물을 세우면서, 메가처치(Megachurch)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흔히 대형교회의 시대라 그러지요.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회 전반에 소위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밑바탕 속에 교회가 자기 성장에만 관심을 가졌지, 세상을 향해서는 따뜻하지 못했다고 하는 반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정직한 교회를 위해서는 미가서 68절을 주셨습니다.

 

공의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사명을 붙드는>

 

<6: 8>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중략)

 

공의를 세우는 교회를 내걸었습니다. 특별히 이 공의를 세우는 교회에서는 권리를 주장하는 교회이기보다 사명을 붙드는 교회가 되자. 교회가 대형화 되고, 그래서 교회가 나름대로 숫자와 재정, 건물 그리고 사회적인 지위에 있어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회는 사명을 붙들기 보다는 권리를 주장하는 교회로 전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또 교회가 사회를 향해서 크고 작은 권리를 자신의 수와 돈으로 내세우는 이런 그릇된 모습들, 또 교회의 직분도 권리를 앞세우는 자신들의 근거로 삼는 신앙을 지양. 내려놓고, 사명을 붙드는 본래의 교회의 모습을 지향해서, 그리로 방향을 정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2. 하디 선교사의 회개 : 자기 성찰]

 

이런 열린 교회, 따뜻한 교회, 정직한 교회를 지향하는 "하디 1903성령한국"의 시발점은, 1903년에 있었던 하디 선교사의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디 선교사의 회개를 엿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글들을 제가 몇 개 읽어 보겠습니다 

1902년에 하디는 선교 보고서를 이렇게 써서 냅니다. 감신대 이덕주 교수의 논문 중에 인용된 보고서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좀 나아진 면도 있긴 하지만 교인들의 영적상태는 기대 이하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은 이유로 징계를 받은 세례교인과 학습인이 여럿 있습니다. 교인 하나는 오만방자하게 굴어서 출교 처분했습니다. 또 한 명은 부도덕한 행위 때문에 무기한 교회 출석을 금지했습니다.”

 

계속해서 이런 보고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기대 이하라고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깝고 자책감이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표를 낮추거나 적당하게 일을 하려는 생각을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필요하다면 징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교인 수는 좀 줄었지만, 그 때문에 교회가 약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보고서를 낸 후에, 1904년도에 그가 낸 보고서를 보면, 그는 전혀 다른 보고서를 사람들 앞에 쓰게 됩니다

 

지난달 우리 선교부 소속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원산을 방문한 선교사 부탁으로 한 주간동안 성경공부를 하였는데,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과 성령의 약속하신 말을 얻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얻지 못했던 것이 그동안 사역의 실패한 원인이었다는 것과 아무리 정직하고 힘써 일하더라도 주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확고한 고백이 없이는 모두 소용이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하디는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수고의 결과가 없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을 해보니까 조선 사람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회심을 하고 나서, 편지를 다시 쓰게 되는데, 이렇게 쓰게 됩니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말하는 것은 괴롭고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수 년 동안 한국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한 후에 믿음의 열매 맺게 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해 오는 동안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고, 오래 지속되는 회개를 내가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에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럽고 곤혹스러운 얼굴로 내가 교만했던 것과 고집불통이었던 것과 믿음 없는 것을 자백했을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됬습니다.”

 

하디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 토착 교인들 가운데 선교사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일도 있었구요, 최종순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죄목을 적어서 나와 읽기도 했습니다. 또 독신 선교사 사택에서 일하던 강태수라는 사람이 나와서 자백을 했습니다. 또 양반출신으로 로스의 어학선생이었던 진천수라는 사람은 자기의 아내를 구박한 것과 자기가 교만한 것과 자신이 탐욕에 젖어있었던 죄를 울면서 자백했습니다.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이제 하디 선교사의 회개를 기념하면서 오늘 주일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하디 선교사의 회개는 조선 사람에 대한 경멸, 그리고 원산에 있는 감리교 신자들에 대한 경멸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하디는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옳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 기준에 합당하지 않은 교인들을 출교해버렸습니다. 출석금지를 시켰구요, 징계했습니다. 분명히 하디가 했던 징계와 출교와 출석금지는 정당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아니하는 세례인과 학습인들에 대한 징계, 교회법에 나와 있습니다. 오만방자해서 더 이상 기독교인으로 봐줄 수 없는 사람을 출교한 것, 아마 전도의 효과를 위해서였을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또 부도덕해서 도저히 교회에 교인이라 할 수 없는 사람을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디가 1903년에 들어와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의사라고 하는 엘리트 의식과 서양의 문명인이라고 하는 우월의식과 그리고 우상숭배와 마귀의 종들이 되어버린 조선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하는 선교사의 구원자로써의 교만한 마음으로 조선 사람을 깔보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만방자하다고 출교를 내렸는데, 하디가 생각해보니까 정말 오만방자하고 교만한 사람은 조선 사람이 아니라 자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고집불통의 사람이며, 얼마나 완악한 사람인지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독선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서 전혀 신앙이 없던 사람임을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은 당시 원산에 있었던 사경회 집회에서 큰 충격으로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길선주 목사를 변화시켜서 1907년에 평양 대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디가 회개했던 것은 조선 사람에 대한 멸시 그리고 편견, 고집불통의 완악함, 교만함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회개를 하면서 하디가 보았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돌아봄이었습니다. 자기 돌아봄, 자기 성찰, 하디 선교사의 회개는 바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의 죄악을 고백하는 회개였습니다.

 

 하디는 바로 자신의 교만과 완악과 그리고 불신앙을 회개하면서 자기를 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이 설교를 하면서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하디를 깊이 생각하는 주일인데, 하디를 이야기 할 때면, 상대방에 대해서 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디는 한마디로 조선 사람들을 무지몽매한 야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서양의 문명자로써의 교만함을 회개했습니다. 또 조선 사람들이 부도덕하고 게으르고, 우상을 숭배하고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영적으로 아주 기대이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영적으로 우리가 강력한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너희들 때문이다.’ 라고 그렇게 조선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던 것을 회개하고, ‘내게 문제가 있다. 내가 문제였구나. 내게 신앙이 없구나.’ 하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하디는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대학생 자원봉사자 모임을 통해서 한국에 왔던 선교사입니다. 처음에는 그 대학생 자원자의 모임의 후원을 받아서 부산에 와서 게일(J. S. Gale)과 함께 선교를 했기 때문에, 부산 사람들은 게일과 함께 이 하디를 부산을 복음화 시켰던 원조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선교정책이 바뀌어서 감리교회의 후원을 받으면서 원산의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던 의사였습니다. 그리고 감리교회의 중국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남감리교회의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하디선교사의 회개는 자기 자신의 교만과 자기 자신의 완악함과 자기 자신의 불신앙을 토로한 것입니다.

 

여러분, 대학생 자원봉사자 모임에서 은혜를 받고, 자원해서 전혀 남모르는 미개한 조선에 선교사로 올 정도면 믿음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는 회개할 때, 1903년도에 '내가 믿음이 없다.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다.‘라고 자기의 불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선교사로 자원하는 그 순간은 믿음이 있어 보였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은 젊은 날에 흥분해서 순간적인 감동에서 왔던 것이지 진정한 믿음이 그 안에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가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서, 교인들을 징계하고, 출교하고, 출석을 금지시켰던 그 일이 결국은 자신의 고집불통의 성격에서 오는 완악함이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회개했던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에 대한 그런 깔봄, 우월자의 위치에서 멸시했던 것을 회개한 교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 사람의 회개를 통해서 1903년에 원산에 대역사가 일어나고, 그 여파가 1907년에 길선주 목사의 회개를 통해서, 평양에서 큰 부흥을 일으키면서 한국 교회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3.한 사람의 중요성]

 

성경은 한 사람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1) 로마서에 보면, 한사람 때문에 죄가 들어오고, 한사람 때문에 의가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들어오고, 예수님 한 사람 때문에 의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2) 예레미야서는 한 사람 때문에 성읍이 용서받는 다고 말씀합니다.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가끔 우리는 다른 사람이 불의하게 사는 것을 못견뎌합니다. 분노하고, 그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을 고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쉽게  썩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 51절의 말씀을 보면, 다른 사람이 썩고 안 썩고는 차지하고라도, 한사람 바로 너 자신이라도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면, 너 한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네가 살고 있는 성읍을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3) 누가복음 15장은 이 한사람의 중요성을 또 이렇게 말합니다.

 

[15:7] (...)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5:10] (...)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한사람의 회개가 회개할 것이 없는 아흔 아홉 명의 의로운 자가 하늘에 있어서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쁘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특별히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한 사람이 성령 받고, 한 사람이 정의를 구하며 진리를 행하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디의 회개는 한 사람이 자기를 돌아보게 되었을 때 체험하였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하디 한 사람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4. 마귀의 유혹 판단과 정죄]

 

마귀는 미혹하는 자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립니다. 그 마귀의 유혹 가운데 하나가 판단과 정죄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판단을 넘어서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셨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4:7)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여 판단하고 정죄하게 만드는 지름길은 교만입니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어서 형제자매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비방하고 싸우게 만듧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마귀의 유혹에 빠져 비방과 싸움으로 큰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화평함과 거룩함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공동체이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실상은 싸움과 비방으로 얼룩졌습니다.(1,11) 야고보는 서로 비방하지 말자고 말합니다.(11) 모든 싸움은 정욕 때문에 일어납니다(1) 야고보는 질문합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12) 성도는 율법의 준행자이지 재판관이 아니다.(11) 교회 안에 자기의 믿음으로, 자기의 경건함으로, 자기의 의로움으로, 형제자매를 비방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과 논리는 맞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교만하고 자기 욕심이 강해서 비방하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전투구의 싸움, 이판사판의 싸움은 그 밑바탕에 마귀가 심어 놓은 교만의 올무가 있습니다. 하디 선교사가 회개하였던 것도 자신의 교만과 독선과 불신앙이었습니다. 이 셋은 근본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교만의 문제가 야고보서 4장의 화두입니다. 제가 야고보서를 한 주일에 한 장씩 설교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진정성을 다루는 믿음의 실제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은 시험, 2장은 사람 차별, 3장은 혀의 위험성입니다. 오늘 다루는 4장은 교만의 문제입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를 섬겨 보니까  교회안에 교만한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이 교만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수를 한 30년 믿었는데, 나름대로 율법적으로 아주 완벽하게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 보면, 별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더 쉽게 보면, 주일도 잘 지키고, 헌금도 잘하고,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괜찮게 살고, 사람들 보기에도 사회적으로도 좀 매너 있게 사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30년쯤 되었으니까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교만한 자들은 자신들 나름대로는 완벽한 그리스도인이고, 자기들 나름대로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의에 천착해서 형제자매들을 비방하고 급기야는 싸웠습니다.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교만한 사람들이 재판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말합니다2000년 전에 예루살렘 교회에 교만한 자들이 등장해서 자기들 스스로 재판관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교인들을 판단하지요.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하디가 대학생 자원봉사 모임에서 은혜를 입고, ‘내가 의사지만, 조선 사람들을 위해서 가야지. 그들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무지몽매한 자들을 계몽하고, 그 귀신들리고 마귀를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들을 내가 깨우치리라.’ 그리고 와서 딱 기준을 정해놓고, 복음을 전한 후에 자기의 잣대에 맞지 않으면, 징계해버리고 출교해서 내쫓아요. 출교라는 것은 너는 죽을 때까지 감리교회에 나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감리교회에서 새 신자 등록을 안 받아 주는 거예요. 감리교회에서 한 번 출교를 당하면요, 전국에 있는 어떤 감리교회에서도 새 신자 등록을 받아주면 안됩니다. 극형입니다. 교회법에서 극형은 출교처분입니다. 또 부도덕하다고 사람을 출석을 금지시켰습니다. “너는 교회 나오지마!”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디가 깨닫고 나니까 문제가 내게 있는데, 내가 교만했는데, 내가 완악했는데, 내게 믿음이라고는 쥐꼬리만치도 쥐뿔도 없었는데, 내 교만함과 완악함과 내 불신앙은 보지 아니하고, 내가 조선 사람을 경멸하고 판단하고 징계하고, 출교했구나 하고 회개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이 교만한 자들은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법을 세우는 입법자와 그 법을 판단하는 재판관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신데, 그리고 우리는 그 법을 준행만하면 되는 것인데, 네가 누구이기에 남을 판단하느냐?’ 하고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자기는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법을 지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주의자는 자기는 지키지만, 다른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자기도 지키고, 다른 사람도 지키라고 하는 중간 단계가 있겠지만, 오늘 야고보가 말하는 더욱 큰 은혜라고 하는 표현을 깊이 묵상하셔야 됩니다.

 

왜 그냥 은혜라고 하지 않고, 더욱 큰 은혜라고 했느냐? 단순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디가 징계했던 사람들, 하디가 출교했던 사람들, 하디가 출석 금지했던 사람들 다 잘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하디가 잘못했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바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단계가 은혜는 은혜지만, 공의는 공의지만, 더욱 큰 은혜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들보다 더 교만함을 보지 못하고, 그들보다 더 고집불통인 완악함을 보지 못하고, 그들보다도 더 믿음이 없는 자신의 죄악을 보지 못한 이 선교사의 죄악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제 징계하고, 출교하고, 출석을 금지하는 수준의 신앙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그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가 잘못하고,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하는 그런 부분인 것을 알지만, 그래도 징계하고 출교하고 출석을 금지하는 그 단계를 넘어서서 더욱 큰 은혜로 그들을 겸손함으로 감싸고 돌보고 계속해서 중보기도하고, 그들을 섬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교만한 자들에 대한 비방은 급기야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4:1~3>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교만함 때문에 비방을 넘어서서, 드디어 싸움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과 다툼의 근원이 어디있느냐? 모든 싸움과 비방의 원인은 정욕과 교만 때문입니다. 정욕은 개인의 세속적인 욕망이고 교만은 자기만이 의롭다는 독선입니다. 정욕으로 구하기 때문이 아니냐? 너희의 욕심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이 야고보는 너희가 형제를 비방하고 재판관이 되어서 형제를 판단하고 너희의 정욕 때문에, 너희의 욕망 때문에 사람을 판단하고 싶어 하는 그 유혹을 못 이겨서 싸우고 있는데 그것을 넘어서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야고보가 불의한 사람이 되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디가 지금까지 징계하고, 출교하고, 출석을 금지했던 것을 회개했다고 해서, 징계 받은 사람, 출교를 당한 사람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잘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사람들, 신앙적으로 옳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넘어서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넘어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판관의 위치에 서서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우리가 죄인 된 자기를 돌아보고 더욱 큰 은혜를 받자는 것입니다.

 

 

[5. 더욱 큰 은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더욱 큰 은혜는 무엇일까요? 야고보서 4장의 문제가 싸움과 비방인 것을 고려하면 더욱 큰 은혜는 율법적 판단을 넘어서는 용서와 용납과 사랑의 은혜입니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초월의 은혜요 정의감을 넘어서는 포월의 은혜입니다. “더욱 큰 은혜를 받으면 모든 사람이 사랑스럽습니다. 내 판단에 옳지 않는 죄인조차도 사랑스러워집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판단하시는 것을 넘어서서 자녀로 축복하시는 사랑을 채워 가는 은혜입니다.

 

야고보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형제에 대한 비방과 형제를 판단하는 유혹에 빠지는 재판관의 신앙과 그리고 정욕으로 인한 싸움과 다툼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공동체를 회복시켜주시고, 우리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기를 사모하는,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해야 되겠다고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하디와 같이 저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고 하는 자기를 돌아봄으로써 회개함으로써 그리고 상대방들도 회개하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공동체가 회복되는 것이 더욱 큰 은혜인 것입니다. 하디의 회개는 교만을 회개하고 겸손해진 회개입니다. 독선을 회개하고 판단과 정죄대신 용서와 사랑을 선택한 회개입니다.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의 진정성을 회복한 회개입니다. 교만과 독선과 불신앙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셋은 판단과 정죄로 비방과 싸움을 자아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눌 말씀은 더욱 큰 은혜를 받을 성도들의 삶입니다. 믿음의 진정성이란 구체적인 삶을 말합니다.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1)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하라.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자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고, 정죄하고 재판관의 위치에 서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복종하자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자. 그리하면 마귀가 너희를 피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복종을 못하는 것이지요. ,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복종할 수 있는데 사람들에게 복종하지 못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완전하시니까 복종하는데, 사람들은 부족하니까 복종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 사람보다 내가 완전하다. 내가 볼 때 그 사람이 틀렸는데, 어떻게 내가 교회의 질서 속에서 그 사람에게 복종할 것인가 그런 얘기 아닙니까.

 

하디도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선교사로 자원해 왔는데, 내가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다 부귀영화 버리고 너네 조선 사람들 병든 사람들 고치러 왔는데, 너희는 예수를 왜 그따위로 믿느냐 말이야? 너희는 기대 이하야.” 공식적인 문서에 그렇게 썼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까 이게 교만이었구나. 저들이 교만한 게 아니고, 내가 교만했구나. 저들이 완악한 것이 아니고, 내가 완악한 것이었구나. 조선 사람을 경멸하고, 선교사로 왔다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나를 내세우는 이것이 잘못되었구나. 내가 하나님 앞에 다시 복종하고, 내가 다시 돌아서야 되겠구나. 그것이 하디의 회개였습니다.

 

2) <4:8>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정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성결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처음 할 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자기의 판단이 강해지고, 자기중심의 신앙을 하게 됩니다. 돌아보면, 어느 사이에 하나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치 하디가 자기의 고집불통의 완악함을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도 감당이 안 되는 고집불통의 완악함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교만한 자의 희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고 정죄한 자기 의로움을 내려놓고 ,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는 자기 애통과 자기 근심이 있어야 합니다. 호산나처럼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간절함이 있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가 더욱 큰 은혜를 받습니다.

 

4)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주님 앞에서 우리를 낮출 때에 주님이 우리를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를 선택하십니다.(6) 주 앞에서 낮추는 자를 주님이 높여 주십니다.(10) 믿음으로 살기 원하시면, 욕심을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자기만이 의롭다는 편견과 독선에서 자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겸손은 믿음의 길입니다. 겸손한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삶입니다. 그런 겸손한 믿음의 삶은 아주 분명합니다 겸손한 성도는 주님 앞에서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법을 지키면서도 타인이 법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관대합니다. 너그럽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고 용납해줍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5)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교만함입니다. 자기 의에 천착한 독선과 편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더욱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형제에 대한 비방을 멈추고 자기를 돌아보아 하디처럼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는요,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 큰 은혜가 뭐냐? 은혜면 은혜지, 더욱 큰 은혜는 뭐냐? 판단과 정죄를 넘어서는 사랑과 용서의 은혜요, 용납과 초월의 은혜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의 마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의 은혜입니다. 죄인들조차도 품으시는 포월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만 불의한 사람을 품으셨습니다.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을 지향하고 경건한 삶을 지향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까지도 품는 은혜가 더욱 큰 은혜입니다. 이런 더욱 큰 은혜, 야고보서가 말하고 있는 더욱 큰 은혜는, 겸손함과 연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택하셔서, 더욱 큰 은혜를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전국에 있는 감리교회가 오늘 일제히 다 하디 선교사의 회개를 기념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는 주일로 정했습니다. 오후 4시에는 올림픽 체조경기장에 모여서 수도권의 교회들이 연합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하디 선교사의 회개의 핵심은 자신의 교만과 자신의 완악함과 자신의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여파는 한국 기독교회 역사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실제 일어났던 문제입니다. 4장에서 일어났던 문제는 교만입니다. 그 교만이 형제를 비방하는 일이 되었고, 그 교만이 싸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께 복종하시고, 여러분 죄인들의 손을 씻으시고,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다. 그래서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십시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시는 자를 주님이 높여주실 것이고, 단순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판단의 은혜를 넘어서서, 우리가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가지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를 용서해가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게 되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야고보의 이 마음, 하디의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져서, 우리교회에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