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믿음의 열쇠(창1:1) 2013-0908 주일

우순(愚巡) 2013. 9. 14. 11:13

믿음의 열쇠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할렐루야!

좋은 주일이시길 바랍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말씀은 믿음의 열쇠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언제 읽어보셨습니까언제부터 읽어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시면서, 교회에 오셔서 교인들과 성경에 관한 말씀을 얼마나 나누셨습니까?

 

[성경 그 당혹감: 거짓말과 더러움]

 

저는 열 여섯 살에 처음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주일학교에서 성경퀴즈도 해보았고, 성경암송도 해보았지만, 기계적으로 성경을 대한 것이었고, 제가 자의적으로 성경을 대한 것은 열 여섯 살 때였습니다. 그때 제가 성경을 읽으며 느낀 것은 당혹스러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학교에서 듣던 동화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제 머리 속에 채워져 있던 성경을 천천히 자세히 한 번 들어다 보니 제 생각과는 전혀 다른 느낌 때문에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거짓말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 거짓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도 그렇고, 처녀가 아이를 낳은 이야기도 그렇고,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한 이야기도 그렇고, 다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이야기도 제게는 참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그 외에도 열 여섯 살 짜리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거짓말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또 하나는 더러움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너무 더러운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부부싸움 이야기,  그 다음에 태어난 가인과 아벨의 살인극, 다말과 시아버지 그리고 롯과 딸들의 근친상간 등 거룩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는 가룟 유다가 자기 스승을 팔아버렸고,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였던 베드로는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부인하고, 열 두 제자 가운데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다고 알려진 요한은 예수를 모른다고 변명하느라 알몸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도마는 끊임없이 의심에 의심을 더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의 됨됨이 하나하나가 열여섯 살 중 3짜리의 머릿속에 상당한 당혹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제가 읽은 한경직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는 아마 어둠속에 들어온 빛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는 창조론과 진화론을 대조하면서 성경을 알기 쉽게 풀어주었습니다. 저는 그 때 참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올해 33년째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지난 33년 동안 제가 무엇을 했나 돌이켜보면서 아쉬운 것은 제가 만났던 교인들과 성경이야기를 좀 더 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십 대까지만 해도 내게 남은 시간이 20년 이상 남았으니까, ‘언젠가는 나도 좋은 목회를 할 수 있겠지?’ ‘교인들과 말씀 묵상을 하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우리의 본업은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인데, 우리가 정말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는 반문을 던져 보게 됩니다.

 

열 여섯 살에 성경을 처음 읽고, 호기심과 궁금함에 교회를 가서 고등부 형들에게 수 없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형들은 갈등이 없어?’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치는데,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가르치잖아. 둘 중에 하나는 택해야 되는 거 아니야?’ ‘누나는 처녀가 애를 낳았다는 게 믿어져?’ 전도사님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진짜 다시 오시기는 오시나요?’ ‘예수님이 하늘로 가려고 하셨다는데, 하늘이 어디 있죠? 하늘이 있나요? 하늘은 별과 별 들 사이에 공간의 개념인데, 하늘이 어디일까요?’ 그런데 교회는 삼립호빵과 라면땅을 먹으면서, 뜻도 모르는 일본어로 된 사치기 사치기 사뽀뽀노래를 부르면서, 노는 일에만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훌쩍 세월이 흘러서 하용조 목사님이 쓰신 일대일 제자 양육 교재를 가지고, 교인들과 제자 양육을 할 때에, 제 마음을 울렸던 감동적인 하 목사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교인들은 성경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 성경을 물어보면 아는 이가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성경을 말하는 목사도 없다. 이게 한국 교회다.’ 성경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교인들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나오고, 막상 성경에 대해서 물으면 아는 것이 없어 대답을 못하는데, 더 큰 문제는 성경을 가르치려고 하는 목사도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1: 성경을 여는 열쇠]

 

창세기 11절을 제가 믿음의 열쇠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이 모든 갈등을 풀어내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 말을 신학자들은 라틴어로 Creatio ex nihilo (크리아티오 익스 니힐리오) 무로부터의 유를 창조했다는 표현을 씁니다. 히브리어의 창조라고 하는 바라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는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선언합니다. 이 창조신앙이 믿음의 열쇠입니다.

 

그러나 어떤 불신자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바벨론 신화나 이집트 신화와 비슷하다고 가르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화라는 말이 불신앙적이라고 설화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사실 여부는 묻지 말고 의미만 묻자고 합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창조신화는 더더욱 아니고 창조설화도 성경의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은 분명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조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화적인 사고, 설화적인 사고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유익을 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성경이 이솝의 우화나 교훈을 잔뜩 담고 있는 문학서적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불교나 다른 종교의 경전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을까요? 효라는 말, 인간됨이라는 말, 그래서 서로 공유된 개념들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만이 가지고 있는 점이 무엇일까요?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다 신화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신화, 설화를 읽고 있는 걸까요? 그 신화를 위해서 폴리캅이 86세에 불에 타 죽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데, 이 책을 읽고 의미만 따지며 설화라고 하는 사고만 가지고 매 달 내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고 매 주 교회에 나와 시간을 바치고, 마지막에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길 수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는 분명한 사실이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저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창세기 11절을 읽으면서, 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밑바탕에 한경직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가 있고 창조과학회의 성경해석도 있고, 배재민 교수의 반문서설과 같은 글들이 깔려있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서도,  어느 날 문득, 영성운동가였던 방성규 교수와 함께 Lectio Divina와 같은 성경읽기 작업을 하는데 강하게 와 닿았던 느낌이 있습니다. ‘창세기 11절이 열쇠이구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이 메시지를 아멘으로 받아드리는 사람에겐 성경의 문이 열리고 기독교의 문이 열리지만, 이것을 아멘하지 않느 사람에게는 ,  성경이란 그저 책들 중의 하나일 뿐이고,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종교의 하나일 뿐이고, 그렇다면 성경을 읽는 것이나 다른 경전을 읽는 것이나 유사할 것이고, 기독교나 다른 종교나 매 일관이 될 터이니, '예수만 믿어야 구원받는다'라고 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유일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창세기 11절을 신화로 보지 않고, 설화로 읽지 않고, 이것을 믿음으로 아멘 합니다.

 

[창세기 11: 믿음의 열쇠]

 

<히브리서 1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장 서두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며 선진들이 이로써 많은 증거를 얻었다'고 하는 표제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언뜻 생각해보면 믿음을 가지라는 메시지나 믿음을 가지면 이와 같은 우리가 손에 지금 잡지 않은 미래의 꿈을 성취한다고 하는 소망과 의욕과 열정을 선사해주고 그렇게 믿음으로 구체적으로 살았다는 사람들의 열거 속에서 많은 은혜를 받지만, 히브리서를 가만히 읽어보면 히브리서 113절에 나오는 첫 마디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의 출발점이 어디입니까?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히브리서 113절에 나타난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돌아오면, 창세기 1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믿음의 열쇠인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태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태초는 단순한 처음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처음이 시간의 길이 속에 존재하는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태초는 시간을 길이로 측정할 수 없는 근원적인 시간, 이 우주의 생성 이전의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현재의 지식을 가지고 미래도 예견하고, 과거도 추론하지만, 성경은 그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원초적인 시간의 하나님이 존재했다는 선언부터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주어, ‘하나님이우주의 주어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 처음 근원적인 시간, 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간, 이 세상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간, 한국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 그 시간에 하나님이 존재했습니다.

 

인류학을 하는 한국의 인구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이 극단적인 예견을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의 출산율이 지속되면 5백년 후에 한반도 땅에는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 학자의 진단은 예견과 예측일 뿐이니까 출산율이 높아지면 달라질 수도 있고, 150만 명 가까이 되는 외국 노동자들처럼 이민자들이 이주를 하면, 누군가가 이 땅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출산율 비율을 가지고 아이들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5백년 후 한반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이 지나면, 숲들만 있을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상동교회에서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렸다고 하면, 아마 신화처럼 들리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문득 가져보기도 합니다.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현재의 지식가지고 미래를 예견하고, 과거를 예측하는 것이 상당한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 너머의 세계의 근원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우리의 지식은 유한하고 한계가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말속에 담겨져 있는 첫 번째 의미는 뭔고 하니, 그 태초에 시간에 하나님이 존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좋은 목사님이었던 이현주 목사님에게 제가 신학교시절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어떻게 있다고 할 것이고, 하나님이 없으면 어떻게 없다고 할 것인지 제게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죽변 까지 가서 목사님을 찾아뵙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 때에 목사님은 하나님이 있다 없다고 하는 논쟁을 누가 할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이 있다고 믿든지, 하나님이 없다고 믿든지 정해라. 그 다음 네 눈앞에 하나님이 있는 세계와 하나님이 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죽변에서 만났던 이현주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에 빠졌다가 다시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 때 불현 듯, 제 마음 속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라고 하는 11절 가운데, 첫 번째 메시지인 태초에 하나님이 존재 하셨다라고 하는 그 말씀을 아멘 할 때에 제 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참 놀라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놀라운 세상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존재하고, 그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그 삶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웨슬리의 말을 빌리면, ’내 평생 가장 위대했던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던 것이고, 기독교는 행복이고, 행복한 사람만이 기독교인이고, 만약 그가 기독교인이라면서 행복하지 아니하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그가 기독교 신앙을 설교하면서 행복을 말하지 아니하는 자는 괴물이요 해충이다.‘ 그분의 행복에 관한 설교 메시지가 타당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  지금도 동행하시는 하나님]

 

오늘 예배하고, 여러분이 한 주를 돌아가 사시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믿음으로 한 주를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이 없이 자기 혼자의 지식과 자기 혼자의 판단 속에서 좋았다가 싫었다가 나빴다가 흥분했다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태초부터 존재하셨음을 확신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저는 창세기 11절이 신화도 아니고 단순히 설화로만 읽어낼 우리의 교훈의 구절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임을 확신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그때만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태복음 2820b>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815b>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시편 1399,10>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길 한 가운데에서 돌베개를 취해서 잠을 자던 야곱이 눈을 뜨고 나서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 하였다.’ 그리고는 돌 베개를 취하여 제단을 쌓았던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한 주가 시작됩니다. 9월 둘째 주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믿음으로 한 주를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 삶의 주어]

 

창세기 1장 1절의 핵심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주어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창조하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에 성경에 있던 거짓말들의 빗장이 다 열려지고, 성경 안에 다 이해할 수 없었던 옹벽들이 무너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열여섯 살에 그것을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열 여섯 살에는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성경읽기가 좋았고, 열 일곱 살에는 한경직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가 마음에 그리도 와 닿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제 자신이 성경을 잘 아는 목사도 아닙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성경의 10%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 마음 속에 이 창세기 11절이 확 와 닿았던, 창세기 11절이 마음에 확 와 닿으면서 하나님이 제 마음에 강하게 주신 느낌은 뭔고 하니, 성경 속에 들어있던 내가 거짓말이라고 했던 것들의 빗장이 풀려진 것이었습니다. 11절로 그 빗장들을 풀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을 아멘으로 믿게 되니,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를 나오다가 따님 때문에 교회를 옮기신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밥을 먹는데, 제 앞에 오셔서 식판을 들고 서신 채로 자리를 찾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앉으세요. 우리 교회 처음 오셨죠?” 하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교회에서는 밥 먹을 때 담임목사 앞에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분명히 새신자이시군요?’하니 웃으면서 그럼 제가 다른 곳에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앉으세요.’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분이 우리 교회를 나온 동기를 아십니까? 그 분은 생명공학 회사의 부회장이었습니다. 난자를 자극해서, 정자 없이 난자만으로 수정란을 만들어서 불치병을 고치는 치료제를 개발하는 제약회사 부회장이었습니다. 이분은 마치 미우라 아야꼬의 소설 빙점에 나오는 주인공의 아들 친구인 의사가 시도했듯이 정자 없이 난자만 전기 자극을 통해, 수정란을 만드는 실험을 하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우리들이 이렇게 난자만으로 수정란을 만들어서 치료제를 만드는 단계까지 왔는데, 처녀가 아이를 낳는 다는 것이 뭘 그리 어려운 말인가?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다.’ 그래서 스스로 교회를 나오기로 결심을 하였고, 남대문 상동교회가 오래된 역사적 교회라 이단에 빠질 위험이 없으니 가보시라는 추천을 받고 우리 교회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셔서 한 달 정도 설교를 들어보고, 교회 분위기를 보시고 등록하시겠다고 하시고, 한 달이 지난 후에 등록을 해서 한 동안 우리교회를 다니시다가 따님 때문에 다른 교회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늘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누가 전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인간의 지식이 생명 공학을 하면서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순간에 이른 것을 보면서, 이분은 오히려 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신의 영역의 경이로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정도라면 하나님은 더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 창세기 11절을 믿으면, 성경 속에 있는 수많은 빗장들이 풀려지고, 수많은 담벽들이 허물어지면서 하나님이 행하셨던 하나님의 능하신 역사가 우리 앞에 확연히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믿어지는 순간 우리의 마음에는 기다림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시간의 제약과 공간의 제약이라는 시공의 제약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의 사고가 시공의 제약 속에서 살지 않으려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은 언제나 모자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더 높다.

 

<이사야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보다 높고 깊다는 것을 들으면서도, 사실은 하나님보다 내 생각 속에 갇혀 살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갖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삶의 주어가 되시면, 하나님께 맡길 수가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때만 계시지 아니하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고, 지금도 나의 삶에 다가오셔서 구체적으로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시다고 하면, 그 하나님의 섭리가 나를 인도해 가실 때에 그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내게 주신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갇혀 있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유한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나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시는 , 태초부터 존재하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 삶을 이끌어 가심을 신뢰하지 않으려는 이중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저는 제 신앙 고백으로 이런 것들을 원죄의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말 가운데 재밌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일인데, 누군가가 숨겨진 비밀을 알거나 또는 대답하기 어려운 난제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을 때에 대답을 잘하면 우리도 모르게 참 귀신같이 잘 안다고 말합니다. ’귀신같이 잘 안다는 그 말 속에 거슬러 올라가면 귀신의 왕인 사단이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시도했던 악한 영이요 대적자인 그가 아담을 유혹할 때도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라고 하는 지식의 증가를 이야기 했던 것을 보면 인간은 참 이중적입니다. 자신이 분명히 갇혀있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는 유한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한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묻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기다리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순종하지도 못한다는 것 입니다.

 

 

태초에 존재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존재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한 주간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것인데 그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이 한 주를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 삶 가운데 이 한 주간에 놀랄만한 일들을 계획하고 계실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속에 갇혀 있지 마시고, 또 내가 갇혀있는 존재인데 내 제약된 한계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착각 속에서 사단과 귀신에게 마음을 뺏겼던 아담과 이브처럼 내 생각 너머를 내가 생각할 수 있다는 오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나는 갇혀 있지만 갇혀 있지 않은 삶을 사십시오. 갇혀 있음은 나의 한계를 느끼는 겸손함이오, 갇혀 있지 않음은 그 한계를 내가 넘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이고, 내게 알려주시는 것이고, 나를 그 영역 속에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역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존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하고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하며 순종하며, 하나님과 함께 매일의 삶을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문을 여시고 싶으십니까?

기독교의 문을 열고, 기독교의 진리 속에 들어가고 싶으십니까?

 

창세기 11절의 열쇠로 성경을 열고, 기독교를 여시길 바랍니다.

 

이 한주간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시길 원하신다면 아멘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