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시므온이라는 사람(눅2:25~33) 2012-1202 주일

우순(愚巡) 2012. 12. 1. 16:38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

 

   <누가복음 2:25-33>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1. 힐링콘서트 - 사람 살리기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어제 저녁에 제가 힐링 콘서트에 참여했습니다. 어제 저녁에 우리 교회 대예배실에서 자살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힐링콘서트가 있었습니다. 힐링콘서트는 “자살자 유가족을 위한 문화행사”입니다. 자살예방의 목적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Life Hope 기독교자살예방센터,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목회사회학연구소, 크리스천라이프센터 등의 기관이 함께 기획한 문화행사입니다. 저는 이 콘서트를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성돈 교수님과 기윤실의 박상칠 목사님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장소를 제공하였습니다. 힐링 콘서트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주제로 두 시간 여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힐링콘서트는 사람을 살리는 문화행사였습니다.

 

 

어제 저는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모두 다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라고, 주변에 있는 자살자 유가족들을 위로하시면서 남은 삶을 의미 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제 저녁 성수교회 박상칠 목사님이 아버님의 죽음 이야기를 하시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아 박 목사님에게도 깊은 아픔이 있었구나! 제가 알지 못하는 목사님의 아픔을 듣고는 마음이 짠했습니다.

 

 

어제 저녁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살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전문가들은 자살을 질병의 하나로 이해하면서 교리적으로 정죄하기 보다는 질병처럼 깊은 아픔으로 이해하고, 질병을 예방하듯이 자살을 예방하고 자살자 유가족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돕는 자가 되자는 다짐들을 나누었습니다. 자살자들이 자살하는 순간은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마음의 질병을 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지들이 자살을 하면 자살자의 유가족들은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또 하나의 불치병에 걸려서 죽어간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은 자살을 예방하고 자살자의 유가족들을 깊이 위로함으로 생명을 살리고 치유해가야 하겠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성경말씀의 교훈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갑니다.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 우리 주변에 깊은 상처와 아픔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갈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제 그만 미워하고, 이제 그만 증오하고, 이제 그만 욕망에 집착하지 말고, 믿음으로 사랑하고 믿음으로 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2. 기다림 –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강림절

 

여러분,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힘을 내셔서 이 어려운 때를 잘 이겨 가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의 길로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우리들의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확실한 응답도 중요하지만, 길을 묻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길을 묻는 도마에게 내가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길이신 주님과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은 강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강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로 성탄절 직전 주일까지의 네 주일을 말합니다. 절기색은 보라색입니다.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상징합니다. 보라색은 사순절에도 사용하고 강림절에도 사용합니다. 사순절은 고난의 색이라서 보라색을 택합니다. 강림절은 위엄과 권위의 색이라 보라색을 택합니다. 생각할수록 깊은 뜻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보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죠. 그런데 깊은 뜻이 거기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도 보라색, 우리 주님의 왕권도 보라색, 결국 고난과 영광이 같은 것임을 느끼게 합니다. 사순절의 고난과 강림절의 영광이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성탄절을 앞에 두고 4주 동안 강림절을 지키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게 됩니다. 저는 오늘 강림절 첫 째 주일을 맞이하여 ‘시므온이라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시므온! 누가는 시므온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린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의 요점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과 만남’입니다. 시므온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3. 사람이 있었다! –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 사람 시므온.

 

오늘 제가 준비한 말씀의 첫 번 째 묵상은 ‘사람이 있었다!’ 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람이 있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강림절에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이 선택하셨던 사람들, 하나님이 세우셨던 사람들, 하나님이 준비하셨던 사람들, 하나님이 숨겨두셨던 사람들을 만납니다. 출애굽을 할 때에는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가나안에 입성할 때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준비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에게 시달릴 때에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7000명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또 안디옥 교회에서는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님을 통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엔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이 있었다. 거기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시므온! 그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사람이 그리워서 고독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무심코 내뱉습니다. 사람이 없다! 아닙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때, 많은 사람들이 다 율법의 참 뜻은 잊어버리고 율법주의에 빠져 신음할 때에, 성전은 상인들의 장터로 타락해 갈 때에, 아무도 하나님이 보내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지 않을 때에, 그래서 아무도 없는 것처럼 사람이 그리울 때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성전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성전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4. 사람이 그립다 - 영적 외로움의 아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영적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은 혼자 살기 때문에 겪는 외로움이 아닙니다. 교회를 왔더니 아직 나를 아는 사람이 없고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낯설다고 느끼는 고독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그런 것들은 다 극복했음에도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선교회나 속회에서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해서 많은 친구를 얻었음에도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가정도 다복하고 형제자매친척도 있는 데도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믿음의 사람을 그리워하는 외로움입니다. 정말 신앙적인 사람을 그리워하는 외로움입니다. 마음의 외로움, 신앙의 외로움, 영적인 외로움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외로움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교회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외로움을 느낍니다. 또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외로워합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교회에서 존경할만한 장로님이나 목사님을 만나지 못해서 외로워합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 외롭게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아파합니다. 사람이 없다고 외로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기도하는 사람도 없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없고, 의로운 사람도 없다! 그래서 아파하고, 그래서 상처받고, 그래서 괴로워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자주 사람이 없다고 하는 말을 쓰게 됩니다. 동기들의 모임이나 친구들의 모임이나, 직장 동료들의 모임에서 종종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속회나 선교회에서 사람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사람이 없기도 하지만, 어떤 때 보면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동기들이 모이기로 해서 일곱 명이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한 명이 와 있거나 두 명이 와 있습니다. 그러면 두 번 째, 세 번 째로 오는 사람은 무심결에 입에 붙은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이 안 왔네.” 또는 “사람이 없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럼 먼저 와있는 사람은 돼지인가?’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됩니다. 속회에 한 다섯 명이 모여야 되는데, 속장과 인도자만 오면, 둘이서 이구동성으로 입을 맞춥니다. “사람이 하나도 없네. 다들 놀러 갔는가봐.” 스스로 두 사람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을 시키는 건지, 아니면 천사로 격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없다” 이런 우리의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에는, 어떻게 보면 피타고라스 학파가 가졌던 ‘수에 대한 숭배사상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대치가 있는 것이죠. 오늘은 일곱 명이 온다. 오늘은 다섯 명이 온다. 그런데 하나, 둘 온 것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하는 실망감이 깔려져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기대치의 마음속에 있는 수에 대한 숭배사상들, 수의 힘을 신뢰하는 마음들, 이런 마음들이 나쁘다 좋다고 하는 것은 제 설교의 준비가 아닙니다. 그런 말 속에 한 사람의 소중함이 무심결에 지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쩜 신앙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람이 그리운 영적 외로움일지도 모릅니다.

 

5. 한 사람의 소중함 - 기다림의 주인공

 

그러나 가만히 말씀을 묵상해보십시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강림절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성탄절을 준비했습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증거 하는 믿음의 증인이 되었고 성경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구속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한 사람, 하나님이 준비하신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이 한 사람이 강림절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자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유대교인들도, 심지어는 이슬람교 교도들도, 예수님은 적어도 랍비나 스승이나 성인으로 인정합니다. 선지자로 격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들의 신앙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 더 말할 것 없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선지자나 성인이나 선지자로 고백하는 것만도 아주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듯이 보입니다. 대제사장들도 관심도 없었고 인지도 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연구해서 자칭 성경을 잘 안다고 하는 서기관들도 오늘 이 강림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산헤드린을 장악해서 유대교의 정치제도를 이끌어 가고 있는 장로들도 단 한 명도 여기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강림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토록 하나님이 준비한 사건이고, 성경에서 예고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 어처구니없는 사건입니다. 전혀 이 사건이 사건화 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주님을 만났다. 자 이 한 사람이 참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강림절에 종교적 지도자로서 정치적 지도자로서, 또는 지성과 학문의 대가로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이 땅에 오셔도 인지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언어로 표현하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번역하면, 제대로 된 목사도 없구요, 존경할만한 장로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신학대학 교수님들도 많이 오시는데, 제대로 된 신학대학 교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이 기독교에 희망을 가질 수 없고, 교회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없을까요? 정말 아무도 없고, 모든 사람이 우리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교회를 다니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의 옷을 입고 내려오실 때에 그 하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시므온입니다. 단 한 사람이었지만 그 한 사람이 예수님의 강림절의 주인공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6. 시므온이라는 사람 -성령이 함께 한 사람

 

 

이 소중한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성령이 함께 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시므온이 성령이 함께 하고(25절), 성령의 지시를 받고(26절),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27절) 설명합니다.

 

 

<누가복음 2:25-27>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은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이 소수라도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본문을 가만히 묵상해보니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이라는 말씀이 더 깊이 마음에 느껴집니다.

 

다 같이 성경을 다시 묵상해볼까요? 성경은 우선 시므온을 의롭고, 경건하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누가복음 2:25>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이 짧은 소개 문구는 전형적인 율법적 표현, 또는 유대교적 영성의 표현입니다. 쉽게 말하면, 유대교의 종교적 가치에서나 또는 율법적 시각에서, 완전한 사람을 표현할 때 이렇게 표현합니다. “의롭고 경건하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는 한 마디로 완전한 사람이요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이라는 이 표현은 율법적으로 완벽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적어도 유대교적인 영성에서 보면, 아주 완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므온은 이렇게 율법적으로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보면, 이런 전형적인 율법적, 유대교적 영성의 표현으로 끝나지 않고, 누가는 하나를 덧붙여 놓습니다. 성령이 함께 한 사람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 누가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유대교적인 완전함을 표현하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관통하고 있는 성령신앙으로 설명했습니다. 누가는 시므온을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대교의 인사말 ‘평강이 있을지어다’에 은혜가 붙어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로 발전한 것처럼, 사람을 설명하는 표현도 발전했습니다. 유대교적인 표현에다가 ‘성령신앙의 시각’을 덧 붙였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령의 지시를 받아! 성령의 감동으로! 시므온은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쓸 때에 자기가 서 있는 입장에 따라서 역사를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관(史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인물을 바라볼 때, 자기의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쉽게 말하면 조지 워싱턴을 영국 사람이 볼 때는 식민지에서 반란군을 지휘했던 두목처럼 볼 수 있고, 미국 쪽에서 보면 건국의 아버지로 보는 국부(國父)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누가는 의사였고 역사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을 보낼 때에 데오빌로에게 보내는데, 각하라고 그랬습니다. 이 데오빌로는 보통 각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각하입니다. 왜냐하면, 데오빌로라고 하는 말이 ‘데오’는 ‘하나님’이란 뜻이고, ‘빌로’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런데 각하입니다.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의사인 누가가 보낸 글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의사의 직업적인 특색 때문에 누가는 정확하게 기록을 했구요. 그래서 복음서 가운데 가장 역사성이 뛰어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쌍둥이 복음서인데, 사도행전은 역사서로 분류합니다.

 

 

그러면 누가는 어떤 사관을 가지고 이 성경을 기록했을까? 누가는 성령사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시각에서 성경을 기록하고 예수님을 봤습니다. 모든 것을 성령의 시각에서 봤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에 이 시므온은 유대교의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율법적으로 완전한 사람을 넘어서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은 또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2:26-27>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누가가 바라볼 때, 이 시므온은 단순히 율법적인 완전함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그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이 임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지시가 아니고, 율법의 지시가 아니고, 자신의 지성의 판단만이 아니라, 성령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갈 때에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7. 성령의 감동 -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오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에 들어오실 때 그냥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배하러 오실 때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오셨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모든 성도님들이 모두 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오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배할 때에 영과 진리고 예배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잘 아시지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옛날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래서 옛날 성경에는 우리들의 마음이 신령하고 진정성을 갖게 되면 예배가 잘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과 진리로’라는 희랍어의 뜻은 진리에 이끌려서, 영에 이끌려서라는 뜻입니다. 이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진리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예배하고, 보혜사 성령님에게 이끌려 예배할 때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예배할 때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나름 의롭고 경건하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확실히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의롭습니다. 경건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채 교회를 다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는 분명히 좋은 것입니다. 완벽한 인간입니다.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입니다. 삶을 고뇌하고 생각을 깊이 하는 지성적이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대단히 훌륭합니다. 아주 출중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위에 계시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성령이 함께했던 사람입니다. 시므온은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 성령의 지시를 받아 성전에 들어가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8. 사람이 또 있다! – 신앙동지를 만나라

 

이제 우리가 생각할 다음 주제는 신앙동지, 영적 동지, 믿음의 동역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십시오! 성전에는 믿음으로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또 있습니다. 성경은 또 사람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안나입니다. 안나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또 있었습니다. “또 있었다”, 이 말씀이 이 설교를 준비하는 제 마음 속에 다시 또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에 시므온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안나 선지자가 또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을 겪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괜찮은 목사님, 훌륭한 장로님, 뜨거운 기도자가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심지어 오늘날 교회는 다 썩었고 쓸 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므온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나와 같은 선지자가 또 있습니다. 시므온만 아니라 안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만 아니라 또 있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사람이 또 있다는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주 엘리야 콤플렉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엘리야의 열등한 마음, 엘리야의 고독한 마음을 이겨야 합니다. 엘리야는 유대교적 영성에서 보면, 의롭고 경건하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지 아시죠? ‘나는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합니다.’ 그런데 나만 남았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 고독감, 외로움을 토로합니다.

 

 

<왕상19:14>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요즘 말로 번역하면 이렇게도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평생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헌금만 해도 아파트 몇 채는 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제 나만 남았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내 생명조차 뺏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다 죽고 나만 남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아니다! 또 있다! 사람이 또 있다! 또 네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또 있다. 하사엘이 있고, 예후가 있고, 엘리사가 있고, 칠 천 명이 있다. 하나님은 아람을 위하여 하사엘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예후를 준비하셨습니다. 심지어 엘리야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9:15-16>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열왕기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여러분, 정말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고 하는 이 전형적인 유대교의 율법의 표현처럼, 엘리야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경건한 사람이었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엘리야 그는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는 “하나님, 나만 남았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 불의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람의 왕, 이스라엘의 왕, 심지어는 너를 대신한 선지자도 준비해 두었고, 네가 알지 못하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숨겨두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만 있던 것이 아니라, 안나도 있었습니다. 엘리야만 남은 것이 아니라, 하사엘도 남았고, 엘리사, 예후, 칠 천 명이 소리 없이 남아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빠지기 쉬운 영적인 고독과 외로움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남겨두시고 인도하시고, 성령이 함께하시는 사람들을 만나서 영적인 동지를 삼아야 합니다. 이들은 정치적 성향이 아닙니다. 이들은 수의 힘을 과시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이들은 여전히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숨어있기도 합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었지만, 성경은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 이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때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은 영적인 동지들과 함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9. 교회의 가치 - 예수님과의 만남

 

이제 우리가 끝으로 나누려는 말씀은 성전의 가치입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안나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안나는 과부가 되고 84세가 되어서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더니 예수를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2: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시므온도, 안나도,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시므온도 안나도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성전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소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성전이 타락하기도 했습니다. 장사치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너무 쉽게 성전을 폄하하고, 우리들은 너무 자주 하나님의 교회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너무 냉소적으로 비난하고 비방합니다. 어설픈 지식이나 가벼운 정의감으로 성전과 교회를 경시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질책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오늘 서두에서 말씀드린 어제 밤의 힐링콘서트의 결론 중 하나가 ‘빠른 세월 값진 인생’입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한 가운데서 세월을 아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마음을 모두고 진지하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그만 이제는 정말 그만 불신앙적인 마음, 불신앙적인 행동을 그치고, 성령님의 인도에 이끌려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의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전의 가치, 교회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교회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우리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체험의 그 날을 위해, 오늘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가 강림절입니다. 이 강림절에 눈을 들어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눈으로 나만 남았다고 하는 영적인 외로움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숨겨두신 사람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도록 지켜주신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을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지 말고 금식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우리 주님을 만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 우리가 만난 주 예수 그리스도 곧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승리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