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성령의 잉태 <마태복음 1장 18절-20절>

우순(愚巡) 2007. 5. 15. 10:25
 

마태복음 1장 18절-10절   성령의 잉태


도입) 


  할렐루야!

  오늘도 주님 안에서 예배의 감격을 느끼시기를 축원합니다

  상동교회는 생기를 불어넣는 민족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바램을 들으시고 우리 교회를 민족의 성소로 승화시켜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전개)


  오늘은 마태복음 1장 18절로 20절의 말씀을 가지고 성령의 잉태에 대하여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성령의 잉태!............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성령의 잉태는 동정녀 탄생과 함께 예수님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키워드입니다.


  많은 지성인들은 이 대목에서 멈칫거립니다. 남성없이 여성 혼자 아이를 만들 수 있다는 동정녀 탄생론은 과학자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좋은 빌미가 됩니다. 그러나 요 근래 생명공학의 복제기술은 인간창조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고 있습니다. 생명복제 기술은 생명윤리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관에 역설적으로 도움을 줍니다. 한마디로 인간들도 생명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 기술은 하나님의 기술을 측량할 수 있는 폭을 넓혀주고 있습니다. 인간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남성의 역할 없이도 여성 단독만으로도 얼마든지 아이를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본론)


  성령의 잉태는 우리가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 대하여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학도 하나님을 찾는 탐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전제 위에 세우는 삶의 틀거리입니다.


1. 성령의 잉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남성 중심의 유대 족보입니다. 그래서 낳다라는 말을 남자가 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았습니다.  어떻게 남자가 남자를 낳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남자가 남자를 낳은 다는 계승의 의미를 중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다릅니다.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16절을 보십시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요셉이 예수님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낳았다고도 기술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서..........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시는 하나님의 통로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낳게 하신 주체는 따로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이 낳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를 선포해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심!...........기적!..........초월성!......이것은 결코 전능하심도 기적도 초월성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이성과 감성의 영역 밖에 있다는 말입니다. 장수하시는 분들이 많은 우리교회입니다. 홍해은 장로님이 어린 시절에는 상동교회의 건물 자체가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뉴욕에 갔을 때 지하철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1904년 10월 27일 뉴욕지하철이 개통됐다. 4년 7개월 동안 4천만달러를 투입한 결과물이었다. 시청역에 몰려든 시민들은 반짝이는 올리브그린색 전동차가 들어서자 환호성을 질렀다. 시속 25마일의 지하철은 시청에서 145번가까지 구간을 15분 만에 주파했다. 이날 하루 15만명의 시민이 새로운 교통수단 체험의 기쁨을 누렸다. 우리나라에서 지하철 운행이 시작된 것은 1974년 8월 15일. 청량리역에서 지하철 1호선 개통식이 열렸다  .....한국보다 70년전에 뉴욕에는 지하철이 개통되었습니다


   뉴욕에서 지하철이 개통되던 1904년도에 한국은 일본제국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삼 년후에 부임하신 전덕기 목사님은 항일운동을 하다가가 1914년에 옥사하셨습니다. 그 때 땅속으로 쇠붙이가 다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전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잉태도 사람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아주 전능하신 평범한 일일뿐입니다.


2. 성령의 잉태는 성령의 창조성을 선포합니다


  마태복음은 신약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 마태복음의 화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기억하시지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물론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의 잉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태동시키는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서막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사건에도 성령의 잉태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기억하십시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하나님의 신이 성령입니다. 히브리어 원로는 루아흐입니다. 바람과 같은 형태로 묘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명위로 운행하시는 모습을 연상 하십시요. 운행은 히브리어 메라헤페트로 감싸 안음을 나타냅니다. 물질은 자기보다 큰 물질 안에서는 오직 한 곳에 거합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작은 물질 안에서는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자 이 접시를 보십시요. 이 접시는 제 몸집보다 작습니다. 그러나 이 접시 위를 개미 유충이나 아주 작은 미생물들이 횡단을 한다면 한 시간이 걸릴지 한나절이 걸릴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들은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접시 위에 방향을 표시해야 하고 서로 충돌하지 않기 위하여 신호등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접시보다 훨 큰 제가 이 접시를 손에 잡고 있으면 저는 이 접시 안에서 가고 온다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내가 잡은 그 순간 나는 접시의 시작과 끝에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뿐만 아니라 모든 접시의 모든 면에 동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이란 자기보다 큰 물질 안에서는 오직 한 곳에 존재하지만 자기보다 작은 물질 안에서는 모든 곳에 동시적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존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오든 곳에 동시적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 어떻게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셔서 모든 곳에 존재하십니까? 그 분 존재 자체가 그 분이 창조하신 세계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주자 너무 커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한 갖 피조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물질의 크기는 상대적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이 물질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영이십니다. 그러나 크기를 재는 물질의 속성을 빌려 설명하자면 우리 보다는 우주가 크지만 우주라도 하나님 보다는 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의 한 곳에서만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곳에서 동시적으로 존재하십니다.


  성령의 잉태는 이런 하나님의 무소부재성을 실질적으로 느끼게 하는 존재양식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 성령님께서 수면위에 운행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위격 중 성령님께서 수면위 모든 곳에 존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무소부재성을 구체적으러 셜명하는 위격이시고, 성령의 운행하심은 창조의 역사를 창출하는 에너지의 충일하심입니다. 이처럼 창세기에 나오는 태초의 세계는 성령의 운행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목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성령의 잉태로 출발했습니다. 성령의 잉태는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로운 세계의 운동력이며 제일 원입니다. 결국 이 말은 창세가나 마태복음이나 공히 성령의 잉테로부터 세계가 열렸음을 보여 줍니다. 성령님은 창조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잉태는 성령의 창조성을 선포합니다



3. 성령의 잉태는 사람의 중생을 예표합니다.


  성령님은 태초의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출발시켰습니다. 바로 그 성령님이 지금 우리들을 향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1)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2)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3)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또는 위에서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개역개정 요한복음3:1-7)


 거듭남!


   중생은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개신교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죄인의 구원인데, 그 구원이 ‘오직 믿음’의 교리 때문에 거듭남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은 믿음을 강조한 장점은 있으나 외로워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루터의 신학은 ‘죄인의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죄인인 상태로 구원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지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개신교 신학의 강점이고 근간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죄인인 상태에서 은혜로 얻었다 할지라도 구원 받으면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간과하는 약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루터의 오직 믿음 교리를 수정하고 있습니다. 칭의로서의 구원은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얻지만 성화로서의 구원은 성령의 역사로서 얻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죄없이 탄생하셨습니까? 성령으로 잉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태어 날 때 이미 인간의 혈육만이 아니 성령의 역사로 태어 나셨기 때문에 죄  없는 자로 태어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잉태는 죄 없는 상태를 만드는 중요한 신적행위입니다. 거듭남이란 단순히 의롭다하고 인정을 맏는 법률적 사죄의 선언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신적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령의 잉태는 사람의 중생을 예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