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5일 설교 - 선교사역
<성경본문:사도행전 1장 6-11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선교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선교사역이라는 말 자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익숙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선교사역이라는 말은 좀 낯선 말입니다. 전도와 선교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선교사역은 낯선 말입니다. 그것은 사역이라는 말 자체가 CCC나 예전단 같은 선교단체에 의해서 지역교회로 유입된 말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역은 복음전도와 같은 말이지만 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로 문화변혁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원래 선교는 라틴어 동사 mitteer(보내다. 파견하다)를 어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선교를 의미하는 mission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고 파송되는 것을 뜻한다. 영어의 mission(선교)와 missionary(선교사)는 라틴어 mitto에서 유래된 말인다. 그 의미는 '보냄을 받은자'라는 뜻이다.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선교사역이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냄 받은 선교사들의 모든 섬김을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 주일에 CCC와 공동으로 선교사 파송 및후원을 약정하는 ‘선교주일’을 지키려고 합니다. 이 번 선교주일에는 김정한 선교사를 비롯한 일곱 명의 선교사와 고 한부남 권사 유가족들이 봉헌한 ‘선교사 양성 기금( 선교사 자녀 장학금)을 받는 열 한명의 선교사 자녀들 또는 후원자들이 참석할 것입니다. 또 선교헌금을 봉헌한 이동표 성도님과 고 한부남 권사님의 자녀들도 함께 참여할 것입니다. 이 번 선교주일을 지키게 된 데에는 CCC(대학생선교회)의 박성민 대표와 고 한부님 권사님의 아드님이신 이희돈 장로님의 기도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선교주일을 지켜야 합니까? 세 가지 큰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과 우리 교회의 뿌리와 성도의 축복때문입니다.
1. 선교사역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뭐냐? 두 말 할 것 없이 복음전도입니다. 선교사역은 문화변혁을 포함하는 복음전도의 효과적인 섬김입니다. 선교학자 피터 왜그너는 기독교의 선교사역을 복음위임과 문화위임으로 표현하며 선복음위임 후 문화위임론을 말했습니다. 복음위임은 영혼구원을 말합니다. 문화위임은 문화변혁을 말합니다. 복음위임은 영혼구원을 성취하고 문화변혁은 사회구원을 성취합니다. 이 둘은 함께 갑니다. 그러나 영혼구원을 이루는 복음위임이 언제나 먼저 앞서야 합니다. 선교사역은 이 두 가지를 성취하는 교회의 으뜸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역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선교사역자의 견해는 이미 존 웨슬리 목사의 은총과 책임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조화와 중용의 신앙을 이야기 하면서 영혼구원과 사회변혁을 양자택일적인 개념이 아니라 순차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든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며 인간의 책임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가도록 섬겨야 합니다. 선교사역은 이 두 가지를 성취하기 위하여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기억하십시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선교사역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복음전도를 통해 영혼구원을 성취하며 사회변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선교사역은 교회의 본질을 성취해가는 거룩한 섬김입니다.
이런 선교사역의 섬김은 선교단체를 통해 진지하고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지역교회를 깨웠습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신학교 양성과정의 커리큘럼 때문에 다른 교단보다 조금 늦게 선교사역에 눈을 떴습니다. 이는 CCC(대학생선교회)나 예수전도단 등이 일반 대학생을 중심으로 퍼져갔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는 일찍 예수전도단과 협력할 수 있어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CCC와 교류를 할 수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저는 CCC의 마게도니아 프로젝트 실행위원이고 제 아내는 예수전도단의 DTS훈련을 받았습니다. 감리교회는 목회자 양성과정이 고등학교 졸업자들이 바로 신학교를 가게 했었기 때문에 선교단체의 소중함을 잘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것은 신학교 입학과정이 고등학교를 졸압한 직후에 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선교단체들은 ‘가라 아니면 보내라’(Go or Send!)라는 구호를 알려 주었습니다. 지역교회는 사역을 할 때 인원과 재정과 조직을 우선시합니다. 그러나 선교단체는 인원보다는 비전(Visiopn)을, 재정 보다는 마인드(Mind)를, 조직보다는 사명(Mission Statement)을 강조하며 복음전도에 새로운 영성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동안 지역교회들은 선교를 과거의 역사로만 이해했을 뿐이었지만 선교단체는 미래의 역사로 선포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라는 과거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선교사역의 사명을 감당하는 중심국가라는 미래의 역사가 중요한 영적가치가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신학교 내에서 ‘선교사역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기도모임’에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교단도 신학교도 선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도 없었고, 선교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뿐만 아니라, 장로교, 또는 다른데도 과거의 선교사들이 우리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하는 역사의 과거로서만 선교를 이야기했지, 우리가 선교를 하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경제적 빈곤이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단체들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CCC나 예수전도단같은 선교단체들이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선교사역은 목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말도 합니다. “ 제1차 종교개혁이 성직자의 손에 있었던 성경을 평신도에게 전해준 것이라고 한다면, 제2차 종교개혁은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선교사역을 평신도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에는 선교사역을 평신도들이 주도하게 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영혼구원이며 사회변혁입니다. 선교사역은 이런 우리의 존재목적을 성취하는 교회의 으뜸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역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2. 선교사역은 우리 상동교회의 뿌리입니다.
우리 상동교회는 스크랜턴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감리교회입니다. 감리교회는 존 웨슬리 목사의 선교사역의 뿌리로부터 자라난 교회입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120년전에 달성궁의 시병원을 시작으로 우리 상동교회를 설립하신 분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현교회와 동대문 교회와 더불어 스크랜턴 선교사의 삼 대 교회입니다. 그 중에서 제 일 먼저 시작된 교회로 한국 감리교회의 모교회입니다. 우리가 섬기늠 삼일학원의 학원선교도 그 뿌리를 캐 보면 이화학당을 세웠던 스크랜턴 선교사의 학원선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상동교회는 존 웨슬리와 스크랜턴의 선교사역의 뿌리에서 자라난 열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교사역은 우리 상동교회의 뿌리입니다.
이제 우리 상동교회는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가 있지만 보다 더 선교사역에 더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교회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선교사역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말하기 전에 깊은 영적인 진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행1:8A)... 사도행전은 성령의 책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행1:5). 마음을 같이하여 더불어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행1:14). 회개하니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행2:38). 말씀을 청종할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행10:44). 사도의 안수를 받을 때 성령받았습니다(행 19:6). 이 말은 선교사역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거운 짐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임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선교사역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축복의 사역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선교사역은 우리 상동교회의 뿌리이며 사명입니다. 우리 교회의 정식 명칭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상동교회입니다. 기독교입니다. 감리교회입니다. 상동교회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대 위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로 20절을 묵상하십시요.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 하시니라” 존 웨슬리의 대선언도 기억하십시요! “세계는 나의 교구다” 그리고 우리 교회 자체가 스크랜턴 선교사의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임을 명심하시다. 선교사역은 우리 상동교회의 뿌리이며 사명입니다.
3. 선교사역은 성도의 축복입니다.
선교사역은 성도의 축복입니다. 선교사역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선교사역은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선교사역은 성도의 축복을 이어가는 ‘믿음의 명가’를 세워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에게 설교할 때 강종합니다. 선교사역자가 되라! 부모들에게 설교할 때는 이렇게 자녀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내 자녀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선교사역자가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의 영혼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역에 헌신하도록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축복을 말할 때 장자의 축복권을 늘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권을 주시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권을 넘겨주었습니다. 장자권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린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장자로 태어났으나 장자의 축복권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가인은 살인자입니다. 르우벤은 성정이 급하여 아비의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장자가 아니었음에도 장자처럼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곱을 비롯하여 다윗과 요셉 등입니다. 다윗은 여덟 번 째 아들이었습니다. 요셉은 열 한 번째입니다. 교회도 장자권의 축복을 받는 교회가 있고 누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물론 장자의 축복권을 받은 교회가 누리기도 하면 그야 금상첨화입니다. 우리 교회는 한국 감리교회의 장자입니다. 한국 교회의 장자이기도 합니다. 120년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축복의 시간입니다. 이제 장자의 축복을 받았으니 장자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우리 교회의 규모나 재정 형편 때문에 걱정하시는 분이 계시면 힘을 내십시요 하늘을 바라보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칭찬을 들었던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이 두 교회는 환난과 궁핍이 있었던 교회고(서머나) 능력이 적은 교회였습니다(빌라델비아). 그러나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았습니다(계2:10) 그래서 서머나 교회는 실상은 부요한 교회였습니다(계2:9). 빌라델비아 교회는 열린 문을 두어 선교사역의 모델이 되었습니다(계2:8) 그 문을 닫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두 교회도 좋은 모델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을 받았으나 땅 끝까지 증인이 되지 못하자 환난을 당하여 흩어졌고(행8:1) 경제적으로 궁핍해져서 안디옥 교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행11:27-30)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 흩어졌던 사람들이 세웠던 개척교회였지만(행11:19), 바울과 바나바를 세워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 유럽에 기독교 문명 시대를 열었습니다. 소아시아와 유럽의 교회들을 세운 것도 안디옥 교회에서 세움을 받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학자들은 안디옥을 선교사역의 첫 번 째 모델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선교사역은 흐르는 물이 계속 흐를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장자권의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장자권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선교사역을 우리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축복으로 깨닫고 선교사역을 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단순한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선교사역자가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선교사역자가 되어서 목사가 되기도 하고, 선교사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가 사역자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가든지, 보내든지, 아니면 후원하든지해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빈곤하게 만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세상 사람도 사명을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했던 사랑의 빚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선교는 사랑의 빚을 갚는 사명입니다. 그리고 선교사역은 우리가 받았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요즘 오프라 윈프리의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화두가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남보다 많이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남보다 더 아파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남보다 더 가슴설레이는 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남보다 더 부담 되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다)
선교사역은 성도의 축복이며 사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한국교회가 이만큼 성장해서 선교사역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명입니다. 우리는 선교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때로 부담을 느낍니다. 심지어 선교사를 파송하면 부담을 많이 가져야 되고 책임을 져야 되니까 파송은 하지 말고 후원만 하자고 합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보다 더 부담되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라는 윈프리의 말처럼 부담만 느끼지 말고 사명감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더 아파할 수 있습니다. 지난 해 아프카니스탄의 사태처럼 죽음의 고통을 느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우리의 선교사역이 사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느끼는 사명감을 넘어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그리고 맡기셨다는 소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로마서12:1-2) 선교사역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거룩한 하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선교사역은 교회의 본질이며 우리 상동교회의 뿌리고 성도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선교사역의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뿌리가 되고, 우리 성도들의 축복이 되고, 우리 믿는 자들의 소명이 되는 이 선교사역이 우리의 자녀들을 통해 활발하게 일어나서, 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도울 수 있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스크랜턴 선교사의 헌신으로 세워진 우리 상동교회가 선교센타가 되기를 진심으로 사모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의 발원지인 우리 상동교회의 120년 역사가 이제는 선교사역의 너른 바다로 나아가기를 두 손 모아 간구합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선교사역에 헌신하는 성도님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이 설교는 당일 전한 말씀을 후에 보완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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