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과 오순절
<창세기11:1~9 >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사도행전2:1~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떠세요? 우리 호산나 찬양대의 찬양이 참 좋지요? 은혜가 되지요? 찬양대는 하나님께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들으면서 마음에 은혜를 받습니다. 성도님들 가운데 찬양사역을 하셨던 분들이나 악기를 다루시는 연주자들은 우리 호산나 찬양대에 오셔서 봉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찬양대장이신 임용택 권사님이나 지휘자이신 권동현 집사님에게 신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말씀을 들으시면서 또 다른 은혜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제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 설교가 길다고 말하고 어떤 분들은 짧다고 말하고, 어떤 분들은 느리다고 말하고 어떤 분들은 빠르다고 말합니다. 저는 누구일까요? 제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요? 제 스스로 제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조금 빠르게 해보겠습니다. 혹시 연로하신 성도님들은 불편하실 수도 있으니 너무 빠르게는 안하겠습니다. 다만 부탁이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 길은 설교자의 준비와 진정성도 필요하지만 듣는 성도님들의 마음자세도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청중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회개하고 성령 받았지만, 스데반의 청중은 이를 갈며 돌을 던져 설교자를 죽였습니다. 두 분의 설교는 모두 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파하는 설교였습니다. 우리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설교자는 진정성을 가지고 준비해서 전하고, 듣는 이는 겸손한 마음으로 아멘 하며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말] 요즘 저는 창세기를 중심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우리네 삶의 원형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땅과 하늘의 이야기 곧 우주 삼라만상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것인지를 결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중에서 바벨탑과 오순절을 설교의 소재로 택했습니다. 제가 오늘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벨탑은 언어가 불통된 이야기이고, 오순절은 언어가 소통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언어의 불통과 소통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바벨탑의 주인공들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썼는데, 그들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하는 본래의 선한 목적을 상실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언어와 말을 가지고 입을 맞추고 말을 맞추어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했습니다. 하늘에 닿을 바벨탑을 만든 것이고,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고,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이때, 성경에 도시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도시에 대해서 하비콕스(Harvey Cox)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농촌을 만드셨는데,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도시화가 되면서 부가 집중이 되고, 문화와 문명이 꽃을 피우게 되었는데, 그것과 함께 죄가 많아 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의 말과 하나의 언어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자신들의 영역을 드러내려고 하고, 도시를 만들던 그 바벨탑의 문화를 만들던 사람들에게 내려오셔서 그들을 흐트려 놓으십니다. 그들의 언어가 불통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말이 안통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탑 사건의 요지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미래지향적인 희망을 품고 준비했습니다. 제가 미래지향적인 희망을 품었다는 것은 오순절 사건처럼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이 통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오늘의 말씀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로 시작합니다. 1절,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하나님이 만드신 삶의 원형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로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은 사람들을 연결해주고 마음을 소통하게 합니다. 언어가 다르고 말이 다르면 답답하고 마음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유학생활을 하신 분들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에 대하여 더 생생한 경험들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소통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로 사랑하고 축복하면서 한 분 하나님께 같이 예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의 언어로 하나의 말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고 하나의 제사(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됨으로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우리가 하나된 것 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요17:20~23>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이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주신 것은 하나의 믿음을 갖고 한 분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우리가 하나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목적의 상실과 언어의 혼란]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목적의 상실입니다.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은 하나의 믿음으로 한 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예배하는 것인데 본래의 목적을 상실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로 마음을 하나로 만들더니,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사람들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고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본래의 선한 목적은 사라지고 그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이 갖고 있는 기능을 악용했습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악용합니다.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바벨탑을 쌓아서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 사람들의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표준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로 마음을 맞추어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드러내자고 했습니다. 거기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모습을 보시고 못 마땅해 하면서 이들이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말씀하십니다.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악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주신 것은,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한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축복하라고 하심인데,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로 마음을 맞추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했습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 성읍은 도시화가 되는 흔적입니다. 탑을 건설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닿게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땅과 하늘과 산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산은 사람이 사는 곳이고, 하늘은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며, 산은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하늘에 닿는 것은 신앙이 좋아지거나 하늘에 미쳤다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되는데 침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제가 지난번에 선악과 이야기를 하면서, 선악과가 어떤 종류의 과실이냐? 학명이 뭐냐? 속명이 무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열매가 독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선악과라고 하는 그것을 통해서, 에덴동산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자리를 잃어버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는 이것을 원리강론에서 따먹었다는 말로 성적 범죄를 연상시킨다고 잘못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뺏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욕심이 많으냐면, 하나님의 자리까지도 내 것으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욕심이 한 번 그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신의 영역까지도 뺏어서, 내 영역으로 만들고 싶은 게 인간의 욕망입니다. 오죽하면 성경은,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고 경고를 하겠습니까. 바벨탑은 바로 인간의 욕망이 극명하게 투영된 것입니다. “하늘에 닿자.” 하나님의 영역을 향해서 침범해 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다음 이름내기의 문제점입니다. "자 우리의 이름을 드러내자." 우리가 갖고 있는 이름도 소중하지만, 구약시대는 이름이 존재와 동일시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택한 곳에 둔다고 하였고,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짐승의 이름을 짓게 하였고, 하나님이 선택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이름 흔적이 들어가 있는 이름으로 아브람의 이름을 바꿔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이 되게 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인 YHWH 중에 헤트라는 H를 아브람에 주셔서 아브라함이 되게 하셨습니다. 신명을 포함시킵니다. 그들은 이름을 존재와 동일시해서 이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름을 드러내자고 하는 욕망은 젊은 날의 정욕보다 무섭습니다. 중년의 소유욕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고약한 명예욕입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는 것은 선한 의미에서 후대에 좋은 이름을 남기는 선한 이름 남기기가 아니고, 일종의 자신의 명성을 남기려고 하는 그리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려고 하는 한 사악한 욕망이 투영된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사람들 앞에 온 누리에 바벨탑을 쌓은 족속들이 남기려고 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것을 옳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언어와 말을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목적의 상실, 기능의 악용이 가져온 혼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절,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이게 이제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반복될 것인데 아무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탑을 쌓아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명예욕부터 시작해서, 끊임없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심을 합니다. 7절,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나님이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도록 언어를 불통시켜 버립니다. 그런 뒤에 그들이 이 혼란 속에서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그들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그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도시에 살고 있는데, 도시를 부정적으로 봐서 ‘야, 우리 도시를 다 때려 부수자.’라는 말을 성경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경고지요. 하나님은 바벨탑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경고합니까? 하나님의 의도와는 정 반대로 가고 있는 인간들의 실생활을 하나님이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삶이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명예욕과 자신들의 명성을 알리려고 하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는 욕심이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시화가 되면 다시 노아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노아 홍수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노아 홍수 때의 하나님이 세상에 죄가 가득한 것을 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생각이 언제나 악한 것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의 사람들의 모습은 항상 생각하는 게 악한 계획만 갖고 있고, 세상에는 죄악이 가득해서 하나님이 쓸어버리셨습니다. 쓸어버리고, 노아의 가족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작은 마을들이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이 먹혀들어가는 작은 마을이었죠. 그런데 다시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잊어버렸습니다. 옛날에 온고지신의 마음으로 옛것을 생각하면서 교훈을 삼아야하는데, 인간에게는 망각이 있습니다. 그렇게 수없는 경고를 하나님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또 잊어버렸습니다. 잊고는 다시 노아 시대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소멸시키면서 낙원에서 추방당한 실낙원시대로 돌아간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사람들의 이름을 드러내고 도시화를 만들어가지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결심을 하셨습니다. 이들의 언어를 갈라놔야 되겠다. 그래서 바벨탑은 그들이 혼잡을 경험하게 되는 세상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바벨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혼잡’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인터넷에서 바벨탑을 치면 픽션이 아니고 실제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예들이 이라크 쪽에 거대한 탑의 문화를 만들었던 것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바라보고 있는 그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문제이고, 사람들의 이름에 대한 욕망의 문제이고, 도시화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먹혀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가 마련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보다 사람의 이름을 더 내세우는 사회, 그런 공동체에 하나님께서는 혼란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왜? 왜 하나님은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을까요? 목적의 상실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다다르려고 한 것과 사람들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한 것과 도시를 만든 것 때문입니다. 이는 불신앙적인 것이고 죄악이었습니다.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악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다다르게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고, 사람들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것은 욕심의 발로이기 때문이며, 도시를 만든 것은 결과적으로 노아 홍수 이전의 죄악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은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로 입을 맞추어 죄악을 범했습니다.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이 순기능을 하면 한 마음으로 한 소리로 한 분 하나님께 예배하는 하나의 영적 공동체를 이루지만, 역기능을 하면 입맞춤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바벨탑이 그랬고,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고, 예수님을 죽이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 우리는 성경이 주는 교훈을 통하여 우리네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말을 맞추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탐욕에 젖어서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악한 자들과 입을 맞추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 하나님을 거역하는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순절의 언어 소통] 언어사건으로 바벨탑과 상반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입니다. 유월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서웠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다 숨어들었습니다. 그들이 은혜받기 위해 모여 들었다기 보다는 사실은 숨어들은 것입니다. 그들의 전과를 생각해보면,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이름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요한? 알몸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도마? 주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의심만 하던 사람 아닙니까. 나머지는 뭐했는지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그들은 엄마를 시켜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하고, 세상의 나라가 오는 줄 알고 외무부장관, 내무부장관을 꿈꿨던 사람 아닙니까. 누구도 자기들의 이름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은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니까요. 그랬더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서, 성령에 따라 말하게 하심을 받으면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2:1~2>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이전에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여자들과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더불어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나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그들은 그 집에 모여서 무엇을 했냐?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거기서는 베드로도 야고보도 요한도 자기들의 이름을 내세운 사람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침범한 사람도 없고 다른 생각을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나고 보니까 후회만 되는 거예요. 예수님 살아계실 때,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고, 죽은 다음에야 알아들은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말씀이었구나. 생각해보니까 주님 죽으실 때에 그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렇게 옆에 앉아서 많은 기적을 보았는데도,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처럼 오셔서 병든 사람 한 명만 고쳐도 교회에 사람이 차고 넘칠 것 같은데, 웬걸 예수님이 시각장애우도 고치고, 혈루병이 있는 여인도 고치고, 열두살 먹은 소녀도 달리다굼 외쳐서 일으켜 세우셨고,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얼마나 크게 역사를 하셨습니까. 그런데도 정작 예수님이 죽을 때에는 아무도 옆에 없었습니다. 그게 인간인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도 깨어있을 수 없느냐.” 단 한 명도 예수님이 죽을 때 같이 기도도 안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고 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나서 보니까, ‘어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던 하나님의 나라, 가룟 유다가 말하던 정치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거였구나.’ ‘어라? 우리가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고 싶었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게 아니었구나.’ ‘주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부활이라고 가르쳤는데, 그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고, 죽고 나서 보니 주님이 진짜 부활 승천 하시는구나.’ 그 때서야 깨달음이 와서 한 곳에 모여, 그때는 사람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거기에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지요. 아들이 죽을 때, 그렇게 아들을 고독하게 만든 제자들, 3년 6개월간 숙식을 같이 해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요즘으로 말하면, 수사를 받기도 전에 부정했습니다. ‘너 아느냐?’ ‘모르는데요.’ ‘너 예수님이랑 같이 있었냐?’ ‘저 아닌데요.’ 자기 아들하고 3년 6개월을 먹고 살았는데도, 엄청난 권력자 앞에서 죽음 목전에서 그런게 아니라, 여자 하인 하나가 물어보는데도 아니라고 바로 발뺌합니다. ‘아이고, 저 권사 아닙니다.’ ‘저 장로 아닌데요. 저 절대 장로 아닙니다. 어디가서 저 장로라고 하지 마세요.’ ‘목사는 뭐요. 오다가다 안수받은거지요. 저보고 목사라고 하지마세요.’ 이런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기도하겠다고 또 모여들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위대한 것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옛날에 자기 아들에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기도가 나올까요? ‘야 너 같은건 기도해도, 하나님이 기도 안 받으셔. 베드로! 너 인간이 왜 이렇게 치사하냐? 너 여자 앞에서 예수 믿는다고 고백도 못하고 말이야. 예수님 앞에서 저는 목사 아닌데요? 너가 무슨 목사냐. 너는 가라. 앞으로 같이 하지 말자.’ 인간이라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텐데, 어머니 마리아는 좀 달랐습니다. 그런 평범한 인간의 군상들 속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존경받았던 것은 그들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더불어 함께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아니하고, 용서하고 용납하면서 더불어서. 이 더불어서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만은 엄청난 파워가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함께 기도했더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행2:2~4>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이 충만해지고 나니까, 그들의 언어가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언어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까지 말하던 말이 아닙니다. 이제는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대로 입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행2: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2:12>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였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언어의 혼잡인데 반해 오순절 사건은 언어의 소통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사용하다가 언어의 혼잡을 가져 왔지만 , 오순절 사건은 정 반대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다가 언어의 소통을 가져왔습니다. 성경은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며 놀랐다고 증언합니다. <행2:8~11>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바대인과 메대인은 서아시아 근방 사람들입니다. 메소보다이마와 로마는 유럽이고,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는 터키쪽이며, 애굽과 구레네와 리비야는 아프리카 사람들입니다. 지중해 연안의 남 유럽과 서 아시아와 북 아프리카의 다양한 사람들이 각각 자기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당황했습니다. <행2:7~8>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2:12~13>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오순절 사건은 확실히 신기하고 놀랍고 당황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선포합니다. 성령이 임재하였다!
<행2:1~4>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에 다같이 한 곳이 모였더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불의 혀 같이 갈라는.....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입니다. 언어가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더라도 성령이 임재하시면 하나가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언어가 소통됩니다. 가정이든, 속회이든, 선교회이든, 교회든, 성령이 임재하심을 경험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를 말하게 됩니다. 하나의 말로 마음을 서로 소통하게 됩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행2:5~6>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우리 기독교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은 교회의 요람입니다.기독교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시작된 종교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을 하게 되면서 세계 종교로 확산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을 했습니다. “너희 새 술에 취했니?” 술 먹었냐며 조롱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술 취했냐고 조롱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을 통해서, 언어가 다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언어가 소통이 되기 시작하면서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언어 소통의 사건을 기점으로 기독교가 세계 종교가 됩니다. 복음이 전도되기 시작하고, 세계 선교사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사건 이 후에, 이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이 달라졌습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가 툭툭 나서며 내가 대장이라고 자랑을 하지 않고, 야고보와 요한이 딴생각을 하지도 않고, 비겁하게 도망가지도 않고, 이제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온 신경을 다 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세계 종교가 되었던 기폭제였고, 분기점이었습니다.
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장소가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철저하게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만 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는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1장 12절로 14절은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행1:12~14>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마가의 다락방 ,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 그리고 다른 언어.... 우리는 기독교가 시작되던 처음 시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면서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쉬운 말 같지만 결코 쉽지 않은 말입니다.
예수님을 고독하게 만들고 배신하고 도망갔던 12제자가 더불어 함께 기도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 마리아의 용서와 용납이 없었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을 일입니다. 암튼, 핵심은 과거사를 생각하면 도저히 더불어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더불어 함께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들이 기도하던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에게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들은 사람들의 이름을 내려 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부르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역사만을 기다리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겸손함, 이제는 하나님의 역사개입을 바라보는 신앙적인 마음만이 이들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인정하고, 우리들의 삶의 한 가운데 하나님의 자리를 분명하게 만들어 놓고, 간절히 기도할 때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하던 그들에게 언어소통의 역사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언어는 자기들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다른 언어인데 바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상대방의 언어였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언어가 아닌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결국 결론은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바벨탑과 오순절 사건이 주는 영적교훈은 아주 명확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언어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의 언어 하나의 말이 소통되면서 복음이 전도되고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것은 교회를 넘어 우리 인간의 삶에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십시오! 이 번 주 중에는 김학중 목사님을 보시고 가을 영성축제를 합니다. "기적의 중심에 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성령충만함을 입기 위하여 간절히 사모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십시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시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 삶의 한 가운데 하나님의 자리가 분명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도, 노아 홍수 시대에 죄악이 가득하고 사람들의 생각하는 것이 항상 악한 계획뿐이라는 것도, 모두 다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소멸시키면 모든 것 전부를 다 가질 것 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아닙니다. 나머지 모두까지 다 잃어버립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명예욕 또는 명성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욕심 또한 결국은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순간 혼잡이 옵니다.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해야 합니다. 다윗처럼 내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가 되는 것도 좋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84:10~11>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이 하나님의 자리까지 탐을 내고 자기들의 이름을 드러내려다 결국은 언어의 불통을 가져와 말이 안통하는 바벨탑의 혼잡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하니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언어의 소통을 가져와 말이 통하는 오순절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선교의 문을 활짝 여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핵심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언어가 통하고 말이 통하는 복음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말을 하며 사시는 좋은 한 주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결국 결론은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벨탑의 언어와 같이 본래에는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썼는데,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자기 이름을 자꾸 내세우려고 하고, 도시화를 만들 듯이 집단화를 해서, 악한 일을 도모하면 끝내는 마음이 통하지도 않고, 말도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산이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셔서 흐트려 놓으십니다. ‘너희들로써는 내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준 것은 노아 시대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한 것인데, 왜 과거의 역사를 다시 밟으려 하느냐? 끊어야 할 텐데, 노아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라. 노아 이전의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들이 내 영역을 침범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고, 도시처럼 모여들어서 힘을 기르려하고, 그 힘을 길러서 자기들끼리 분쟁하다가 깨진 것 아니냐. 죄만 가득한 것 아니냐. 왜 너희가 다시 과거의 전철을 밟으려고 하느냐.’ 하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정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인간적으로는 실패한 자고 비겁한 자고 알몸으로 도망가는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이 모여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하나님 이제 우리가 생각해보니까 잘못했습니다. 예수님 살아계실 때,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는데 그 뜻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주님이 나와 한시도 깨어있을 수 없느냐고 하실 때, 그 주님의 고독을 이제 우리가 이해합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제 부터는 예수님을 잘 믿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 생각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이제는 옛날과 다르게 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내세울게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만 영광 받으시옵소서.’ 그랬더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더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같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는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이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반복하지 아니하고, 과거의 전철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그래서 노아시대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배신하고, 아프게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다른 말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펼쳐질 복음전도의 세상, 세계 선교의 세상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주일에 여러분에게 간절히 축복합니다. 여러분 주일에 오실 때마다 은혜 받으시길 바라고, 속회와 선교회로 모일 때마다 기도하시길 바라고, 그리고 이번 부흥회에도 많이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교회에서 부흥회 하는데 와서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우리 상동교회 주인으로 부흥회에 참석하십시오. 헌금도 하고,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이렇게 구하세요. “주님 내가 성령받기를 원합니다. 주님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원합니다. 내 말이 달라지길 원합니다. 내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다른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랬더니 유럽에서 온 사람들도 알아들었습니다. 터키에서 온 사람들도, 이라크에서 온 사람들도,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도 알아들었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한 이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이 세상에 함께 참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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