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의 은혜로]
(사도행전 15장 1절~21절)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사랑하는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는 대강절, 대림절, 강림절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력으로는 당회를 섬기는 주일입니다.
목사는 늘 고뇌합니다만 요즘 저는 더 깊은 고뇌를 합니다. 매주 토요일 밤이면 주일 설교 때문에 고뇌가 깊어 갑니다. 아주 평범한 진리이지만, 제가 설교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단 한마디도 설교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역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는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마디의 설교도 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성령의 교통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1. 예수님을 기다리는 교회
강림절과 당회! 예수님을 기다리는 강림절기의 첫 주일에 모이는 당회! 설교를 준비하면서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당회, 예수님이 오실 때를 준비하는 당회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강림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강림절은 예수님의 오셨음을 기념하고, 예수님의 오실 것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강림절에는 교회력의 시작으로 네 개의 촛불을 켭니다. 첫 째주일에는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 둘 째 주일에는 회개와 빛의 촛불, 셋 째주에는 사랑과 나눔의 촛불, 넷 째 주에는 만남과 화해의 촛불을 켭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교회와 성도는 기다림의 소망, 회개의 빛, 사랑과 나눔, 만남과 화해의 촛불을 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올 강림절에는 에수님을 기다리는 거룩한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강림절의 말씀을 몇 개 소개해드립니다.
1) 시편 80:1~7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소산님에둣에 맞춘 노래
1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2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5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6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2) 이사야 64:1~9
3)
고린도전서 1:3~9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4) 마가복음 13:24~37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9-31; 눅 21:25-28)
24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 비유에서 배울 교훈(마 24:32-44; 눅 21:29-33)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2. 처음 교회의 탄생
저는 사도행전 15장을 자주 묵상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가끔 설교를 합니다. 또 양해도 구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다시 설교하더라도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의 탄생장'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은 교회의 탄생장입니다. 교회의 시작은 어디일까요? 사도행전 15장을 교회의 탄생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신학자들이 제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은 조직적인 교회, 그리고 총회가 있었던 교회, 그리고 사도와 장로들이라고 하는 직책이 완전히 자리를 잡고 그들이 회의를 통하여 교회를 이끌어갔던 조직적인 가시적 교회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을 제 1회 총회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입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의 마가의 다락방을 교회의 탄생장으로 볼 수 있고,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의 고백을 탄생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세례를 탄생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출애굽기 25장 이후의 성막이나 창세기 6장의 노아의 방주를 탄생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교회는 그 모든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은 그런 뿌리들로 부터 피어난 꽃입니다. 흔히 '만개한다'는 말을 쓰지요. 꽃이 활짝 피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은 교회의 탄생이 만개한 성경입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 궁금하신 분들은 집에서 사도행전 15장을 깊이 묵상해보시면 깊은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처음 모습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강림절과 당회를 맞이해서 보게 되는 것은 다툼과 변론을 해결한 은혜입니다.
처음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가 흔히 초대교회라고 하는 처음 교회는 정말 완성된 교회였을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가시적인 교회의 모습은 완벽했는가? 완벽했다면 무엇이 그렇게 했는가? 처음 교회에 대한 관심이 깊습니다.결론부터 말하지만 처음 교회 흔히 초대교회라고 부르는 처음 교회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은혜스러운 교회였습니다. 와벽하지는 않지만 은혜스러운 교회가 처음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의 교회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할례문제를 두고 극심한 다툼과 변론이 있었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행15:1~2)
문제의 쟁점은 구원론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나? 유대로 부터 내려온 사람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과 바나바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에게도 세례를 베풀며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나 다 소용이 없다고 단정하며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강조합니다.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라디아서 5:1~5)
바울은 할례문제를 구원의 본질로 보지 않았습니다. 할례도 무할례도 다 효력이 없고 오직 사람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임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할례를 받지 않게 했습니다. (갈2:3), 바울은 할례자였던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11~21)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세례를 받은 교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중에 유대로부터 할례자들이 오니까 그들을 신경써서 식사를 마치지도 않은 채 일어나 버린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례를 받은 같은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식사 자리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사실에 대하여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는 할례문제로 인하여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다. 오직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이 갈라디아서 2장 6절은 그리스도 안에 자유를 선포한 위대한 성경구절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서 바울은 선포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다.” 만약 모세의 법을 따라서 할례를 고수한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헛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당신이 모세의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내가 무엇이라 이야기 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식사를 하다가 유대로부터 온 할례자들이 두려워서 식사 자리를 일어서는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게 만든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효력이 없는 할례나 무할례를 가지고 다툼과 변론을 일삼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사실과 우리의 구원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습니다.
3, "주 예수의 은혜로"
오늘 제가 준비한 말씀의 제목은 "주 예수의 은혜로"입니다. 처음 교회는 "주 예수의 은혜로"를 선포함으로 다툼과 변론을 해결했습니다. 화합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다툼과 변론이 있었던 교회가 처음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 처음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일치를 선포합니다. 그 일치는 완벽한 하나됨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할례로 통일을 하거나, 무할례로 통일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문제는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교회는 지혜로운 선택을 합니다. 유대인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이 기막힌 선언의 중심에 ‘주 예수의 은혜로’가 있습니다. 할례와 무할례가 '주 예수의 은혜' 앞에 공존하게 된 것입니다. 합일의 일치는 아니지만 상호존중의 일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요즘 하는 말로 소통과 화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 15장의 처음교회는 바울의 신앙고백을 베드로와 야고보가 옳다고 인정함으로써, 초대교회가 비로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팔레스타인의 헤브라이즘 적인 소위 유대교적 기독교와 안디옥을 중심으로 하는 헬레니즘 적인 이방인의 교회가 손을 잡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손을 잡았던 초대교회의 연합은 둘이 완전히 하나가 된 합일의 일치가 아니고 둘을 인정하는 상호 존중 속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일어난 연합이었습니다. 처음교회는 변론과 다툼이 있었지만, 성령의 교통안에서 예수의 은혜를 앞세워 연합의 일치를 만들어 내었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사도행전 15장이 가시적인 교회의 첫 탄생장면이라고 이야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소통과 화합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동취였습니다. 미 연합감리교회의 대안으로 부상한 부활의 교회는 담임목사가 양자택일이 아닌 양자동택을 태했습니다. 아담 해밀턴 목사는 전통과 현대, 구 교인과 새 교인의 간격을 양자택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양자동택으로 선택했습니다. 양자를 다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의 화합과 일치가 이루어지고 상호존중의 연합이 이루어져서 극장에서 시작한 4명의 교우가 15,000여명의 교회로 부흥하였습니다.
다틈과 변론이 있었던 교회가 처음 교회였습니다. 완벽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학자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말을 쓰지말고 예수의 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해야 할 정도로 처음교회도 다툼과 변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교회가 가지게 된 위대한 점은 다툼과 변론을 예수의 은혜로 연합하여 하나됨을 선포한데 있습니다. 바로 주 예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은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주예수의 은혜가 중요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문제는 구원입니다. 교회는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나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곳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 나머지 비본질적인 것들은 헛된 것입니다. 그 당시의 모세의 법을 따라서 할례를 주장하던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의 태도는 그들에게는 목숨과도 같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선포합니다. “할례나 무할례나 다 소용이 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고,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다.” 문제는 구원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입니다. 아니 문제가 구원이라면, 해답은 예수의 은혜인 것입니다.
4. 은혜의 깨달음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의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를 강조하여 얻는 깨달음입니다. 다툼과 변론이 있었지만 주 예수의 은혜로 초대교회가 택한 지혜로운 결정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비본질적인 할례 문제를 상호존중으로 해결하고, 본질적인 구원의 문제를 풀어간 지혜를 묵상해야 합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처음 교회가 택한 상호존중의 소통과 화합은 주 예수의 은혜를 앞세울 때에 해결되었습니다. 처음 교회의 지도자들이 선포한 ' 주 예수의 은혜로'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1). 주 예수의 은혜가 중요함을 깨달음 것입니다.
할례는 비본질이요 은혜는 본질입니다. 우리가 절말 좋은 성도가 되려면 이 점을 평생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만이 본질입니다. 은혜를 떠나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 에수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의 은혜만 강조해야 합니다.
2). 소통과 화합은 지도자들이 주 예수의 은혜를 강조하며 서로를 존중할 때 성취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상호존중으로 소통과 화합을 이룬 지도자들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바울과 바나바는 첨예한 할례 문제를 주 예수의 은혜로 지혜롭게 해결했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모였을 때에 그 많은 사람들, 갈등으로 치닫는 다툼과 변론의 논객들을 진정시키고 , 주 예수의 은혜를 선포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다툼과 변론을 종식시키고 주 예수의 은혜의 시대를 선포했습니다.
많은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서 변론과 다툼을 할 때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합니다. 야고보가 일어나서 말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셨던 역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포합니다. “우리는 할례자의 사도로 부르셨지만, 저들은 무할례자들의 사도로 주님이 부르셨으니 우리가 저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이 메시지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포를 했습니다. “그럼으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이방인들이 교회에 와서 구원을 받는데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모세의 법을 따라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지 말고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세의 법도 지키고 세례의 법도 지키지만, 저들에게는 셰례의 법만 지켜서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자.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저들도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있으니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은혜가 아니겠느냐?” 그렇게 이 바울과 바나바와 베드로와 야고보 네 명의 걸출한 지도자들이 화합을 이룰 때에 지금의 가시적인 교회가 태어나면서 역사는 이 날을 제 1의 총회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3). 자신의 전통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에 순종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주 예수의 은혜를 선포한 초대교회는 믿음의 내려놓음이 있습니다. 예루설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베드로와 야고보는 자신들의 전통을 내려놓고 할례문제를 이방인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치적을 내려놓고 베드로와 야고보의 사도권을 인정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모세의 법을 따라서 자신의 할례를 고수하던 입장을 내려놓았던 이 내려놓음,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신흥교회여서 부흥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치적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겸손하게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시켜주기를 바라는 마음들, 이러한 마음들이 사도행전 15장의 가시적인 교회를 완성시켜가면서 내부적으로는 영 열광주의와 동방의 신비주의와 영지주의의 이단을 극복하고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박해를 극복하면서 지금의 교회의 시대를 만개시켰던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중요합니다. 오늘은 주 예수를 기다리는 강림절의 첫날, 기다림과 소망의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날 촛불을 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이 세상에 오시기를 기다렸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5장의 처음교회는 다툼과 변론이 있었지만, 상호존중을 통해서 양자택일이 아닌 양자동택의 함께하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바로 이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핵심은 구원입니다.그리고 그것은 에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할례나 무할례나 다 소용이 없지만, 오직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만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만이 교회의 구원을 일으키는 능력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와 평강을 베풀어주시고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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