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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의 교리는 바울의 언어에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에 ‘대속’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것도 비유적으로 나온다. 마가복음의 11장인가 12장인가에 나오는데, 문맥으로 보면 섬김을 위한 일반적인 것이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희생 제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서 직접적으로 대속의 교리를 찾으려면 히브리서에 있는 정도다. 교리사적으로는 언제부터 자리 잡았느냐면 어거스틴에게 책임을 돌려야 되는데 그의 잘못은 아니다. 기원후 400년 전후에서 살았는데 예수 믿은 지 6년 만에 비숍이 되었다. 갑자기 교회의 수호자가 되었고 그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쓴 도구가 바로 ‘원죄’라는 것인데, 그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가 왜 아이들까지 세례를 주냐, 어른은 죄가 많으니까 세례를 받아야 천당 간다는 것은 말이 되는데 100일도 안되어 죽은 아이가 왜 지옥을 가야하냐, 거기에서 나온 것이 ‘원죄’이다. 물론 13살밖에 안된 자신의 사생아가 죽은 것도 관련이 된다. 그래서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서 ‘명부’를 만든다. 어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옥에 간 건 아니다. 천당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중간, 연옥에 가서 잠시만 기다리면 천국에 간다. 우리가 죽어 뜨거우면 천당일 가능성이 많다. 연옥은 불로 연단하는 곳이니까. 그런데 희미하면 지옥에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거스틴이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원죄’라는 가상적인 논리이고, 유대인들은 원죄를 믿지 않는다. 인간의 타락도 믿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그렇게 넘어갔다. 중세가 되면서 안셀름이 왜 예수가 세상에 왔느냐, 라틴교부들이 법적인 면을 생각하면서 점차적으로 대속의 교리가 고정되었다.
성서는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 다 라는 것을 매우 다양하게 설명한다. 어느 것 하나에 메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큰 유형으로 보면 불교용어로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두 개의 유형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체험을 설명하는 두 가지 언어, 그렇게 보고 목회를 한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주워졌으며 선물이니까, 그러나 은총이, 장로교에서는 ‘시너지’를 최악의 죄악이라고 가르치는데 장로교인들 중에 운동권이 많다. 운동권은 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기에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인간이 구원을 공동으로 이루어나가는 시너지즘이지, 소위 단독, 하나님이 혼자서 역사한다 그런 것은 이미 아니다. 감리교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장로교에서도 옳다고 본다. 은총은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은총 때문에 인간의 책임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이거냐 저거냐 일수가 없는데, 장로교 같은 경우, 도르트문트 회의에서 high Calvinism이 선택되고 그것이 교리화 되면서 인간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겁을 냈다. 그래서 철저하게 대속론으로 갔다.
어거스틴이 비즈니스를 위해서 원죄교리를 만들었고 장로교가 알비니아니즘과 싸우다보니까 철저하게 대속론으로 나갔고, 이건 모두가 교회의 장사꾼들이 비즈니스를 위해 만든 것이다. 교단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대속의 교리를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타력적인 구원이 내 삶을 은총으로 경험하는 것이 밑바탕에 있는거다 라고, 그 점을 안다면 대속의 교리 때문에 불편함이 없을 거다.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할 이유가 없기에.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책임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지 면제해야할 이유는 전혀 없다. 사람이 자기가 할 만큼 책임을 져야 자존심이 산다. 볼테르가 천당가기 싫은 이유는 내가 내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기에 죽은 다음에 예수만나면 내가 기죽어서 못살텐데, 그곳은 천당이 아니다. 나는 그 곳에 가고 싶지 않다. 인간의 자존심을 깡그리 무너뜨리면 그건 구원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을 갈등관계로 본 것은 교회가 교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이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고 본다.
가톨릭의 역사를 보아도 자력구원 쪽을 굉장히 강조를 많이 한다. 불교의 자력구원은 아니다. 한스 큉이 칼 바르트 밑에서 쓴 논문이 장로교 칼 바르트가 말하는 ‘이신득의’와 가톨릭의 교리는 같은 거다 고 하여 절반의 파문을 받았다. 너는 신부이기는 하지만 가짜 교수다. 그래서 한스 큉 밑에서 배운 학자는 가톨릭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일리가 있다. 가톨릭에서는 은총을 말하고 그 은총이 우리를 성화시키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할 수 있게 해준다. 가톨릭에서는 ‘칭의’라고 하지 않고 ‘의화’라고 번역을 한다. justify가 justification, 실제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든다. 그래서 가톨릭 신학은 옳다고 본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면 내가 의로운 사람이 돼야지 하나님이 나를 봐줘서 의로운 사람이 아닌데도 의로운 사람으로 봐준다. 이것이 내가 배운 감리교나 장로교 개신교 전통에서 배운 ‘칭의’인데, 거기서부터 기독교들이 봐주는 것 사기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에 들어와 있다고 본다. 가톨릭 쪽의 글을 보고서야 개신교가 가톨릭과 차별화하려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혔을 때 너무 극단으로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언어와 언어를 담고 있는 밑바닥의 종교체험 그것이 뭘까를 생각해 보면 교리에 대해서 자유할 수 있다. 예수님 덕분에 내가 사는 것이 내 노력이 아니고 이 삶이 위로부터 오는 선물이다는 것은 기본이다. 이를 경험했으면 이것이 대속의 교리이다. 앞서 가신 예수님이 나의 삶, 영생인지 뭐든지 간에 삶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건 내가 닦은 것이 아니다. 선물이다. 그러니까 대속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말하는 ‘내 죄를 졌다’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건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나오는 잘못된 것이다. 아담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초등학교에만 다녀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실제 인물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놓은 죄 때문에 우리가 죽고 그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대속의 교리의 핵심인데 그런 이야기 자꾸만 하면 사람들 교회 안다닌다. 그렇지만 대속이 가르치려고 했던 ‘경험’ 그것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우리가 간직하고 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력구원’ ‘타력구원’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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