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신학(神學)/조직신학

암브로스 감독 이야기<펌글>

우순(愚巡) 2009. 3. 27. 07:40

희랍어로 ‘불멸의, 신적인’의 뜻을 지닌 성 암브로스(St. Ambrose) 감독은 340년(혹은 339년)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갈리아 지방 총독이었던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스로, 기독교인으로 태어난 명문가 출신이다. 안타깝게도 소년기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는 자식들-암브로스와 그의 형 사티루스, 누이 마르첼리나-을 데리고 로마로 가서 고위관료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게 했다.(352년)

암브로스는 정통파 신자인 프로부스(Probus) 밑에서 일하면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와 수사학자로서 크게 이름을 떨친 후 372년 32세의 나이에 리그리아, 에밀리아 두 주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이 사실은 그의 감독직의 성격을 구성하는 배경임에 틀림없다. 이때에 프로부스는 “이제 법관이기보다는 감독이라는 기분으로 정치하시오.”라는 덕담을 전했는데, 정말 그는 감독에 오르게 된다.

암브로스 총독의 공관은 북부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이탈리아 제 2의 도시였던 밀라노에 위치했는데, 그 당시 밀라노의 주교직은 아리우스파의 아욱센티우스(Auxentius)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욱센티우스는  ‘고트족의 사도’라 불리 우는 울필라(Wulfila)의 자식과도 같은 인물로 내색은 않았어도 아리우스파로 분류되는 감독이었는데, 암브로스의 총독부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자(374년), 후임자 선정 문제로 도시는 시끄러워졌다. 교회 내 회중은 서로 우위를 점하려는 정통파(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로 갈라섰으며, 일종의 소요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불온한 상태를 진정시킬 책임이 총독인 본인에게 있다고 확신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찰나, 한 어린이의 목소리가 교회 안에 울려 퍼졌다. “암브로스를 감독으로!” 신기하게도 이 말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으며 대립관계인 두 파는 동일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암브로스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교리 문답자(Catechumen)였고, 신학적 지식을 충분히 지니지 못했던 행정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지지했다. 물론 인정받던 행정가였기에 감독으로 추대되기까지 했겠지만, 그들의 계산에는 아무런 종교적 경험이 없는 총독이야말로 신학적 논쟁에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중립자로서 적합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차 그는 철저한 정통파 감독으로서 직임에 충성한다. 놀란 암브로스는 직업을 바꾸어 철학자가 되려고도, 한 밤 중에 그 도시에서 도망쳐 나오려고도 시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미 감독으로 지정해 놓고 계셨다. 여기에서 암브로스가 고위 관리직의 세상 부귀와 영화 때문에 교회 감독의 자리를 회피했다고는 볼 수 없는데, 추후 감독에 올라 보였던 활약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차라리 감독으로 선정되기까지의 절차가 법적으로 정당하지 않아서, 또는 교리 문답자의 처지였기에 주저했던 것으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저는 제가 감독으로 부름 받는데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세속에 헌신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주님]의 은혜로 저는 바로 제가 되었습니다.” 애써 감독직을 거부했음에도 시민들은 어떠한 실수라도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며 열띤 성원을 그에게 보냈고, 부근의 감독들이나 발렌티니안 1세(Valentinian Ⅰ, 364년-375년) 까지도 그를 감독으로 승인했다. 그리하여 결국 암브로스는 성직자가 되기 전에 밟아야 할 모든 절차를 8일 동안에 마치고 374년 11월 24일 세례를 받은 뒤, 12월 1일 밀라노의 감독이 되었다.

신학적 지식이 부족하였던 그는 “배우기 시작하기도 전에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하기에 배우기와 가르치기를 동시에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정통파 신학자들의 신학사상과 성경공부에 몰입하였다. 또한 자신의 재산을 -동정성을 지키기로 서약한 누이의 생계비만을 남기고는-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눠 주었고, 청빈의 생활로써 목회활동에 전념하였다.

한편, 교회 내분에 대해서는 일단 성직자 전원을 유임시키기로 하여 교회의 안정을 찾는 듯 했지만, 정통파 감독임을 서서히 드러내면서 힘써 아리우스파에 맞섰고, 그의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밀라노 근방의 교회들은 정통파 감독들로 채워져 갔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암브로스를 감독으로 지지했던 것에 후회하면서, 시종일관 감독에 반대하였다.

이 긴장감은 378년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에서 벌어진 로마와 고트족과의 싸움에서 불거졌는데, 로마군대가 대패(출정한 로마군 2/3이상을 잃고 발렌스 황제까지 전사)하는 사건이 벌어져 그 결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포로가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자, 암브로스는 교회기물을 팔아서라도 포로로 잡힌 기독교도들을 석방시키려 했다. 하지만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물을 파는 감독의 행위를 맹렬히 비난했다. 만일 다윗이 아리우스주의자였다면 분명 굶어 죽었어야 했다. 그들은 영적 신실함에서 암브로스를 비난한 것이 아니었고, 단지 정통파라는 이유에서 그랬던 것이다.

2009. 3. 27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