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화 시대 삶의 통전적 변혁을 위한 살림살이 신학을 위하여
“그 누구도 낡은 술 부대에 새 술을 보관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하면 술이 그 부대를 터뜨려, 술과 함께 술 부대가 다 못 쓰게 될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마가복음 2장22절
“종교 교리의 기초 토대들은, 그 같은 의미들을 비판하고 또한 포괄적인 우주를 향해 가장 알맞은 일반적 개념들로 표현하고자 애쓰는 하나의 합리적 형이상학 안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종종 회피되었으며,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의심받아 본 적은 없었다.” - A. N. Whitehead (철학자)
“모든 경험적 지식에는 피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토대가 있으며, 어떤 형이상학도 현실 세계의 실재reality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입증되지 못하면-그것이 경험적 표지를 지녀야만 한다는 의미이다-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다.” - 임마누엘 윌러스틴(사회학자)
“철학(형이상학)은 지금까지 신학에 철학 자체의 오류로 인하여 기독교에 해를 끼쳐왔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이 곧 철학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철학을 신학에 적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올바른 철학으로서 어떤 철학(형이상학)을 신학에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 존 캅 & 데이빗 그리핀(과정신학자)
“어떤 사람들은 인간 역사의 지평을 전부라 생각하고, 자연사의 지평이나 형이상학은 불필요하거나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인은 지금 나타나는 자연사의 지평에 눈을 감을 수도 없고 또 형이상학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이다.” - 서남동(1세대 민중신학자)
“예컨대, 새로운 민중신학은 '전태일 사건'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ㆍ사회적 상황이라는 하나의 류(類)적 상황에서 시공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발견하고, 그 보편성을 다른 모든 류(類)적 상황에 적합하도록 적용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새로운 민중신학은 ‘한국적’이라는 상황뿐만 아닌 제1세계, 제3세계, 어디에도 <적용가능>하고 <충분>할 수 있어야 한다.”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p.145.
1. 들어가며
2. 기존 민중신학에서 새로운 민중신학으로
3. 새로운 민중신학의 조직신학적 작업
4. 재신학, 기독교 다시 세우기
5. 새로운 기독교의 도래
6. 지구화 시대 일상적 삶의 변혁으로서의 하나님나라 운동
7. 나오며
1. 들어가며
이 글은 기존의 주류 서구신학에 대하여 종종 반서구신학을 표방했던 한국의 기존 민중신학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가운데 새롭게 구상된 본인의 <새로운 민중신학>에 대한 글이자 그로 인해 기존 기독교와는 어떠한 충돌과 변화를 야기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글이다. 알다시피 한국의 민중신학은 우리나라 7, 80년대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특수신학이었고 그것은 그때까지의 주류 기독교 신학의 성격과도 많이 달랐었다. 그러한 민중신학에서 우리는 이제 어떠한 비판과 반성을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21세기 <새로운 민중신학>의 성격을 논하고자 한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이 글에서는 기존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보다는 대안에 해당하는 새로운 민중신학에 대한 논의에 좀더 중점을 둘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비판적 쟁점이란 것도 결국은 기존의 것과 새로운 제안으로서 마련된 대안을 서로 비교해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 자신이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이하 ‘화새민’으로 표기)에서도 밝혀놓은 것처럼 새로운 민중신학이 기존 민중신학을 비판함에 있어서 논의의 기반으로 삼았던 기본적 테제들은 이미 자연과학 진영이나 현대 철학 분야 그리고 좀더 개명한 사회과학자들에게서는 매우 일반화된 얘기들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반면에 기존 민중신학 진영에서는 종종 터부시되거나―혹은 아예 몰랐었거나― 했던 사실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까지의 기존 민중신학은 조직신학적 작업의 기초 토대에 해당하는 철학(형이상학)과 신학의 문제가 단 한 번도 온전하게 제대로 검토되진 못했었기에 나의 고민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심하고 있는 민중신학이라는 이 신학은 도대체 그 안에 어떠한 사유의 베이스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정작 세계와 사물을 이해하는 그 기초부터가 기존 민중신학에는 부재 또는 모호했었거나 혹은 구멍 뚫린 철학 사조와 알게 모르게 손잡거나 했었다는 점이며, 바로 이 같은 점으로 인해 한국의 민중신학은 지금까지조차 부실공사를 키워만 왔었다는 얘기다. 나는 이 같은 <해석학적 베이스>에 대한 고찰이야말로 기독교 신학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기초 탐사임을 밝혀둔다.
만일 이것이 기존의 민중신학에서 제대로만 검토되었더라면 이들은 그때까지 자신들의 민중신학을 종종 <반(反)서구신학>이라고 표명했던 그 언명에서조차 매우 위대한 신학적 전환의 토대를 예감했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기존 민중신학에 드러났던 부정합성의 진원인 그 모호투성이에 대해 올곧은 관심을 두지 못한 채, 그저 시류적으로 그때그때마다의 당대 사회적 이슈들을 담론화하기에만 급급했었다. 물론 7, 80년대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이 워낙 긴급하고 절박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나로서는 그 같은 책임성을 1세대 이후의 기존 민중신학자들에게 돌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점에서 솔직히 이 같은 나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기존 민중신학자들에겐 어쩌면 매우 불편스럽거나 한편으론 껄끄러울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나는 여기서 기존의 민중신학 글들에서도 숱하게 얘기된 한국 민중신학의 역사적 태동과 전개에 대해 반복적으로 얘기할 생각은 없다.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한국의 근대화는 사실상 기층 민중의 희생을 담보로 했던 위로부터의 근대화였고, 그 과정에서 억눌리고 고난받는 민중의 발견이 이뤄짐으로서 정치ㆍ사회적인 민중신학이 형성되었다는 점은 이미 민중신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일 것이다. 당시 전태일 사건은 바로 이에 대한 가장 첨예한 민중사건이었고, 일부 소장신학자들은 바로 그 과정에서 충격을 받은 뒤 그때까지의 서구신학의 연구에 도무지 전념할 수 없을만큼 손을 놓아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고난 받는 민중현실과의 만남과 경험들을 기독교 신학에 끌어들임으로써 한국 신학의 새로운 신학적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 같은 사실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탐사를 간략하게나마 시작해보도록 하자.
2. 기존 민중신학에서 <새로운 민중신학>a New Minjung Theology으로
알다시피 기존 민중신학은 종종 자신의 정체성을 <반(反)서구신학>으로 표현하곤 했었는데, 정작 민중신학이 그토록 비난했던 그 서구신학의 실체가 뭐냐고 했을 때는 제각기 논란이 분분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대체로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관념론적 신학의 병폐를 언급했던 터라 아마도 기존의 주류 보수신학을 일컫는 게 아닌가 하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실제로 7, 80년대에도 주류 보수신학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계의 대다수는 정치ㆍ사회참여에 미온적이었을뿐더러 반공주의와 군사독재정권에 야합하기도 하는 모습들을 곧잘 보여줬었는데, 당시 1세대 민중신학자 고(故) 심원 안병무는 그러한 기존의 보수 기독교계에 대해 매우 냉소적 성향을 보여주곤 했었다. 예수를 믿되 민중 운동으로서의 예수를 믿었던 안병무는 사도신경을 거부한 기독교인이었다.
알다시피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그의 저작들에서 곧잘 “서구신학의 관념론적 병폐”라는 표현을 쓰곤 했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보는 기존 민중신학이 비난했던 그 서구신학의 병폐란, 거의 이천 년 동안 주류 보수신학 안에 지속적으로 기초되어 왔었던 그 철학적 베이스에 해당하는 <관념적 이원론>ideal dualism이 갖는 오류에서부터 그 치명성이 발현된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 관념론적 병폐는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일찍이 스며들었던 플라톤의 이원론을 비롯한 헬라철학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관념적 이원론을 오늘날 생태여성신학자들은 다른 말로 <위계적 이원론>hierarchical dualism이라고도 부른다. 예를 들면, 관념적 이원론으로서의 시각은 신/인간, 교회/세상, 내세/현세, 영혼/육체, 정신/물질, 남자/여자 등등 세계를 이원화시켜 전항을 본질로 후항을 파생적인 것으로서 내다보도록 하는 그러한 인식적 사고구조의 틀을 가지게 만든 점이 있다. 이러한 이원론으로서의 철학적 신념은 위계적인 힘의 발현을 낳게 되는데, 결국은 어느 한 쪽에 다른 한 쪽을 종속시켜 보는 그러한 구도로서의 인식 사고구조가 알게 모르게 여전히 기독교 사상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해왔었다는 얘기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대표작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서 오늘날 다른 분야의 여러 학자들도 경구처럼 인용하는 구절인 “서구 철학사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유명한 표현을 남긴 바 있는데, 마찬가지로 기독교 사상사 역시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했던 어거스틴 신학(혹은 더 일찍으로 따지면 니케아 신조에 표방된 기독교 사상)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뤄져 왔었다고 여겨진다. 적어도 지금까지 이천 년 동안 주류에 속해왔던 기존의 정통신학은 그러했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조직신학적 작업을 위해서는 철학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최신의 형이상학이 신학에 요구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선 어차피 뒤에서 논의될 새로운 기독교에서 또 다루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관념론적 서구신학을 그토록 반대하던 기존의 민중신학은 왜 90년대 이후로 점점 비판적이고 왜소하게 게토화되는 쪽으로 봉착해 간 것일까? 내가 보기엔 1세대가 전태일 사건으로부터 발견한 신학적 발견은 세계 신학사에 상당히 커다란 의미를 던져주는, 가슴 끓는 발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세대는 이에 대한 학문적 고찰이 참으로 미흡했었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7, 80년대 당시의 절박한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고 보여지기에 1세대는 그 발견에 있어서만큼은 커다란 공헌을 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1세대가 미완으로 남겨놓은 학문적 작업이 2세대에 이르면 민중신학은 맑스주의와 연관되고 있다. 기독교와 유물론의 접합을 모색했던 강원돈의 <물(物)의 신학>은 이에 대한 극명한 사례였으며, 적어도 강원돈의 <물의 신학>은 민중신학사에서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최초로 유물론적 세계관이라는 철학적 수용을 시도하고자 했던 신학적 작업으로 평가될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해 반대하는 신학자들도 있었긴 하다. 어쨌든 강원돈의 작업은 그때까지의 기존 민중신학이 담고 있었던 바를 매우 첨예하게 드러내서 보여주었다는 점에선 어쩌면 매우 정직한 작업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9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드러났었던 김진호 중심의 3세대 민중신학은 맑스주의를 넘어서 해체주의적 전략 혹은 후기구조주의에서 표방된 기제들을 민중신학의 철학적 베이스로 삼고 있다. 그의 저서들을 살펴보면 끓임없이 강조되는 신학적 용어는 결국 <반(反)신학>이요 <탈(脫)신학>이었다(예를 들면 그의 대표 저작인 『반신학의 미소』(삼인)를 보라). 이 같은 민중신학에 담긴 사유 형태는 주로 프랑스 철학 담론에 해당하는 해체주의 혹은 후기구조주의가 보여주었던 사유 형태에 가깝다. 그의 민중신학이 주로 기존의 지배담론 혹은 전통에 대한 <해체>를 부르짖고 있는 점은 언젠가 김명수 교수가 “민중신학의 해체주의적 경향”에서 내다본 것처럼 1세대 민중신학에 대한 또 다른 계승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해체주의 혹은 후기구조주의라는 철학적 사조의 한계가 결국엔 3세대 민중신학의 한계로도 이어진다는 사실을 인지해 둘 필요가 있겠다. 해체주의를 표방했던 데리다나 탈주(도주) 혹은 가로지르기 또는 -되기를 주창했던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도 자신이 맑시스트임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던 점들을 미루어 볼 때, 3세대 민중신학자들의 학문적 작업은 90년대 국내 지식인계에 불어닥친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과 관련하여 이미 예정된 학문적 행보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 이제 전체 민중신학이 세대별로 상정해 왔었던 각각의 형이상학에 대한 밑그림들을 생각해보라(‘도표1’ 참조). 왜 민중신학은 줄창 이 같은 반(反)플라톤적 철학 사조들과 친화적이었을까? 더구나 기존 민중신학이 플라톤적 관념론을 베이스로 깔고 있던 주류 서구신학에 대하여 체질적인 거부반응을 보일 정도로 <반서구신학>이었음을 감안해볼 때, 이처럼 기존 민중신학이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은연중에라도 반플라톤적 철학 사상들과의 친화적인 학문적 행보 역시 애초부터 자명한 길을 걸어간 것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즉, 내가 보기엔 그동안 기존 민중신학은 부지불식간에 걸어왔던 행보들은 이미 징후적으로 노정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 |
||
![]() |
||
바로 그래서 본인은 기존 민중신학의 한계를 그 철학적 기초 작업에서부터 새롭게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민중신학>에 대한 작업이 불가피하다고 봤던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주류 정통신학에 속해왔던 서구신학의 한계와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형성되었던 정치ㆍ사회 참여적 성격의 기존의 민중신학이라는, 이 두 양 진영을 새롭게 극복해보고자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본인의 새로운 민중신학은 반신학/탈신학이 아닌 <대안신학>Alternative Theology 또는 <재(再)신학>Re-Theology에 해당한다. 이제는 본인의 새로운 민중신학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나마 해보고자 한다.
3. 새로운 민중신학의 조직신학적 작업
새로운 민중신학이 기존의 민중신학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종종 맑스주의 진영과도 친화적일 수 있었던 유물론적 세계관이나 후기구조주의적 사유들과는 결별하고 불교와 유교를 비롯한 동양사상 및 우리나라의 동학사상 그리고 오늘날 생태여성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입각한 유기체적 세계관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기존의 서구신학과도 달라질뿐더러 기존의 민중신학과도 달라진다. 그런데 이 점에서 우리는 화이트헤드 철학에 기초한다는 영미권의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본인의 새로운 민중신학과 과정신학과는 어떠한 차이를 갖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얘기되지 않을 수 없다(화새민 185-213 참조).
아마도 가장 큰 차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성으로서의 신학의 사회변혁적 성격만큼은 오히려 기존의 민중신학의 자양분에서 끌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때 서구의 과정신학이 기존의 전통신학에 대한 책임 있는 대안으로서의 신학을 표방할 때에도 과정신학자들은 종종 사회적 억압에 대한 문제를 잘 고찰하지 않는다는 점이 얘기되곤 했었다. 이를 테면 클레어몬트 진영에 속하며 과정사상을 통한 기독교 교육을 강조했던 엘리자베스 무어(E. M. Moore) 역시 그 스스로도 과정신학에 대한 반성을 언급한 바 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서 짐작되는 바는 오래 전 서남동이 한때 과정신학자 존 캅(John B. Cobb)에게 던진 비판에서도 조금 유추해볼 수 있겠다. 즉, 1세대 민중신학자였던 서남동이 보기에 당시 서구신학자들이 서 있는 삶의 자리가 어쩔 수 없이 백인 중산층 계급을 대변하는 사회학적 자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본 것인데, 적어도 내가 알기에도 80년대까지는 서구의 과정신학자들도 주로 종교철학적 분석이나 신정론 문제를 극복하는 새로운 유신론으로서의 분석 또는 불교를 비롯한 동양사상과의 비교를 강조했던 사변적 고찰에 대체로 많이 맞춰진 점은 있었다고 본다.
알다시피 기존의 과정신학은 신론에 있어서만큼은 화이트헤드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그의 신 개념을 결국엔 수정했던 종교철학자 찰스 하츠온(Charles Hartshorne)의 수정 신관에서 비롯되었다. 과정신학 진영에선 이에 대한 논의가 매우 컸었다. 주지하다시피 찰스 하츠온은 화이트헤드의 신(God) 개념을 다소 수정하고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지향하는 새로운 민중신학의 신 개념은 과정신학의 수정 입장을 따르지 않는 보완 입장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도 둘 다 신관에 있어선 <범재신론>panentheism에 해당한다는 점에선 공통적이긴 하다.
기존 민중신학의 신 이해는 그동안 신관에 있어선 정확한 포지션을 찾지 못했었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사상은 현대 철학계에서 볼 때 과학주의와 경험주의에 기초되면서도 유일하게 유신론 사상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를 기독교 신학에 끌어들일 경우 오늘날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들과도 결코 충돌하지 않으면서 신 존재를 말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이것은 기존의 리처드 도킨슨류의 무신론 진영의 공격들을 비껴갈 수 있을뿐더러 기존의 무신론보다도 더 큰 설명력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신론 외에 인간론에 있어선 본인은 기존 민중신학의 민중론을 비판함으로서 <새로운 민중론>을 제시한 바 있다(화새민 8장). 내가 말하고자 하는 새로운 민중신학의 민중론은 기본적으로 <인간론>에 해당한다. 나는 <민중>Minjung이라는 용어에 대해 기본적으로 두 가지 함의가 있다고 본다. 첫 번째로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분열과 부조화에 놓여 있는 존재 일반에 속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민중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사회학적 지평에서의 민중도 예외일 수 없다. 이러한 차원을 나는 <보편적 일반인>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불완전성을 가질뿐더러 기본적으로 구제받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중생>衆生에 속하는 자들일 것이다.
기존 민중신학은 바로 인간에 대한 이같은 철학적 이해를 간과하다보니 종종 사회학적 민중을 신학적으로도 우상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때가 많았었다. 이른바 <‘민중’신학>이 아니라 <‘민중신’학>이라는 비판 말이다. 두 번째는 그러한 보편적 일반인들 가운데서도 사회학적 지평에서 말하는 힘의 위계에 놓여 있음으로 인해 분명한 사회적 약자로서의 민중이 있다. 나는 이를 새로운 민중론에 있어 <우선적 민중>preferential-minjung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들 우선적 생명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선적으로 입어야 하는 우선적 특혜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미 현실의 세상은 불공평하고 차별적이기에 예수는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우선적으로 더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선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라는 공평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역설적이기도 하다.
새로운 민중신학의 <그리스도론>의 경우는 아직 본격적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역사적 예수 연구 성과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보고 있는데, 나 자신은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그것은 한 사람의 인물론이 아닌 사건으로서의 예수 이해를 따른다. 이 점에서 민중신학자이자 성서학자였던 안병무의 『갈릴래아 예수』(한국신학연구소)는 한국 신학계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예수 탐구 작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말하는 민중운동으로서의 예수 이해 혹은 민중사건으로서의 예수 이해는 민중신학계에서 지금까지조차도 많은 성찰을 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어쨌거나 나 자신은 현재까지의 역사적 예수 연구 자체의 근본적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역사적 예수 탐구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고 보는 입장에 서 있기에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다양한 가설적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때 현재의 나 자신이 세우고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실험적인 가설은 원래부터 한 인물이 아닌 <다중 예수>Multitude Jesus에 서 있는 입장이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를 보는 기존의 민중신학적 성찰에다가 북미권에서 고등비평 진영에 속하는 역사적 예수 불가지론자(Jesus Agnostic)인 로버트 프라이스(R. M. Price)가 『Deconstructing Jesus』라는 책에서 굳이 내어놓고 있는 최신 가설에서 끌어온 것이기도 한데 프라이스의 연구가 아직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는 없다(헌데 놀랍게도 얼마 전 방영된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다큐프로그램에서 존 도미닉 크로산(J. D. Crossan)과 함께 그의 인터뷰 장면이 방영된 바는 있다).
여기서 국내엔 아직 낯선 이 학설을 일일이 다 소개하기란 어렵지만 지면상 간략하게만 말한다면, 원래 마가복음서가 그리고 있는 예수는 그때 당시의 지혜자 랍비로서의 예수, 묵시운동가로서의 예수, 사회변혁가로서의 예수, 시인이자 농부로서의 예수 등등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예언자 운동과 메시아 운동을 그 안에 한 명의 인물로서 마가가 서사적으로 엮어낸 것이라는 얘기다. 마가가 보는 예수 이해는 갈릴리 현장에서 시작하여 갈릴리 현장에서 부활하여 끝나는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사건으로서 집약된다고 본 것이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는 한 인물의 탄생도 없으며, 생을 마감하는 결말로서의 죽음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로 맺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에 따른 <다중 예수론>의 입장은 기존 기독론에 대하여 매우 급진적이고도 혁명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론은 예수라는 한 명의 인물론이 아닌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사건론>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사실 복음서의 인자 개념이 본래 단수가 아닌 집단으로서의 복수라는 점은 안병무의 연구를 포함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학자들도 거론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란 곧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사건의 퍼스날리티>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저마다의 예수상을 제시하였는데 내가 보기엔 이미 본래적으로 다양한 예수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신학적 성찰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신앙하는 대상의 역사적 실체인 ‘역사적 예수'란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져간,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위하여 죽어갔던 저 수많은 무명의 죽음들, 수많은 슬픔들의 이름이자 사건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이 모든 것을 ‘사건으로서의 예수’로 집약시켜 놓은 매우 놀라운 작품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예수 이해에서 볼 경우, 조직신학적 차원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의미 역시 보다 급진적으로 이해된다. 우리는 예수는 신이자 인간이라고 고백하고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통해서 우리 자신도 <신성화>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새로운 민중신학이 전망하는 예수 이해는 ‘중보자’라기보다 아포테오시스(Apotheosis : 그리스어로 '신이 되다', '신격화하다'라는 뜻의 apotheoun에서 유래, 신(神)의 위치로 승격됨을 가리키는 말)의 전형을 보여주는 가장 바람직한 사례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하겠다. 즉, 복음서의 예수는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전범으로서의 최고의 모델이라는 얘기다. 그것이 곧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사건이었다는 얘기다.
그럴 경우 <구원론>의 지평도 결국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사건 구원론>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사건 안에서 구원의 지평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마태7:21).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된다고 했을 뿐더러, 나를 믿진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사건)은 믿어라”고 말씀하셨다(요한10:33-38). 예수는 사건이다. <예수=예수가 걸어갔던 길>, 곧 하나님나라 운동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복음서의 예수가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재현될 수 있다고 본다. 안병무는 이를 <화산맥>으로 비유한 바 있다. 또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는 믿음에서 예수의 삶을 따르는 신앙으로의 전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새로운 민중신학의 조직신학적 작업에서 기존의 성령에 대한 이해 역시 좀더 그림이 명확하게 되어지는데, 나 자신은 성령을 이해할 때는 화이트헤드 사상에서 말하는 <신의 원초적 본성>God's primordial nature으로부터 오는 <최초의 주체적 지향>intial subjective aim을 떠올린다. 이 최초의 주체적 지향은 그 원천이 본래 신의 것으로서 신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것은 그 현실적 존재에게는 최고의 실현가능한 이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타자를 위해서도 최선의 것에 해당하며 궁극적으로는 현실 세계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목적에도 부합되기에 신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최초의 주체적 지향은 세계 안에 일종의 생명살림과 더 큰 성장적 질서로서의 지향이다. 그것은 화이트헤드 철학의 구도에서 보더라도 세계 안의 모든 존재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게 하는 <하나님의 숨>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나는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성서에서 말하는 성령의 기능과 너무나 유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성령의 현현으로서 이는 삶의 매순간순간마다 최초의 주체적 지향을 물리적으로 현실화하는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에 속한다. 나는 이러한 차원을 영성의 최고 단계에 해당하는 <만무>滿無, full naught라는 개념으로서 설명하고 있다(화새민 255). 그런 점에서 새로운 민중신학은 신비주의와도 맞닿아 있는 기독교 신학을 지향한다.
새로운 민중신학의 조직신학적 작업 외에 실천신학으로서의 작업도 앞으로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대체로 지금까지의 기독교 실천신학은 대체로 교회와 관련된 목회신학, 예배신학에 곧잘 맞춰져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새로운 민중신학 입장에서 보는 교회론 및 목회론, 예배론이 나와야 할 것이지만, 보다 특별한 차이는 앞으로는 기독교 수행론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내가 보는 기독교 수행론의 궁극적 목적은 맹목적 충동에 젖어 있는 보편적 일반인으로서의 라이프스타일을 벗어나 세계 안에 하나님나라를 이루고자 자각된 열망을 지녔던 예수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체득에 다름 아니다.
사실 기독교의 경우 수행론은 여타 종교에 비하면 매우 일천할 지경이다. 이웃종교인 불교만 하더라도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 간화선 등등 그 수행론이 매우 발달되어 있지만, 기독교 안에서는 가톨릭 수도사들의 수행 전통을 뺀다면 거의 전무할 정도다. 아마도 이러한 연유에는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학의 관심사가 주로 <성화>의 차원보다는 구원을 받는 <칭의>에 좀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점도 없잖아 있으리라 생각된다. 기독교 수행론에 대한 나 자신의 기본적 입장은 “영성과 영성수련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약간 언급된 바 있다. 특히 나 자신은 지구화 시대의 일상적 삶의 변혁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이 부분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끝으로 본인의 새로운 민중신학은 <우선성의 원리>principle of preference라는 것을 견지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이것은 기존 민중신학에서 곧잘 강조된 바 있던 <민중당파성>에 상응하는 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우선성의 원리>란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고통의 정도가 심하고 큰 곳일수록 우선적으로 치유하시려 한다고 보는 원리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우리의 기독교 신학이 이 같은 <우선성의 원리>를 포기하거나 간과할 때 그것은 한낱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종교적 영성이나 성서라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 그리고 우리의 예배를 비롯한 모든 종교적 장치들이 현실 세계 안의 고통 받는 약자들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들을 결여시킬 때 그것은 바로 거짓영성이요, 거짓성서해석이며, 거짓종교임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세계 안의 사례임을 우린 결코 잊어선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성의 원리는 이미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우선성의 원리가 현실적으로 실체화된 구원사건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이 철저히 약자해방의 성격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조리한 현실 세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우선성의 원리를 짐작케 한다. 사실 기존의 민중신학자들이 기존 기독교에 대해 폭로했던 <거짓보편성>도 바로 이러한 우선성의 원리가 탈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 <재신학>Re-Theology, 기독교 다시 세우기
나 자신이 기존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민중신학의 수립을 통해 깨달은 것은 <반신학>이 아니라 <재신학>의 중요성이다. 나는 기존 민중신학이 추구했던 반신학의 가치와 의미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잘못된 위계적 전통에 대한 항거였다. 하지만 기존의 전통에 대한 탈주와 반대 혹은 해체만 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무책임한 처사일 수 있잖은가. 만일 아이가 해로운 장난감을 손에 가지고 있다면 그 장난감을 빼앗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이로운 장난감을 제시해보는 것이 훨씬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바로 그런 점에서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은 기존 기독교의 전통들을 적극적으로 다시 재해석해냄으로써 보다 새롭게 제안해보고 있는, 또 다른 제안으로서의 기독교 신학이라는 <대안신학>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그 옛날에 어거스틴이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흡수하면서 자신의 기독교 신학을 형성했듯이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자신의 기독교 신학의 기초 패러다임으로서 수용했듯이, 철학을 수용하는 이러한 조직신학적 작업을 왜 오늘날이라고 해서 못할 게 무엇인가. 오늘날에는 훨씬 더 정교하고 엄밀한 첨단의 철학적 사유 체계들이 있잖은가. 내가 보기에 기존 기독교는 헬라철학의 이원론적 흔적들을 새롭게 갈아엎는 새로운 전복으로서의 조직신학적 작업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철학적 베이스가 달라짐으로서 다른 모든 것들도 함께 뒤바뀌게 된다.
오늘날 전 세계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대할 때 <고백의 언어>와 <사실의 언어>를 혼동한다. 이 혼동은 21세기 들어서도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피곤한 반복적 폐해에 해당한다. 니케아 신조(또는 ‘사도신경’을 떠올려도 좋다)를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서 이해하거나 진화론과 창조론의 충돌 사건 같은 것들은 그러한 혼동으로 인해 겪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나는 이 혼란이 단순히 서구 성서학계가 근대 모더니티를 겪으면서 전개된 바 있는 <성서비평학>의 도입으로만 해결된다고 보진 않는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저 깊은 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를 내다보는 이해의 기초부터가 달라지는 패러다임 전환을 겪어야만 온전히 바뀔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 궁극적 지평이 형이상학의 차원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포스트모던 담론까지 거치면서 기존의 형이상학이 폐기되다보니 성급히 형이상학 실재론의 종말을 선언한 진보 신학자들도 있다(Don Cuppit). 따라서 오늘날 현대 사상가들에게 신 존재는 실재적인 신 이해가 아닌 고작해야 신에 관한 담론과 동일시되기도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될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화이트헤드 철학이 갖는 형이상학 실재론은 매우 유용하다고 여겨진다.
새로운 기독교는 성서와 예수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기독교다. 나는 이를 <열린 중심주의>라고 부르고 있다(미기 363-365). 그런 점에서 새로운 기독교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가지지만 기존 기독교의 모든 유산들을 그 옛날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활개쳤던 희랍의 형이상학이 아닌 오늘날 최신의 새로운 형이상학의 프리즘으로 다시 재해석해서 재수립한다는 점에서 <새로운>이라는 형용사를 쓰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기독교>a New Christianity이자 또 다른 제안이라는 점에서 <대안 기독교>Alternative Christianity인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기독교의 입장은 적어도 2가지 대원칙을 표방하고 있다.
● <새로운 대안 기독교>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2가지 대원칙
1) 오류와 비극 앞에서는 언제나 겸허한 기독교
2)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하려는 기독교
새로운 기독교의 입장에선 그 어떤 막강 파워의 정통(orthodox)이든 전통(tradition)이든 간에 오류(error)와 비극(tragedy)에는 결코 선행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오류와 비극 앞에서는 적어도 철저히 겸허해지고자 하는 기독교이다. 만일 새롭게 제안된 이러한 기독교 역시 오류와 비극을 낳을 경우 언제든지 수정 또는 보다 더 나은 기독교를 향해 해체 가능하다. 화이트헤드의 언급처럼 “오류를 놓고 두려워하는 것은 진보의 종말이며, 진리란 오류를 보호하는 것이다. 오류는 진보를 위해 치르는 댓가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은 근대 합리성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것은 오류 앞에서는 수정 가능한 최선의 합리성일 따름이다. 이러한 합리성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로는 세계 안의 다양한 타자들과의 소통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외치는 그러한 기독교인이 될 순 없다. 신앙은 고백과 기술(description)의 차원이겠지만 신학은 그것이 왜 그러한지에 대해 해석해주는 설명(explanation)의 차원에 가깝다. 따라서 신학에서도 결국은 합리적으로 조정된 언어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때 솔직함은 신앙 성장의 출발이자 눈높이로서의 시작점에 해당한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솔직하게 나갈 수 있어야 하며, 예수에게 솔직하게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솔직함이 없다면 성장도 없다.
그리고 이 2가지 대원칙 외에 굳이 하나를 더 두고자 한다면, 3) 약자를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기독교를 넣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로선 1)과 2)의 두 가지 원칙만 가지고도 충분히 3)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본다. 알고 보면, 3)은 진리에 대한 예증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내가 말하고 싶은 새로운 대안 기독교는 저 2가지 대원칙을 지니면서 다음과 같은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을 의도하고 있다.
![]() |
||
이러한 기독교를 나는 <꿈의 기독교>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은 이천 년 전 예수의 역사적 삶을 오늘날 최신의 철학사상으로 다시금 <재보편화>하는 작업을 통해 축조되는 새로운 기독교인 것이다. 소위 말하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것도 그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지 일종의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이전의 니케아 신조나 칼케돈 신조 및 어거스틴 신학의 주요 테제들은 여전히 이어받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 지평에서의 재보편화의 작업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고 보며, 바로 그런 점에서 그 역시 한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당시에는 워낙 가톨릭이 타락해 있었기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일정 정도의 종교갱신 운동은 있었을지언정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종교개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종교분파> 사건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고 본다. 언젠가는 먼 훗날 새로운 기독교의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기독교교회사가 다시 쓰여질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내가 보는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사건 이후로는 점점 더 간격이 벌어진 시행착오의 기독교사상사이자 교회사였다고 본다.
5. 새로운 기독교의 도래
어떤 점에서 본인이 제안하고 있는 새로운 기독교 모습은 이천 년 동안 아직 단 한 번도 시행해보지도 않았었고 아직 제안된 적도 없었던 기독교다. 왜냐하면 서구철학사가 지배해왔던 낡은 형이상학의 껍질을 20세기 들어서야 겨우 탈바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기독교 시대의 도래는 이제 막 싹을 틔우려는 새로운 전환기에 와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전환의 시대는 내가 보기에 니체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하여 그동안 플라톤적 사유에 대한 반동과 노예해방 및 여권신장으로서의 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자각 및 다윈 진화론의 대두를 비롯한 자연과학의 발달 등등 새로운 발견과 가치관들이 여기저기 움트기 시작했던 19세기 때부터 서서히 진행되어 왔었으며, 20세기 초반의 과학혁명과 실증주의의 부흥 그리고 20세기 중 후반의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를 겪으면서 지구 행성은 이제 다원화된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어제의 경로를 밟고 있는 오늘의 21세기 초반 역시 여전히 그 전환기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환기에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장담하건대, 현재의 기독교가 근원적인 패러다임을 겪지 않는다면 나는 필연적으로 결국 추락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추락하는 것은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고도 생각되어지지만, 어쨌든 존 쉘비 스퐁(J. S. Spong)이라는 신학자의 말대로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 민족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예루살렘 멸망을 외쳤던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복음서 예수의 외침을 떠올리게 하는 절박한 심정의 예언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기독교 흐름을 볼 때 현대의 자연과학 진영과 소통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결국엔 퇴행할 것으로 본다. 또한 니케아 신조 같은 정통교리가 이해되지 않더라도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기독교 역시 결국엔 퇴행될 것으로 본다. 보상과 처벌의 전지전능한 절대자로서의 신 관념을 믿는 초월신론의 기독교 역시 결국엔 퇴행될 것으로 본다. 세계 안의 부조리한 현실과 첨예한 계급적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내세 천국 지향의 기독교 역시 결국엔 퇴행될 것으로 본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나누지 못하는 솔직하지 못한 기독교나 오직 하나님만 안다는 식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기독교 역시 결국엔 퇴행될 것으로 본다. 이러한 기독교들은 결국 ‘묻지마’의 마스크를 씌우고 있는 것이기에 세계 안에서 소통이 아닌 <불통스런 기독교>가 될 뿐이다. 결국엔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것이기에 점점 게토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현재 기독교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기존 기독교가 워낙 큰 건물과 땅과 재산도 보유하고 있기에 아마도 기독교가 망하는 데는 다소 긴 시일이 걸리겠지만, 기존의 보수 기독교가 제대로 변하지 않는 한 기존 기독교의 폐해에 대한 공감들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추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도 세계 안에는 무신론과 종교의 해로움에 대해 많은 공감들을 얻어내고 있는 지경이다. 이를 테면 영국의 무신론 세력들은 이전에 비해 더욱 적극적인 전도를 펴고 있으며 대학가에도 침투되고 있을 정도다. 이러한 흐름에 서 있을 경우 10년 뒤, 30년 뒤, 50년 뒤 그리고 100년 뒤의 기독교 모습은 어떠할까? 반면에 적어도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이제야 겨우 싹을 틔우고 있는 입장일 뿐이다.
나는 서구의 유럽 사회가 기존의 낡은 기독교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꼭 퇴보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한편으로 무신론 이후에도 가능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유신론적 기독교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기회의 시대의 도래라고도 평가된다. 지구화 시대의 일상적 삶을 건강하고도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몸(Mom)수행적 기독교 그리고 궁극적인 상생과 대동 세상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새로운 기독교는 현재의 서구 유럽 사회에도 충분히 통할 것이라고 나 자신은 분명하게 확신하는 바이다.
6. 지구화 시대 일상적 삶의 변혁으로서의 하나님나라 운동
관계적 지평에서 모든 존재들은 유기적으로 서로 엮여 있다. 그럴 경우 나를 포함한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차원의 통합적인 관계망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이는 곧 신(God)과 나(I)와 타자(Others)가 이미 존재론적 차원에서부터 함께 얽혀 있는 통합적 관계망에 해당하며, 나는 이러한 통합적 관계망을 <GIO(God-I-Others)관계망>GIO Relative System이라고 부른다.
이때 GIO관계망에서 볼 경우 <나>라는 존재는 그냥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GIO관계망에서 형성되고 있는 나>인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타자원인성>과 <자기원인성>을 기본적으로 함께 가지며, 관계성은 존재의 부차적 성질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존재론적인 본성에 속하고 있다. 그리고 존재는 결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과정>process로서의 존재인데, 이것을 GIO관계망에서 볼 경우 <나>라는 존재는 결국 <God과 Others의 자기화 과정>에 다름 아니다(‘내 몸의 단면도’ 참조). 물론 나는 신이 제시하는 길을 거절할 수도 있는 내적 자유도 있기에 건강하지 못한 불순종으로서의 몸을 형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끊임없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우리는 그를 버렸으나 그는 한시도 우리를 버리지 않는, 이것이 바로 신의 은총과 사랑인 것이다.
![]() |
||
내 몸의 단면도는 <단위 행태>unit attitude를 분석하는 가운데 나온 화이트헤드 사상에 대한 응용 개념이기도 하다. 내가 보는 <몸>Mom은 물리적 신체로서의 Body와는 구별되며 오히려 신체 경계까지 넘어서 우주 전체에까지 연장되어 있다. 몸은 나 자신이 전체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 그 자체로서, 내 몸이 있고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계 자체가 이미 나의 몸을 매순간마다 형성하고 있다는 얘기다.
주지하다시피 화이트헤드 사상의 구도에서 보는 하나님은 이미 과정신학에서도 얘기되듯이 매순간마다 세계 안에 끓임 없이 설득적인 사랑으로서 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신의 사랑에도 불순종하는 현실 세계의 영향을 받기에 세계와 함께 가는 동반자적인 존재요, 세계와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고난의 동반자>로서의 하나님’God as the companion who shares our suffering with us이며, 부조리한 현실 세계를 보다 더 나은 자신의 비전으로 인도하고 있는 인내어린 시인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나의 몸을 구성하는 기반이며 그러한 가운데 신과 세계는 서로 상호관계적인 지평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때 내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 삶의 행태에 있어 가장 우세한 경향을 목적적 태도를 꼽으라면 그 자신의 행복 추구일 것인데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단연 <자본 축적>의 삶으로서 드러나고 있다. 대다수의 삶은 거의 예외 없이 바로 여기에 집중된다. 이러한 삶의 태도들은 현실 세계를 다시금 재편시키는 뚜렷한 사회상의 목적 혹은 거대 이념으로 전일됨으로서 <자본주의>라는 세계 체제는 더욱 고착화되며, 이것은 또다시 세계 안의 무수한 몸의 태도들을 압도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체제는 계속적으로도 우리들의 몸 안에 내면화되어지고 있는 셈이다. 알고 보면 <맘몬>의 문제는 사실상 내 몸의 문제이기도 하다.
모든 변혁에 있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내 삶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자각>에 다름 아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을 신의 본성에 맞추지 않을 경우 우리의 몸은 맘몬이 의도하고 있는 계급 상승적 욕망에만 사로잡히게 된다. 그럴 경우 나와 타자는 영원한 헤매임 혹은 질곡의 고통을 계속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이때 하나님이 현실 세계에 대해 의도하는 바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물리적 실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내 삶의 유일무이한 기준으로서 상정하고 거기에 맞춰 매순간의 삶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나라>란 것은 <하나님-나-타자>(GIO)를 포함한 존재의 모든 목적들이 조화롭게 소통되고 있는 차원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서로의 자율적 목적들이 조화됨으로써 더 큰 자아실현의 확장들을 경험하는 차원이다. 이러한 차원의 자아실현은 곧 <자타실현>이기도 하다. 그러한 차원에 이르면 <하나님-나-타자>(GIO)는 서로의 소통에 아무런 제약이 없게 되는 것인데, 나는 이를 <GIO만족>GIO-satisfaction이라고 부른다. 나의 몸과 삶은 <GIO만족>을 추구할 때 가장 최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나 자신은 새로운 민중신학을 다른 표현으로 살림살이 신학 곧 살림신학이라도 부르는데, 내 몸의 단면도에서도 보듯이 이 지점에서 나는 신체와 세계 사회의 경계 영역에 해당하는 <생활반경>이라는 영역을 매우 중요시 여기고 싶다. 이러한 생활반경의 대표적인 사례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내 삶의 가장 가까운 <보금자리>와 <일터>를 들 수 있겠다. 생활반경은 시공간적인 친숙성이 있는 내 몸의 직접적 활동영역이다.
이때 생활 속의 이 흐름이 일정한 패턴의 구조를 반복적으로 형성할 때 우리는 이를 일컬어 흔히 <생활방식> 혹은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 자신의 기독교 신학이 의도하는 최상의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의 라이프스타일을 내 몸으로 체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독교 영성훈련의 문제는 예수의 라이프스타일을 내 몸에 체득하는 훈련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결국 예수의 삶의 일상을 오늘 우리네 일상의 삶으로서 전환해내는 그것 아니겠는가! 따라서 자신의 일상적 삶을 가꿔나가는 생활방식이란 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은 생활반경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나는 바로 이 <일상>이라는 영역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데, 실은 이 일상적 삶의 변혁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의 변혁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안의 모든 위대함들은 바로 성실한 일상적 소박함과도 깊은 연관을 지닌다.
그리고 이 생활반경의 에너지는 다시 일반 사회로부터 나오고 일반 사회로 다시금 결국 흘러들어갈 것이다. 내 몸의 단면도에서도 보듯이 의식중추→신체(직접)→생활반경(간접)→세계(간접)로 갈수록 느낌의 직접성은 점점 더 멀어진다. 이때 나 자신이 일상이라는 생활반경이 중요하다고 보는 이유에는 그것이 신체와 세계의 가장 적당한 접점 역할로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내 삶이 변화된다는 것, 내 삶이 뭔가가 상향적으로 업그레이드 된다는 이 느낌은 바로 이 일상의 변화 체험과 깊숙이 관련한다.
생각건대 종교만큼 자신의 내적 신념의 체계를 뒤흔들어 놓는 것도 없으리라 본다. 그럼으로써 종교는 그 사람의 삶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변화시키도록 만든다. 이때 우리는 그러한 신념의 체계가 적용되고 열매 맺는 그 효과들을 적절하게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일상의 변화를 통해서 우리가 믿는 종교의 위력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는 삶의 직접적 체험에 대한 간증을 통해 그 힘을 세계 안에 알려준다. 나 자신이 일상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네 기독교가 제대로 된 종교라면 바로 이 부분이 확고하게 그리고 제대로 열매 맺어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예수사건을 통해 나와 관련되고 있는 생활반경 즉, 일상적 삶의 건강한 변혁을 위한 모임이 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자기변혁과 사회변혁의 효과도 결국은 자신의 일상적 삶에서 피부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생활반경이라는 공간은 바로 그러한 부조리나 변혁의 효과들을 직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영역이라고 본다. 예컨대, 나 자신의 변혁에는 게으름이나 귀차니즘의 극복 같은 것 역시 중요하다. 동시에 또한 사회체제 변혁에 있어선 자본과 제국의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투쟁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안에서 직접적 현실로서 발견되고 드러나는 자리는 결국 자신의 <일상적 삶>이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게으름이나 귀차니즘의 경우엔 개선의 필요성에 대한 직접적 느낌을 가질 수 있겠지만, 신자유주의나 제국주의의 폐해를 개선하고자 하는 필요성에 대해선 의식적 느낌을 곧잘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 신체에서는 보다 멀어져 있는 일반적 세계 사회 영역에 그 같은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적으로는 너무나 많이 우리의 일상들과 신체들마저 일그러뜨리며 침투되고 있다는 점 또한 분명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선 기존의 3세대 민중신학자인 김진호 글의 매우 탁월한 점을 들라고 한다면, 그는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우리네 일상 속에 은폐된 폭력과 고통의 메커니즘들을 예리하게 잘 포착하여 지적해낸다는 점에 있겠다. 만일 우리가 신자유주의나 미제국주의의 폐해들마저도 뚜렷이 지적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것들이 나의 일상적 삶의 영역에 끊임없이 침투되고 있는 그 지점들을 직시할 때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공감과 설득력을 얻어낼 수 있을 걸로 본다.
이런 쪽으로 영성수련 곧 <공부>(工夫, Kung-Fu)가 고도로 발달한 사람은 바로 그 지점을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예리하게 짚어내어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통 일반인들에겐 평택 대추리 문제나 우리나라의 FTA 문제가 어쩌면 저 먼 나라의 얘기로도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눈을 뜬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의 일상들을 일그러뜨리는 생활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잘 인지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때 평택 대추리에 사는 주민들의 경우, 그들은 이미 그들의 삶의 일상에서부터 미제국주의의 폐해들을 직접적으로 겪음으로서 생존의 절박성을 그 자신의 삶의 일상에서부터 너무나 크고도 깊게 느끼고 있다고 하겠다. 공부가 발달한 고도의 영성인은 세계 전체의 사건의 흐름들을 마치 자신의 일상처럼 피부로 느끼듯 이를 몸으로 느끼고 볼 줄 아는 자라고 생각된다. 영성이 발달할수록 자신의 몸과 자아는 점점 더 전체 세계를 파악하며 품어나가게 된다.
나 자신이 추구하는 교회신앙과 신학이란 바로 이러한 삶의 일상이 새롭고 건강하게 변혁되는 체험과 효과를 맛볼 수 있는 교회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삶의 간증이 있는 기독교 신학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상의 삶을 가꿔나가는 활동, 즉 <살림살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살림>Salrim이 내게는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본인의 <새로운 민중신학>에 대한 이름붙이기를 굳이 한다면 <살림신학>Salrim Theology이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 곧 살림신학은 일상적 삶의 변혁과 그 활동에 중점을 두고자 하는 <생활신학>이기도 하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살림’이란 말뜻에는 생명을 살리는 살림이란 말뜻도 포함된다. 죽임이 아닌 살림 말이다. 뉴욕유니온신학교의 현경 교수는 자신을 <살림이스트>라고도 소개한다. 따라서 나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살림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살림살이의 살림>과 <죽임의 반대인 살림>을 의미한다. 아마 이 두 가지 의미도 본래는 하나였을 듯 싶은데, 사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를 나 자신이 새삼스럽게 떠든 것일 수도 있겠다. 기존의 주류 보수신학이 지배이데올로기와 친화적인 제국의 신학이자 <죽임의 신학>이라고 한다면, 나 자신이 추구하는 신학은 그러한 기존 기독교를 대체하려는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로서의 <살림의 신학>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그 자각인은 곧 살림이스트이자 생명살림꾼인 것이다.
나의 <살림신학>은 기존 민중신학의 포커스와 달리 자기 자신의 의식주 생활의 습관과 패턴의 문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뿐만 아니라 <가정>과 <일터>라는 삶의 기초현장을 보다 근원적으로 여기고 이를 신학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당연히 이러한 가정과 일터라는 생활반경도 전체 세계의 흐름과 함께 맞물려 있음은 말할 나위 없겠다. 따라서 살림신학은 알고 보면 지극히 지역적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지구적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성찰이 가능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는 나 자신의 기독교 신학이 결국 화이트헤드의 종합화 작업에 기인한다는 점에도 있다.
그리고 살림신학은 자신의 삶의 일상을 가꾸는 <살림살이의 신학>이기에 다분히 <여성성>을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서 지닐 수밖에 없다. 소소한 삶의 일상의 그림들과 나눔들 그리고 새로운 발견들은 섬세한 여성적 감각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아기자기한 여성적인 일들에 해당되고 있다. 여성은 자기 자신의 신체와 일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가꿀 줄 안다. 기본적으로 여성에게는 일상생활의 중요성과 가꾸기(살림)가 매우 친숙하고 자연스럽다. 앞으로의 교회신앙도 이 같은 일상성을 깊이 성찰할 때 여성성을 더욱 풍부하게 보여줄 수 있을 걸로 본다.
우리가 자기 일상의 영역에서의 상향적 변화라는 건강한 체험과 그 효과들을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느낄 때 그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으리라 본다. 이른바 더욱 <살맛>나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생명의 약동과 기운을 일상에서 체험하는 건강한 신앙, 나는 그러한 기독신앙을 명시적으로 추구하고자 한다. 세상을 <살맛>나게 산다는 그 느낌, 그 <살맛>이 바로 활력이요 생명살림의 에너지다. 살맛나는 체험의 간증이 없는 신앙은 무기력하기 십상인 거다. 그리고 그 살맛나는 삶에 깃든 성령의 기운을 일컬어 흔히 말하는 <신바람>이 아닐는지. 이것은 삶의 실제적 변화들도 없이 그저 내면적 안위로만 그치는 아편적 보수 신앙도 아니요, 어설프게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변혁으로 곧장 날아가서 사회 제도 시스템의 문제만 따져 묻는 데모꾼의 신앙도 아니다. 이 모두를 내 삶의 일상적 생활영역과 관계시켜 고찰함으로서 이를 건강하게 담아내고자 하는 <전인적 삶>으로서의 통전적 신앙이 바로 오늘날에도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바이다.
나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으로서의 <살림신학>은 기존의 주류 보수신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대안 기독교 신학으로서 그 출발은 기존의 민중신학에서 진화해 온 <새로운 민중신학>이자 제3밀레니움의 삶의 일상들을 언제나 GIO만족에 비추어 새롭게 가꾸고자 하는 <건강한 기독교 신학>이 되고자 한다.
7. 나오며
지금까지 나 자신은 기존의 서구신학에 대해 반서구신학을 표방했던 기존 민중신학으로 그리고 그러한 기존 민중신학을 새롭게 비판적으로 극복해보고자 하는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민중신학을 통해 새로운 기독교 신학을 개괄적으로 고찰해보았다. 어떤 점에서 이 글은 본인의 삶의 궤적과도 관련이 있다. 나 자신은 보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20대로 접어든 90년대 초반에 민중신학을 만나서 내 신앙의 전환을 경험한 바 있었다. 예장통합측 교단에 있다가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가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중신학에서도 결국 그 어떤 한계와 반성이 필요하다고 보았기에 나로선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래서 본인은 새로운 민중신학을 구상하게 된 것이었고 그것은 기존 민중신학에 대한 수정과 비판정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기존 기독교 신학 전반에 대한 새로운 재수정으로서의 <재신학>Re-Theology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다.
현재의 본인은 세계 안의 고등한 종교적 통찰의 순간 혹은 종교적 영성과도 맞닿아 있는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을 공부하는 가운데 있다. 국내엔 하나 뿐인 유일한 이 전공과는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에 있다. 그동안 나의 사유의 여정들은 많은 모험들을 거쳐 온 느낌이다. 다양한 사유의 모험들을 겪어서 그런지 나는 보수적인 교단시스템의 통제를 받는 신학대학교에 있기보다는 비록 가난하고 힘들고 배고프지만 좀더 자유롭게 창조적인 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현재의 재야 진영의 활동들도 참 좋다. 나는 신학적 작업이 가난한 배고픔 가운데 있을 때 약자들을 위한 우선성이라는 래디컬한 긴장도 잃지 않는다는 점을 느낀다. 좋은 글도 오히려 힘들고 배고픈 시절 가운데 있을 때 좀더 잘 나온다고도 하잖은가. 본래 <래디컬>이라는 의미도 근원적인 뿌리를 캐낸다고 할 때의 표현이었듯이, 나는 오늘 우리의 기독교 신학계 역시 삶의 힘든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을 잃지 않으면서 신학의 근원적인 뿌리부터 제대로 탐사하고 축조해보고자 하는 자각된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한 자각된 열정이야말로 현재의 힘든 어려움들도 극복하게끔 열어준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비다.
나는 그러한 자각된 열정을 갖고 부단히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를 건설하기 위한 하나님나라 운동을 오늘날 예수의 길을 함께 가려는 세계 안의 많은 신학 동지들과 함께 꿈꿔보고 싶다.
정강길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연구실장 (http://freeview.org)
'신학(神學) > 조직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창옥 교수가 들려주는 화이트헤드 이야기 (0) | 2009.05.02 |
---|---|
오영환 교수가 들려주는 화이트헤드 이야기 (0) | 2009.05.02 |
암브로스 감독 이야기<펌글> (0) | 2009.03.27 |
김광식 목사님의 "기도와 신학" -고희 기념 논문 집에 올리는 글 (0) | 2009.02.24 |
예수, 그는 우리에게 구속자인가 선생인가 (0) | 2009.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