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회는 '예수'의 홈페이지가 아닙니다.
황호용
2008. 12. 05.
‘예수’ 찾기 그만합시다!
요즘 일부 그리스도교회 개혁론자들이 인간 ‘예수’ 또는 역사적 ‘예수’ 찾기에 부심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그리스도교회가 2천년 동안이나 해온 일이라서 뭐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고 설사 ‘예수’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낸다고 해서 그 때문에 그리스도교회가 개과천선하여 새로워질 것도 아니며 여전히 ‘예수’자신과는 상관없이 학문적 성과로 끝날 것이 뻔합니다. 정작 오늘날 그리스도교회의 문제는 애초부터 그리스도교회 안에 ‘예수’가 존재하지도 않았고 ‘예수’가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과거 2천년 동안 그리스도교회 안에는 ‘예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2천년 동안에도 그리스도교회 안에 ‘예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교회는 ‘예수’찾기를 그만하고 ‘예수’선포(宣布)를 그만해야합니다. 그리스도교회가 여전히 없는 ‘예수’를 있는 것처럼 선포하는 것 즉 거짓‘예수’선포를 일삼는 일을 계속한다면 오히려 그럴수록 세상으로부터 불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회는 '예수'의 홈페이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회는 바울(paul)의 홈페이지(home page)인 것이지 '예수(jesus)'의 홈페이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회는,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이 신도(信徒)로 하여금 '그리스도(Christ)'를 숭배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든 홈페이지인 것이지 '예수'를 추종하도록 하기위하여 만든 홈페이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한 '예수'에게만 붙이는 직함(職銜/official title)으로서 인간 '예수'에게 붙이는 칭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부처(Buddha/깨달은 자)’란 ‘석가모니(샤카 족의 무니[muni=성자])’에게만 붙이는 직함으로서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tha/석가모니의 본 이름)’에게 붙이는 칭호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소위 교회개혁을 외치고 있는 성직자들과 신도 또는 그리스도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바울의 홈페이지인 그리스도교회에 들어와서 그 안에 '예수'가 없다고 불만합니다만 그리스도교회는 바울의 홈페이지이기 때문에 거기에 '예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거기는 '그리스도'만 있는 곳입니다. 홈페이지에 자기가 원하는 컨텐츠(contents)가 없으면 사이트(web site)를 닫고 나가야지 남의 홈페이지를 고치려 들면 안 되듯이 그리스도교회 안에서 '예수'를 못 찾으면 그리스도교회를 떠나야지 그리스도교회를 개혁하려한다든가 하면 안 됩니다.(절 싫으면 중 떠나는 것이지 절을 태워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남의 홈페이지를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찾는 '예수'는, '예수' 본인이나 그의 제자들이 만든 홈페이지에 들어가 봐야 있을 것인데 불행하게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교회(church)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는 교회의 개념이 없었고 '예수'와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교회라는 영상물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신전(神殿)의 연장(延長)입니다.
교회는 바울의 개념이고 바울의 머릿속에 있었던 영상물입니다. 교회는 <신전에서의 '야훼(WHYH/yahweh)'신(神) 숭배>를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신 숭배>로 바꾸어놓은 바울의 걸작입니다. 교회는 <죽은 '야훼'신과 무너진 예루살렘 신전>을 <부활한 '그리스도'신과 반석위의 교회>로 기사회생시킨 종교혁명가 바울의 위대한 업적입니다. 교회는 <배타와 전쟁의 신 '야훼'>를 <포용과 사랑의 신 '그리스도'>로 대치시키고, 아집과 오만(傲慢)의 유대민족을 세게 속의 유대민족으로 바꾸어 놓은 불세출의 종교가(宗敎家) 바울이 이루어 낸 ‘유대교의 세계화’입니다.
따라서 교회에는 오직 초월적 존재인 '그리스도'가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만든 교회에는 부활 이전(생전)의 '예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생전의 '예수'를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부활하여 '그리스도'가 되기 이전의 역사적 인물 '예수'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만입니다.
‘그리스도’는 ‘야훼’의 연장입니다.
전통적으로 종교는 초월적 존재(神)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역사적 인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종교는 '그리스도'라는 초월적 존재로부터 나온 것이며 역사적 인물 '예수'라는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생사고락을 겪는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부터는 종교가 나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어 부활하기 이전(살아생전)의 인간 '예수'의 제자들은 종교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생전의 제자들은 '예수'를 숭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역사적 인물인 ‘예수’가 부활하여 초월적 존재인 ‘그리스도’가 된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역사적 인물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tha/석가모니의 본 이름)로부터는 종교가 나올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석가모니(샤카 족의 무니[muni=성자])가 초월적 존재인 ‘부처’(Buddha=깨달은 자)가 된 후에야 비로소 종교가 나올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었던 ‘예수가’ 부활함으로써 초월적인 존재로 변화된 후 그에 대하여 칭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예수'의 영(靈/spirit)이나 혼(魂/soul)이나 귀신(鬼神/ghost) 등 '예수'의 넋을 의미하는 어떤 말에도 해당되지 않는 말이며 '예수'의 육신을 가리키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리스도'란, 생전의 육신을 가진 인간 '예수'가 죽임 당한 후 유령이나 귀신과 같은 존재로 된 것이 아니라 곧바로 초월적 존재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예수'의 영혼이나 귀신보다 위격이 높은 존재 즉 신적 존재라는 뜻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신전을 계승한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 신전에 모셔졌던 ‘야훼’신에 필적할만한 강력한 신적 권능을 지닌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경전(그리스도교의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messiah/구세주]’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바로 헬라어로 ‘그리스도(Christos)’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그리스도’를 단순히 ‘메시아’권능(權能)에 머물러 있게 둘 수가 없어서 온 신약성경을 통하여 ‘야훼’신의 현현(顯現/incarnation/동정녀탄생)으로 격상시켰으며 더 나아가 최후의 심판주로 격상시키는 등 ‘야훼’신에 버금가는 권위에까지 올려놓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야훼’의 아들로서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탄생(육화肉化/성육成肉/incarnation)한 것은 ‘예수’를 탈(脫)인간화시킨 것이며, 죽은 ‘예수’가 부활한 것은 ‘예수’를 인간으로부터 초월시킨 것이며, 예수가 최후의 심판주로 재림(再臨)하겠다고 언명한 것은 ‘예수’를 ‘야훼’와 동등한 신적 존재로 확정짓는 것으로서, 이렇게 신약성경에서의 ‘예수’에 관한 모든 설화는 ‘그리스도’의 신격화와 그 신격의 격상을 목표로 하여 일관되게 ‘예수’를 탈인간화 내지 비인격화시키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격의 격상(格上)작업은 경전적 작업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성경 밖으로 나아가 교리적 작업으로까지 이어져 마침내 ‘성자(聖子)가 성부(聖父)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Homo ousios = one Substance)’이라는 삼위일체 교리까지 도입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는 '야훼'신과 동일한 존재, 즉 '야훼'신의 또 다른 이름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야훼-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신격격상 작업과 ‘예수’에 대한 지속적인 탈인간화 내지 비인격화와 작업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그리스도'는 ‘예수’가 부활하여 된 신이 결코 아니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예수'의 연장(延長)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야훼’의 연장으로서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야훼'신이 ‘그리스도’신으로 변화한 것으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야훼’신이 ‘그리스도’신으로 이름만 바꾼 꼴이 된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가 된 '예수'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된 '야훼'를 숭배하는 종교로 된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똑 같은 신을 섬기는 똑 같은 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확실하게 유대교로 되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는 결코 바울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유대교의 일대 전환을 의도하였을지언정 결코 유대교로로 되돌아가기까지를 의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로써 소멸 직전에 처한 ‘야훼’와 율법과 유대교와 유대민족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는 바울의 초대교회를 펼친 웅지(雄志)가 완성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야훼'신과 폐기된 율법과 소멸해가는 유대교와 암담한 유대민족 등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던 유대민족주의자 바울이 '야훼'신과 '예수'를 연결시킴으로써 탄생시킨 새로운 신(神)입니다. 이 새로운 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울은 ‘야훼’신과 율법과 유대교와 그리고 유대 민족의 문제까지 모두를 일거에 장쾌하게 해결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 죽임 이전의 '예수'를 전혀 본적도 없고 극히 적대적이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순간적으로 부딪친 '예수'체험은, 바울이 ‘예수’ 그분 자체를 만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라는 아이콘(icon/엄청난 내용을 내포한 상징)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시킬 해답을 얻는 유레카(Eureka)의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신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순간, 즉 '예수'가 부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깨달음의 순간이요, 새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대한 역사적 순간은 이후의 삼위일체(三位一體/the Trinity)교리의 승인으로 인하여 엉뚱하게도 '야훼'신이 부활하는 순간이요, 율법이 부활하는 순간이요, 유대교가 부활하는 순간으로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바울의 깨달음으로 인하여 ‘야훼’신을 지양하고 그 대신으로 ‘그리스도’신이 탄생되었던 순간이 삼위일체 교리의 승인으로 인하여 ‘야훼’신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는 순간으로 왜곡되고 말았으며,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드디어 완성되었던 율법이 다시 그 이전의 폐기되어야할 불완전한 율법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으며, 신흥종교(그리스도교)로 재탄생했던 유대교가 역사적 퇴물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순간으로 왜곡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최초 바울의 '그리스도'신은 ‘야훼’신을 지양(止揚)한 신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야훼’신이 인류와 상관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려온 신, 소위 초월한 신이라고 한다면 바울의 ‘그리스도’신은 인류를 바탕으로 하고 인간을 뿌리로 하며 나아가 인간 스스로가 화(化)해서 된 신, 즉 인간적인 신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 ‘야훼’는 도대체 인간들과는 이질적이고 인간 차별이 극심하고 전쟁밖에 모르는 잔인한 신이었습니다. 말로는 인간을 사랑한다지만 그가 제시한 율법(경전)은 몰(沒)인간적이고 배타적이어서 극히 비(非)공동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화(化)해서 된 신 ‘그리스도’는 오직 사랑일 뿐이며 어떠한 악인이라도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 때까지 회개하도록 기다리는 신이었습니다.
바울의 ‘그리스도’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적세계(4차원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곳을 벗어나 인간이 존재하는 현실세계(3차원의 세계?)로 들어온 전혀 새롭고 참신한 신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출현한 이후 바울의 입에서 ‘야훼’란 이름이 발언된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가 삼위일체교리를 통하여 ‘야훼’와 동일 본질이 됨으로써 결국 이름만 바꾼 ‘야훼’신으로 된 것입니다.
로마시대 정치적 목적인 종교회의를 통해서 소위 투표로 진리를 결정하였는데 그 때 그들은 [성부(야훼)와 성자(예수)는 동일본질이다.]라는 명제를 채택했습니다. 그로써 ‘그리스도’는 곧 ‘야훼’신으로 된 것입니다. 그들은 당장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수 천 년 만에 종교혁명을 통하여 유대교를 본질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인류적 희망을 펼쳐낸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단 한 번의 극히 짧은 투표행위로써(그나마도 부정한 방법으로) 유대교로 환원시켜버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마치 끈 떨어진 연(鳶/kite)처럼 ‘예수’와의 인연이 끊어지고 자꾸만 멀어져서 그리스도교는 마침내 ‘야훼’신으로만 가득 채워진 유대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 온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 ‘예수’를 연결하려고 2천 년 간 노력했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지 않는 한 그것들은 모두 현학적인 언어유희로 끝날 수밖에 없었고 오늘까지도 그리스도교 안에는 여전히 ‘예수’는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야훼’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된 ‘야훼’신, 즉 ‘야훼그리스도’에게 신접(神接/성령체험/영성수련)하여 신통력을 얻고자 교회를 찾아온 신도에게 교회는 엉뚱하게도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생전의 역사적 인물 '예수'를 들이대면서 그를 따르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도적인 기만행위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교회도 ‘예수’와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는 역사적 인물 '예수' 그분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신(神)이 되어 교회 안에서 숭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가 일방적으로, '예수'가 신이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중국 삼국지의 ‘관 우’와 우리나라 고려의 ‘최 영’장군이, 자신들의 영정(影幀)이 무속종교의 법당(法堂/신전)에 걸려서 숭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무속종교인들이 일방적으로 ‘관 우’와 ‘최 영’ 장군을 신령으로 숭배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불교 사찰의 불상 역시 역사적 인물 ‘고타마 싯다르타’ 그분 그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동상이나 석상이 절에 놓여서 숭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불교신도가 일방적으로 불상을 만들어 놓고 그를 숭배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사찰을 지어놓고서 말입니다.)
교회를 펼쳐낸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와 그 교리는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이 ‘예수’를 신격(神格)화시키면서 체계화한 것이며 그로써 유대교를 극복하려한 것입니다. '예수' 자신이 교리를 체계화하거나 '예수' 자신이 유대교를 개혁해서 그리스도교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는 종교(유대교)를 거부하고 혁파한 사람인데 바울이 그를 다시 종교 안에 가두어버리고 대신 ‘그리스도’를 내놓은 것입니다.
결국 교회에 나오는 신도는, 바울과 삼위일체론자들이 체계화한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 즉 바울과 삼위일체론자의 추종자들이지 ‘예수’의 추종자들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는 신도는 바울의 신앙을 본받아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야훼’신, 즉 ‘야훼-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바울의 추종자들인 것이지, '예수'가 부활해서 된 신 즉 ‘예수-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자들이 아니며, 인간 '예수'를 숭배하는 자들은 더욱 아니며, 더구나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 신도로 하여금, 이처럼 바울이 세운 교회를 '예수'가 세운 교회로 착각하게 만들고, '야훼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신도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숭배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인간 바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인간 '예수'의 추종자인줄로 착각하게 만들어서, 신도를 정체성의 혼란에 빠뜨리는 등 지극히 기만적인 선교로 겨우 교회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도는 ‘예수’에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
성직자들과 신도 또는 그리스도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교회가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고 불만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교회는 '야훼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종교단체이지 역사적 인물 '예수'를 추종(追從)하는 사회단체가 아닙니다. 또한 교회가 몰사회적이고 신비주의적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많지만 교회는 '야훼그리스도'에게 신접하려고 모인 사람들의 종교적 단체이지 '예수'의 사상을 연구한다든가 그 사상을 실천하려고 모인 사람들의 사회적 단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무속신앙인들이 법당에 삼국지의 ‘관 우’의 영정 혹은 고려 ‘최 영’장군의 영정 등을 걸어 놓은 것이, ‘관 우’신접(神接) 또는 ‘최 영’신접을 위한 것이지 ‘관 우’의 무예를 익히거나 ‘최 영’장군의 충성심을 배우려고 모셔놓은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무속신앙인들에게 그런 의무 같은 것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도에게도 '예수'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열사가 되어야한다거나 할 의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신도는 ‘예수’를 닮을 수 없습니다.
종교의 이념(理念/ideology-종교에서는 이를 敎義/敎理/dogma라고 함)은 경전의 교설(敎說/종교에서는 이를 진리라고 함)을 기본 자료로 하여 형성된 것입니다. 일반사회나 정치사회에서처럼 종교에서도 이념이 진리를 해석하는 틀이 되고 관점이 됩니다. 따라서 종교에서는 교리(교의)에 따라 진리가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똑같은 유대교 경전이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그 경전에서 예언된 메시아(그리스도/구세주)가 이미 오셨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유대교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경전을 삼위일체 교리에 입각한 그리스도구원관(觀)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교 경전을 인류 구원의 약속(約束)의 책이라는 의미로 ‘구(舊)약(約)성경’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에서는 유대교 경전(구약성경)의 ‘야훼’신과 신약성경의 ‘예수’와 그리고 두 경전에서 다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 등 셋(삼위/三位)의 관계를 ‘동일한 본질’이라는 일사불란한 관계로 정립(定立)함으로써 두 경전을 관통해서 흐르는 신의 섭리(攝理)를, <‘야훼’신 자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예수’로 태어났으며(초림/初臨) 그가 인간의 죄 값을 대신하여 십자가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여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 구원을 위한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최종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재림/再臨).>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그리스도교 신도는 신약성경에서 인간 ‘예수’를 만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로 보면 성경에 나오는 ‘예수’ 이야기는 탄생이전부터 죽음이후까지 신에 의해 기획되고 신에 의해 연출된 시나리오(scenario)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참혹한 십자가죽임의 고통과 절대비폭력의 인내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실천으로 사랑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신(神)이 치르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할진데 신도가 그로부터 감동받을 수 있는 여지는 아무래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교리를 통하여 신약성경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원죄 때문이라며 그 앞에서의 회개(悔改)를 강요하니까 억지 눈물을 흘리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교회 안에서 결코 신도를 감동시킬 수가 없고 신도가 닮아가는 모범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도의 강력한 신앙적 모범은 오직 구약성경의 위인열전에 나오는 인물들로서 이를테면 모세나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야곱 등등 신통력을 얻어 대정복자가 되거나 기적적으로 대성공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이 처음 종교를 찾을 때는 신통력을 얻어 소원성취하려는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 유대교적 인물들을 모델로 한 노골적인 부추김과 무한 반복되는 기복(祈福)설교는 신도로 하여금 강렬한 열망으로 이들의 유대교적 모범을 따라가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과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도의 원초적 욕구가 기복이고 교회의 생존전략이 기복인 상황에서 교회가 국가나 민족 또는 무차별적인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예수’닮은 신앙인을 배출하기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물게 겸손한 신자가 배출되지만 교회가 신자의 헌신 용도를 그리스도교 선교라는 종교적 한계 안에 강력히 국한시킴으로써 결국 ‘예수’닮은 품성은 사회변화에는 아무 쓸모없는 우물안개구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도를 진정한 의미의 ‘예수’의 제자(추종자)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신도중에서 온 국민이 추모하는 열사(烈士)가 나왔을 경우에도 그를 살신성인한 ‘예수’의 제자로서 거양(擧揚)하고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자살행위라고 악의적으로 폄훼(貶毁)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에 위배된다는 식으로 천박(淺薄)한 교설을 늘어놓고 있으며, 이는 과거 왜정시대 삼일독립만세 운동 이후 교회가 민족독립운동을 외면 또는 배척한 전례를 이어받는 것으로서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교회의 감추어졌던 반민족적 반사회적 정체성을 어쩔 수 없이 백일하에 드러내고야 마는 안타까운 행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열사를 폄훼하거나 독립운동 또는 민주화운동을 배척하는 것 등은 몇몇 교회의 돌출적 작태가 아니라 숨겨진 교회의 본질적 정체성에 지극히 합치하는 행태로서 교회의 일반적인 행태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例)로서 최근 그리스도교회 성직자들이 사학재단의 투명한 재정운영을 집단적으로 반대하여 극한투쟁을 불사하는 행태나 불교에서 승려들이 관광입장료수입 많은 사찰을 장악하기 위하여 깡패조직을 동원하는 등의 추악한 행태 등은, 종교의 은폐되었던 배금주의[拜金主義/mammonism]적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서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신도는 ‘예수’의 모범이나 가르침을 전혀 따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끊임없이 ‘예수’를 선포(宣布)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호도(糊塗)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교회를 ‘예수’가 창립 창건한 것처럼, 마치 교회 안에는 항상 ‘예수’가 있는 것처럼, 마치 교회가 ‘예수’의 모범을 실천하는 단체인 것처럼, 그리하여 교회가 결코 반민족적 반사회적 단체가 아닌 것처럼, 마치 교회가 배금주의가 아닌 구제단체인 것처럼 위선(僞善)하는 것이요 그럼으로써 교회가 사회로부터 그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기획되고 설계된 기만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희망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전쟁광인 미국의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이나 재벌밖에 모르는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 같은 신앙인들을 배출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들은 ‘예수’닮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교경전(구약성경)의 위인열전에 오른 인물들에 비견할 만큼 뛰어나게 대정복자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배출할 수 있는 인물의 극적인 예(例)가 아니라 극명(克明)한 예이며, 그리스도교가 배출할 수 있는 인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입니다. 이제는 교회에 대한 희망 즉 종교에 대한 희망을 버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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