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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神學)/조직신학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

우순(愚巡) 2007. 8. 3.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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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진보와 보수 어디까지 왔나?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 정말 다른가



김두식 교수(경북대 법학과, 전 한동대)


1.

몇 해 전, 대체로 진보적이라는 평을 듣는 신문사의 젊은 기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동석했던 기자들 중에는 기윤실이 한창 '음란물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그걸 취재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보수 기독교의 행보 쪽으로 화제가 흘러가게 되었지요. 역시 진보적 매체의 기자들이라, 보수 기독교의 그런 '꽉 막힌' 모습에 대해 매우 냉소적인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꼴통 보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혹시 교회개혁 운동하는 분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대형교회들의 이른바 '세습'이 한창 문제되던 시기라, 짐작했던 대로 기자들도 교회개혁 운동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이 그런 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까 한심하다고 하던, 음란물 반대 운동하던 분들 있잖아요? 그 분들이나 교회개혁 운동하는 분들이나 모두 기윤실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분들입니다. 정확히 겹치지는 않지만, 양쪽에 모두 관여하는 분들도 많이 있지요."


기자들은 모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의아해 했습니다. 한 쪽(음란물과 싸우는 사람들)은 '꼴통'이고, 다른 한 쪽(교회개혁운동하는 사람들)은 '정의의 편'인데 어떻게 같은 사람들이 그 두 가지 일에 모두 관여할 수 있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저도 그 분들과 같은 부류의 꼴통이고, 그 분들 대부분과 아주 친하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기자가 진지하게 묻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교수님을 뵈면 꼭 한 번 여쭙고 싶었습니다. 교수님은 이런저런 글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셨는데요, 정말 하나님을 믿으시나요?" 처음에는 그 질문의 의도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저에게 기자가 덧붙였습니다. "다른 의미는 아니구요. 제가 뵙기에 교수님은 멀쩡한 분이신데, 그런 분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너무 어색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한참이 지난 지금도 저는 그 질문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꽤 알려진 계간지 편집에 함께 관여하던 교수님으로부터도 똑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질문하는 분들 입장에서는 칭찬으로 한 말 같기도 한데, 저로서는 부담이 많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멀쩡해 보인다는 것이 과연 자랑할 만한 일인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상'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이루고, 때로는 그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어떻게 정상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지나치게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는 이후 저의 신앙을 다시 되돌아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보수와 진보에 관한 <기독교사상>의 원고청탁은 그 날 기자들의 질문만큼이나 저를 난감하게 합니다. 우선 제가 과연 진보냐, 보수냐 하는 간단한 질문에조차 저는 쉽게 답변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진보와 보수가 신학적 입장을 말하는 것인지 정치적 입장을 말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합니다. 다원화된 세상에서 진보, 보수가 획일적으로 규정될 수도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사안에 따라 입장을 달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념적 지형이라는 것이 딱딱 떨어지는 구획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광범위한 스펙트럼 속의 어느 지점일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음란물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인 사람들이 교회개혁 문제에 있어서는 진보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 그 한 예입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구분은 그만큼 상대적이고 모호한 것입니다. 보수-진보 구분의 그런 한계를 알면서도 여전히 같은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제 입장을 이해하고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수 교회에서 성장한 저의 배경 때문에, 진보 쪽 이야기를 하면서도 막상 에큐메니컬 그룹의 움직임에 대해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음도 미리 밝힙니다.


2.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 지형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노무현 정권(길게 보면 김대중 정권) 이후 보수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변화를 먼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과 교회를 다닌 저 같은 사람에게 최근 보수 기독교의 '어르신'들이 보여주고 있는 변화는 쉽게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랍습니다.


매일같이 대자보를 통해 안기부, 보안사, 경찰 대공분실, 부천경찰서 등의 끔찍한 인권 유린 사례를 접하던 저의 대학 시절, 목사님들은 언제 어디서나 로마서 13장이라는 칼과 방패를 들고 나와 청년 학생들의 입을 가로막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무참하게 훼손되는 상황에서도 목사님들이 제시한 유일한 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말씀뿐이었지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도 목사님들께는 의심할 바 없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권세'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는 협박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3장은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청년들에게 정말 끔찍할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 장벽이었습니다. 성경말씀을 콘텍스트 속에서 해석하는 방법을 교회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당시 로마서 13장 말씀을 가르치면서, 그 배경이 되는 로마서 12장을 언급하신 목사님은 (적어도 제 기억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장황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상식적인 선에서 언급하자면, 로마서는 로마 제국에 의해 박해받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편지였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왜 박해를 받았을까요? 로마 제국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복종했다면 그들이 박해를 받았을 리가 있나요? 물론 그렇지 않지요. 다 알다시피 기독교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했고, 그 결과 국가의 기본을 흔드는 정치적 범죄자로 처벌받았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병역이 원래 세습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군대에 가면 당연히 우상숭배와 살육에 동참해야 했으므로 기독교인들은 군대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교회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진한 신앙인들이 정치범으로 처벌받는 아이러니 속에서 사도 바울은 권위에의 복종을 가르칩니다. 이 복종이 무조건적인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국가에 대해 언제나 '조건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우상숭배나 살인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하려고 할 때, 기독교인들은 그 요구에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국가에 대한 불복종을 이유로 일상적 박해에 시달리던 교회 공동체를 향해 사도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면합니다. 바로 그 말씀에 뒤이어 등장하는 것이 로마서 13장 1절 말씀입니다.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교회를 지속적으로 박해하던 거대한 악(로마제국)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하나의 방법으로 '복종'의 윤리가 제시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가르친 복종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1970-1980년대 내내 부패한 폭력정권을 축복한 대가로 부, 권력, 명예를 획득하던 그런 복종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국가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치며 모든 사회문제에 대해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보수 교회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사회문제는 '성문제'였습니다. 주된 싸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낙태였고, 대표적인 사회악으로 거론되는 것은 동성애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 부패한 권력의 전횡, 폭력의 일상화와 대량학살, 환경 파괴라고 하는 거듭되는 '불의'앞에 침묵했던 교회 지도자들일수록 개인적 음란의 문제에 집착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지도자들의 성윤리나 생활이 비기독교인들보다 특별히 나은 것도 아니어서 쉬쉬 하는 가운데 스캔들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 세대는 성적인 범죄만이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불의인 줄 알고 자랐습니다. 기독교 윤리를 개인의 성적 순결 유지 차원으로 제한했던 지도자들은 막상 3S 정책으로 시민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으려는 타락한 정권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국가권력은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그저 복종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이 무조건적인 순종에 대한 반성일까요? 선거에 의해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국가권력이 등장하면서 보수 교회 지도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1980년대 그렇게 자주 들어야 했던 로마서 13장 설교는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3장에 대한 목사님들의 해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해도, 그걸 들을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목사님들은 행동으로 성경해석의 변화를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나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현장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언제나 단상의 중앙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20년 전 국가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치던 바로 그 분들이 이제는 거리로 나서 가상의 '공산정권'과 투쟁하는 선봉에 나서고 있습니다. 저는 단상에 근엄한 얼굴로 앉아 계신 '그 때 그 교회 지도자'들을 볼 때마다 과연 무엇이 저 분들을 변하게 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결국 그 분들이 가르치던 권세에 대한 복종은 '극우'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복종만 의미했던 것일까요? 기독교인들은 복종해야 할 대상을 정할 때, 그 권력이 좌파인지 우파인지 먼저 판단한 다음 자기 입장을 정리해야 하나요?


국가보안법과 사학법 관련 집회에서 발견되는 것은 고립과 두려움, 그리고 적대감입니다. 그 엄청난 양의 고립과 두려움, 적대감의 바탕에는 '뭔가를 지키려고 하는 강한 의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강한 의지는 때로 착각을 불러오기도 해서,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는 기독교 정당 출범 같은 오류를 낳기도 합니다. 기독교 정당 출범식에서 태극기를 앞에 놓고 엄숙한 얼굴로 경례하는 '그 때 그 교회 지도자'들은 변함없이 보수 교회를 대표하는 분들이셨습니다. 물론 그 이후 실패한 실험에 대한 반성 같은 것은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회 문제의 범위가 낙태, 동성애에서 국가보안법과 사학법, 주한미군 철수 반대, 김정일 정권 타도 등으로 확장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가난, 평화, 환경의 문제는 '기독교 윤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평화를 예로 들어볼까요. 기독교 역사와 전통이 가르치는 전쟁에 관한 입장은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 딱 두 가지 뿐입니다. 제 정신 박힌 신학자의 입장에서 '거룩한 전쟁', '십자군' 따위를 교회 전통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상호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 이론은 모두 '전쟁은 기본적으로 악한 것이다'라는 전제 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당한 전쟁에 동의한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깔뱅, 라인홀드 니버, 폴 램지 등 어떤 신학자가 제시한 요건에 의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이 최근 미국에 의해 벌어졌습니다. <Jim Wallis, God's Politics : A New Vision for Faith and Politics in America (Harper, 2005) 108쪽 이하 참조>


그런데도 앞서 언급한 신학자들의 전통을 따르는 한국 보수 교회 지도자들 중 누구도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미 동맹의 이름 아래 파병 지지에 앞장 선 것이 보수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신학은 도대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까? 한미 동맹은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정립한 새로운 신학입니까? 빈곤, 평화, 환경의 문제를 무시하는 조지 W. 부시 스타일의 신앙이 '보수'로 이해되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3.


교회 지도자들의 이런 변신 못지않게 놀라운 점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의 보수와 진보가 세상에서 말하는 보수-진보 스펙트럼과 언제나 정확하게 일치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보수파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도 우파이며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분들입니다. 반대로 교회의 진보파들은 정치적으로도 좌파이며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치적 색깔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세대차와 똑같은 세대 간 갈등이 교회에도 존재합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교회의 진보파도 세상과 똑같은 폐지 입장이고, 사학법에 대해서는 교회의 보수파도 세상과 똑같은 반대 입장입니다. 심지어 전라도-경상도의 지역갈등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살아 있어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강남 거주 교인들은 신앙과 삶의 기반도 강남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나마 교회의 보수-진보가 세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필요한 국면마다 성경말씀을 억지로 끌어다 붙인다는 정도일 겁니다.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교회의 보수 세력은 세상의 보수 세력과 손을 잡기 시작합니다. 한때 '복음주의'라는 추상적 표현 속에 한 묶음으로 이해되었던 보수 교회 내의 청년세대와 기성세대도 서로에 대해 뚜렷한 선을 긋게 되었습니다. 보수적인 정치권과 음양으로 손을 잡은 기성세대 지도자들은 30-40대의 청년 지도자들이 당연히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리라 낙관했습니다. 그러나 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뜬 보수 교단 출신의 청장년 세대들은 보수 정당 일변도의 움직임에 도저히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 사회책임'이 떴을 때 그 움직임에 동의하지 않았던 비교적 젊은 세대들은 결국 2005년 여름 '성서한국'의 이름으로 대규모 수련회를 개최함으로써 앞선 세대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지요. 재미있는 것은 '성서한국' 대회의 구호 역시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위한 사회적 책임인가'에 있어서도 한국 교회의 보수와 진보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두 그룹 모두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보수와 진보로 갈라지고 있을 뿐입니다. 방법 면에서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라는 본질적인 이야기보다는, 기독교가 이런 정치 지형 속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면 자기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지극히 정치공학적인 담론만이 판을 칩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는 '애국'이라는 가치에 충실히 봉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의 지위와 세상 나라인 '대한민국 시민의 지위'가 서로 충돌할 때 어떤 가치가 우선되어야 하는가 따위는 논의되는 일조차 거의 없습니다. '건전한 기독교인'은 곧 '건전한 미국 시민'이라는 미국 기독교식의 세계관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까닭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신앙 양심에 기초한 병역 거부에 대해 '애국'의 이름으로 가장 강력한 반대 논리를 펴는 것도 대부분 기독교인들입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나 개신교도였던 전명운 의사 등이 애국적 동기에서 사람을 쏘아죽인 행위는 보수와 진보 양 쪽에서 모두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칭송을 받습니다. 3·1운동은 보수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기독교 사회참여의 중요한 모델로 거론됩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다??라며 남산의 신사에 올라가 고개를 숙였던 보수 교단에서도 그 부끄러운 역사는 슬쩍 감춘 채, 당시 신사참배에 거부한 소수 기독교인들의 후예임을 자처합니다. 그 점에서 한국 교회는 보수든 진보든 '조상 바꿔치기'의 공범입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분들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보수와 진보 교회 어느 쪽에서도 '국기에 대한 경례' 또는 '국기에 대한 맹세'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습니다. 1970년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다 퇴학당한 고신파 학생들의 이야기는 그저 경상도의 몇몇 교회에서 쉬쉬하며 이야기되고 있을 뿐입니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지만, 국기에 대한 경례는 그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일 뿐이라는 논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신앙의 선배들도 똑같은 논리로 남산에 가서 신사참배를 했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결국 신사는 '일본'의 신사이기 때문에 우상이고, 태극기는 '우리나라' 국기이므로 우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토론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보수와 진보를 관통하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전통은 그 누구도 도전하기 힘든 한국 교회의 굳건한 뿌리인 것입니다.


애국주의의 바탕에는 국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의존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지속적인 박해를 받고 있던 시절, 누가 자신들을 지배하는가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아닌 다른 누가 지배한다 한들, 형편이 더 나빠질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는 기독교인들에게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니라 무력에 의한 '로마의 평화'였지요. '로마의 평화'를 누리기 시작하면서 국가방위와 통치라는 새로운 '사회적 책임'이 기독교인들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통치자를 위해 기도하는 수준을 넘어 통치자와 권력을 공유하며 '더 나은 세상' 혹은 '더 높은 지위'를 향한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진입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 평화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공동체의 '존재 그 자체'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초기 기독교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제는 목숨을 건 개인적 신앙고백 없이도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기독교 체제(Christendom)'가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취급받고 때로 박해를 받기도 하는 이 새로운 시대는 기독교인들에게 오히려 최대의 위기가 되었습니다. 자기 나라의 시민권은 탄생과 함께 자동적으로 얻을 수 있지만, 원래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그렇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방과 함께 수립된 정부의 첫 지도자들이 대부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도 미국 기독교와 거의 동일하게 '사회적 책임'을 당연한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사회적 책임'은 언제나 공직 진출 등을 통한 적극적인 참여의 모델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사랑과 정의, 평화를 실천하는 '교회의 교회됨',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거룩한(구별된) 공동체의 존재'를 통해 사회에 충격을 던지는 방법이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생각은 보수 쪽에서도 진보 쪽에서도 별로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건국과 함께 벌어진 동족상잔의 참극 속에서도 교회는 평화와 사랑을 지키는 독자적인 입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저 남들과 똑같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육체적 생존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그 기나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서구 기독교 전통 속에 살아있는 그 흔한 양심적 병역거부자 하나 제대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존 스토트, 대천덕 등 한국교회에서 존경받는 서양 출신의 수없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였다는 사실은 아예 언급도 되지 않습니다. 독재정권과는 싸워도, '신성한 병역 의무'와의 싸움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conscientious objection'이라는 영어 표현의 번역에 불과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놓고 "그게 어떻게 양심적 병역거부냐, 비양심적 병역거부지"라고 반문하는 교회 지도자가 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는 진보적 인사들도 국가의 역할에 강력한 신뢰를 보낸다는 점에서는 보수 기독교인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빈곤은 여전히 국가의 책임이며, 교회는 그저 국가를 향해 예산의 확충만 요구하면 된다는 식의 진보는 적어도 교회 내에서는 진보일 수 없습니다. 빈곤은 국가의 책임이기에 앞서 교회의 책임입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모두 국가에 맡기고 국가에 대한 불변의 전폭적 신뢰를 보내는 것은, 국가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는 일종의 우상숭배입니다.


보수와 진보가 모두 국가에 대해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는 분위기 덕분에, H.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첫 번째로 얻어맞고 잊혀져간 메노나이트, 아미쉬 등 평화주의 종파들의 입장은 우리나라에서 한 번도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는 평화와 정의를 위해 헌신한 교회다운 교회의 존재를 통해 정치적으로 발언한다는 이들의 입장은 언제나 '분리주의'의 낙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수든 진보든 정치적으로 발언하는 방법은 오직 세상과 똑같은 정치 참여 방식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었고, 정치적 담론의 장에서 교회 공동체가 그 존재 자체로 발언할 일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어놓고 가신 하나님 나라의 씨앗은 교회였습니다. 예수님도 초대교회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외친 일도 없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 한다고 외칠 일도 없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자기 욕심과 하나님의 뜻이 뒤죽박죽 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세상 속의 교회'가 되라는 사명을 저버리고 '끝없는 상향성의 추구'라는 세상의 논리에 매몰되어, 이제는 완전히 '교회 속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 제국을 향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라고 데모를 하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내 가르침에 바탕을 둔 정당을 만들어 복지와 통일에 우선권을 두어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복지국가가 아니라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국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기 때문에, 반대로 국가가 우리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살인을 하라고 요구하고, 아침 애국조회 때면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 명령 앞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의 보수와 진보는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4.


애국적이고, 국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정치를 통해 정치적 발언을 하려고 하고,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보수든 진보든 우리는 모두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국가-교회' 모델을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기독교 국가'를 만들자는 목표가 공공연히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각자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모양은 조금씩 달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하나님 나라의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도전하는 세력(예컨대 공산주의)과 싸우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데에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 내에 민주주의는 없다"며 일인 독재체제를 구축한 교회 지도자일수록, 시청 앞 집회에 가서는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김정일 공산도당과의 싸움에 앞장서는 것도 아이러니입니다.


이런 애국주의의 열풍 속에서, 진보든 보수든 우리 기독교인들은 교회-국가의 관계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상으로 삼는 자유민주주의조차도 인간 세상에서 가장 덜 나쁜 체제일 뿐,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면 우리가 가진 두 시민권 사이에 충돌이 없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초대교회 교인들과 우리들의 삶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공포와 불안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권력도 돈도 없었기 때문에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일도 없었습니다. 가난과 박해 속에 그들은 언제나 자유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부딪히는 가장 큰 고통은 아마도 '암' 같은 질병일 것입니다. 그 밖에는 가난과 진학 실패, 사업 실패가 있을 수 있겠지요. 국가와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므로 당연한 것 아니겠냐고 하시겠지요.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초대교회와 우리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예수님 시대의 로마 제국과 지금의 미국 제국은 정말 다릅니까? 교회는 초기 기독교 시절과 완전히 똑같은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제국이 알아서 변화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주었습니까?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과 로마제국의 유럽 정벌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누리는 이 평안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제국이 변했기 때문입니까, 우리 교회가 변했기 때문입니까? 교회가 사랑과 평화로 세상을 이긴 것입니까, 세상의 논리가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를 부패케 한 것입니까?


저는 이 땅에 '진짜 보수'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보수는 국가 권력의 절대화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신사참배에 반대한 선배 신앙인들을 따라 애국주의의 덫을 벗어버린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나 맹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을 '교회의 예표'로 보지 않고, '대한민국의 모델'로 삼는 이상한 성경해석도 그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성문제보다 훨씬 더 자주 언급되고 있는 빈곤, 평화, 환경의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자들을 위한 복음을 날조하는 '강남' 기독교의 틀을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32장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국가 '안보(security)'는 공의의 열매이며, 공의는 가난한 자를 돌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거나, 힘 있는 나라에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보는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어주고 내부의 빈곤을 퇴치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진짜 진보'도 많아졌으면 합니다. 진짜 진보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이어받아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굳이 국가권력의 힘을 빌지 않고도 교회의 힘으로 일단 뭔가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국가를 향해 뭔가를 하라고 열심히 외치기 전에 먼저 자기 것을 내어놓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외치면서 정작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냐는 비판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보수든 진보든 교회는 세상의 논리에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그 존재 자체로 세상을 향한 대안이 될 수 있는 정치적인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초월성과 영원성의 입장에서 세상의 시스템 자체를 비판하고,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 세상을 향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살인적인 경쟁 시스템 속에서 '적자생존'의 논리를 진리로 믿고 있을 때,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고, 슬퍼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고,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만족을 얻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자비를 입고, 화평케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며,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세상의 체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것을 더 늘리고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정치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함으로써 세상에 충격을 던지는 정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교회 공동체가 되기 위한 출발점은 무엇보다도 성경 읽기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복음과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상황과 인간'에 대한 관심이 너무 약하다고 평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진보적인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과 함께 제발 신문도 읽으라고 권유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성경을 너무 모르는 데 있습니다. 자기 눈으로 성경을 읽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적습니다. 보수 교회는 날이 갈수록 성경의 '빨간색 부분'에 관해 설교하지 않습니다. 빨간색이라면 무조건 거부감을 느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그 빨간 색 부분이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데 있습니다(물론 모든 성경책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책 속에서 빨간 부분을 멀리하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구약의 율법만 가르치고 현세의 축복만 강조하면 그건 유대교이지 기독교일 수 없습니다(유대교도 그런 한심한 수준의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보수 기독교인들이 1세기 유대 상황 속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진적이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전혀 '급진성'을 띄지 않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콘텍스트 속에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한 번만 눈과 마음을 열고 바라본다면, 보수든 진보든 많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진보적 기독교인들도 별로 나을 것이 없습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만 받아먹는다는 점에서는 진보 쪽 사람들도 별로 나을 것이 없습니다. 진보 기독교 지도자들은 '빨간색 부분'을 자주 설교하는 만큼 그 빨간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진보든 보수든 교회의 회복은 신문이 아니라 성경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국가를 향해 매일같이 무엇을 해 달라고 요구하는 진보 교회가 아니라, 국가가 따라올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진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거룩한 공동체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교회의 교회됨'이 세상에 대한 정치적 발언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난 보수와 진보, 세상과 똑같은 보수와 진보의 존재가 하나님 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기독교사상 2006년 2월호 / 2006. 2. 23. 뉴스앤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