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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2000년 봄) |
△ 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통해 한신대를 빛낸 사람들. 왼쪽부터 김재준, 문익환, 안병무, 서남동 목사.
죽재 서남동 목사의 삶과 영성
- 채희동 목사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한국의 민중신학을 개척하신 죽재 서남동 목사님의 생애와 그 분의 신학사상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죽재 서남동 목사님은 한국 민중신학의 씨앗을 뿌리고 일구었던,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우뚝 솟은 큰 산입니다. 그 분의 삶과 신학의 발걸음 하나 하나가 우리 교회와 신학에 소중한 거름이 되었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은 그분의 어렵고 딱딱한 신학이론이 아니라 삶 속에 함께 녹아 있는 신학, 살아있는 생명으로서의 죽재신학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죽재 서남동 목사님의 삶과 그 분이 일생동안 해 오신 신학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과 신학의 일치, 신학과 삶의 만남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죽재 서남동 목사님은 강단의 신학자의 소유물처럼 여겨졌던 신학이 민중 속으로, 교회 대중 속으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성육신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죽재가 하신 '삶의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으로 하여금 구체적인 삶 한복판에서, 역사 한가운데에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살리고,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걷도록 인도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상아탑 속에, 교회 울타리 속에, 교리와 신학 전통 속에, 성서 안에 감금된 예수를 해방하여 우리의 가난하고 서럽고 한 맺힌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제가 만난 죽재 서남동 목사님은 위대한 신학자이기 전에 영혼이 맑고 깨끗한 사람, 진리를 찾아 일생을 뜨거운 신학적 열정으로 불꽃처럼 산 자유의 사람이었습니다.
시은 고은은 죽재를 가리켜 "봄비 내린 후의 숲처럼 싱그럽고 맑아 불의와 억압의 그림자마저도 깨끗이 닦을 수 있었던 사람, 살구꽃처럼 피어오르는 웃음으로 ant 사람을 대하던 언제나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진리를 찾아 순례하는 구도자로서, 제도화되고 우상화된 교회와 네모 반듯한 강단의 신학에 갇혀 있지 않고 평생을 참 신앙인의 자세로 살았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목회를 하고 있는 죽재의 제자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죽재를 회고하면서 말하기를 교수로서의 권위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었고, 언제나 인자하고 따스한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고 말을 했습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당신의 생각과 좀 다른 학생이 당신의 이론과 반대되는 주장을 할 때였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유심히 그 학생의 질문을 들은 후에 손바닥으로 책상을 딱 치면서 "아, 그래, 자네 말이 옳아. 다시 한번 나에게 말을 해 주게"하시면서 그 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셨다고 합니다. 죽재는 언제나 어린 제자에게까지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으셨던 참 스승이셨습니다.
이처럼 아침 이슬처럼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기에, 죽재는 고난받는 가난한 민중에게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고난받는 민중의 억울한 한의 소리, 그 신음소리를 그리스도의 소리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죽재의 민중신학이 생명의 신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맑은 영혼을 통한 하나님사랑, 민중사랑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받는 민중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 고난받는 민중의 한의 소리를 타고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한 신학입니까? 이 얼마나 플라스틱처럼 굳어 있는 우리의 삶과 신학에 생기를 주는 생명의 신학입니까? 죽재 서남동의 민중신학은 감히 '과격하다 급전적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그 분 처럼 영혼이 맑고 깨끗한 사람만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신학인 것입니다.
저는 죽재 서남동 목사님을 통하여 저의 살모가 신학의 전환을 가져왔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그 동안 서남동 목사님의 삶과 신학을 통해서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 어린 시절, 찌든 삶과 고된 노동에 지쳐 자리에 누울 때면 언제나 들려 오는 내 아버지의 신음소리,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마루바닥에 담요를 깔아 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 어린 저와 가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던 내 어머니의 기도소리가 그 때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농사꾼으로 장사꾼으로 사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그 신음소리, 한의 소리가 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소리요, 이 시대를 해방하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이제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깡마른 내 아버지의 몸뚱이와 갈라지고 갈라져 핏물 든 내 어머니의 마른손은 아직도 땀 흘리는 노동만이 자신의 삶을 실현하고 구원하는 것임을 믿고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고 계십니다. 이 한반도 땅에서 무수히 많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들, 노상에서 공장에서 논과 밭에서 자신의 손과 발로써 하나님을 고백하고 자신들의 노동으로 하나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고, 그로써 이 땅에 새생명으로 잉태하는 고귀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들의 삶, 바로 서남동 목사님은 이 분들의 삶을 증언하고 전달하고, 그리고 그들처럼 함께 '살아가는 신학'을 몸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서남동 목사님은 우리에게 "신학 한다"는 것의 참 의미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의 우리의 신학수업이 "신학 한다"의 차원이었지만 이젠 "신학을 살자"의 차원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분리된 관념적이고 박제화 된 서구의 신학이 아니라 바로 한반도 산하에, 그리고 한국의 종교 문화 역사 속에서 지금도 자시느이 노동과 희생을 통해서 이 땅의 고귀한 생명으로 잉태하는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에 응답하고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신학이어야 합니다. 서남동 목사님의 신학은 고난받는 민중의 삶 한복판에서, 생명 한복판에서부터 출발한 "삶의 신학"이었고, 그의 삶 또한 그 자신의 신학함대로 살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신학함의 참 의미가 있고, 그 속에서 우리의 생명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신학으로 하여금 새로운 신학적 전환,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참되게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열어 주신 죽재 서남동 목사님(1918-1984)은 1918년 7월 9일 목포 앞 바다 작은 섬, 자은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죽재는 자은도 갯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아마도 그가 일생동안 가지고 있었던 기질은 뻘마당에서 잔뼈가 굵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친 바닷가에서 얻는 그 기질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자신의 안락을 위해 살지 않고 일평생 오직 참된 진리를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죽재는 그러한 기질 때문에 언제나 교회 울타리 밖으로, 강단의 문 밖으로, 사회의 변두리(옥고를 당함)로 내밀리고 밀려난 '방외의 신학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재와 깊은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던 민중시인 김지하가 태어난 곳이 목포라는 사실은 그들의 운명이 이미 그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재가 갈릴리 예수를 만난 것은 소학교 오 학년 때 목포에 있는 교회학교에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성경을 배우면서입니다. 그는 성경공부를 통해 성경의 이야기들 속에서 '갈릴리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 때, 어린 죽재의 마음속에 '갈릴리 예수'는 어떻게 그려졌을까? 그는 결국 서구의 전통신학과 지배 이데올로기화된 교리, 그리고 성서와 교회 울타리 안에 갇혀있던 '갈릴리 예수'를 민중현장 속으로, 우리의 삶 속으로 성육신시킨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신학 속에, 성서 속에, 교회 울타리 속에, 교회조직 속에, 교리 속에 감근된 예수를 해방하여 가난하고, 고통받는 민중에게 가까이 가도록 인도하는 신학자가 된 것입니다.
죽재는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전주에 있는 기독교계통의 학교인 신흥중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다가 193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의 나이 19세가 되는 해에 일본으로 유학 길을 떠납니다. 그는 일본 동지사대학 문학부 예과를 1년 수료한 후, 신학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쌓게 됩니다. 이것이 죽재가 40년 동안 걸어왔던 신학의 시발점이요, 이 때부터 죽재는 멀고도 험한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재는 1941년(24세)에 일본 동지사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에 돌아와 잠시 평양에 있는 요한성경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그 다음 해부터 십 년간 대구에서 목회를 합니다. 그는 대구에 있는 대구제일교회, 범어교회, 동문교회 등에서 목회를 하게 되는 데, 목회를 하면서도 '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습니다. 그는 신학교 시절 보다 더 현대신학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고, 그 신학이 주는 감동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이 시기에 한국인으로 죽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진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은 곧 함석헌 선생과 김재준 목사입니다. 죽재는 대구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함석헌 선생이 하는 성경강해에 참석하여 그의 정신적 영향을 받게 되고, 김재준 목사와 깊은 교류를 해 오면서 그 젊은 시절, 죽재의 정신적 영향뿐만아니라 신학형성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죽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서구의 신학자는 틸리히입니다. 50년대에 죽재는 틸리히의 실존주의 신학사상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드디어 죽재에게 본격적으로 신학 수련을 쌓을 수 있는 장이 주어졌습니다. 1952년 그의 나이 35세가 되던 해에, 그의 꾸준한 학문적 연구가 한국신학대학에 교수로 초빙을 받는 데까지 연결된 것입니다. 죽재는 한국신학대학에서 이종성 교수 등과 함께 주로 '철학적 신학'을 강의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폭을 넓혀갑니다. 한국신학대학에서 강의하던 죽재는 보다 더 넓고 체계적인 신학수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37세에 때늦은 캐나다 유학 길에 오릅니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대학 빅토리아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1957년에는 동 대학 대학원에 졸업하여 신학석사를 취득하고 돌아옵니다. 캐나다 유학을 마치고 다시 한국신학대학 강단에 선 죽재는 이전보다 더 왕성한 신학적 활동을 하게 되는 데, 유학 이후 2년 동안에 죽재가 발표한 연구논문이 모두 14편에 이르는 데서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죽재는 그 이듬히 1961년 44세의 나이로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초빙을 받고, 종합대학이라는 보다 넓은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신학수련을 계속하면서 주로 '현대신학', '기독교역사철학'등을 강의합니다. 죽내는 연세대학에 있으면서 신학적으로 본격적인 자기 신학을 체계화 시켜나갑니다. 그것은 먼저 50년대 실존주의 신학을 지나 60년대에 이르러 본회퍼의 세속화신학, 샤르뎅의 진화론적 신학,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 몰트만의 정치신학, 죌레의 신의 죽음의 신학, 요아킴 플로리스의 성령의 제3시대론 등에 몰두합니다. 이 때 쌓은 신학적 수련은 훗날 죽재의 민중신학에 소중한 신학적 토양이 됩니다. 또한 죽재신학은 이 시기에 현대신학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최신 서구의 현대신학을 한국신학계에 소개하여 한국신학의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을 하게 됩니다. 유동식 교수는 이 때의 서남동을 가리켜 '현대 신학의 안테나'라고 했습니다. 세계에서 무엇이 돌아가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안테나에 귀를 대고 있으면 되듯이 현대신학의 흐름을 알고 싶으면 죽재에게 귀를 기울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죽재는 연세대학이라는 종합대학에 있으면서 타학문, 특히 물리학, 생물학, 과학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죽재는 이 때 과학종교가 던져주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신학교 연구실에는 신학서적 대신에 과학서적으로 가득해 집니다. 그 자신의 신학적 관심은 줄어들고 과학종교에 깊이 심취하고 있는 것에 과학서적으로 가득해 집니다. 그 자신의 신학적 관심은 줄어들고 과학종교에 깊이 심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재는 이 때 한국신학자로는 최초로 자연신학, 생태신학, 과학신학의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1969년부터 1974년 동안으로, 그는 신학을 떠난 것이 아니라 과학사상에서 새로운 신학적 비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재가 해직 후에 다시 대학의 상아탑에 복귀하면 아마도 과학종교의 비전을 추구할 가망성이 크다고 한 것에서 보면, 그가 민중신학에 관심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아마도 '과학신학자'라는 새로운 명칭이 붙어졌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학사상에 심취 해 있던 죽재로 하여금 상아탑 서재에 앉아 진리를 몰두하던 것에서부터 역사 현장에서 진리를 몰두하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손과 머리로 하던 신학에서 발과 몸으로 하는 신학으로 전환하게 햇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1970년 한국의 민중, 아니 한국의 민중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분이 그를 당신의 선교의 도구로 쓰신 것입니다.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한국사회는 장기적인 군사독재 시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부도덕하게 정권을 획득한 박정권은 수 차례에 걸친 민정이양의 약속을 저버리고 삼선개헌 급기야는 유신헌법으로 이어지는 18년간의 장기군사독재라는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경제적으로는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친되기 시작한 경제개발계획으로 외형상 급격한 고도성장과 공업화를 이룩했지만, 그러나 이 같은 고도성장의 이면에 숨겨진 고도성장 정책의 자체모순이 1970년대를 통해 서서히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농촌의 피폐와 이농인구의 증가, 도시빈민의 확대, 노동조건의 열악에 따른 노동문제의 대두,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에 따른 분배문제의 노정, 엄청난 외채의 누적과 이에 따른 해외의존도의 심화 등 사회 경제 정치적인 문제들이 노골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민중현실 한 가운데에서 살았던 죽재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소외 받고 억압받는 민중을 자신의 신학의 주제로 삼게 됩니다. 죽재의 민중신학의 태동에 있어서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요소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도시산업선교의 영향입니다. 도시산업선교회는 1960년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경제계발계획으로 공업화, 산업화에 따라 발생하는 경제성장의 자체모순에 관심 하면서,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고난받는 민중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믿고 실천하려는 것으로 죽재의 민중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줍니다.
둘째로,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자살사건입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온 몸에 불을 질렀습니다. 죽재는 자신의 민중신학을 전개하면서 기꺼이 고난받는 민중의 역사 속에 자신의 몸을 태운 전태일의 모습에서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아성'을 보았고 전태일의 죽음 속에서 예수의 부활사건을 보았던 것입니다.
셋째로, 민중시인 김지하의 문학과 그의 정치적 행태입니다. 특히 지하의 문학은 죽재의 민중신학을 신학적으로 체계화시키는데에 있어서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즉 '신과 혁명의 통일', '한과 단의 변증법'등의 구도는 지하의 구상메모인 "장일담"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죽재의 민중신학에 있어서 김지하의 문학 작품은 사상적으로 뿐만 아니라 방법론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하의 문학과 죽재의 민중신학과의 관계에 대하여 앞으로 분명하게 밝히는 작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1970년대 한국 민중의 상황과 이러한 일련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죽재의 민중신학의 태동과 발전의 배경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것과 함께 죽재가 민중의 신학을 하게 되었던 근본 요인은 무엇인가, 즉 그의 삶과 신학의 전환은 어디에서부터 인가하는 문제를 밝혀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일반적으로 죽재의 신학적 전환시기를 1975년 아프리카 나이로비에서 있었던 WCC신앙과 직제 회의에 참석한 후라는 데 일치하고 있습니다. 죽제는 동 회의에서 한스 베버(Hans R. Weber)가 인도하는 성서연구 시간에 세계 교회 신학자들로부터 한국의 정치적 상황, 특히 김지하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동시에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신학에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고 '신학적 회심'을 하게 됩니다. 죽재는 그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김지하'에 관한 자료를 모두 수집하여 서울 YMCA 연구실에서 닷새 동안 탐독하여 자신의 신학을 반성하고, 그의 삶과 신학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재가 신학사적인 차원에서 민중신학을 처음으로 발전시킨 논문은 1974년 연세대 신과대 퇴수회에서 발표한 "예수와 민중"이라는 논문과 1975년 2월 기독교사상에 발표한 "예수 교회 한국교회"라는 논문입니다.
이렇게 죽재에 의해 한국의 민중신학은 태동된 것입니다. 그러나 죽재는 그 이후, 1979년까지 민중신학에 관한 한 편의 논문도 발표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죽재로 하여금 '민중의 신학자'로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단련기간이라고 할까, 죽재의 삶에는 커다란 시련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것은 민중의 신학자에게 주어지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이요 그의 삶과 신학이 일치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민중의 신학자는 상아탑에 앉아서 민중을 논할 수 없고, 사변의 신학으로도 민중의 고난받는 현실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민중의 신학자는 고난받는 민중의 恨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발의 신학, 몸의 신학, 삶의 신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민중의 신학자인 죽재는 민중현장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恨의 소리의 전달자가 되려고 몸의 신학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는 그에게 찾아오는 시련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고, 그는 민중이 받는 고난과 수모를 생각하면 자신에게 찾아 온 이 시련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1975년 6월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후 죽재는 해직되어 강제로 학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하여 면학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해임된 것입니다. 그 당시 학교(연세대) 관사에서 살고 있던 죽재는 교수직에 물러나 갈 곳이 없었습니다. 집 한 채, 방 한 칸 마련하지 않고 살았던 죽재는 난감했고, 그래서 학교 당국에 간청을 했습니다. "당분간 이 곳 관사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그는 편히 머리 둘 집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어찌 민중의 신학을 하면서 자신의 집을 장만하고, 어찌 민중의 고난을 말하면서 편히 머리 둘 안식처에 연연했겠습니까.
죽재는 학교를 나왔습니다. 이제 강단의 신학을 포기한 것입니다. 어쩌면 더 홀가분한 지도 모릅니다. 책에 갇혀 있고, 강단의 울타리에 갇혀서 죽은 신학을 할거라면 차라리 거리로 나아가 고난받는 민중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게 더 감사할 일입니다. 서구의 신학자들이 쓴 신학서적과 교만하기 이를 때 없는 바리새인과도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만나지 못했던 갈릴리 예수를 후미진 골목, 냄새나는 민중의 마을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교회에도, 학교에도, 책속에도 없었던 그 분을 말입니다. 거리에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창녀나 비렁뱅이의 울음소리 같기도 합니다. 아니 배고픔에 지친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는 울음소리 같기도 합니다. 죽재는 혼자 중얼 거립니다. 저 소리는 예수의 신음소리라고, 아 저 울음소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울부짖음이라고 말입니다.
1975년 3월 1일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안병무, 문동환, 이우정, 문익환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일명 "명동사건"으로 긴급조치9호 위반협의, 즉 민중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한 죄로 입건되어 민중의 신학자로서 서남동은 또다시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됩니다. 죽재는 이 "명동사건"으로 구속되어 15번의 재판 끝에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이 구형되었고, 1976년 11월 13일부터 12월 29일까지 10차례의 항소심재판 끝에 징역 2년 6개월, 자격 정지 2년 6개월로 형이 확정됩니다.
죽재가 감옥에 끌려가면서 제일 많이 염려한 것은 그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들이 아끼는 책을 가장 걱정하며 감옥을 갔는데, 죽재는 자기 아내를 염려하여 당신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고 합니다. "내 책꽂이 몇 째 칸 무슨 책에 얼마나 있으니 그걸로 쌀도 사고 생활비로 하라고, 며칠 동안은 어떻게 든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언제나 따스한 마음으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으로 살던 죽재는 독재의 서슬 아래에서 억압받는 민중과 함께, 도시 변두리, 판자촌에서 방황하는 예수와 함께 거리;의 신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은 추웠고 배는 고팠습니다. 그러나 거리에서 헐벗고 굶주렸던 그 예수는 감옥에도 있었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죽재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 추운 감옥에는 아침햇살처럼 아름다운 그 분의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바로 죽재는 이렇게 한국 민중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그 감옥 안에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갈릴리 예수와 22살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을 생각하고 다짐하면서 민중신학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자기가 몸으로 느끼고, 체험한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지배자의 예수, 배부른 부자의 예수가 아니라고.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예수는 거리의 예수, 고난받고 헐벗은 민중의 예수라고. 죽재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듯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때로는 해방의 희열을 느끼며 민중의 신학을 구상했습니다. 22개월 동안의 감옥생활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민중의 예수만이 나를 구원하고, 이 세상을 해방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재는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죽재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보다 더 하늘은 빛을 잃었습니다. 죽재는 감옥에 있는 자신과 감옥 밖에 있는 자신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살의 안과 밖 중에서 어느 곳이 진정한 감옥일까. 차라리 감옥 안에 있는 것이 편하리라. 그 곳에는 그 분이 계셨으니까. 민중과 함께, 민중이 되어 살았던 갈릴리 예수가 그립습니다. 여전히 교회의 철탑은 높아만 가고, 갈릴리 예수는 교회 철문을 두드리다가, 저 화려한 교회, 배부른 교회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뒤돌아 섭니다. 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가진자의 탈을 쓴 성가와 설교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예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후미진 거리, 당신의 백성이 있는 민중의 거리로 뒤돌아갑니다.
죽재는 만 22개월만에 문익환 목사와 함께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지만, 그가 감옥 안에 있으면서 구상한 민중신학을 체계화시키는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 1977년 12월 31일, 환갑을 바라보는 60세 노신학자는 그 추운 겨울 감옥문을 나서면서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고난받는 민중을 위해 자신의 신학을 도구로 쓸 것을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해왔던 신학의 주인은 자신과 같은 신학자의 것이 아니라 지금 고난받는 민중, 그 민중의 사건을 통해 재연되어 다시 부활하는 갈릴리 예수를 위한 '민중의 신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서구신하그이 논리로는 고백할 수 없는 한국민중의 하나님, 민중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 한국의 민중문화를 통하여 민중해방의 힘을 주셨던 하나님, 오늘 다시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다시 부활하신 갈릴리 예수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죽재는 석방 후 두 달 뒤인 1978년 2월 한국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 원장으로 취임합니다. 그것은 강단을 빼앗긴 이 민중의 신학자에게 감옥에서 구상한 민중신학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킬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죽재를 위하여 당신의 일을 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방외의 신학자, 거리의 신학자 죽재 서남동은 민중의 신학을 정리하기에 앞서 자신의 연구실 벽에 걸려 있던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본회퍼, 니버 형제 등 서구의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의 사진을 모두 떼어 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처형되기 위하여 압송되어 가는 녹도장군 전봉준의 사진을 걸어 놓았습니다. 이제 민중의 신학자 서남동에게 있어서 그의 신학의 자리는 서구의 역사와 신학이 아닙니다. 우리 신학의 뿌리라 여겼던 서구신학을 단(斷)한 것입니다. 그의 신학의 근거는 서구 신학자들의 논리나 주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 민중이요, 그 민중과 함께 싸우다 죽어간 이 땅의 무수히 많은 전봉준과 같은 민중이요, 한국 민중의 역사 한복판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고 해방하시는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십니다. 죽재는 이제 단순히 서구신학을 전달하거나 답습하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한국 민중의 고난의 현장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죽재는 이제 민중의 신학자요, '한국적 신학자'입니다.
죽재를 보십시오. 다시 죽재 서남동의 삶과 신학을 보십시오. 서구신학에 매몰되지도 않고, 서구신학자들의 말과 논리를 맹목저긍로 추종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우리 땅, 한반도에 살아 숨쉬는 예수, 한국인의 예수를 말하는 죽재를 보십시오. 한국의 종교문화 속에 찬란하게 빛나는 조선의 예수를 보고 있는 죽재의 저 아름다운 눈을 보십시오. 판소리, 탈춤, 민담, 미륵, 전봉준, 춘향, 심청, 이청준의 소설, 김지하의 ..... 한 줄 한 줄이 죽재의 손을 통해 아름답게 한국인의 신학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십시오.
죽재가 일구어 놓은 한국인의 신학, '우리신학'에 저들 서양인들도 귀를 세워 듣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반도 땅이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것을 보십시오. 죽재의 손을 통해 세계신학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우리 땅에서 우리의 신학자의 손으로 세계신학자들의 손을 이끌고 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죽재는 이제 단순히 신학자라고만 말할 수 업슨 stkfka입니다. 죽재는 '한국적 신학자의 한 모형'입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종교의 언덕을 그대로 넘고 넘어 가면서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한국인의 예술적 혼을 신학에 담고, 그 정신을 하나님의 숨결로 승화시켰던 죽재에게 있어서 한국종교문화와 그 전통은 어느 것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소중한 신학적 옥고들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적 신학자로서 죽재는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장으로 있으면서 감옥체험 후 그가 구상하고 있었던 '민중신학'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고 체계화시킵니다. 죽재는 1979년 한 해 동안 민중신학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논문인 "두 이야기의 합류", "우리의 부활과 사월혁명", "恨의 사제", "恨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소리의 내력" 등 무려 5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그 이듬해도 민중신학에 대한 연구논문을 꾸준히 발표하고 잇는 것으로 보아 죽재는 이미 감옥에서 민중신학을 구상해 놓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죽재가 이 때 발표한 이러한 민중신학의 주옥같은 논문들은 한국신학의 거대한 산줄기를 이룹니다. 세계 어느 신학자도 밝혀 주지 않고, 한국의 어느 신학자도 가려하지 않았던 그 길을 죽재는 그의 신학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죽재는 서재에서 논문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가. 얼마나 오랜 밤을 지새우며 고난받는 민중의 恨소리에 응답하고자 했을까. 고난의 역사, 恨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살아 온 무수히 많은 이 땅의 민중을 만나면서 얼마나 가슴 저미는 떨니는 손으로 신학이야기를 적어 갔을까. 그러나 죽재의 손을 통해 교회에 갇혔던 예수가 해방되고, 도시 변두리, 언제나 멸시와 천대, 억압과 착취만 받아왔던 이 땅의 민중들이 이제서야 역사의 주체로, 역사 한가운데로 당당하게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재의 뜨거운 신학적 열정이 민중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결국 이것은 한국 민중신학의 성숙으로 나타납니다. 죽재의 신학을 중단 없이 계속 이어지고, 방법론적으로도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시기에 발표한 논문은 "민중(씨알)은 누구인가"(1980),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1982),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1982), "민담의 신학 - 반신학"(1983), "십자가 - 부활"(1983), "세계의 생명과 그리스도"(1983), "문화신학 - 정치신학 - 민중신학"(1983), "빈곤의 사회학과 빈곤의 신학"(1983)
그러나 죽재의 신학작업은 여기에서 중단되고 맙니다. 죽재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더 이상 그의 신학은 진행될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쓴 "현장의 소리"(1984)라는 글은 모 월간지에 기고했지만 아직까지 게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자그마한 암 세포(췌장암)가 그의 육신의 삶을 더 이상 살아가지 못하도록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죽재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자시느이 모교인 캐나다 토론토대학 빅토리아 신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 온 지 두 달 뒤, 1984년 7월 19일 67세의 일기로 한국교회와 신학에 커다란 공헌과 함께 남아 있는 후학들에게 무거운 과제를 남겨 놓고 떠나갓습니다. 그의 육신은 비록 땅에 묻혔지만 그의 삶과 신학은 학국교회와 신학이 있는 한 영원히 우리의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죽재 자신이 하는 신학은 중단되었지만, 민중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는 남아 있어 민중의 고난 속에서 영원히 살아 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죽재 서남동 목사님의 삶을 중심으로 한 그가 걸어 온 신학의 여정을 함께 보았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과 함께 죽재신학이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학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으며, 그리고 21세기 한국신학에 어떤 길을 열어 주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학의 주인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신학자입니까? 아니면 목회자입니까? 그럼 민중신학의 주인은 또한 누구입니까? 민중신학자의 것입니까? 아니면 민중교회 목회자의 것입니까?
서남동 목사님은 신학의 주인은 신학자가 아니라 고난받고 가난한 민중, 하나님의 창조사업에 자신의 몸으로, 삶으로 참여하는 이 땅의 무수히 많은 민중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학은 여전히 신학자가 주인이며, 신학자에 의한 신학, 신학자를 위한 신학, 신학자의 신학을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민중신학 역시도 민중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민중신학자를 위한 신학을 하고 있습니다.
민중신학자를 위한 민중신학은 민중을 그 '신학이라는 상자'속에 가두어 놓고 민중신학자에 맞는 민중을 신학화하고 있습니다. 서남동 목사님은 노동자, 농민이 쓴 글을 1차적인 민중신학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과 같은 신학자의 신학은 민중의 신학을 도와주는 안내서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신학이 삶 속으로, 신학이 민중 속으로, 신학이 땅 아래로 성육신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학이 서 목사님께서 민중신학자의 신학이 아니라 민중의 신학을 하신 것처럼 삶의 신학, 아래부터의 신학, 교회 일반대중으로부터 출발하는 땅의 신학, 발의 신학을 살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신학이 죽재신학에서 찾아내야 할 소중한 '신학정신'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신학계 전반은 강단의 신학, 원탁에 둘러앉아 신학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학자의 신학, 신학자에 의한 신학만을 하고 있습니다. 학문의 세계에서 그 고유한 방식과 언어와 형식이 있지만, 오늘 우리가 하는 신학이 그리스도를 믿는 한국 그리스도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있으며, 신학이 삶을 변화시키고 해방시키고 있는지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학은 이제 신학방식이나 신학의 언어, 말법, 형식 등 모든 면에서 우리의 삶 속으로,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성육신해야 합니다. 이제 신학이 생활 속에서 구체화, 실용화되는 것입니다. 교회 일반 대중이 신학적 삶을 살도록 우리는 몸의 신학, 땅의 신학, 밥의 신학, 시장의 신학, 농사의 신학, 노동의 신학, 건축의 신학, 그림신학, 노래신학 등 실용신학, 생활신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죽재의 말처럼 머리의 언어에서 몸의 언어로, 문자의 신학에서 이야기 신학으로, 신학자의 언어에서 민중의 이야기, 민중의 예술양식, 민중의 놀이, 민중의 먹거리, 민중의 살림살이로 전환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신학이 줄기차게 찾아 나섰던 해방, 혁명, 구원, 생명, 우주, 부편 등의 큰 이야기들은 이제 민중의 작은 이야기, 즉 일반 생활자의 밥 먹고, 자고, 노는 일상생활 속에서 구원과 해방을 찾고 말하는 신학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것이 21세기 우리신학이 이어받아야 할 죽재 서남동 목사님의 민중신학의 기본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남동 목사님의 민중신학을 생활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어가고 싶습니다. 생활신학으로서 민중 신학이 보는 민중에 대한 이해는 변화합니다.l 90년대의 민중을 70년대의 인권운동의 시각에서, 80년대의 변혁운동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90년대의 민중은 이제 더 이상 경제적, 정치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거부합니다. 90년대 민중은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종교적, 문화적, 민족적, 생태적, 여성적, 심리적, 문명사적, 우주사적 측면 등 다차원적인 측면에서 직접적인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민중은 하나의 측면에서만이 아닌 다양하고 복잡한 다차원적인 측면에서 직접적인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민중은 하나의 측면에서만이 아닌 다양하고 복잡한 다차원적인 측면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민중신학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회 정치적인 시각에서 보여지는 민중이라는 협소한 개념에서 즉 민중성, 종교성, 생명성, 예술성, 여성성, 문명성 등을 담아낼 수 있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실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죽재는 적어도 민중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보았습니다. 죽재가 민중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혹은 이데올로기화하지 않았던 것은 민중 속에 살아 숨쉬는 생명에로의 에너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90년대의 민중의 다른 이름을 살림살이의 주체자인 생활자라 명하고 싶습니다. 이른 아침, 부엌에서 식구들의 아침밥을 짓는 어머니가 생활자이며, 신학자입니다. 또한 그것이 신학의 내용이요 형식입니다. 농부가 논밭에 나아가 땀을 흘리며 씨뿌리고 일구는 농사일이 신학이며, 그것이 신학의 주제요 방식이 됩니다. 여기에서 어머니와 농부가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가장 아름다운 신학의 주체인 것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신학자라는 사람들은 신학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신학자란, 땅을 일구며, 생명을 돌보고,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 몸과 발로써 동참하는 이 땅의 무수히 많은 생활자들, 농부, 여성, 노동자, 주민, 어린 아이, 장애우 등입니다. 강단에서, 문자에서, 책에서, 권위에서, 지위에서, 지식에서 빠져 나아와 생활 속으로, 삶 속으로, 생명 한복판으로 내려 올 때, 성육신할 때, 신학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진정한 신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삶 없이는 구원의 신학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민중의 다른 이름을 생활자라 했습니다. 이 생활자를 저는 다시 주민이라는 말로 부르고 싶습니다. 주민은 일상생활 속에서 장초화, 정보화, 지역화를 통하여 주민 자치 지역자치를 실현하여 중앙집권적 제도와 가치를 생활자 중심으로, 지역 중심으로 이동시켜 각 개인의 삶의 가치를 높여 나가는 생활의 주체자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측면에서 소외되어 온 우리 시대의 민중인 주민은 이제 주민 스스로, 자각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성적으로 참여하고 생산해 가는 주관자, 생활자인 것입니다. 삶의 신학, 생활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은 이제 주민신학입니다. 주민신학은 신학자의 신학에서 생활자의 신학으로, 중앙신학에서 지역신학, 지방신학으로, 사변신학에서 생활신학으로, 문자의 신학에서 실용신학으로, 모방신학에서 개성화, 창조화신학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학이 이렇게 생활신학으로서의 주민신학으로 전환해 나갈 때, 우리의 일상생활과 신학이 친밀해 지며, 우리의 생활 속에 내재된 신성을 회복하여, 삶의 성화, 생활의 영성을 통한 구원의 새로운 삶을 우리는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생활신학의 주체를 생활자로 보았을 때, 사람만이 생활자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생활, 곧 살림을 하듯이 논두렁의 풀벌레, 개똥벌레도 그들 나름의 소중한 일상의 생활을 영위하는 생활자입니다. 바람에 출렁이는 호수,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 언덕 위에 이름모를 들꽃, 이 모두는 사람 못지 않은 그들 나름대로의 살림살이를 하고 있는 생활자입니다. 하나님의 살림살이 또한 이들의 살림살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예수의 살림을 위한 십자가 사건 또한 언덕 위에 꽃 한 송이의 살림과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생명살림으로 만나지는 것입니다.
죽재는 그의 신학 3기에 속하는 과학신학 탐구기에 "신. 인간, 자연은 유기체적으로 하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한생명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은 한생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활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은 한 생명신학인 것입니다.
죽재신학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가능성은 문화예술신학으로서와 민중신학입니다. 죽재는 한국의 전통 문화, 종교, 예술, 문학 특히 민담, 탈춤, 판소리의 민중 예술 양식 등의 한국문화를 매개로 한국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문화예술 과정은 한민족의 정신과 일과 생명을 승화시키는 과정이며, 이것을 신학화 하여 우리 시대에 살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 예술은 위로부터의 예술이 아니라 민중으로부터, 일반 서민으로부터 표현되어지는 아래로부터의 문화요, 일상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예술인 것입니다. 죽재가 우리에게 남겨 둔 문화예술신학이 한국 교회 목회 현장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밑바닥에서 살아나는 종교적 영성을 회복하도록 문학, 으악, 미술, 춤, 영성, 의복 등 다양한 문화양식들이 예배와 성찬, 친교공동체 속에서 실행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현장은 문화예술신학의 실천의 장이요 목회는 문화예술신학의 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화예술 목회를 통하여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적 영성의 회복과 한국인의 종교심을 살려 새로운 문명의 새 지평을 열어 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죽재 서남동 목사님을 민중신학자로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죽재를 감히 말한다면 생명의 신학자요 예술신학자요 성령의 신학자입니다. 죽재의 신학은 네 번 바뀌었습니다. 1950년대의 실존주의 신학, 1960년대의 세속화신학, 1960년대 말의 생태학적 신학을 포함한 과학신학, 그리고 70년대 중반부터 80년의 민중신학입니다.
유동식 교수는 죽재가 지금 살아 있다면 아마도 분명 그의 신학이 민중신학을 넘어선 다른 무엇으로 전환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진리를 쫓아 걸어가는 순례자는 끊임없이 진리의 나그네길을 걸어갑니다. 죽재 역시 어느 한 신학사상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신학의 길에로 전환을 했습니다. 정말 죽재 선생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그 분은 지금 어떤 신학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길을 우리에게 밝혀주실까요? 죽재는 아마도 교조화 되고 폐쇄적인 오늘의 민중신학의 옷을 벗어버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민중의 숨구멍을 막아 쥐고 있는 민중신학의 껍질을 벗겨 내고 거기에 생기 있는 신학의 물줄기를 부어주려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민중생명"이라는 보다 살아 움직이는 실체인 것입니다. 죽재신학 말기에 보여 주었던 자연신학과 민중신학의 합류, 세상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만나지는 생동력 있는 구원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여 현대문명의 죽임의 그늘 속에 갇혀있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을 것입니다. 지금 죽재로부터 시작된 민중신학이 진통하고 있습니다. 시름시름 앓고 있는 민중신학을 보면서 죽재는 미소짓고 있습니다. 교조화 되고 박제화 된 신학자들의 유희의 도구로 전락한 오늘의 민중신학은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쓸어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난받는 민중의 아픔과 괴로움을 위로해 주지 못하는 민중신학은 이미 신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민중을 구원하기는커녕 민중신학자 자신도 구원받지 못하는 민중신학은 이제 더 이상 신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제 조그만 책상 위에 놓여있는 죽재의 사진을 보면 죽재는 언제나 맑게 웃고 계십니다. 그 미소는 어린아이처럼 맑고 깨끗합니다. 그 미소 속에는 어둡고 깜깜한 골목길에 있는 민중을 싱그런 생명의 바다로 나오게 하라 손짓하는 것 같습니다. 그 미소는 민중을 답답하고 헉헉거리는 좁은 골방에 가두지 말고 보다 생기 있는 나무와 풀과 꽃이 있는 자연의 세계로 나오라고 말씀하빈디ㅏ. 민중과 자연이 만나, 민중과 우주가 일체가 되어 하나님의 새하늘과 새땅을 일구라 하십니다. 그 미소는 서구신학을 모방하지 말고, 한국인의 역사와 종교문화 속에 역사해 오신 하나님의 숨결로 생기 있는 신학을 하라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그 미소는 더 깊고 더 넓은 하나님의 세계로 민중을 끌고 나와 하늘을 보고 역사를 보고, 쌀 한 톨을 보고 우주를 보고, 밥 짓는 어머니, 씨부리는 농부에게서 세계 전체를 보고, 가난한 민중의 손끝에서 생동하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재의 미소가 제 마음에 여러분들의 가슴에 아침이슬처럼 아름답게 피어나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과 영성
지금까지 서남동의 생애를 중심으로 그의 신학적 변천과정을 살펴보면서 죽재가 열어 놓은 우리 신학의 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죽재신학의 영성은 무엇인가. 죽재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민중구원론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조을 것이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민중의 恨과 고난을 매개로 하여 오늘 고난받는 민중에게 메시아성을 부여하는 데 있다. 또한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의 실체는 민중구원에 대한 생명성과 역동성을 가능케 하는 불이론적 구원과 구원의 주체성, 실천성, 현재성, 과정성,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이러한 민중구원론이야 말로 한국 그리스도인이 회복하고 발전시켜야할 영성이라 할 수 있다.
1) 恨과 한의 영성이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의 실체는 첫째, 恨과 '한'이 통전하는 <한>의 구원론이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에서 恨의 의미는 역사적인 恨,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다 포괄적이고 심오한, 종교적인 측면까지를 담고 있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의 恨과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의 '한'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에 있어서 한의 의미가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
恨에 대하여 죽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밖에 보면 육치고 안에서 보면 혼이 듯이 민중도 밖에서 보면 민중이고 안
에서 보면 그의 혼에 해당하는 恨이다"
이것은 민중 밖에서 오는 恨과, 민중 안에서부터 오는 '한'으로 설명되어진다. 전자는 사회정치경제적 요소에서 오는 恨이라면, 후자는 종교문화적 요소에서 찾아지는 '한'이다. 서남동이 단순히 전자의 恨만을 보았다면,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죄성을 극복할 수 없지만,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구원의 가능성이 왜곡될 수 있지만, 서남동은 후자의 '한', 즉 종교적인 '한'을 말하면서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죄성도 담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서남동에게 있어서 민중의 <한>이란 사회정치적 요소로 찾아오는 恨과 민중 내부로부터 오는 '한'이 '합류'한 <한>이다. 논자는 전자의 恨을 역사적 恨이라고 하고 후자를 종교적 '한'이라고 부른다. 이 두 한이 민중 속에서 작용하여, 민중의 구원의 요소로 작용하는 민중의 <한>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민중신학은 恨의 신학이면서 동시에 <한>의 신학이다. 교회는 한풀이 교회이며, 서남동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민중의 한을 풀어주고, 마침내 <한>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민중의 恨을 풀기 위하여 오셨으며, 恨의 사제가 되시어 그 恨에 참여하심으로써 <한>세상을 이루셨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민중 속에 한의 사제로 현재화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도 민중의 한에 가슴 아파하시면서 당신 자신도 한이 맺히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 스스로도 한이 맺히셨기 때문에서 고난받는 민중의 恨을 풀어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한의 사제로 보내 주셨다.
고난받는 민중 속에서 민중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恨과 하느님의 한, 즉 사랑과 희생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한'이 통전하여 민중의 <한>으로 들어간다. 서남동이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민중의 <한>은 사회 정치적 요소로 오는 恨과 다르며, 역사적 恨이 배제된 초월적 한과도 대비되는 종말론적 <한>, 민중뿐만 아니라 비민중까지도 구원하는,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민중의 가슴 속에 맺히는 역사적 恨을 극복하는 <한>, 사회혁명보다 한 차원 높은 대혁명 또는 영원한 혁명인 것이다. 이 영원한 혁명이 바로 구원이며, 이 구원은 민중 속에 축적된 恨이 .....의 행위로 구원의 동력화를 이루어 내는 <한>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에 있어서 영성이란 민중의 억울한 恨풀이에 참여하는 것인 동시에, 거기에 머물지 않고 억압받는 민중과 억압하는 지배자가 함게 구원받는 <한>세상, 민중과 비민중이 함게 구원의 세계로 가는 <한>의 영성, 고난받는 민중의 억울한 恨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느님께서 친히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시는 恨과 '한'의 영성을 회복하여 마침내 하느님이 친히 내림하시는 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인 <한>의 구원에 참여하는 영성인 것이다.
2) 일원론적 불이적 영성이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의 실체는 둘째, 서구의 이원론적 사고 구조가 낳는 신학적 오류와 모순선을 극복하는 데 있다. 이에 대한 서남동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형론적 해석의 입장에서는 텍스트-콘텍스트의 모형에 근거한 성서해석
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게 별개로 타당성이 없다고 보아요.
지금의 성령활동이고, 과거의 것은 하나의 전거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서남동의 민중신학은 일원론적 사고구조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서구 전통신학이 신과 인간, 초월과 내재, 영과 육,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고, 그 양자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며, 그것으로부터 신학을 출발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서남동은 일원론적 사고구조를 낳고자 했다. 우리는 서남동 신학에 있어서 이원론은 민중신학 이전인, 과학신학사상을 탐구할 때 이미 극복하고 있음을 다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오늘의 신학'의 최대의 과제며, 거의 전부인 것 같이 보이는 과제는
'이원론의 극복', '미래의 비전'으로 요약할 수 있는 바,"
서남동의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구원론은 틸리히가 말하는 신율적인 경험이며 임의적, 인본주의적이 아닌, 곧 자율적 이분법적 도식이 극복된 삶의 경험이다. 여기에서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은 동학의 수운 최제우가 <<동경대전>>에서 밝히는 있는 '불연기연(不然期然)'
을 통하여 설명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불연기연은 동학의 논리구조이기도 하다. 우선 기연
(期然)은 상식적인 사고, 대상에 대한 감각적 판단이다. 기연은 상대의 세계이고 불연은 절대의 세계이다. 원인에 대한 경험적 추론이 기연이라면 궁극 원인에 대한 철학적 논구는 불연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오문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연이 외적 사물에 대한 감각적이며 경험적 과학이라면 불연은 내적 영적 존재에
대한 직관적 연구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기연을 외적 과학, 불연을 내적 과학이라 이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흥비가>에서 노래하듯이 수운은 외적 대상이나 내적 주체나
모두 무궁한 무한 존재라고 한다.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말이야말로 불연기연 논리를
적용한 대표적 사례이다. 형식논리로 말한다면 인간은 인간일 뿐이지 다른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해월은 인간을 하늘이라고 말한다. 유한존재인 인간을 무한존재인 하늘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기연의 논리를 따른다면 있을 수 없지만 불연의 눈으로 본다면 가능
한 언명이다."
기연과 불연을 동일시함으로 동학은 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에서도 민중과 예수를 동일시함으로 민중과 예수를 구분하는 이원성을 극복한 일원론이다. 기연의 논리로 보면 민중을 메시아로 볼 수 업싲만, 불연의 눈으로 보면 민중은 메시아이다. 서구의 이원론적 사고의 틀(기연적 논리구조)로 보면 민중은 메시아가 될 수 없지만, 한국사상의 핵심이 되는 동학의 불연기연의 논리로 해석하면 민중은 메시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기연의 세계가 불연의 세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가 기연의 세계인 민중을 불연의 세계인 메시아가 되게 한다. 그러나 이 성령의 역사 없이는 민중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민중은 메시아이면서 메시아가 아니다. 즉 민중과 메시아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민중을 단지 한 인간으로, 죄인으로서의 인간으로 보면 민중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 민중 역시 구원 받아야할 대상으로서의 죄인, 또한 구원에 방해가 되는 죄인에 불과하다. 기연의 논리로 볼 때 민중은 버림받고 구제될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민중 안의 참다운 본성, 즉 메시아성을 본다. 그것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통해서 들어나는데, 이것이 메시아적 요소가 된다. 민중의 고난을 단순히 기연적 논리로 보면 하나의 고통이요, 처절한 비극적 아픔에 불과 하지만 불연의 논리로 보면 민중의 고난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적 본성이 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이로써 민중의 메시아성, 곧 민중 안에서 그리스도가 참된 본성이 됨으로써 민중이 구원의 주체가 된다. 불연의 논리로 보면 고난받는 민중에게서 메시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민중이 주체적으로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 민중이 비민중도 구원할 수 있는 거시다.
이와 같이 일원론적 불이론적 영성은 예수와 민중은 분리될 수 없으며, 예수는 민중이요, 민중은 예수가 된다. 또한 민중사건에 참여하는 우리는 곧 예수와 동일시하는 자력적 구원이 가능하게 된다.
3) 주체적 자력적 구원이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의 실체는 민중의 자력적 주체적 구원에 대한 강조이다. 서구의 전통신학적 기독론은 구원에 대하여 비주체적 타력적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 구원에 대하여 자기가 주체가 될 수 없다면 과연 구원이란 무엇이고, 신앙인의 구원적인 삶은 필요한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이다. 이에 대하여 서남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는 아닙니다. 그는 민중 속으로 내려와 자기를 동일화하고,
그들에게 약속과 소망을 주고, 민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를 해방할 수 있도록 촉구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에게 있어서는 민중 자신이 스스로 자기해방을 추구하는 원형적인
것이 보여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독론적이라는 것은 '타력적'인 것이고, 서영론적이라는 것은 '자력적'인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대신 십자가에 죽었다고 할 때 그는 어디까지나 '남'입
니다. '남'이 딴 장소에서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고난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것을 무시
하는 것은 아니나, 이것이 마치 기독교의 본질인 양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자력적'이라면 자주 휴머니즘과 결부시키는 데 이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은 자력적, 주체적 구원론이다. 민중이 구원의 주체가 된다. 이것은 '민중이 메시아다'라는 사실을 전제로 가능하다. 민중이 메시아가 됨으로 자기 스스로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른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주(侍天主)를 해석함으로 이를 설명해 보자. 동학의 시천주는 '하늘님을 모신다'는 뜻이다. 기연의 눈으로 보면 주체가 하늘이고, '나'는 주체를 모시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불연의 눈으로 보면 하늘님을 모시는 존재가 곧 하늘님이다. 그러므로 하늘님을 모신다는 것은 곧 참된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고난받는 민중을 해방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생명되게 하는 하느님의 본성이 민중 속에 내재되어 있기에 민중이 구원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민중이 메시아가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가 될 수 없으며, 타력적 구원인 것이다. 민중신학에서 민중의 자력구원이란 인간 민중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휴머니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연적 논리의 해석이다. 그러나 민중의 자력구원은 민중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며, 민중이 메시아가 됨으로써 구원의 사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며, 자각적으로,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연의 세계, 곧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이다.
4) 현재적 실천적 영성이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의 실체는 구원의 혀재성과 시런성이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은 지금 여기의 구체적인 삶에서 실천되어지는 것이다.
서남동의 신학방법론을 보면 볼트만과 틸리히에게서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 신학과 한국학자들, 특히 이기백에서 배운 사회경제사적 방법, 그리고 요하킴 플로리스의 성령의 제삼시대론의 도움을 받은 성령론적 방법이다. 실존론적 방법이란 인격적 만남과 결단과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지극히 내면적이고 주체적 세계에 대한 접근 방법이다. 실존론적 방법의 특징은 '실존적 체험', '결단과 의지', '주체성'의 강조,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현재사상, '현재적 종말', '불안', '소외' 등인데, 이러한 실존주의적 사고가 죽재신학의 기본적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실존론적 방법은 상반된다고 생각하는 사회경제사적 방법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신학에도 스며들고 있다. 즉 죽재의 신학적 관심이 개인의 '실존'에서 인간의 '사회적 조건', '집단' 등으로 옮겨 갔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신학적 사고 구조는 여전히 실존론적 사고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 눈 앞에 전재되는 사실과 사건을 '하느님의 역사개입', '성령의 역사', 출애굽의
사건으로 알고 거기에 동참하고...."
또한 성령론적 방법에서도 역시 이 실존론적 방법은 적용된다.
"성령론적 해석에서는 내가 예수를 재연하는 것이고 지금 예수사건이 다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은 오늘 고난받는 민중사건 속에 예수를 재연하는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현재성'과 고난받는 민중의 恨의 소리에 응답하고 동참하는 '실천성'을 담고 있다. 이것은 성령론적 방법으로 가능하다. 이같은 서남동의 해석방법은 성서의 민중전통과 한국의 민중전통이 예수사건의 집단적 현재화인 동시에 하느님의 선교 활동이기도 한 오늘의 한국 민중전통을 통해 실천적으로 매개, 통합되게 한다.
결국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의 틀은 우선 실존론적 방법으로 기본적인 신학적 사고 구조를 이룬 다음, 다시 실존론적 방법으로 밝힐 수 없는 사회 조건의 문제를 경제사회사적.문학/예술사회사적 방법을 통하여 성서와 교회, 그리고 한국의 민중전통을 분석한 다음, 오늘날 민중현실 속에 현재화시켜 실천을 매개로하여 통합시키는 성령론적 방법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성령론적 방법을 통해 죽재신학은 현재적 실천적 영성을 담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민중의 고난에 참여하는 현재적 실천적 영성을 통해 오늘 우리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탈역사적, 내세지향적, 초월적 영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5) 진화론적(과정적) 영성이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에 있어서 주목하여야하는 것은 구원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이다.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은 교리체계나 신학적 논리에 대한 적합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생성 발전하는 삶의 다양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해석보다 삶의 경험, 사건의 발생, 민중의 삶의 자리가 중요시되며, 그것은 곧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 생성되는 현재이다. 서남동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고난받는 민중의 恨의 소리에 응답하고, 이에 동참함으로 하느님의 직접 통치, 곧 종말론적 천년왕국에로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은 진화론적 발전과정을 가지고 있다.
서남동이 세속화신학을 지나 과학신학사상에 심취할 때, 화이트헤드, 떼아르, 하드손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자연신학을 받아 드린다. 새로운 자연신학은 세속화신학에소ㅓ 들어난 신학적 무신론을 극복하는 것으로, 이것은 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발생발육과 정신과 문화와 사회와 역사의 발전은 진화론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남동은 현대 과학의 우주와 실제에 관한 최대의 발견은 '진화'라고 본다. 이것은 보다 높은 정신에로, 보다 많은 지식에로, 보다 넓은 자유에로, 보다 더한 존재에로의 진화, 곧 신에로의 진화인 것이다. 그러나 서남동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에 관하여 과학적은 등가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진화'라는 것이다.
"신이 진화라고 한다면 그의 고유성은 미래고 약속이다. 신학자의 신은 인간의 영혼을 구출하고 철학자의 신은 인간의 정신을 되찾게 하는데 대해서 과학자의 신은 인간의 생
활과 행위를 속량한다. '진화'의 신은 인간의 미래를 개척한다. 인간의 미래를 개척하는
과학과 공학은 이 '진화'의 신의 역사이다. 그러기에 '진화'의 신을 향하는 행방은 설계와
전진이요, 그 신 봉사는 역사의 발전을 위한 인간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서남동에게 있어서 신에 대한 과학적인 동의어는 '진화'이다. 신은 바로 진화과정의 창조력인 것이다. 이렇게 신을 우주적 진화과정의 동력으로 이해한 서남동은 그가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생태학적 신학'을 모색할 때, 진화로서의 신은 '생성하는 신'으로 더욱 생명력을 KA고 있다. 창조활동을 정지하거나 보류하고 있는 신만의 존재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생성하는 신의 생성활동이 곧 그의 '창조활동'이며, 그 창조는 '계속적 창조'인 것이다.
이제 서남동에게 있어서 신은 우주 발전과정의 동력이며, 초월자, 절대자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세계 속에서 역사하는 '생성하는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은 만물 안에 만물을 통하여 일하고 역사하시는 하느님인 것이다. 서남동은 민중신학을 탐구하면서 무엇보다도 억눌리고 소외당하고 고난받는 이 땅의 민중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보게 되는데, 이 또한 생성하는 하느님, 일하시는 하느님과 한 흐름 속에서 만나지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서남동의 진화론적 발전 과정적 사고는 민중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도 "진화(과정)적 민중발전론"의 입장을 취하고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한국사적 증언으로 이기백 교수와 강만길 교수의 사론을 소개하려 한다.
이 두 분이 같이 역사발전이란 역사발전을 담당하는 주체세력의 확대과정이라고 말한다.
곧 인간해방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론이 현대의 지배적인 사관이라고들
한다."
즉 역사의 담당자, 주체세력으로 민중이 점점 확대, 발전되어간다는 것이다. 이 발전과정에서 민중은 첫째, 오랜 기간 지배대상이 되었다며, 둘째, 반항을 통하여 역사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하고, 셋째,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민중은 한 걸음식 지배세력 곧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길을 닦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남동의 진화론적 민중발전론은 죽재신학 제3기인 과학신학사상을 통하여 형성된다. 이러한 진화론적 사고는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밑바닥에 깊숙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우리가 밝힌 것에 따라 민중구원론을 이해해 보면, 민중구원이라는 것은 고난받는 민중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느 한순간에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중구원은 역사 속에서 점점 확대 발전, 전진해 가는 진화론적 구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구원론을 진화론적, 괒어적 발전과정으로 이해한다면, 민중구원론은 하의 새로운 창조과정이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정치혁명, 사회개조, 변혁운동이 아니라 고난받는 민중의 한의 소리, 생명의 소리를 듣고 '매순간'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응답하며, 참여하며, 실천할 때, 하느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천년왕국은 민중에 의하여 점점 더 질적으로 확산되고, 발전하여 새로운 하느님 나라, 구원과 해방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므로 민중구원론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민중의 자기확장 방법으로 메시아왕국을 이루는 하나의 창조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은 정지되어 있는 고정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 변화 생성해 가는 창조과정인 얷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창조과정에 참여하는 엿엉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창조운동인 영성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의 세계로 질적인 확산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서남동의 민중구원론을 통해 죽재신학에서 들어나는 영성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죽재신학의 새로운 변화를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세 단계의 신학적 전환이다. 첫째는 실존론적 단계의 영성이요, 둘째는 역사적 단계의 영성이요, 셋째는 종말론적 단계의 영성이다. 죽재는 실존론적 단계에서 인간 실존의 내면의 깊이에 과님하다가 세속화론을 접하면서 역사신학적 관점을 갖는다. 그 후 성령의 신학을 통하여 종말론적 신학의 입장에 서게 된다. 위 세 단계에 대한 영성신학적 방법으로 접근해 보면, 실존론적 단계가 인간 개인의 실존에 대한 응답과 책임에 의한 구원이라면, 역사적 단계는 혁명, 해방, 정치, 변혁 등을 주제로 하는 사회정치가 참여이다. 그러나 죽재의 영성신학은 실존론적 영성과 사회정치적 참여와 영성과도 구별되는 종말론적 영성이다. 죽재의 종말론적 영성신학은 인간의 실존의 범주를 넘어서고, 역사변혁, 사회 개조, 정권 교체적인 범주를 넘어 '신과 혁명의 통일', '밑바닥과 하늘의 일치', '지상양식과 천상양식의 일치', 인내천의 신학, 곧 하느님의 직접 통치하시는 종말론적 영성을 말하는 것이다.
"민중신학이여, 마을로 내려 오라"
서남동, "서남동신학의 이삭줍기", 대한기독교서회, 1999
채희동
감리교 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 연합신학원을 나왔다. 현재 한생명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우리가락찬송가' 보급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크리스챤 신인문예상에 입선(1994,1996)한 동화작가.
죽재신학은 문자가 아니라 민중을 바라보는 애뜻한 눈길이다
오늘로 죽재 서남동 목사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지 꼭 열 다섯 해가 지났다. 이렇게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죽재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곁에 맴돌면서 그가 남긴 신학과 삶의 순결함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죽재와 신학적 호흡을 하기를 바랄뿐만 아니라 그의 숨결을 느끼며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신앙적 순례의 길을 함께 걷기를 바라고 있다.
죽재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힘은 무엇인가. 쉽게 만났다가 허망하게 잊어지는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이토록 뜨거운 만남'으로 언제나 우리 안에 살아있는 죽재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는 왜 잊혀진 이름, 잊어진 신학을 '서남동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세상에 내어 놓았는가. 서평에 앞서 본인은 이 보이지 않는 힘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고, 그 힘을 찾아내는 것이 죽재신학을 발견하는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신학이란 이름의 학문세계에서 일생을 보낸 죽재의 저서는 너무도 빈약하다. 그는 겨우 {전환시대의 신학}(1976), {민중신학의 탐구}(1983) 등 두권의 저서만을 남겨 놓고 가셨다. 그러나 여기 '서남동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세 번째 저서가 유고집의 형식을 빌어 이렇게 세상에 나오니 죽재를 그리워하고 그의 신학을 되새기고자 하는 이들에게 또다른 의미를 던져 준다.
이 많지 않은 그의 저서들을 통해서 우리는 '서남동신학'을 말할 수 있을까. 죽재신학은 있기나 한가. 본서는 용감하게도 '서남동신학'이란 이름을 내 걸고 출판되었다. 그렇다면 죽재신학은 무엇인가.
{서남동신학의 이삭줍기}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재신학은 알곡을 위한 신학이 아니다. 죽재신학은 주인의 손에 의해 언제나 알곡은 걷두어지고, 황량한 들판에 버림받은 쭉정이들과 함께 남아 겨울 찬바람을 맞는 이삭들의 신학이다. 주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신학을 논하지 않았고, 신학이라는 시장에서 더 좋은 값을 받기위해 기름끼 넘치는 얼굴로 신학을 포장하지도 않는 버림받은 자들의 신학이다. 겨울 들판에 남아 쭉정이들과 함께 혹독한 추위와 고통을 견디어 내며 좌절하지 않고, 끝내 봄햇살 내리는 봄날에 다시 파란 생명으로 태어나는 생명의 신학이다.
그래서 죽재신학은 문자가 아니다. 죽재신학은 이 땅에서 버림받은 쭉정이를 바라보는 애뜻한 눈길이다. 죽재신학은 논리가 아니다. 고난받는 민중의 한의 소리를 그리스도의 소리로 들을 수 있는 신앙의 힘이다. 죽재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물러있지 않고 끊임없이 길 떠나는 신학적 순례정신이다. 그래서 죽재신학은 죽어있는 문자나 논문들이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물체이다. 이 생물체로서의 죽재신학이 오늘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움직이고, 한국 신학마당에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영생하고 있는 것이다.
죽재는 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논리의 상자에 갇혀 신학을 한 것이 아니라 시인처럼 상상력과 직관으로 '신학' 저 편에 있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려 했다. 그래서 죽재는 지금까지 우리의 신학이 "신학을 한다"의 차원(이해를 위한 신학)에서 머물어 있던 것을 "신학을 살자"의 차원(삶의 신학)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과 분리된 관념적이고 박제화된 서구의 신학이 아니라 한반도 산하(山河)와 한국의 종교문화 속에서, 지금도 그들의 고귀한 일과 희생을 통해 역사를 살아내고 있는 이 땅의 무수히 많은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에 응답하고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신학이다.
죽재신학의 여정
본서 {서남동신학의 이삭줍기}는 죽재신학의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서남동의 신학적 여정은 그 자신이 밝힌 대로 그의 첫 번째 논문집인 {전환시대의 신학} 머리말과 본서 제1장에 수록된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의 저서"라는 짧은 글을 통해 쉽게 정리될 수 있다. 우선 서남동의 신학적 변천 과정은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폴 틸리히, 불트만 등의 영향을 받은 1950년대의 실존주의 신학사상, 둘째는 60년대의 기독교 신앙의 비종교적 해석을 시도한 세속화 신학사상, 셋째는 현대 과학사상을 가지고 신학을 재구성, 재해석하려 했던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의 과학 신학사상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민중 상황에서 민중의 恨의 소리에 신학적으로 응답하려 했던 정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 탐구기다. 본서는 이러한 죽재신학의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수록되어 있다.
죽재 선생의 최초의 논문이라 할 수 있는 "사랑과 법률"로 시작된 죽재 신학의 여정은 서양신학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그들의 신학의 언어와 방법을 배워 한국교회의 상황과 선교에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특히 본서 제2장에 수록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십자가 이해"와 같은 논문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십자가관을 유형별로 구분해 줌으로써 한국교회와 신학이 속죄론과 구원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분석해 준다.
제3장 현대신학 부분에서 우리는 죽재가 실존주의를 너머 역사신학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과정신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60년대의 신학"이란 논문에서 1960년 대의 신학을 '轉換期의 神學'(Theology in Transition)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그 당시 죽재의 신학적 시각은 오늘에도 유효하다. 그는 이미 그 당시에 오늘날 신학이 안고 씨름해야 할 문제들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21세기를 바라보는 우리 신학은 죽재가 선언한 대로 '전환시대의 신학', 곧 신학적 전환기에 서 있는 것이다.
죽재는 실존주의 신학과 역사신학, 세속화신학의 길목에서 다시 자연, 우주, 생명에로 신학적 방향을 돌려 과학 신학사상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다. 새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평화과 안녕을 도모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통해 새로운 신학적 비전을 보았고, 더 나아가 과학을 종교의 차원까지 몰고가려 했다. 그로써 사제는 과학자가 되고, 우주생성의 역사는 숨겨진 하느님의 창조과정을 설명해 준다. 특히 제5장에 수룩된 "생태학적 신학 서설"에서 죽재는 생태계 위기를 부르는 것으로 인구증가, 경제성장으로 인한 오염, 기술과학의 발전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생태학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 죽재는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과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학이 '자연에 관한 신학'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
"신학의 시계종은 계속해서 진동한다. 전통주의적, 개인주의적 구원관은 혁명주의적 정치신학으로 바뀌고, 다시 혁명주의적 신학은 기술과학적 유토피아주의로 바뀌고 또 다시 유토피아주의는 생물학적 전망으로 변했다. 신학은 지난날, 세속화의 동기 '신의 죽음'의 동기에서 했던 것보다도, 이제 생태학적 전망에서 훨씬 더 과격한 자기 수정을 해야 하게 되었다."(생태학적 신학 서설)
이미 1970년 11월에 발표한 죽재의 생태학적 신학은 아직도 1990년대를 살고 있는 한국신학자들이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신학적 과제로 남아 있다. 자연신학에로 '과격한 자기 수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신학계를 보면서 죽재와 같은 전위신학자가 다시 그리워진다.
본서의 편집구조가 죽재신학의 말기라 할 수 있는 민중신학에 앞서 전개되었던 과학신학 내지 생태학적 신학이 마지막 장에 자리 잡은 이유는 아마도 죽재신학의 종착점이 민중신학이 아니라 민중신학을 관통하면서 흐르는 '자연'을 신학의 주체로 삼고, 자연에서 새로운 신학적 기운을 느끼고자하는 생명신학의 가능성을 편집자가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재는 고난받는 민중과 생태계 파괴로 신음하는 자연의 고난을 분리하지 않았고, 세상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민중과 자연을 한생명으로 여겼던 것이다.
본서 제4장은 <민중신학과 한국신학>이라는 제목으로 여러편의 논문과 좌담이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논문은 안병무 교수와의 좌담이다. 한국 민중신학의 두 거성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신학을 논한 것은 이 글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민중신학의 싹을 틔울 무렵, 이 두 민중신학의 개척자는 지금까지 해 온 신학을 반성하고, 한국 사회를 분석하면서 새로운 신학적 기운들을 서로 호흡했다. 그로써 한국신학의 자리를 교회 울타리가 아니라 한국의 민중현실로 봄으로써 비로서 한국 민중신학의 터전을 함께 닦아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죽재는 민중신학을 말하기 전까지 서구신학에 대한 잡식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현대신학의 안테나라는 별칭도 얻었다. 서구신학에 대한 죽재의 신학적 잡식성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의 신학적 식욕은 자기몸 살찌우기가 아니라 한국신학의 밑거름으로 쓰기 위한 신학적 농사과정이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민중신학이여, 마을로 내려 오라
죽재신학이 꽃을 피운 것은 70년대 중반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한국의 민중신학이다. 오랜 신학적 수련과정을 통하여 서구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텍스트로 삼고, 신학의 객체가 아닌 신학의 주체자가 되어 신학을 전개했다. 죽재는 앞선 서구신학과 불연속적 연속성에 있으면서 주체적이고 실천적이며, 민족적인 신학의 새길을 열어 주었다.
죽재가 한국의 민중신학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은, 방외의 신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네모 반듯한 상아탑에 있었다면, 그는 기존의 신학자들이 해왔던 관념적인 신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방외의 신학자로서, 야인의 신학자로서 죽재는 버려진 쭉정이들과 함께 광야에 남아 그들을 위한 신학을 한 것이 바로 오늘의 민중신학이다.
오늘날 '민중신학이라는 말'은 있지만, '진정한 민중신학'이 없는 것은, 민중신학자는 많으나 야인의 신학자, 곧 방외의 신학자가 없는 까닭이다. 민중신학을 말하면서 너도나도 강단으로 자리를 옮겨가고, 민중신학을 말하면서 서양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갇혀 민중의 말이 아닌 신학자 자신의 언어로 민중신학을 말한다.
야인 신학자가 살아있지 않는 한 민중신학은 없다. 이것이 죽재가 남긴 신학적 유산이다. 여기 우리 손에 주어진 이 논문들이 죽재신학의 유산이 아니라 바로 신학하는 이가 결코 버려서는 안될 신학 정신, 신학이라는 학문 저 편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맑고 깨끗한 영혼을 소유한 자만이 신학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 죽재의 고귀한 유산일 것이다.
오늘날의 민중신학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민중은 마을에 있는데 민중신학은 자꾸만 산으로 올라 가는 꼴이다. 민중은 마을에 남아 가난하고 헐벗으며 고난의 한가운데, 마을에 있는 데 민중신학은 강단이라는 산으로 올라가 민중 몰래 자기들만의 언어로 신학을 말한다.
"민중신학이여, 이제 민중이 살아 숨쉬는 마을로 내려 오라. 내려와 민중의 마을에서 신학을 살라."
이 말은 상아탑을 떠나 버림받은 민중의 거리에서 신학을 몸소 실천하였던 죽재가 우리 곁에 살아 있으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들려 주는 말이다. 이것이야 말로 글로 말로 하는 신학에서 몸으로 발로 삶으로 신학을 했던 죽재 서남동이 남긴 신학적 유언이라 생각한다.
민중의 마을에는 민족의 역사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종교전통이 숨쉬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전통도 고스란이 전수되어, 민중의 마을은 민중신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상아탑이나, 서구신학의 서적에서 볼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민중신학의 재료들이 마을에 가득한데,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를 바라보고 신학을 말하고 있는가. 민중의 말, 민중의 글, 민중이 입는 옷, 민중이 사는 집, 민중이 이루어 놓은 공동체, 민중의 일터, 민중의 농사법, 민중의 놀이, 민중의 춤, 민중의 노래, 민중의 자연이해, 민중의 먹을거리, 민중의 자녀교육, 민중의 의술, 민중의 장례문화 등과 같은 마을공동체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민중의 삶이 고스란이 배어있는 마을신학으로 민중신학은 자리를 옮겨 가야 할 것이다.
너의 토양에서 신학을 일구라
서남동 목사님은 석방 후 두 달 뒤인 1978년 2월에 한국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 원장으로 취임을 한다. 강단을 빼앗긴 이 민중의 신학자는 감옥에서 구상한 민중신학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킬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방외의 신학자, 야인의 신학자, 거리의 신학자인 죽재 서남동 목사님은 민중신학을 정리하기에 앞서 자신의 연구실 벽에 걸려 있던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본회퍼, 니버 형제 등 서구의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의 사진을 모두 떼어 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처형되기 위하여 압송되어 가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 이제 민중의 신학자 서남동에게 있어서 그의 신학의 자리는 서구의 역사와 신학이 아니다. 우리 신학의 뿌리라 여겼던 서구신학을 단(斷)한 것이다. 그의 신학의 자리는 서구 신학자들의 논리나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 민중이요, 그 민중과 함께 싸우다가 죽어간 이 땅의 무수히 많은 전봉준과 같은 민중이요, 한국 민중의 역사 한복판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고 해방하시는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시다.
우리는 죽재 서남동의 삶과 신학을 통해서 서구신학에 매몰되지도 않고, 서구신학자들의 말과 논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우리 땅, 한반도에 살아 숨쉬는 예수, 민중의 마을에 오신 한국인의 예수를 말하는 죽재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한국의 민중신학이요, 이 민중신학을 서구신학자들도 귀를 세워 들었고, 죽재의 손을 통해 세계신학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 가는 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있었다.
죽재 서남동 목사님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학도들에게 또 다시 신학적 유언을 말씀하신다.
"너의 토양에서 신학을 일구라."
본인은 지금까지 본서의 서평을 논하기 보다 죽재 서남동의 신학적 정신, 혹은 그의 신학적 유언을 추리하여 살펴 보았다. 아무쪼록 본서를 읽어갈 때마다, 문자에 이끌려 가지 말고, 이 책의 밑바닥에 잔잔이 흐르고 있는 죽재의 신학적 정신을 보시길 바란다. 이것이 아직도 죽재 서남동을 잊지 못하고 여전히 죽재 곁에 우리가 남아 있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학자는 모름지기
신학자는
모름지기 거리를 오갈적에
빌딩숲을 보기 보다는
돌담밑에 핀
풀잎향기를 맡을 줄 알아야 한다.
신학자는
모름지기 책방을 서성이기 보다는
마을어귀에 서서 노인들과 장기 한판 두고
농부들과 막걸리 한잔
얼큰하게 마실줄 알아야 한다.
신학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갇혀있지 말고
손끝으로 우주를 가리키고
쌀 한톨 속에 미소짓는 그리스도를
몸으로 끌어 안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신학자는
시인도 되며 농부도 되어
거지도 되며 수녀도 되어
자유한 바람으로
이쪽 저쪽 바람의 끝이 되어
신학을 살 줄 아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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