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묵상(默想)/거룩한 묵상

예수님의 고독

우순(愚巡) 2009. 7. 1. 08:24

  예수님의 고독

 

    교회에서 밤을 보내면서 기도했다. 가슴에 기도하고픈 생각이 굴뚝 같이 치밀어 올라 이틀 밤을 예배당에서 보냈다. 잘 곳은 마땅 찮아 내 사무실에서 자다가 중직실에 가서 소파에서 잠을 잤다. 깊은 밤 자다가 기도하다가 생각하는 중에 예수님의 고독이 생각났다. 그래 예수님도 이 마음이셨을 거다. 자신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면 오른 편 왼 편에 앉으려 하고 서로 누가 큰 지 싸우기만 했으니 얼마나 고독하셔쓸까? 게다가 유대교의 제 정파는 얼마나 제 각각 다른 생각을 갖고 예수님을 공격했던가?

 

제자들의 무지

 

    예수님의 고독은 제자들의 무지가 큰 원인이다. 제자들은 어쩜 그리 성령강림 때까지 그렇게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엉뚱한 행보를 했을까? 키재기 논쟁을 하고, 어린 아이들을 내 쫒고, 말씀을 전해도 알아 듣지 못 했으니,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고독했을까? 제자들은 3년 반동안이나 예수님과 동행하며 숙식을 같이 했지만 깨닫지를 못했다. 제자들의 마음엔 예수님이 그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던 게 아니고, 자기들이 그리는 자기들의 나라만 있었던 것 같다. 달라도 아주 달랐다.

 

    게다가 그들은 아주 비겁했고 셈에 밝았다. 십자가 사건이 있을 때는 도망가기 바빴고, 옥합을 깨뜨릴 때는 신심을 보기 보다는 물질적인 아쉬움을 표출하느라 분노까지 했다. 유다는 한 술 더 뜬다. 오십봏 백보 양보하여 유다를 이해한다 해도 그에게는 자기의 소속 정파에서 훈련 받은 열심당원으로서의 정치적인 투쟁만 남아 있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채 무지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냥 예수님을 아무 깨달음 없이 따라가며, 예수님이 보이는 표적과 치유와 능력에 도취되어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은 이로 인해 진한 고독감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나와 함께 한 시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자기 중심적인 유대인들의 야합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야합이 예수님을 고독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는 가룟 유다의 열심당, 바리새파, 사두개파,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등은 같은 유대교의 지도자이면서도 색깔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특히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부활에 대한 인식 차이로 서로 다른 행보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는 긴밀하게 손을 잡았다.  더구나 이들과 손을 잡은 로마 병정과 우대 정치가들의 결탁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고독으로 몰아 넣었다. 자기 중심적인 유대교 지도자들의 야합이 예수님을 고독하게 만들었다.

 

   유대교의 민중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중신학자들의 눈에 민중은 억압받는 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죽이는 데 합세한 민중은 그야말로 판단을 잘 못하는 어리석은 우민들이요 진실과 정의를 배반한 교민(狡民)일 뿐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치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쳤다. 이 잘 못된 선택의 배경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사악함이 들어 있다. 인간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은 원죄의 본성 아래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교활함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욕심이 들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가 있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이 딱 들어 맞는다.

 

   예수님의 고독은 인간의 고독이다.

 

    예수님의 고독은 바로 인간들이 만들어 낸 고독이다. 그리고 이 고독은 예수님을 고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을 고독하게 하는 자가 당착적인 자기 업보이다. 예수님을 고독하게 한 순간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 버림 받는 신으로 부터의 고독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의 고독 속에는 인간의 실존적인 고독의 아픔이 진하게 깔려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고독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낸 자기 소외다. 실존적인 자기 소외의 아픔이 예수님의 고독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