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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默想)/거룩한 묵상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3:1) 기독교 타임즈 글 (2009-07-28)

우순(愚巡) 2009. 7. 28. 09:43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3:1>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예수님이시지만,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목회를 섬기면 섬길수록,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자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요즘 책들을 읽다 보면 두 개의 예수님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믿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살기입니다. 전자는 예수님을 믿는 복음이고, 후자는 예수님처럼 사는 사랑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전자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 (faith about jesus)이고, 후자는 '예수님의 신앙'(faith of jesus)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자는 복음의 배타성을 말하고, 후자는 사랑의 포용성을 말합니다.

 

<예수믿기>

 

예수믿기의 핵심은 예수님을 대속자로 믿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대속자가 되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대속자 예수님을 결정하는 가장 큰 핵심은 대제사장과 화목제물입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제사를 집례하는 대제사장이시며 대속의 제물인 화목제물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웨슬리가 체험했습니다. 저도 믿습니다.

 

(로마서 3:24-26)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또는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웨슬리 일기 1738년 7월 24일) 나는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strangely warmed)을 느꼈다. 구원을 위해 내가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였다고 나는 느꼈으며 ; 주께서 나의 죄를 , 심지어 나까지도 다 거두어 가셨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예수살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예수믿기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예수신앙이 깨달아집니다. 그것은 예수살기입니다. 예수살기는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예수님 따르기입니다. 바울의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면, 복음서의 신앙은 역사적 예수님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행함이 따르는 사건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스승과 모범이 되십니다. 1930년도판 우리 감리교회 교리적선언문 제 2조는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며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라고 고백합니다. 존 웨슬리의 감리교회 운동이 기독교 역사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거룩한 삶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감리교회의 소중한 자산인 사회성화는 예수살기의 전형적인 실천입니다.

 

이런 예수살기는 그 지평이 상당히 넓은 포용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명을 경시하고, 각종 다름으로 인해 서로를 미워하는 슬픈 이 시대에, 예수살기는 아주 소중한 교회의 자산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내적으로는 대속의 믿음이지만, 외적으로는 사랑의 믿음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통해 우리의 참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살기의 소중함을 늘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살기의 사랑실천은 인종과 종교와 국경을 넘어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생명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전도의 문이기도 하고, 어둠의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참 빛의 길이기도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중용의 길>

 

저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 안에 함께 있음을 깨닫습니다. 존 웨슬리는 '가장 아름다운 중용의 길(The best beautiful middle way)'을 걸어갔습니다. 중용의 길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중용의 길은 종종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길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그 깊이를 깨닫게 되면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정도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믿기와 예수살기는 함께 가야할 길이고 비행기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그러나 함께 가는 길이지만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믿기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수학의 곱셈에서 제로(0)는 무엇을 곱해도 답이 제로(0)가 됩니다. 예수믿기가 제로가 되면 예수살기는 제로가 됩니다. 예수살기 곧 예수님처럼 사는 삶은 아름다운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언제나 한계에 부닥치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삶을 사는 누구도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금 더 의로울 수는 있어도,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킬만한 절대적 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인간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죄악은 필경 인간을 파멸시킬 뿐이지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예수님을 믿는 복음이 전제된 후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랑이 실천될 때 온전하다고 믿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분명히 믿지 못할 때도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아주 아름다와 보일지라도 근사치의 흉내이고 필경은 기쁨이 없는 고행일 뿐이며 철학적인 구도의 길일 뿐 복음은 아닙니다. 웨슬리가 회심을 경험한 날 일기에서 고백한 것은 기쁨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예수님을 따르다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분명한 영적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나니 예수님 믿기 이전의 예수살기도 아름다웠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예수살기는 더 아름다웠고 영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배타성과 사랑의 포용성>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복음의 배타성과 사랑의 포용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저는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의 유일한 대속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다른 길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다릅니다. 상동교회와 같은 민족교회들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펼쳐질 때 기독교는 타종교와도 손을 잡았습니다. 옳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할 때, 군사독재정권과 싸울 때, 약한 자의 인권을 지켜줄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창조하신 사람이라면 , 인종과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함께 손을 잡고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보니, 복음의 배타성을 분명히 믿고, 사랑의 포용성을 실천하면 우리 교회는 다시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7)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만이 구원의 길임을 분명히 하는 복음주의 신앙고백이 우리 신앙의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 토대위에서 예수님처럼 사랑을 전하는 길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우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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