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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默想)/거룩한 묵상

[스크랩] 예수님의 사랑

우순(愚巡) 2006. 4. 15. 20:54

   예수님을 이야기 할 때 가장 중요한 속성은 사랑이다. 더욱이 이 사랑은 기독교와 비기독교인들 사이에 놓여 있는 장벽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공동의 느낌이다. 비기독교인들을 물론 안티기독교인들 까지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기독교의 본래성 만큼은 긍정적으로 이야기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기독교의 본질이고 기독교의 본래성이며,. 예수님의 본질이고 본래성이다. 또한 하나님의 본질이요 본래성이다. 요한 일서는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 <요일 4: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또한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생명과 사망을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요일 3:14]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또한 예수님의 본래성인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만남의 가능성이 사랑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도 요한은 사랑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다고 선포한다.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신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 사랑의 가장 지고지선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표현된 사건이다. [요일 4: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렇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의 본질인 사랑은 하나님을 만난 자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의 갈림길이 된다. 구약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틀거리를 율법 혹은 계명이라고 보았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이 것 만으로도 기독교의 모태인 유대교는 놀라운 종교적 변화를 추구했다. 구약의 유대교가 만났던 처음 도전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틀거리의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우상숭배라고 부르는 비 기독교적 혹은 반 기독교적 신관은 사실 그 시대 사람들의 나름대로의 '신-만남'의 틀거리였다.

 

    기독교의 현관문인 모세 오경 신앙이란 한 마디로 '신-만남'의 틀거리를 말한다. 그 이전 까지는 신을 만나는 결정적인 통로가 자연이었고 그 중에서도 점성술이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인 갈대아 우르로 대표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점성술이나, 이집트의 태양신, 가나안의 바알리즘은 모두 신을 만나는 틀거리가 자연에 있음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해와 달과 별이 만남의 결정권자임을 보여 준다.

 

    이런 점성술의 신앙은 예수님 때에도 다시 부각된다.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이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다. 점성술의 끊임없는 도전은 요한 계시록에서도 이어진다. 어린 양 예수님에게 24 보좌가 무릎을 끓고 경배를 드린다. 5. [계 4:4]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사람들은 이십 사라는 숫자에서 쉽게 구약의 12 지파와 신약의 12 사도를 읽어 낸다. 그러나 에드워드 로제는 요한 계시록의 본문 읽기와 배경 읽기를 통해 이십 사의 보좌가 당시 소아시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점성술의 신앙임을 밝혀 냈다. 즉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영향을 이어 가고 있던 소 아시아 지역의 점성술에 따르면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별이고 그 별들을 움직이는 것은 별들의 별인 스물 네 개의 별로서 남반구에 열 두 개와 북 반구에 열 두 개가 있다. 그 별들의 별이 예수님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이것은 점성술이 오랜 기간의 갈등을 접고 기독교 신앙에 완전히 굴복하는 '신-만남'의 변이에 대한 선포다.

 

   그런 신을 만나는 틀거리의 갈등 한 가운데 십자가의 사랑이 곧 예수님의 본질이 있다. 사도 요한은 십자가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 되었고,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때문에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요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 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볼 수 없지만 사랑안에 거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사랑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지름길을 말해주고 있다. 요한 일서 4장 7절로 11절의 말씀은 이를 아주 명확하게 선포한다

 

     [요일 4:7-11]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사랑을 가르쳐 주신 분이시고 사랑을 드러내신 분이시며 사랑의 가치를 알려 주신 분이시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을 만나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신 분이시다. 사람은 끊입없이 지가 존재성을 묻고 산다. 어떤 사람은 뚜렷하게 질문하고 인식하고, 어떤 사람은 삶에 지쳐 무의식적으로 간과하고 지나갈 뿐이지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인식하지 않는 아무도 사람은 없다. 심지어 설령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애 전부를 대체적으로 함부로 살았다 할 지라도 죽는 순간에 그는 자신의 존재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좋든 싫든, 받아들이던 거부하던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신은 인간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신을 만나는 만남의 틀거리를 예수님이 아주 새롭게 제시하였다. 점성술에 의한 운명론의 수용이 아니고. 무선운 자연의 신 앞에 생존을 굴복하는 비겁한 인간의 모습조 아니고, 반대로 프로메테우스의 불 이야기처럼 신에 대하여 저항함으로 인간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계시된 사랑을 통해서 신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물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대답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예수님의 이야기이며 기독교의 자산이다. 기독교가 종교인지 아니면 복음인지 논쟁하는 보수 논객이 있다. 기독교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파하는 이론가들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웃기는 일들이다 . 기독교는 말의 존재가 아니라 능력의 존재이다. 말 나불랭이 속에 표현된 정의가 중요한 것이 아나라 삶 속에 녹아진 체험이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이고, 기독교의 가장 아름다운 힘은 사랑안에 나타나 있고, 기독교가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길은 사랑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인간의 신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믿는 구세주 예수님이 말 그대로 세상을 구원하신 길이기 때문이다.


 




 

 

 

출처 : 생기묵상원
글쓴이 : 생기목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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