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본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마16:13-16)
예수님은 누구신가? 일찍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질문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진술하는 우리의 고백 속에 예수님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오묘한 진리 속에 예수님의 본질이 있다. 예수님의 생애를 전해주고 있는 복음서는 이 오묘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전해주고 있다. 마태복음음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선포한다(마1:1).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다(마가복음1:1).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선포한다.(누가복음 1:35).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라고 선포한다.(요한복음1:1-14)
사복음서의 예수님 진술은 있는 그대로만 읽으면 한 편의 줄거리처럼 연결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사람의 아들이다.(마태복음)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마가복음) 그리고 이 어울릴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명제 곧 사람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가능하다.(누가복음). 마지막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만나는 오묘한 진리는 예수님이 원래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셨는데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한 몸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얻을 수가 있다.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특별성 혹은 차별성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종교라는 점이다. 예수님의 본질은 이를 극명하게 잘 드러내준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사람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만날 수 있는 본체는 사람이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드러내준다. 예수님에게서 사람과 하나님이 만났다. 이것은 두 가지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사람과 하나님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사람의 몸인 것과, 사람과 하나님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님의 본질 때문인 것을 말해주 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구원이란 결국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다. 영생이란 죽지 않는 것이고 죽지 않는 것은 신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 죽지 않는 신의 본질이 어디에 만들어 지는가? 사람의 몸이다. 성경은 부활체의 선포를 통해 지금과는 다르나 부활한 후에도 신령한 몸이 있다고 말한다(고린도전서 15장 35절-49절) 하나님은 몸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몸이 있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공간이 사람의 몸인 것을 말한다. 다만 그 공간이 육의 몸이 아니라 신령한 몸이라는 특별성이 있을 뿐이다(고린도전서15:46-49)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는 많은 시도가 신화를 낳고 고행종교를 낳았으나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선포함으로 모든 인간 중심의 종교를 우상숭배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는 사람이 사람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모델이 예수님이시라는 말과 같다. 사람이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라는 말이다. 단 예수님의 출생에서도 분명히 보여준 것처럼 성령의 개입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타 종교와 다른 점이다. 사람이 사람 스스로 하나님의 본질을 얻어 살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움으로만 하나님의 본질을 얻어 살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성령의 도움으로만 우리는 사람이면서 사람의 본질만 가지고 살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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