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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默想)/거룩한 묵상

[스크랩] 예수전 묵상

우순(愚巡) 2006. 4. 15. 20:52
 

“예수전 묵상”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 <누가복음24:44-48>



  1. 예수전 묵상이 꼭 필요하다!


   흔히 묵상하면 말씀묵상이나 QT를 연상하는 데 ‘예수전 묵상’이라니? 언뜻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는 말이다. 예수전이란 예수님에 대한 전기이다.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이다. 그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한 이야기를 묵상하는 것이 예수전 묵상이다. 예수전 묵상이 묵상인 것은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시며 말씀의 핵심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 자체가 태초부터 존재하신 말씀이며(요한복음 1장 1절, 14절), 성경의 핵심이 되는 모세의 울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4장 44절-48절) 예수님 자신도(누가복음24: 44) 가장 사랑했던 제자 요한도 (요한복음 1:1-14) 예수님을 말씀이며 말씀의 핵심으로 선포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과 말씀을 동일시하는 확고한 선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또는 이기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14>



    그러므로 결국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또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는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님을 만나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말씀을 묵상하고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면 그 모든 말씀 묵상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명작을 만들기 위해 성경을 열 세 번인가 통독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TV 대담에 나와 자기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성경을 열 세 번이나 통독하고 성경을 기반으로 그것도 예수님을 소재로 해서 불후의 명작을 창작했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 나름대로의 예수님을 만났을 수 있고, 그런 예수님에게서 특히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님 모습에서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와 구도자의 이상을 읽어냈을 수는 있지만 진정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우리가 닮고 싶은 예수는 만났지만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는 만나지 못했다는 말과도 같다. 예수님은 우리가 닮아야 할 우리의 모법이며 스승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어야 할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믿음(Faith of Jesus)과 함께 예수에 대한 믿음(Faith about Jesus)도 중요하다.  이 둘은 모두 다 중요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며 내용이다.


2. 예수전 묵상은 예수님을 만나는 감격이다


    만남에는 스침과 교통이 있다. 스침은 단순한 만남이고 교통은 서로가 통하는 만남이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강복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교통하심이다. 성령의 교통하심이란 우리 밖에 계신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놀라운 사건이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처럼 단순히 예수님을 스쳐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밖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사건이다. 우리 밖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며 우리의 구원자로서 죄 값을 치르신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 밖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이시지 우리의 삶을 바꾸시지는 못한다. 바로 여기에 값싼 은혜주의자들의 신학적인 한계가 있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오직 우리 밖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신학 이론은 값싼 은혜의 논리다. 은혜는 값없이 주지만 값싼 것은 아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지만 아주 값비싼 것이다. 그 값비싼 은혜는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신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구원을 위한 그 무엇이 있다는 단순 논리는 은혜를 거부하기 때문에 배격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구원은 우리 밖에서만 일어나는 나와는 전혀 무관한 신의 단독행동이라는 논리 역시 단순하고도 값싼 은혜의 논리이다. 구원은 우리 밖에서 죄 값을 치루시는 대속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바꾸시는 놀라운 사건이시다. 때문에 진정한 구원은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만나는 사건이다. 예수님을 우리 밖에서가 아닌 우리 안에서 만나는 놀라운 사건이 예수전 묵상의 열매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과 신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헬레니즘적인 사고를 뛰어 넘는 진정한 성경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을 다가오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향해 다가가는 인간의 감격적인 만남의 교통이다.



3. 예수전 묵상은 철저하게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예수전 묵상을 통하여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웨슬리 신학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존 웨슬리는 우리 밖에 계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 안에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무죄하거난 구원의 값을 가져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 때문이라고 선포했다. 웨슬리는 성경 묵상을 통하여 성령님이 선행은혜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 다가서게 하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우리 밖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바꾸시게 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오늘날 전 세계 오순절 성령신학의 기초가 웨슬리 신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성령님은 교통케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인간을 교통케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밖에 계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만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구속사건이 우리 밖에서 하나님 혼자만의 독백이나 판토마임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시는 ‘더불어 함께“ 하시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놀라운 성경의 선포를 듣게 된다. 예수님은 말씀이다.(요1:1-14). 그리고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시는 목적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한복음 14:26) 성령님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말씀이신 그 분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또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에 끊이없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요한계시록 2장 17, 29 3장 6,13, 22)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령의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같은 성경을 읽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어느날 느낌도 없고 믿을 수도 없던 그 성경말씀이 강하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의 핵심이며 그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우리 밖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사 만나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묵상하고 성경을 묵상할 때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출처 : 생기묵상원
글쓴이 : 생기목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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