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도 사랑도 신비다(2010-1003 설교) 전문
성찬도 사랑도 신비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7-9)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보내시고 제정하신 예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만찬 예식’(聖晩餐, The Holy Communion)입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유일한 예식인 ‘성만찬’
어떻게 보면 교회가 가진 모든 예식들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을 통해 만들어 주신 예식은 ‘성만찬 예식’ 하나일는지 모릅니다. 세례 예식은 이미 세례 요한이 시작하고. 세례 종파가 시작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기념하라”(눅22:19)는 이 예식 한 가지를 남겼습니다. 성일을 기념하고, 또한 교회가 다른 많은 행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공식적으로, 이것을 꼭 하라고 하신 것은 ‘성만찬 예식’이 유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臨齋)를 경험하는 성찬(聖餐)
이 ‘성만찬 예식’은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신비를 제공해 왔습니다. 성찬도 사랑도 마찬가지로 신비입니다. 기독교는 극단적 신비주의에 빠지면 열광주의에 빠져서 이단에 빠지거나 광신도가 되어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극단적 신비주의가 아닌 건강한 신비를 소유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은 자신의 주관적인 차이에 따라서 많은 편차를 보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가장 신성시하는 이 성만찬이 초대교회에서는 아주 웃지못할 희극과 같은 일로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식인종들의 식사시간으로 알려졌던 것입니다. ‘살을 먹는다. 피를 마신다.’ 전혀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낯선 이방인이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를 교회 안에 사람들은 은혜롭게 받아들였지만, 교회의 바깥에 사람들은 미래 종교와 같이 그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오해 중에 가장 큰 오해가 바로 ‘식인종의 식사’입니다. 사람들의 판단과 생각이라는 것은 이처럼 기독교를 심하게 오해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이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신비를 간직해왔습니다.
감리교회가 고백하는 성찬의 신비(神秘)
특별히 우리 감리교회는 극단적인 종교개혁파들처럼 이 성찬예식이 단순히 기념행사가 아니라는 것을 정리했습니다. 그렇다고 가톨릭처럼 이천년 전에 예수의 살과 피로 바뀌어 지는 ‘화채설’(化體說)을 지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건강한 개신교의 형제인 장로교와 루터교와 함께 ‘임재설’(臨齋說)을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받는 이 성찬의 살과 피에 해당하는 떡과 포도주는 이천년 전의 살과 피로 바뀌는 물리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지만, 그 속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어 왔습니다. 이것은 사랑처럼 신비한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을 하면, 사랑을 받는 자가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식들과 겪는 가장 큰 갈등 중에 하나는 무엇입니까? 부모의 사랑을 자식들이 깨달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그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진하게 깨달을 때까지는 나이가 들어서 자신이 엄마 아버지가 되어서 자식을 낳아보고 나서야 부모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자가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깨달아 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는 자가 그 사랑하는 자의 진심을 알 때만이 깨달아 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깨달을 수 있었으면, 이 땅에는 죄도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과 불화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찬을 받는 자가 가져야할 깨달음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임하고, 평화가 임하고, 성찬을 받는 사람들에게 병과 약한 것을 치유하는 능력이 일어나고 이 성찬을 받는 사람들에게 그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성찬을 받는 자의 마음 속에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끝으로,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능력이 사랑하는 자의 사랑의 양으로, 상대방에게 전달이 되어 진다고 하는 것은 논리상으로는 맞지만, 실제상으로는 틀린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받는 자의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찬을 받는 자가 깨달음이 있을 때, 이 성찬 속에 담겨진 놀라운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병과 약한 것이 치유받고 낙심과 절망에서 희망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몸이 전율을 느낄 정도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모시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신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늘 이 성만찬을 받는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어서 이 성찬 속에 담겨진 신비한 사건,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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