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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만민이 기도하는 집(2010-1017 설교) 전문

우순(愚巡) 2010. 10. 24. 08:15

만민이 기도하는 집

 

2010년 10월 17일 서철 담임목사

:: 이사야 56:7 ::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성전(예배당)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상동교회는 1년에 두 번 특별새벽기도회를 합니다. 부활절을 앞에 두고 3주간 기도회를 하고 추수감사절을 앞에 두고 3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합니다. 금년에도 오늘부터 시작해서 11월 첫 주까지 추수감사절 직전 3주간을 특별새벽기도 주간으로 섬깁니다. 오늘 기도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이사야서에 있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했고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면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집을 기도하는 집이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집의 기능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대교의 성전은 제사가 주요한 기능입니다. 그 다음에 각 지역에 세워둔 회당은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이 중요한 기능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시편을 보면 성전에 올라가면서 그들이 찬송을 불렀다고 하는 기록에 근거해볼 때 하나님의 성전에서 찬송을 했을 거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집을 설명할 때 『제사하는 집이다』그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사당과 같은 것입니다. 또 『교육하는 집이다 혹은 가르치는 집이다』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또 『찬송하는 집이다』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제자훈련을 했거나 또는 혼례를 했거나 또는 교회 안에서 각종 예식을 하는 집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불러도 틀린 점이 없습니다. 근데 왜 선지자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을 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해서 성전에 들어가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의 책들도 보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설교도 보고 종합한 결과 한 가지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인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지름길은 기도이기 때문이다. 제사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교육시설이라고 해서 가르치는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르치는 자가 있어야합니다. 찬송하는 집이라 그러면 혼자도 찬송할 수 있지만 찬송을 모르는 사람들은 적어도 반주자가 있어야하고 음악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만 찬송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데 돕는 이가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대단히 번거롭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다릅니다.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1일대일의 관계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고해성사 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개신교에는 고해성사 제도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매개자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죄를 용서함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이 목사나 사제에게 와서 상담을 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또 목사나 사제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가 죄 사함 받았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목사나 사제의 상담이나 선포가 있기 때문에 죄가 용서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죄가 용서 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를 용서해놓고 나서 그다음에 사제의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주 놀랍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는 그 어떤 매개자가 없이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보자이며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셔서 그리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단번에 제사를 드리므로 모든 제사의 효력을 다 끝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끝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14절에『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 한 번의 제사가 모든 제사의 효력을 완성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임을 만날 수 가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충만한 교회라고 하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충만하십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원론적인 얘기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인용하기도 하고 자기의 사견을 밝혀가기도 하면서 교회를 이야기 합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근데, 뉘앙스를 보면 교회가 이런 교회여야 된다고 하는 원론적이고 정론적인 메시지 속에는 지금의 교회가 그렇지 못하다고 하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시각 속에는 아주 위험한 함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함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충만하다고 하는 것,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택한 곳에 두시겠다고 하실 때에 하나님이 그곳에 충만하게 계시다고 하는 것, 이것은 인간들의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상동교회는 122년 동안 예배하면서 이곳에 하나님이 충만하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충만하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오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누구든지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바로 기도를 통해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이 없어도 됩니다. 가르치는 자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있으면 예배가 더 짜임새 있게 드려질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있으면 배울 수 있어서 좋습니다. 반주자가 있으면 찬송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세팅된 자리가 아닐지라도 오늘 여러분이 이 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제도적인 교회, 눈에 보이는 가식적인 교회의 조직적인 문제 속에는 결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정론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이 교회가 지나간 2000년 동안 비록 원론적이고 정론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늘 있어왔습니다.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대표적인 것이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다락방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였습니까? 그들은 예수가 죽으실 때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의심했던사람들입니다. 예수를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마태복음 26:40절을 보니까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말씀합니다. 그들은 환난을 피하여 도망갔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든 것도 신학자들이 추정을 해보니까 그들이 처음에는 기도 때문에 모여든 것이 아니라 핍박을 피해서 도망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서 그 모순된 조직적인 제도적인 교회 속에서도 마음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게 되는 순간 성령이 내려오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겁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놀라운 사건을 여기서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 그리스도가 충만하시기 때문에 비록 우리들이 모순이 있고, 결함이 있고, 원론적이고 정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연약한 점이 보일지라도 우리가 마음을 같이하여 더불어 힘쓰면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절에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의 물건을 훔쳐 먹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이 거룩한 제사의 음식을 훔쳐 먹었던 그 시대에 사무엘이 성전에 들어갔고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처음에 사무엘도 엘리 제사장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연거푸 사무엘이 찾아옴을 보고 엘리는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애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가 들은 음성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 같구나. 가서 이제 또 너를 부르는 음성이 들리면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그렇게 말하거라』그리고 또 사무엘이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사무엘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엘리 시대에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던 여자의 아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집의 위대한 역사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교회에 오셔서 어떤 이야기를 들을지라도 마음을 다 내려놓고 이곳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새벽 기도시간에 저는 엘리사의 기도를 설교했습니다. 아람군대가 쳐들어왔을 때에 엘리사의 사환 청년은 두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눈을 뜨게 하소서. 이 청년의 눈을 뜨게 하소서. 보게 하시길 원합니다.” 청년의 눈이 떠졌습니다. 보니까 하나님이 보내주신 불 말과 불 병거가 이스라엘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의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주님이 꽉 채워져 충만한 교회가 되었으니, 제도적이고 조직적인 제도의 결함과 약점과 부분적인 모순이 있을지라도 주님으로 채워지신 이 교회 안에서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눈이 떠지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직장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불 말과 불 병거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제사하는 집이기도하고, 가르치는 집이기도하고, 찬송하는 집이기도 하고, 봉사하는 집이기도 하지만,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기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어떤 도움을 주는 도우미가 없을지라도, 그 어떤 세팅된 조직과 제도가 없을지라도 기도는 나 혼자 할 수 있습니다. 나 혼자 이 하나님의 전에 와서 하나님 앞에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하고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면 기도가 유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기도의 순서가 맞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주님 나는 여전합니다. 나는 실패하고 이 주간에도 하나님 앞에 범죄 했지만 오늘 주님을 만나러 다시 나왔습니다. 지난주에 예배하고 돌아갈 때 내가 세상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또 실패했습니다. 저는 또 낙오됐습니다. 저는 또 범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제가 다시 힘을 내기 원합니다. 제가 다시 유능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제가 다시 하나님 손에 붙들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사해주시고 저를 일으켜 세워주셔서 다시 한 번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세상의 벽이 너무 커서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직장도 잃어버리고 육신은 늙어가며 병만 생기고 마음도 약해져 갑니다. 하나님! 제가 견딜 수 없어서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왔는데, 하나님 제가 기도합니다. 저를 다시 위로하여 주시고, 저를 치유하여 주시고, 제게 다시 용기를 주시고, 제 가슴에 눈물이 흐르는 감격을 주셔서 이 한 주간은 다시 한 번 일어나게 해 주시길 원합니다. 기도가 어눌해도 우리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 주시고 어루만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선민이 아닌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만민이란 말 속에는 이방인을 포함하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교회는 선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유대의 율법주의자가 되어가고, 중세 가톨릭의 형식주의자가 되어갑니다. 우리 속에는 선민의식이 꽉 차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만민에 대한 구원 사상이 사라지고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어느 사이에 신앙 우월주의가 싹터서, 선민주의가 싹터서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교회는 선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오늘 성경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과 연합하여 조합하여 나오는 이방인들이 기도할 수 있는 집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사야서는 포로기의 선지서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포로로 끌려가있는 모습 속에서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망했구나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그렇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 또 한쪽으로는 우리는 선민이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지만은 우리 옆에 있는 이방인들인 이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옆에 있는 분들을 바라보시면서 저 장로님은 원로시니 기도하면 하나님이 팍팍 들어주실 거야 그런데 저 집사님이나 장로님은 내가 봐도 하나님이 기도를 안 들어주실 거야 혹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위험한 생각입니다. 야고보는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려고 했고,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가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내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해하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가인을 해하면 안 된다.”여러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생을 죽인 형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셔서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성경을 읽으면서“기독교에 가보니 동생을 죽인 살인자의 기도도 하나님이 들어주시는데 그것이 바른 종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더 억지를 써서 “동생을 죽여도 기도를 들어주시니, 살인 같은 거 밥 먹듯이 하자!” 그렇게 권장하는 말씀 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지나간 수 천년동안 단 한 번도 죄를 지으라고 권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짓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현실과 인간의 구원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우리는 종종 잊고 있습니다. 나는 선민이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만민이라고는 착각을 합니다. 교회는 선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교회의 이방인처럼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은 만민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니까 기도 할 때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약해지지 마십시오. 이 교회에 오셔서 아직 낯설고 적응하지 못했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등록하지 않은 채 지나가면서 이 교회에서 예배는 분이십니까?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선민이 아니고 이방인과 같은 만민이고 교회에서 내세울만한 공로가 없는 사람일 지라도 여기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치유가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위대한 점이며 하나님의 넓으신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옆 사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가인과 같을 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가 혹시 죄를 지었을지라도 질병을 고침받기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치유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구원의 법칙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기쁨

 

 

    끝으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쁘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은 이방인일 지라도 기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사야서는 66장으로 되어있습니다. 1장부터 39장까지는 구약성경 39권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0장부터 66장까지는 신약적인 복음서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를 제1 이사야서와 제 2 이사야서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2 이사야서에 해당되는 56장에서는 내 집은 선민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고 이 만민 속에는 이방인이 들어있고 이 이방인 가운데 하나님과 연합하는 이방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는 복음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셔서 성전에 들어가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에 오셔서 하나님을 만나시길 원하십니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연합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1년에 두 번씩 하는 특별새벽기도 주간을 꼭 기억하셨다가 힘들지만 이때만큼은 나오셔서 함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비록 수는 적지만 7시 기도회에 몇 사람이라도 시장터 사람들이 나와서 같이 기도를 합니다. 그들을 배려해서 같이 기도를 합니다. 또 우리 가운데 먼 거리에서 오시는 분들을 배려합니다.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한 자는 하나님이 기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교회는 하나님이, 주님이 꽉 차있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이 주재하시고 임재하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선포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곳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삶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자식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질병을 고쳐 일어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기사와 표적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꼭 기억하시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