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눈물
<마태복음27:45~56> 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ㄴ)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시 22:1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3) 어떤 사본에, 49절 끝에 요 19:34와 같은 말이 있음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아직도 흐르는 눈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한 주간은 어떻게 지내시었는지요? 따뜻한 봄볕이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활짝 피어난 봄꽃들이 우리의 마음을 밖으로 재촉하던 완연한 봄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봄날을 만끽하기에는 <아직도 흐르는 눈물> 때문에 꽃에 마음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304명의 무고한 시민과 어린 학생들이 차가운 물속에 수장된 채 죽어간 세월호의 눈물이 흐릅니다. 특히 모든 이들의 죽음이 가슴 아파 눈물을 흐르게 하지만 248명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아직도 물속에 잠겨 있는 9명의 실종자들 그리고 그 들의 가족들이 흘리는 눈물이 우리네 가슴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1년 전인 2014년 4월 16일 벚꽃보다 더 아름답고 목련보다 더 우아했던 우리의 아이들이 차가운 물속에서 숨을 거둔 아픔이 아직도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계속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지난 한 주간 제 마음에는 활짝 피어난 벚꽃이 아니라 봄날 따뜻한 햇살을 방해하는 비바람에 떨어진 길가 가장자리의 꽃잎들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아스팔트 가장자리로 흩날리며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면서 신음하는 꽃잎들이 아직도 울고 있는 세월호의 아이들 같았습니다. 1년 전 304명이 차가운 물속에서 죽어간 세월호의 사고로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 248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우리 감리교회의 6개 교회 17명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죽어간 아이들도 아이들의 부모님들과 형제들은 아직도 울고 있습니다.
작년에 안산 분향소에 가서 분양을 하고 단원고등학교 옆에 있는 명성감리교회에 들렸을 때 담임목사이신 김홍선 목사님은 죽은 아이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유가족들도 큰 문제라면서 가족들의 치유를 위하여 힐링 센터를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안산명성교회는 지난주일(4월 12일)을 <기억주일예배>로 드리면서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억했습니다. 명성교회 학생 중에도 여섯 명이나 희생되었습니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 800여명은 지난 4월 16일에 단체로 합동분향소에 가서 1주기 추모식을 하면서 눈물을 쏟아 내었습니다. 지금도 맹골 수도에서는 여린 손을 내밀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구조 요청 소리가 굉음이 되어 울리고 있습니다.
희생자들의 가족들 52명이 삭발식을 했습니다. 머리를 삭발한 52명의 가족들의 마음에 아직도 눈물이 흐릅니다. 모든 이의 슬픔이 아프지만 아이들을 잃어버린 부모님들의 마음이 말 할 수 없이 아픕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은 <진실규명>과 <세월호 인양>을 간청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 인양을 두고 인양비용을 계산합니다. 진실규명과 아이들의 시신보다 돈을 더 걱정합니다. 효용성이나 실효성을 생각하면 돈을 계산하는 것이 타당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명 앞에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시신 앞에서 돈을 계산하는 이 사회의 풍토는 잘 못입니다. 돈을 계산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는 생각안하지만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약 자기들의 아이들이 죽어갔다면 어땠을까? 자기 아이들의 시신을 물속에 나누고도 그런 돈 계산을 할 수 있을까요? 세월호는 무조건 인양되어야 하고 사고의 진실은 철저하게 규명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직도 흐르고 있는 눈물이 멈추어질 것입니다.
[사람의 끝과 세상의 밑바닥]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희생당한 단원고등학교 <2학년 3반 최윤민 언니 최윤아씨>는 지난 일 년 간 <사람의 끝>과 <세상의 밑바닥>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동생의 죽음 앞에서 동생이 살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동생의 시신이나마 찾으려고 애쓰면서, 정부가 사고의 진실을 규명해주기를 간총하면서 <사람의 끝>과 <세상의 밑바닥>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참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끝>을 보고 <세상의 밑바닥>을 보았던 일 년간 동생을 잃어버린 언니는 세월호의 침몰만이 아닌 <미래와 희망의 침몰>을 보았습니다.
최윤아씨가 모 언론사와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의 밑바닥을 본 사람이에요. 그 현장 한 가운데서, 대한민국 밑바닥을 보고 사람들에게 배신을 정말 많이 당한, 사람들에게 버림을 정말 많이 받은, 그런 사람이에요.”
최윤아씨는 배가 가라 앉던 날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정말 가슴 아픈 얘기를 듣고 정신을 차렸어요.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어느 새벽에, 아빠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애가 살아있을 확률이 없다는 거야, 윤아야. 이제 애 찾아서 가는 일만 남은 거야. 엄마 안 쓰러지게 네가 옆에서 잘 보고 있어. 아빠는 괜찮아….” 그러면서 아빠가 막 우셨어요. 그 말을 하시는데, 아니야 아빠 윤민이 살아있어, 그런 말도 못했어요. 사실 누구보다 애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건 제가 아니라 아빠잖아요. 그래서 그 말도 못하고, 그냥 엎드려서 막 울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엄마가 그러시는 거예요. “이제, 애 데려가는 게 목표라고…애 나오면, 데려가는 게 목표라고. 이제 그것밖에 없다고…. 윤민이 무슨 옷 입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그 말을 엄마가 하시는 거예요. 그 얘기들 듣고 나서…그 때까지는 어떻게든 애가 살아있을 거라고 믿고 버티려고 했는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더라고요. 부모님들이 그러시니까,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최윤아씨는 동생의 죽음 이후 스스로에게 희망을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사고 이후…저 스스로에게 질문했어요. 너한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도 희망도 보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최윤아씨는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미래의 침몰, 희망의 침몰을 경험한 것입니다. 최윤아씨는 그럼에도 끝을 보여준 사람들에게 밑바닥을 보여준 세상을 향해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계속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주려는 감사한 사람이 있다는 걸도 알고, 누군가 그 손을 잡아줄 거라는 희망이 있으니까…마지막 남은 내 희망 같은 거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난 밑바닥까지 쳤지만 포기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걸 포기하는 것 같아요. 내가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근데 손 하나 내미는 거, 그거 정말 별거 아니거든요. 단지 내 용기가 필요할 뿐, 정말 별거 아니에요. 또 거기서 돌아온 보상은 너무나도 감사하고 큰 거거든요. 사람들이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안 될 거라고,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밑져야 본전으로 일단 손 한 번 내밀어 봤으면 좋겠어요. 그걸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고, 그래서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지금껏 제 손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저는 끝을 보고,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음에도, 지금도 용기내서 손 내밀고 있으니까."
팽목항구에서 부모님들은 울었습니다. 자식이 죽어서 울고, 시신도 못 찾을 까봐 울고, 사람의 끝, 세상의 밑바닥을 보면서 울고, 사람보다 돈을 앞세우는 세대 풍조에 울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울었습니다. 그 와중에 엉터리 기사를 쓰던 기자들, 사기를 치던 보이스 피싱족들, 밥도 못 먹는 사람들 앞에서 라면을 먹던 관리들을 바라보면서 울었습니다.
시편 42편의 저자는 자신의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고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시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혹시 너무 눈물이 나서 눈물이 주야에 음식이 되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세월호 사고로 가족을 잃어버린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야말로 눈물이 주야에 음식이 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끝을 보고, 세상의 밑바닥을 본 채 울고 있는 이들에게 성도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말씀합니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울고 있는 사람들, 세상의 밑바닥을 보고 사람의 끝을 본 사람들, 자식을 잃어버리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암들에게 성도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고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어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우리 주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어서 울고 있을 때 함께 우셨습니다.
<요11:32~35>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아들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
오늘 읽은 성경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던 날의 이야기입니다. 세월호 1주기가 되는 지난 주간 내내 제 마음을 붙잡고 있던 생각은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이었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248명의 단원고 학생들의 부모님들을 생각하며 위로의 말을 찾다가 생각한 마음입니다. <세월호 인양 촉구서>에 서명을 하고 주일 예배 시에 입는 목사 가운의 스톨에 달 노란 리본을 준비하는 데 문득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이 생각났습니다. 아울러 자식을 먼저 하나님의 나라로 보내신 부모님을 위로하면서 더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찾을 때 아버지 하나님은 어떠셨을까? 문득 제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은 <눈물>이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뜨거운 눈물이었습니다. 울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물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27:45~46>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성경은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 시간으로는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입니다. 이 시간은 해가 중천에 떠서 가장 밝은 시간이고 가장 따뜻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가자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가장 밝은 시간을 가장 어두운 시간으로, 가장 따뜻한 시간을 가장 차가운 시간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밝음이 사라지고 어둠이 그 자리를 대체합니다. 따뜻함이 사라지고 차가움이 온누리를 얼어붙게 합니다. 이 날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또 예수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함께 우셨다고 기록했습니다.
<히5:7>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를 향하여 구원을 요청하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울고 있는 독생자 아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울고 계시는 모습이 제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을 잡은 것은 <하나님의 눈물>이었습니다. 아들이 죽을 때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하나님은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간구와 소원을 올릴 때 어떻게 하셨을까? 제 마음에 주신 주님의 음성은 <하나님도 우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이 십자가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죽는 그 순간, 밝음이 어두움이 되고 따뜻함이 차가움이 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오버랩 되었습니다. 다시는 눈물이 없게 하시겠다는 말씀 말입니다. 눈물을 씻겨 주시겠다는 말씀 말입니다. 하나님은 눈물을 씻기십니다.
<계7:15~17>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21:1~4>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1)계셔서 어떤 사본에,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가 있음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도 없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눈물을 씻겨 주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다시는 눈물이 없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1차적인 메시지는 박해자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 하나의 깊은 뜻을 성경의 행간에서 읽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던 하나님 자신의 눈물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아시는 분이시고 눈물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의 고통을 느껴본 체험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는 자의 눈물을 씻겨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죽인 사람들 때문에 울고, 아들의 죽음을 방관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방관한 어떤 사람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경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울게 만든 사람들입니다. 아들이 죽던 날 하나님을 힘들게 한 사람들은 방관자였던 <어떤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고 말합니다. 단지 그 중의 한 사람만이 해명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합니다.
<마27:47~49>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3)
성경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들>은 정말 이 시대의 사람들, 원 죄 아래 놓여 있는 우리의 모습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죽던 날에 <어떤 사람들>은 구경하고, 방관하고, 조롱했습니다. 죽어가는 예수님의 아픔에 진하게 동참하는 사람은 단지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악한 세대의 사람>은 대부분 이런 <어떤 사람들> 같습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27장의 앞부분을 읽어보면 더 가관입니다. 무리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선동을 듣고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합니다.(마27:20~21) 얼마나 무리들의 외침이 컸던 지 빌라도는 민란이 나는 줄로 알았다고 전합니다.(마27:24) 백성들은 거침없이 말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돌리라고 말합니다.(마27:25) 그러자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쐬우고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를 오른 손에 들리우게 하고 희롱합니다.(마27:29) 지나가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마27:39~40) 심지어는 함께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을 하였습니다.(마27:44)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의 무관심, 조롱, 모욕 속에 죽어 가시면서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자기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은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의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울부짖으며 <진상규명>과 <신체인양>을 간청하는 목소리가 십자가에서 울부짖던 예수님의 절규처럼 들려집니다. 우리들은 혹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방관하거나 조롱한 어떤 사람들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울게 만든 어떤 사람들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눈물로 만든 부활]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제 마음에 주신 또 하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눈물로 만든 부활>입니다. 저는 요즘 신학적 논리나 교리적 신조나 종교적 교훈 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성령 안에서 느끼는 기쁨으로 삽니다. 좀 더 진지해지고, 좀 더 간절해졌습니다. 부활절을 보내면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보내면서, 제게 <부활>에 대한 느낌 하나가 생겼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눈물로 만든 생명의 보석이다!> 하나님은 눈물로 부활을 준비하셨다. 하나님은 사망의 권세가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던 날 눈물로 부활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은 부활입니다. 하나님은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무덤을 굴려내시고 땅을 진동시키시며 바위를 터지게 하여 부활을 준비하시고 아들을 살려내셨습니다.
성경본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마27:50~53>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아들이 죽던 날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부활이었습니다. 성소휘장이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는 현상과 함께 부활의 시간이 일어납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고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나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전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죽음 이야기에서 주님이 선포하신 것은 부활과 생명이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11:23~27>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부활은 죽음과 맞서 싸우신 하나님의 승리이십니다. 사탄은 인간에게 죽음을 들이대고 사망의 권세로 위협하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의 권세와 맞서 싸워 죽음을 멸하십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은 지금도 죽음과 싸우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음은 우리들에게 끝없는 아픔과 상처를 남깁니다. 그래서 인간은 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울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면서, 우는 자들의 눈물을 씻겨 주면서, 다시는 울지 않도록 <눈물을 흘리게 한 죽음>과 맞서 싸웁니다. 죽음을 근원적으로 소멸시키시고 생명을 다시 살나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눈물로 생명을 위하여 싸우고 부활을 위하여 싸웁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습니다.
<계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은 사망을 음부와 함께 불못에 던져버리십니다.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을 만날 지라도 끝까지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서야 합니다. 죽음은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어버릴 수 없습니다.
<롬8:37~39>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말라고 편지를 씁니다.
<고전 15:55~58>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성도는 부활을 믿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설교하기 위하여 부활을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성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눈물로 만드신 부활이 우리를 죽음의 무덤에서 살려내실 것을 믿습니다. 사망을 통과하나 영원한 사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사망 가운데 영원히 버려두지 않습니다. 죽음은 삶이 끝나는 문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영생의 문입니다. 우리 모두 <세월호 사고의 진상규명과 선체 인양>을 기원하면서 <하나님의 눈물로 만든 부활>의 믿음으로 죽음과 맞서 싸웁시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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