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절정이 되게하라
[열왕기상2:1~3]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할렐루야!
한 주간 행복하게 지내셨습니까? 매 주간 매일 매 시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만족으로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정말이지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만족 때문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선포할 말씀은 "죽음을 절정이 되게 하라!"입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행복과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난 주일 오후 주일 설교를 정리하면서 웨슬리의 행복관과 죽음을 생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 김금례 권사님의 장례식을 섬기면서 부활과 영생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일 오후에 설교를 되새김하곤 합니다. 마치 바둑을 두고 나서 복기하듯이 주일 설교를 차분히 되짚어 봅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는 주로 웨슬리의 행복과 죽음에 대하여 정리했습니다. 웨슬리의 설교와 일기에 나타난 행복관을 읽다가 웨슬리의 죽음 장면에서 그의 행복관이 절정을 이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웨슬리는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 한 밤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은성 권사님의 모친이신 고 김금례 권사님의 소천 소식이었습니다. 권사님과 장례예식을 상의하고, 다음 날인 월요일 오전에 임종예식, 오후에 입관예식, 그 다음 날 화요일 아침엔 장례에식, 오후엔 하관예식을 하면서 한 주를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죽음은 삶의 절정이라는 것입니다. 행복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죽음은 끝장이 아니라 절정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죽음은 이별이 아닙니다. 헤어짐이 아닙니다. 끝장이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의 삶의 가장 큰 절정입니다. 최고의 순간입니다. 자기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절정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우리의 믿음, 우리의 성품, 우리의 기도를 가장 진실하게 드러냅니다. 죽음의 순간은 삶의 절정을 표현하는 순간입니다. 죽음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가는 길입니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회피하지도 말고, 담대하게 정면으로 돌파해갑시다. 우리의 삶의 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죽음을 삶의 절정이 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죽음은 행복의 절정입니다]
웨슬리는 기독교를 행복이라고 정의했고, 자신 스스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그 행복한 삶은 절정을 맞이합니다. 웨슬리는 행복하게 살다가 죽음을 통하여 행복의 절정을 맛보았습니다. 웨슬리의 임종 자리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했습니다. 한 마디로 웨슬리는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어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웨슬리의 죽음은 행복의 절정이었습니다.
웨슬리의 최후를 지켰던 벳시 리치(Betsy Ritche)는 당시 39세의 초기 감리교 신자로 후에 감리교회의 성자로 추앙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1791년 2월 28일 소천하시기 이틀 전 웨슬리 목사님의 일화를 이렇게 전합니다.
"급격히 약해져 친구들은 모두 대단히 놀랐고 회이트헤드 박사는 다른 의사를 불러 오도록 촉구하였다. 브랫드포드씨가 우리의 존경하는 아버지에게 가서 그 생각을 여쭈자 그는 절대로 안된다고 하면서 "화이트 헤드 박사님이 누구보다 내 상태를 알고 계셔! 지금 나는 대단히 만족스러워 다른 사람은 필요하지 않아"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거의 하지 않고 거의 하루종일 주무셨다. 그러나 그분의 침묵이야말로 교회,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그 분이 서둘러 가고 있는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그가 얼마나 마음을 집중시키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 번은 낮으나 똑똑한 소리로 "예수의 피"를 통해서만 가장 거룩한 곳에 이를 수 있다고"고 하셨다.그 때 기운만 있었다면 좀 더 애기하고 싶은 듯 하였다. (웨슬리 총서 8권 242쪽)
웨슬리 목사님의 행복관을 정리하다가 제가 느낀 것은 죽음이 절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행복하게 사셨고 그 행복한 삶의 자세가 죽을 때 더욱 빛이 난 것입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하여 집중했고, 오직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만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소천 직전인 1791년 3월 1일 화요일에는 그 유명한 말씀을 다시 남깁니다. "아무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 외엔" 하였다. 그리고 일어나서 축복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숨쉬는 동안 나를 지으신 이를 찬양하리,
또한 내 목소리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는 때에도,
나의 숭고한 힘을 다하여 찬양하리;
생명과 생각과 존재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죽지 않는 시간속에서도,
내 찬양의 날은 끝나지 않으리니"
<중략>
그분이 의자에 앉으실 때에 우리는 그분이 임종하실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임종이 가까운 몸인데도 약한 소리로나마 "주여, 당신께선 말할 수 있는 자에게 힘을 주시며 말할 수 없는 자에게도 주시니나이다. 주여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말씀하소서, 그리하여 모두가 당신께서 우리의 혀를 푸셨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그런 다음 그분은 찬송을 불렀다;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신께
여기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약해지면서 숨을 한 번 몰아 쉰다음 "이제 다 되었군. 우리 모두 가자"고 하셨다. 우리는 그분을 침대에 눕혔으며 그분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러나 조용히 누워 멀마 동안 자고 자고나서 나를 가까이 불러 "벳시, 그리고 브렛포드, 다른 사람들도 기도하고 찬송드려 주어요" 우리는 무릎을 꿇었고 진정 우리의 가슴은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찼다. 방안이 하나님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웨슬리 총서 8권 244쪽~245쪽)
웨슬리는 점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벳시 리치는 웨슬리가 마지막 모습을 승리의 순간으로 묘사하면서 웨슬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죽었갔는 지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잠시 기다리시더니 남은 힘을 모두 모아 외쳤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약속을 지키시는 우리의 여호와를 믿으라'고 하며 울고 있는 친구들을 위로하는 듯, 그분은 떨리는 두 팔을 들어 승리를 표시하였고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 나지 않지만 퍼지는 나팔소리를 내어 우리는 마음으로 그 음성을 들을 수는 있었다. "모든 것 중 가장 나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다시 얼마 후 타들어가는 입술을 축이고 나서 그분은 "안돼, 우린 열매를 거둬야 한다. 썩은 송장에 돤심도 두지 말라"하셨다. 잠시 숨을 몰아 쉬더니 "구름이 가득 내려 온다! 하고 곧이어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다!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부탁하셨다. 브로드벤트(Broadbent)씨가 또 한번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입이 되었다. 그리고 웨슬리 목사님도 위의 말을 하곤 대단히 기진맥진 하였으나 아직은 영혼은 불타오르는 듯하였다. 거의 밤새도록 앞에서 인용한 시편을 다시 반복하려는 듯 하였으나 단지, 내 찬양하리........내 찬양하리.......하는 소리만 들렸다. (웨슬리 총서 8권 245쪽)
죽음은 행복의 절정입니다. 웨슬리는 행복한 삶을 죽음의 순간에 절정이 되게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믿음을 보여줍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부터 나는 만족으로 살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한 삶은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가운데 절정을 드러냅니다. 죽음을 절정이 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죽음이 행복의 절정이 되게 하십시오. 행복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가운대 죽음을 행복의 절정이 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죽음은 사랑의 절정입니다]
죽음은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두말할 것 없는 대표적인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야말로 사랑의 절정입니다. 3년 반의 공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순간 예수님은, 예수님이 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 구원의 죽음입니다. 놀랍게도 짐승제사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 곧 화육하신 하나님 자신이 죽는 사랑의 절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가신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기독교 신자이든 비기독교인이든, 타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확고부동한 기독교의 진리는 십자가 복음이요, 십자가에서 죽으신 에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입니다.
저는 군대 법사에게 복음을 밤새 전한 적이 있습니다. 법사님은 제게 "서 목사님 열정은 존경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10%만이 진실이고 90%가 우화고 신화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신학자들은 성경의 역사를 설화나 신화로 이해하고 사실보다는 의미찾기에 주력합니다. 무신론자들은 더 말할 것 없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물론 신 인식 자체가 허구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성은 사람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 다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인정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귀한 죽음을 당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모두 다 인정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여기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 소중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일곱 가지라고 해서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개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아시지요? 일곱 개의 가상칠언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내가 목마르다”(요 19:28)
“다 이루었다”(요 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가상칠언가운데 처음 세 말씀 모두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말씀들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자신을 죽이는 자들에 대한 사랑, 극형을 당하고 있는 강도에 대한 사랑,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던 배신자 요한을 향한 사랑이 사람들에게 주신 세 말씀입니다. 모두 다 사랑의 말씀이요 사랑의 절정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극형을 받는 죄인을 구원하고,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를 다시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의 현장에서 보여준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마디로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에도, 예수님의 복음에도, 예수님의 기적에도, 예수님의 축사에도, 예수님의 비유에도 고개를 갸웃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은 그가 정말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셨음을 인식했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사랑의 종교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합니까? 바로 이 죽음의 사랑입니다. 끝까지 변함없이 용서하는 사랑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도 믿게 만든 사랑의 절정입니다.
[3. 죽음은 용서의 절정입니다]
죽음은 용서의 절정입니다. 인간의 삶의 위대함은 사람을 용서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의 이웃을 용서하는 데 인간의 위대함,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마6:12)
초대 교회 집사였던 스데반의 죽음은 용서의 절정입니다. 자신을 돌로 치려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주님께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죽음이 삶의 절정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용서의 절정을 드러냅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이 죽을 때에 하늘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돌을 던지는 자를 용서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4~60)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자신을 죽이기 위하여 돌을 던지는 군중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탄원의 기도를 드립니다. 스데반은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신앙이 죽음을 통하여 절정을 맞이한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열매요 삶의 절정입니다. 죽음은 자신이 살아 온 삶을 한 마디로 압축하여 보여주는 진정한 자기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며, 즉음을 삶의 절정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라고 선포합니다. 특별히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은 하늘을 바라보며 용서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용서를 통해 삶의 절정을 드러낸 사람중엔 요셉도 있습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가 많던 사람입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묻혔고, 형들의 야합으로 죽음의 위기를 겪었으며, 미디안 상고에게 종으로 팔려가는 인신매매를 당하였습니다. 그 뿐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다가 모함을 당하여 옥에 갇히고 죽을 위기를 만났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아주 심한 상처투성이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속적인 인과응보에 따르면 요셉은 당연히 미움과 복수심으로 일평생 칼을 갈고 살아야 했고 스스로도 많은 고통을 느껴야 했을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 모든 상처를 치유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형제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죽음 장면은 미래에의 축복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었던 요셉이지만 자신이 죽을 날이 다가 올 때 그는 자신의 삶의 절정, 용서의 절정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창50:22~26)
이런 요셉의 죽음은 이미 자기 형들에 대한 용서에서 충분히 예견된 행동이었습니다. 야곱이 죽고 나자 야곱의 아들들 즉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다가가 목숨을 구걸합니다. 그 때 요셉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하면서 주저없이 형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까지 돌보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50:15~21)
요셉은 죽을 날이 가까워 올 떄 110세에 죽으면서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형들을 용서하고, 형들의 자식들을 돌보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무엇이 요셉을 이렇게 용서의 사람이 되게 했습니까?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하나님은 우리를 해하려는 자들이 악을 행할지라도 그것마저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용서의 마음으로 살다가 죽음이 가까이 오면 더욱 더 큰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성도의 죽음은 용서의 절정입니다.
[4. 죽음은 믿음의 절정입니다]
죽음은 믿음의 절정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살았던 허다한 증인들의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가장 중요한 단어는 믿음으로,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죽음도 막을 수 없는 위대한 신앙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죽음은 언제나 평소에 가졌던 믿음을 확실하게 드러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죽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본향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1:13~16)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죽음이 가까이 오면 후손에게 믿음을 물려줍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자기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 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믿음임을 고백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다윗은 죽을 날이 다가 오매 아들 솔로몬에게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당부합니다. 재물도, 권력도, 왕권도 물려주고 할 말이 많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다윗의 죽음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다윗은 죽을 날이 임박하며 아들을 불러 놓고 신앙고백적인 유언을 합니다.
[열왕기상2:1~3]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다윗의 유언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평온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신앙이란 믿음의 깨달음입니다. 믿음으로 깨닫고 깨달은 것을 믿는 게 신앙입니다. 다윗은 죽을 날이 가까이 오자 아들을 불러 놓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합니다. 아주 담담하게 말하는 다윗의 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평온한 마음을 엿보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 솔로몬에게 신앙을 당부하는 믿음의 아버지 역할과 형통의 축복을 합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죽음이란 나만이 가는 길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가는 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이 오면 하나님을 만날 믿음으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인생의 가장 귀한 교훈인 믿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네가 형통할 것이라고 믿음의 길을 유언합니다. 이런 죽음은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평상시의 믿음이 축적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일평생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고백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성경의 죽음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도 있습니다. 심리학의 용어로 설명하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죽음을 맛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오미가 그랬고, 구레네 시몬의 처자식들이 그랬습니다. 나오미는 잘 아시다시피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어버리는 슬픈 사건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가족들은 졸지에 남편이 억지로 십자가를 메고 갔기 때문에 가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예수님의 탄생에 참여하는 구속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가족들은 로마 교회의 존경을 받으면서 사도 바울의 어머니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두 아들들은 초대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죽음이란 분명 슬프고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 마저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바울의 로마서 8장은 아주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아버지 이어령씨를 전도한 따님 이민아씨는 '땅 끝의 아이들'(시냇가에 심은 나무)이라는 간증집을 냈습니다. 이민아씨는 말합니다. "내가 낳은 아이는 저 하늘나라로 보냈지만 대신 더 많은 땅 끝의 아이들을 얻었습니다." 부모는 산에 묻고 오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고 옵니다. 아무도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잃어버린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상치 목한 죽음,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죽음을 맛보기도합니다. 그럴때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믿음의 소리는 다니엘서의 신앙고백입니다. 다니엘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 (아벳느고)입니다. 그들은 다니엘과 함께 죽음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 채식을 택할 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느브갓네살이 만든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여 풀무불 가운데 던져졌을 때에에도 아주 분명하게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풀무불 속에서 믿음의 고백을 선언합니다.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6~17)
하나님은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실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즉 풀무불에서 건져 내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이 세운 신상 곧 우상에게는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실 줄로 믿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아니 하실지라고 우리의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늘 믿기 때문에 죽음 조차도 극복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부활과 영생입니다.
죽음은 믿음의 절정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성도의 믿음은 절정을 드러냅니다. 죽음의 권세가 결코 해칠 수 없고 누를 수 없는 믿음의 절정이 드러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주인공들이 대표적입니다. 믿으로 죽어간 선조들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믿음의 절정입니다. 믿음의 진가를 드러내는 최고로 멋진 순간입니다.
[5. 성도의 죽음은 삶의 절정입니다.]
죽음으로 삶의 절정이 되게 하라! 죽음은 행복의 절정이요, 죽음은 사랑의 절정이며, 죽음은 용서의 절정이고, 죽음은 믿음의 절정입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생입니다. 믿음으로 죽는 자는 부활하여 영생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죽는 성도의 죽음은 삶의 절정입니다. 인생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자신의 진가가 드러나는 삶의 절정입니다. 성도는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진가를 드러냄으로 삶의 절정을 맞이합니다. 성도는 죽음으로 인생을 끝장내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 삶의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믿음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고 절정이며 새로운 시작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두 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 자체를 다르게 생각합니다. 특히 첫 번 째 죽음은 육신의 장막을 벗는 것일 뿐 영원한 죽음이 될 수 없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둘 째 사망을 더 문제시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둘 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십니다.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이기는 자에게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2:8~11)
이기는 자는 둘 쨰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진짜 죽음은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기는 자는 둘 째 사망을 받지 아니하므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부활하여 영생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부활과 영생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이 말은 죽음을 극복한 종교라는 뜻입니다. 죽음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단순한 수용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며 영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이 세상의 죽음은 단순한 이별입니다. 비록 가슴 아프고 슬픈 이별이며 쉽사리 만날 수 없는 이별이지만 분명 죽음은 우리가 흔히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듯이 잠시 잠간 헤어지는 이별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셨고, 웨슬리도 승리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마시고 회피하시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다윗처럼 요셉처럼 웨슬리처럼 죽음이 다가오면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십시오. 결코 과시하라는 말이 아니고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 온 믿음의 삶을 절정까지 끌어 올리라는 것입니다. 삶의 절정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이 끝나가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영혼을 두드릴 때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죽음을 삶의 절정이 되게 하십시다. 행복의 절정이 되게 하고, 사랑의 절정이 되게 하고, 용서의 절정이 되게 하고, 믿음의 절정이 되게 하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용서하고 등진 자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풀무불에서 죽을 지라도 믿음으로 죽어야 합니다. 예상치 못한 죽음이 우리를 시험할지라도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죽음을 절망과 패배의 시간으로 삼지 말고, 승리의 시간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시간으로, 삶의 가장 축복된 시간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지금 바로 여기서 부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번 주간도 주님과 함꼐 동행하면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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