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구도자의 순례: 걷는 기도

우순(愚巡) 2011. 8. 20. 22:33

구도자의 순례 : 걷는 기도

 

    (시편37: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할렐루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평강이,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전할 말씀은 "구도자의 순례 : 걷는 기도" 입니다. 구도자들이 순례 길을 가면서 드리는 걷는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의 핵심은 우리들이 걸어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 모두 구도자처럼 순례 길을 걸으면서 기도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걷는 기도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기쁜 체험을 말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본문은 시편 37편 23절로 24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정하시고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체험은 실로 기쁘고 행복한 체험입니다.

 

    오늘은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우리 말 성경은 개역성경, 개역개정성경, 공동번역, 공동번역 개정판, 새번역 성경, 표준 새번역 성경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개역개정 4판인데 여전히 한자식 표현과 옛말식 표현이 많습니다. 거기에 비해 표준 새번역 성경은 한글 세대가 읽기 편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천천히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 (시37:23~24 표준 새번역)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 중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길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시편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리긴 하지만 주님이 지켜주셔서 넘어지지 않는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개역개정 성경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길을 정하시고" 라고 번역했는데, 표준 새번역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는데 아주 중요한 첫 걸음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길을 갑니다. 크던 작든, 멋있든 멋없든, 화려하든 초라하든 각자의 길을 갑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철학자 안병욱 교수는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이라는 시를 노래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남과 싸우고...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살아간다.

 

인간은 세계라는 무대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어떤 이는 인생을 농사에 비유한다.
어떤 이는 인생을 하나의 예술 작품에 비유한다.
어떤 이는 인생을 책을 쓰는데 비유한다.
어떤 이는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우리는 저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자기의 길을 가는 인생의 나그네다.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이 가는 길은 인도요,
자동차가 가는 길은 차도요,
배가 가는 길은 뱃길이요, 바닷길이다.

 

우주에도 길이 있다.
지구는 지구가 도는 길이 있고,
별은 별이 가는 길이 있다.

 

옳은 길을 가되 우리는 적절한 속도,
적절한 걸음걸이로 가야 한다.

 

군자는 인생의 큰 길,
옳은 길을 정정당당히 간다.
마음에 추호도 부끄러움과
거리낌이 없는 사람만이 청천백일 하에 크고.
넓은 길을 늠름하게 활보할 수 있다.
힘차고 당당하게 걷는
걷는 걸음을 활보라고 한다.

 

광명정대의 정신을 가지고
인생을 바로 사는 사람만이
정정당당한 자세로 태연자약하게
인생의 정도와 대로를 힘차게 걸을 수 있다.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가는 이 세상의 길은 덧없기에 우리 모두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우리는 나그네로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길을 가는 나그네라고 합니다. 시인 박목월은 '나그네'라는 시에서 인생을 길을 가는 나그네로 노래합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이고, 인생이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입니다. 모든 인생이 저마다 자기의 길을 갑니다. 시편과 잠언에는 길에 대한 말씀이 135회나 나오며 예수님은 스스로를 길이라고 하셨습니니다. (요14:6) 그런 많은 길 가운데 우리 주님이 기빠하시는 길은 어떤 길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우리의 나그네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두말할 것 없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사람은 주님이 그 발걸음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런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구도자의 순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구도자의 순례 길은 성직자나 수도사나 고행자의 전용로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가는 평범한 보통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실천하고 체험할 수 있는 산 길입니다. 기독교의 신비는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서만 이루어지는 몰입이나 접신이나 황홀경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범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신비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도 평범한 우리의 일상 길에서 느낄 수 있는 거룩한 길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발의 등이요 길에 빛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편 105절) 

   중세 시대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엑카르는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 속에 하나님이 임재해있고 하나님은 스스로를 녹여서 피조물의 모습으로 몸 바꾸기를 일으키시는 분이라고 깊은 체험을 들려줍니다.

 

   "창조계는 하나님의 선이 녹아서 된 것이다. 하나님이 녹아서 밖으로 흘러나가 모든 피조물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선은 존재한다. 용해와 몸바꾸기(molting)를 일으키는 창조계는 선하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뜻해서 흘러 나온 것이다. 모든 선은 넘쳐 흐르는 하나님의 선에서 흘러 나온다 피조물을 바람직하게 사랑하려면, 그들의 아름다움과 선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선함의 원칙이다. 피조물 안에 있는 선, 피조물의 꿀 같은 달콤함은 모두 하나님 안에소 모아진다. 엑카르트의 심리학은 억압의 심리학이 아닌 기쁨을 지향하는 심리학이다"

(마이스터, 127쪽)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은 이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 녹아 흘러 넘쳐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발의 등을 삼고 길의 빛을 삼아서 걷는 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의의 길이고, 그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 그런 주님기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사람은 구도자들이 순례를 하며 드리듯이 걸어가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걸어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오늘 나누려고 하는 구도자의 순례 곧 걷는 기도는 바로 피조물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조용히 걸으면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신비요 거룩함의 순례입니다. 걷는 기도는 기도생활이 아니라 생활기도의 영성이다. 구도자들의 순례 길에서 체험할 수 있는 깊은 기도가 걷는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만물 속에 깃든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그 길을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어쩌다 비틀거려도 아주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음건과 포쇄의 철 : 새옷입고 새 길 떠나기]

 

      우리 말의 철이 든다는 말은 말 그대로 계절이 바뀌는 철을 알아서 무엇을 해야 하는 지을 깨닫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농부들은 참 확실히 철든 사람이었습니다. 사계절은 물론 24절기가 바뀔 때마다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철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 모르는 사람도 있고, 철부지도 있습니다. 철 든 사람들은 철을 분멸하여 철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정확하게 알고 철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

 

   지금 철은 처서입니다. 아직도 여름이 무덥게 느껴지긴 하지만 절기는 이미 가을의 문턱 입추를 지나 처서가 다 되었습니다. 내일 모레 8월 23일이면 모기입도 비뚤어진다는 처서입니다. 처서가 되면 초목은 성장을 매조지하고 겨울 날 차비를 시작합니다. 옛 조상들은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서 풀이 더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밭두렁이나 산소의 벌초를 합니다.  피뽑기, 논두렁풀 베기를 하고 참깨를 털고 옥수수를 수확합니다. 또 김장용 무·배추 갈기, 논·밭 웃비료 주기가 이루어진다.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타고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을 타고 온다고 합니다. 이는 귀뚜라미와 뭉게구름이 나타나면 찬바람이 돌면서 가을이 본격적으로 온다는 뜻입니다.

 

      고려사 선명력 상에는 처서 기간 15일을 셋으로 나누어 첫 5일인 초후(初侯)에는 매가 새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둘 째 5일 차후(次侯)에는 천지에 가을 기운이 완연하며, 마지막 5일 말후(末候)에는 들판의 곡식에 익어간다고 합니다. 여름동안 장마에 젖은 옷이나 책을 말리는 일도 이 무렵에 합니다. 아낙네들이 젖은 옷을 말리는 것을 음건이라고 하고, 선비들이 축축해진 책을 말리는 것을 포쇄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음건( )여름내 젖었던 옷이나 책을 음지에서 말리는 것이고, 포쇄(曝曬)는 아직도 붙어 있는 여름 햇볕과 가을 바람에 옷이나 책을 말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조 시대에는 예문관이나 홍문관에서 역사책인 실록이나 사초가 습기에 젖지 않도록 포쇄관을 선정하여 바람에 말리고 햇볕에 말리게 하였습니다.

 

     옷과 책을 말리는 음건과 포쇄의 철 처서에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꺼내어 축축히 젖은 마음을 성령의 바람에 말리고 은혜의 햇볕에 말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또 무더운데다 휴가를 보내면서 어수선하게 지내느라 방치해두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꺼내 바람에 말리고 햇볕에 말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시 성경을 읽어보고,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큐티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처서는 음건과 포쇄를 통하여 옷을 말리고 책을 말리는 계절이고 곡식이 익어가는 계절입니다. 우리네 신앙도 다시 말려서 열매를 거두어야 할 철이 처서입니다.  

 

 

   올 처서에는 우리 모두 구도자가 되어 순례의 길을 걸어가며 걷는 기도를 드리시면 어떨까요? 우리 모두 차분하게 젖은 옷을 말려서 새 옷을 입고 축축해진 말씀을 말려서 가슴에 품고 새 길을 시작하시면 어떨까요?  바울은 세례의 정의를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옷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옷 갈아입기에서 보듯시 옷 바꿔입기는 언약식입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을 때 옷을 바꿔 입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고 새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새 옷을 입고 새 길을 시작하는 결단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요나단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삼상18:1~4)

    

    철든 사람은 새 철이 오면 새 일을 시작합니다. 올 처서에는 그리스도로 옷을 갈아입고  성령의 바람과 은혜의 햇볕으로 말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새 길을 떠나시면 좋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걷는 길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주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붙들고 걸어가는 새 길은 분명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일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 : 생명사랑 밤길 걷기 ]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기 원하시는 분들에게 생명사랑 밤길 걷기에 함께 참여해서 구도자들의 순례처럼 걸어가면서 함께 기도하시기를 청합니다. 지난 주간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마음을 잡고 있었던 생각은 '걷는 기도'와 '생명사랑 밤길 걷기'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요 몇 년째 생명사랑 밤길 걷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살 예방때문입니다. 저는 생명사랑 밤길 걷기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의 주관자가 우리 교인이래서가 아니고, 이벤트성 행사를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자살을 예방하는 생명사랑 밤길 걷기가 우리 기독교의 생명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복음의 본질이 생명존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영생인데, 영원히 사는 것인데, 이 짧은 인생마저도 다 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걸어사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걸으면서, 한 가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이 땅에서 자살의 영이 떠나가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특별히 우리의 자녀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옵소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대단히 높습니다. 저는 어제 설교를 탈고하면서 통계청의 사망원인 화일을 30여 쪽 읽어 보았습니다. 어림 짐작은 했지만 깜짝 놀랐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자살은 2009년도 사망원인 중 4순위입니다.  특히 10대에서 30대 사이의 사망원인 중에는 1순위입니다. 2009년도에 신종플루로 죽은 사람이 140명인데 자살로 죽은 사람은 15,413명으로 전년대비 2,555명 증가했습니다. 이는 전년도에 비해 19.3%가 증가된 숫자입니다. 10년전에는 7위였는데 2009년도에는 4위로 올랐습니다.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다음입니다. 흔히 걱정하는 교통사고나 당뇨나 간질환이나 고혈압보다도 높습니다.

 

     상위 3대 원인이 고령화와도 연계되는 데 비해 자연사나 질병사와는 관계없는 10대와 20대와 30대에서는 자살이 사망원인 1위라는 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남녀 공히 1위입니다. 인구 10만명당 교통사고는 14.4명인데 자살은 31명으로 두 배가 넘습니다. 신종 플루나 교통사고등으로 걱정하는 것을 생각하면 자살은 큰 문제입니다. 이 수치는 합병증을 우려하는 당뇨로 인한 사망원인 보다도 높습니다. 당뇨는 10만명당 19.6명이지만 자살은 31명입니다.

 

    이 땅의 고귀한 생명들이 허무하게 죽어가지 않도록 생명을 위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사회가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 생명이 존중되고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세상이 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가능하시면 시간을 내셔서 '생명사랑 밤길 걷기'에도 참여 해보시기 바랍니다. 미국 크로스 컨트리 달리기의 영웅 잭 커크(Jack Kirk)는1930년 부터 95세이던 2005년도 까지 매년 캘리포니아 주에서 열리는 딥시 레이스(Dipsea Race, 1905년에 창설된 대회로 미국에서 보스턴 마라톤 다음으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에 참석하여 완주하였습니다. 그가 100세되던 2007년도에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그는 늙어지면 달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지 않으면 늙어진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마음 편히 걸으면서 생명을 사랑하고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는 거룩한 마음을 함께 나누시면 좋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구도자의 순례인 걷는 기도를 드리면서 거룩한 순례자가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평범한 일상의 거룩함 : 하나님 만나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은 평범한 일상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는 길, 곧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실제로 실천할 수 있고, 체험 할 수 있고, 맛 볼 수 있는 거룩한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특별한 시공의 가치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늘 만날 수 있는 지극히 흔한 길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길이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평범한 사람이 되어 우리의 삶의 자리 그 자체에 다가 오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다 하나님께로 부터 왔고, 모든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만물 속에 깃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1)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1~4)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계를 하나님의 용해와 몸바꾸기의 실현으로 이해했으며, 허울 좋은 종교의식이나 종교 훈련방법 보다도 하나님이 녹아 흘러내리신 피조물의 창조계 안에서 하나님 자체를 경험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참회방법과 외적 수련방법을 수없이 만들어 그 속에서 자신들의 이기적인 자아를 굳건히 붙잡는 자들, 신적인 진리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한 자들은 겉으로는 거룩하다고 일컬어지겠지만, 속으로는 바보와 다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적인 진리의 실질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면, 그들은 크게 진보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보와 다름없습니다. 신적인 지를 전혀 모르니 말입니다." (마이스터, 314쪽)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하나님을 부려먹고 이용하는 일을 거부하며 하나님을 그대로 둘 때 하나님이 되어 나에게로 다가오심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진정한 영성을 위하여 하나님 마저도 넘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그대로 두라는 Gelassenheit (그대로 둠, 방기放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사람은 사람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둘 때 진정한 신적 진리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하나님 자신에게 관심을 두어야지 하나님을 이용하여 다른 것을 구하고나서 하나님 아닌 다른 그것에만 관심이 있으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마이스터 엑카르는 의미있는 촛불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동원하여 아무개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치 하나님을 촛불로 만들어 무언가를 찾듯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찾고 있던 무언가를 찾으면 촛불을 던져 버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부려서 무언가를 찾는다면 ,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찾고 있는 게 이익이든 보상이든 영성이든 다른 것이든 간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쓸데없는 것을 찾고 있기에 아무것도 찾미 못하는 것입니다. " (마이스터, 312쪽)

 

   그러므로 마이스터 엑카르는 하나님의 본래 모습과 인간의 본래 모습이 만나는 진정한 하나됨을 이루라고 설교했습니다. 그것은 탈출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에게서 탈출하고 사람도 사람에게서 탈출하는 진정한 하나를 향하는 탈출만이 단일한 하나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늘 보좌를 버리신 하나님의 화육과 거직 자기를 벗어 던지고 하나님을 찾아 떠나는 참 자기의 인간 본래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에게서 벗어난다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위하여 스스로에게서 벗어날 것이다. 이 두 존재가 빠져나오면, 단일한 하나만이 남을 것이다. 이 단일한 하나야말로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 낳는 사랑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성령이 꽃을 피운다. 삶이 이유가 없을만큼 깊다면, 그런한 삶이야말로 궁극적인 기도가 될 것이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낳는 궁극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이런한 형편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그대로 둘 수 있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조작하지 않고, 하나님을 끓어 오르게 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엣적에 그랫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모든 행복이 거기에 달려 있다는 듯이 지금도 그렇게 끓어 오르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이스터, 311쪽)

 

[구도자의 순례 : 걷는 기도]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구도자의 순례: 걷는 기도>로 정했습니다. 신앙이란 결국 구도자의 순례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도 구도자의 순례였고, 사도들이 간 길도 구도자의 순례였습니다. 신앙인들이 이 마음을 갖고 있을 때는 거룩한 성도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우리의 영혼에 때가 끼고 마음이 변질되기 시작하면 종교의식의 답습자로 전락합니다. 우리 모두 한 주간을 나그네처럼 길을 가지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면서, 걷는 기도를 드림으로 구도자들처럼 순례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구도자의 순례는 순수하고 순결하고 거룩합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드리는 걷는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살아있는 산 신앙의 체험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특별한 곳, 특별한 시간도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늘 볼 수 있고 언제나 만질 수 있는 평범한 일상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인생 길이 구도자의 순례처럼 걸어가면서 기도하고 생활이 기도가 되었을 때 피조물속으로 녹아 들어오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자기 바꾸기를 시작하십니다. 우리 안으로 녹아 들어 오셔서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 것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거룩한 만남을 경험하게 합니다.

 

     실천신학자인 남호 박사는 걷는 기도(예손출판사)를 출간했습니다. 남호 박사는 스페인의 유명한 순례자의 길을 걷고 나서 이 책의 단상을 잡았다고 합니다. 스페인의 '까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의 길)'는 총 800여 Km의 길로 많은 순례자들이 걷는 길입니다.  저자는 2006년도에 이 길을 걸은 후 2007년도에는 안나푸르나, 2008년도에는 네팔의 에베레스트 지역과 랑탕지역을 걸었습니다. 파울로 코엘로는 순례자에서 카드의 문양을 사용하여 예루살렘의 길은 하트의 길이자 성배의 길로, 로마의 길은  클로버의 길로, 산티아고의 길은 스페이드의 길로 표현했습니다. 산티아고는 야고보가 순교하여 묻혀 있는 곳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9세기 부터 순례가 시작되어 12세기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남호 박사는 산티아고의 길을 걸으며 걷는 기도의 착상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절대자를 경험하는 감동은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도 느낄 수 있으며 바삐 움직이는 찰나의 순간에도 느낄 수있고 무릎꿇고 기도하거나 편한 자세로 앉아 명상을 하는 가운데서도 느낄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평지든 가파른 산길이든 한 걸음씩 기도하는 것 또한 하나님을 진솔하게 대면하며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걷는 가운데 기도의 마음을 갖게 되고, 길든 쩗든 기도를 하게 되며 하나님의 창조의 영이 깃든 자연과 세상을 접하며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길을 걷는 것은 기도와 연결되는 끈이자 하나님의 매듭이었다. (13쪽)

 

   " 기도라하면 으레 가만히 앉아서 조용하게 혹은 소리를 내서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온 몸을 땅에 엎디거나 움직이며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 역사에도 많이 등장한다.  따라서 걷는 기도는 거룩한 일이고 정중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중정인 모습을 찾아가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18쪽)

 

   "그리고 기도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시오"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서로를 용서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255쪽)

 

  
     걷는 기도는 바로 그런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거룩함입니다. 이 번 한주간 여러분이 걸어가시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를 녹이서서 우리가 되고 싶어 하시기 때문에, 구도자의 마음으로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다정스럽게 다가오십니다. 기도생활도 잘 해야 하지만 생활기도를 더 잘해야 합니다. 일상속에서 하나님꼐 기도하는 사람,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길에서 걸어가면서도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면서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사람은 주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어쩌다 비틀거려도 넘어지지 않도록 주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이 하나님과 함께 한 주간을 잘 보내시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