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
<다니엘2:44~45>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8.15 광복절 기념주일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해방과 독립을 기념하는 66주년 광복절 기념주일입니다. 우리 나라는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일본에 뺏겼다가 강점 36만인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독립을 성취하고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광복절이 우리 교회에 의미 있는 것은 당시 우리 상동교회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본산이었으며 구심점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오늘을 광복절 기념주일로 지키거나 남북화해주일 혹은 평화통일기원주일로 지킵니다.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새벽 기도회에서 스가랴서 9장 8절을 읽었습니다. 내 집을 둘러 진을 치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자녀의 집을 둘러 진을 치십니다. 적군이 왕래하지 못하도록 진을 치십니다. 포학한 자가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도록 진을 치십니다.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슥9:8)
오늘 아침 우리는 말씀에 의지하여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둘러 진을 쳐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오늘은 우리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진정한 광복을 위해 기도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광복을 주신 하나님, 자유 민주주의를 세워주신 하나님, 일천만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1) 우리 나라의 진정한 광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반쪽짜리 광복이 아닌 진정한 광복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2) 이 땅에 북한 공산주의가 왕래하지 못하도록 기도했습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반공의 보루입니다. 종북좌파의 은밀한 박해, 은밀한 핍박을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북한공산주의는 종북좌파를 동원하여 교회를 은밀하게 박해하고 핍박하며 공격하여 무너뜨리려 합니다
3) 주변 강대국의 포학한 자들이 이 땅을 짓밟지 못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은 언제나 우리에게 골치거리입니다. 주변 강대국들이 우리 나라를 해하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2011년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주일 기도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와 함께 “2011년 평화통일 남북/북남공동기도주일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에는 우리 감리교회를 비롯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한국 기독교장로회, 대한 성공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구세군대한본영, 정교회 한국 대교구 등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오늘 오후 4시에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2011년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주일 기도문”을 갖고 연합예배를 드립니다. 2011년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주일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1년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주일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올해도 8.15 광복절을 맞아 남과 북/북과 남의 교회가 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모으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66년 전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우리 민족은 아직도 온전한 해방을 이루지 못한 채, 둘로 나뉜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해방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한데, 우리는 아픔과 상처를 지닌 채 오랜 세월을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주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바라기는 지난 세월동안 반복해 온 우리의 절절한 간구에 귀 기울여 주옵소서.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
우리는 강산이 예닐곱 번 바뀌도록 담을 쌓고 살아왔지만 잠시도 평화와 통일의 꿈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음일 뿐 서로 비방하고 상처를 주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6.15 선언과 10.4 선언과 같은 협력과 상생의 약속도 있었지만, 어느새 그 다짐을 잊은 채 다툼과 충돌을 계속하며 살아갑니다. 남과 북/북과 남이 서로 신의를 저버리고, 더 이상 대화와 협력을 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더 높은 장벽을 쌓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의 운명이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고 있어 우리에게 더 큰 아픔과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주님,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평화를 약속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다시 헌신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토록 노래했던 금강산이 다시 열리게 하시고, 그토록 자랑했던 개성공단의 협력사업이 더 힘차게 발전하게 하옵소서. 남과 북/북과 남의 왕래가 더 긴밀하게 하시고, 국제사회에서 형제자매처럼 협력하게 하옵소서. 이전보다 더 뜨겁게 만나게 하시고, 이전보다 더 열심히 서로 돕게 하옵소서. 이제는 군사적 적대행위가 중단되어 서해바다에서 긴장이 그치게 하옵소서. 더 이상 분단 때문에 눈물 흘리고 탄식하는 우리 이웃이 없게 하옵소서. 바라기는 남과 북/북과 남이 먼저 한반도/조선반도 안에서 화해의 마음을 일구게 하시고, 동북아시아와 세계를 향해 평화의 씨앗을 뿌리게 하옵소서. 주님, 이 민족을 도우셔서 꿈을 현실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이제 남과 북/북과 남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을 위해 더 낮은 자리에서 겸손히 헌신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의 남은 소명인 이 민족의 두 번째 해방을 위해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이러한 진실함으로 분단의 벽을 허무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순종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서해에서 동해까지 우리의 가슴을 울려온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한라에서 백두까지 역사의 숨결로 두근거려온 ‘통일염원’이 속히 다가오게 하옵소서. 이 겨레의 품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열매맺게 하옵소서. 평화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8월 15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조선그리스도교련맹
화해통일위원회 중앙위원회
남북 공동 기도주일 기도문에는 4가지 신앙 고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 평화를 약속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특별히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이제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을 위해 더 낮은 자리에서 겸손히 헌신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의 남은 소명인 이 민족의 두 번째 해방을 위해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이러한 진실함으로 분단의 벽을 허무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순종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서해에서 동해까지 우리의 가슴을 울려온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한라에서 백두까지 역사의 숨결로 두근거려온 ‘통일염원’이 속히 다가오게 하옵소서. 이 겨레의 품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열매 맺게 하옵소서. 평화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는 위 4개의 신앙고백 중에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밑바탕으로 깔려있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
오늘 선포할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고백위에 바라보는 희망의 나라입니다. 다니엘 2:44-45은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고, 하나님이 주어가 되시어 나라를 세우신다는 이 메시지가 오늘 말씀의 요지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가 그의 의를 세운 나라며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고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 돌아가지도 아니하는 나라입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단2:44)
다니엘은 예언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는 하늘의 하나님이 세우시는 한 나라에 대한 묵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 성경은 우리에게 강하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가 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강할 것이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2:44)
다니엘은 왕의 꿈을 해석합니다. 사람이 세운 나라들이 무너지는 꿈을 해석했습니다.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단2:45)
이 묵시는 구체적인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주전 605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2세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왕족이었습니다. 원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의미인데 느브갓네살은 그를 베드사살이라고 바꾸었습니다. 벨드사살은 ‘그 생명을 보호하라’는 뜻입니다. 그는 왕의 시종으로 있다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까지 섬겼습니다.(단1:21)
다니엘을 포로로 끌고간 느브갓네살 2세는 주전 605년부터 주전 562년까지 재위했던 바벨론의 왕으로 앗수르로부터 바벨론 곧 갈대아 지역을 회복하고 이집트를 공격했던 왕입니다. 느브갓네살은 주전 626년에 앗수르로부터 바벨론의 독립을 선언한 갈대아 사람 나보폴랏사르의 아들입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바벨론 제국은 느브갓네살의 작품들입니다.
다니엘서의 핵심은 역사의 현장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묵시입니다. 구체적인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묵시가 다니엘서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의미있게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에 깊이 개입하셨다는 역사개입을 주의 깊게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세우십니다. 이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아니할 나라입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단2:44)
믿음이란 실상이지 허상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우리들의 의지강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실현입니다. 하나님은 의지를 갖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구체적으로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다니엘서는 바로 바벨론왕 느브갓네살 시대의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의지실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저마다 해석합니다. 그 중 믿음을 그저 마음의 심리 체계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습니다. 저는 수요일에 이관직 교수의 심리 분석을 소재로 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끝마치며 꼭 이야기합니다. 심리학자가 바라본 심리학적 분석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소개는 하지만 우리의 결론은 절대 심리학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희망을 갖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은총의 사건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허구의 심리 체계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실상의 역사책입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허구의 인물이 아니고 다니엘도 상상력의 동화 주인공이 아닙니다. 역사의 현장 속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의지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묵시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비전입니다. 예고입니다. 신탁입니다. 이것은 무당들의 점괘나 귀신들의 액땜과는 전혀 다릅니다. 왜 기독교 신앙이 위대한 신앙인가? 유독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이며 구원의 종교인가? 왜 우리는 이 땅이 기독교의 복음이 전해지는 그리스도의 계절의 땅이 되길 원하는가? 그것은 바로 역사의식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의 현장 속에서 역사를 개입하시고 주관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묵시로 역사를 바라봅니다.
믿음의 사람 성도들은 하나님의 묵시로 역사를 바라봅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사관이라고 합니다. 지성인들은 저마다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을 갖고 세계를 해석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묵시란 바로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의 사관이요 믿음의 세계관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묵시로 역사를 바라보고 세계를 해석하였습니다. 다니엘서의 구체적인 역사현장은 바벨론 왕 느갓네살의 통치기간입니다. 느브갓네살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왕의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계획을 알려주었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이로 인하여 심히 번민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는 해에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왕이 그의 꿈을 자기에게 알려 주도록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라 말하매 그들이 들어가서 왕의 앞에 선지라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단2:1~3)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들이 왕의 꿈을 해석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왕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찾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갈대아인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 어떤 크고 권력 있는 왕이라도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인들에게 물은 자가 없었나이다 왕께서 물으신 것은 어려운 일이라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왕이 이로 말미암아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 명령하니라 왕의 명령이 내리매 지혜자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죽이려고 찾았더라”(단2:10~13)
비로 이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다니엘은 왕에게 그 꿈을 해석하겠다고 청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이 은밀한 일을 알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응답을 얻어 꿈의 해석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묵시로 바벨론 제국의 역사를 해석합니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단2:17~19)
묵시는 역사의 심판과 희망을 깨닫게 합니다.
다니엘이 알게 된 꿈의 해석은 ‘역사의 심판과 희망’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꿈을 해석했습니다. 왕의 꿈은 신상의 꿈이었고(단2:31), 신상은 금 머리-은 가슴-놋 배- 쇠 종아리 - 쇠와 진흙의 발인데(단2:32~33), 손 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이를 쳐서 부서뜨렸다는 것입니다. (단2:34) 이 것은 네 왕국의 멸망사요 새 나라에 대한 희망의 선포입니다. 손 대지 아니한 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 심판과 하나님이 세우시는 새 나라에 대한 희망입니다. 묵시는 역사의 심판과 희망을 깨닫게 합니다.
역사를 네 왕국으로 설명하려는 양식은 당시의 해석 양식이었습니다. 그런 양식은 고대 문헌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김지찬 교수의 성경배경주석에 보면 아카드문헌의 왕조 예언(주전3세기?)도 앗수르-바벨론-페르시아-그리스 네 왕국으로 서술합니다. 주전 2000년의 무녀의 신탁에도 네 왕국의 서술이 나옵니다. 앗수르-메대-페르시아-마케도니아입니다. 이처럼 네 왕국 이야기는 고대문헌의 특징들입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조로아스터교가 인간의 역사를 네 시대로 설명한 것에서 왔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또 나라를 금속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조로아스터 아베스타 경전문서에서 금나라-은나라-강철나라-혼합철나라로 나눈 흔적이기도 합니다. 또 주전 8세기에 헬라시대의 헤시오드는 다섯 시대를 언급하면서 네 시대를 금나라-은나라-청동나라-철나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묵시는 그 시대의 양식을 통하여 알기 쉽게 해석되어 전달되었습니다.
다니엘이 받은 묵시의 핵심은 사람들의 제국을 부수고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너무나 강대한 나머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네 제국이 신상이 손 대지 아니한 돌에 의해 무너지듯 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금나라, 은나라, 놋나라, 쇠나라가 돌에 의해 깨진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이 신상을 깨서 제국이 무너졌다 할 때 돌과 금속들 사이의 강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 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할 때 가장 중요한 동기가 무엇 입니까? 나의 열심, 수행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 분명히 공유한 한 가지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이끌고 계시다는 역사의 현실입니다. 다시 성경본문을 묵상하십시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 (단2:44~45)
다니엘의 꿈 해석은 세 가지가 어우러졌습니다. 역사와 묵시와 믿음입니다. 네 왕국은 구체적으로 실제 역사 이야기입니다. 꿈의 해석은 묵시입니다. 그리고 실제 역사와 하나님의 묵시 속에서 선지가 바라본 것은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의 믿음입니다. 다니엘의 묵시에 나오는 네 나라는 바벨론제국-메대제국-페르시아제묵-희랍제국을 말합니다. 이 네 나라는 모두 강대한 나라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무리 강대해도 무너집니다. 부숴집니다. 손 대지 아니한 돌에 의하여 무너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십니다. 이 새로운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다가오시어 실질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심을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하나님을 아무 것도 안 해주시는 분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실제 역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고 고백은 하지만 확실히 믿지는 못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독교신앙이라는 종교 행위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지 진짜 믿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서 성실하게 사셨던 분들이나 자기 앞가름을 충실히 하신 분들 가운데 의외로 신앙생활을 성실하게는 하시는 데 실제로는 믿음이 없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선진들이 많은 증거를 얻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1~3)
다니엘서는 역사와 묵시와 믿음이 만들어 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강한 나라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이고 그 나라는 강성할 것입니다. 바로 그 나라를 바라보며 희망을 갖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역사의 희망: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를 바라봅니다.
오늘 광복절 기념주일에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를 심판하시며 새로운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국이 통일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심이 됩니다. 북한 공산주의가 근심스럽습니다. 통일이 되도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통일되어야 하는데 북한 공산주의 세력이 아직도 준동하고 있으니 걱정입니다. 통일부담금도 큰 걱정거리입니다. 통일후에 북한 사람이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지떼가 되거나 북한 여성들이 위락 시설의 접대부가 될 위험도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도 언제나 문제거립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입니다. 일부를 제와하고는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지만 분명 평화통일이 되야 한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고 있습니다. 분단의 고착화는 자칙 양국시대로 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역사의 현장에 서서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성도의 삶을 지시해주고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묵시를 바라보고 새로운 나라에 대해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허상이 아니라 실상입니다. 믿음이란 허구의 심리체계가 아니고 실체가 있는 역사체계입니다. 금나라처럼 아주 강대한 나라도, 은나라처럼 금나라를 부수고 들어선 나라일지라도, 그리고 놋나라도 쇠나라도 결국은 손대지 아니한 돌에 의해서 부서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새로운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묵시가 주는 희망에 붙들려 역사 현장의 삶을 종말론적으로 결단하며 사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결단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바라본 희망의 내일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일의 확신 속에서는 사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살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고 거기에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를 바라보는 희망을 갖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지금의 삶을 이겨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한반도에 하나님이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가 평화통일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신앙생활의 원칙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묵시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묵시의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이니 그 희망 위에서 우리의 삶을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오늘 믿는 자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은 묵시를 해석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와서 역사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지식의 표출이 아니라 직관적인 하나님의 묵시를 통한 역사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소통하는 사람은 자신의 객관적 지식 분석에 근거한 삶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다네일서는 아주 분명한 산앙생활의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1.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2. 하나님의 묵시로 역사를 바라보고 세계를 해석하라
3. 믿음은 말씀의 묵시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를 바라보는 희망이다
4.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역사의 현장에서 신앙적인 결단을 내린다
희망의 믿음으로 당당하게 삽시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밤이 되었을 때 저는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묵시의 해석과 희망의 믿음과 당당한 삶입니다. 다니엘이 보여준 삶입니다. 다니엘은 묵시를 해석하는 자였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꿈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묵시를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사는 기도의 사람은 하나님의 묵시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것입니다.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 자기의 믿음을 지켰던 사람이기에 다니엘은 묵시를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니엘은 하나님의 묵시에 근거하여 희망의 믿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포로였고 수 없이 많은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었지만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갖는 축복입니다. 미국 경제의 신용도가 떨어지자 미국 최대 교회를 이끄는 조엘 오스틴(레이크우드교회) 목사 부부는 시카고 화이트삭스팀의 홈구장인 유에스셀룰러필드 야구장에서 ‘희망의 밤’ 집회를 열었다. 오스틴 목사는 특유의 ‘긍정의 힘’을 강조하며 5만 청중을 향해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 삶 속에서 일하신다”며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기대하자”고 권면했다. 이날 집회는 위성방송으로도 생중계돼 700만명이 시청했습니다. 신앙인은 희망의 믿음으로 삽니다.
다니엘은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느브갓네살 앞에서도 다리오 앞에서도 고레스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벨론의 포로임에도 느브갓네살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바벨론의 지혜자들을 죽이지 말라고 청원합니다. (단2:24) 바벨론의 지혜자들은 다니엘의 경쟁자들이었습니다. 다리오 시대에는 정복자의 곁에 있는 총리들과 고관들 때문에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단6:4) 그럼에도 다니엘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었고 오작 하나님꼐 희망을 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나 왕들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당당합니다. 다니엘의 당당함에 느브갓네살 실제 역사의 가장 강대한 왕이었던 바벨론 제국의 신화적인 왕이 머리를 숙여 절합니다.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 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단2:46~49)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나라가 아무리 강대하고 영원해 보여도 손대지 아니한 돌에 의해서도 무너질 수 있는 허약한 나라임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만이 강합니다. 영원합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 해석은 확실합니다.(단2:45) 희망이 믿음이 있는 성도는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평화 통일을 위해 우리의 지식과 사회적 지위를 다 내려놓고 우리의 객관적 지식의 분석을 뛰어넘어서 직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묵시를 붙들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허울 좋은 종교의 답습이 아닙니다. 믿음은 역사에 개입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희망인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 평화 통일이 오리라고 하는 기대가 있습니까?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세우시는 새 나라가 도래할 때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은 분단의 고착상황도 깨질 것입니다. 그리고 강대국들의 힘도 약화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붙들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자유와 민주가 보장되고 평화통일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고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의 종소리가 다시 들리고 주님의 대역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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