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제목 : 십자가의 충동성
성경본문 : 누가복음 23장 23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
가 이긴지라
오늘 나눌 말씀은 십자가의 충동성입니다.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상황 가운데 아주 분명한 것이 충동적인 무리들의 아우성입니다. 예수를 죽여라! 웬지 그 때의 그 함성이 지금도 귓가에 선합니다.
<무리들의 아우성>
예수님을 앞에 두고 무리들은 아우성을 쳐댔습니다. 사람들은 큰 소리로 재촉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빌리도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눅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눅23:13-15)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눅23:22)
그러나 그 때 마다 무리들은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눅23:5)
"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눅23:18-19)
"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눅23:23)
결국 빌라도는 무리들의 충동적인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죽게 만듭니다.
"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눅23:24-25)"
이처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무리들의 충동적인 요구때문에 지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를 질러 댑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바라바는 아주 흉악한 강도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사회적인 중범입니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눅23:18-19)
무리들의 아우성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무리들을 잘 대해 주셨는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무리들에게 떡을 먹이셨고, 병든 자를 고쳐 주셨으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더구나 창기와 세리도 가까이 하셨고 어린 아이들도 껴안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에게 예수님의 그런 모습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바라바가 흉악한 살인자요 강도인 것을 알면서도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무리들의 아우성 속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죄악성이 가득차 있습니다.
<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죄악성>
우리들은 무리들의 아우성을 통하여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죄악성을 바라봅니다. 인간들의 감정은 결코 의롭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의 감정은 아주 사악하고 이해관계에 빨랐으며 죄를 행하는데 빨랐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도 앞장 섰습니다. 더구나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데도 앞장섰습니다. 인간들의 죄악성은 선을 멀리하고 악을 가까이합니다. 빌라도는 인간의 죄악성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당연히 바라바를 죽이고 예수를 놓아주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였습니다. 빌라도는 착각했습니다. 아니 착각 했다기 보다는 인간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죄악성 때문에 인간들이 모이는 무리들은 당연히 죄를 향하여 충동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충동성 때문에 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경우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억울 합니까? 얼마나 속상합니까? 얼마나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까? 예수님도 그런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팔았습니다. 제자들이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무리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아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세리와 창기들처럼 함께 식사를 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바로 그런 모습에 인간의 죄악성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악성 때문에 십자가는 충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리들의 충동적인 아우성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우리들이 십자가를 질 때도 그런 충동적인 무리들의 외침을 듣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기 싫습니다. 십자가가 어려워서 지기 싫은 것이 아니라 무 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구원을 일으킵니다. 그 십자가가 사랑을 보여줍니다.
<내 몰리는 자기 십자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밀려 가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정말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는 어떨까요? 저는 하나님의 뜻이 밀려 가는 것이라면, 자기 십자가는 몰려 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참 도망가고 도망가다 몰리고 몰려서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경우를 만납니다. 몰리고 몰리는 삶이 자기 십자가의 삶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릅니다. 무리들은 아우성을 쳐댑니다. 군중들은 군중심리로 부화뇌동합니다. 판단력을 상실한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따라 어이없게도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만듭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몹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 십자가의 죽음가운데로 내 몰린 것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밀려 가는 삶이고, 자기 십자가는 몰려 가는 삶의 종착역입니다. 그래도 거기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릴 지라도 염려하지 말고 믿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주님을 따라가는 거룩한 성도 진정한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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