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제목: 십자가의 종류
성경본문: 마가복음 15장 27절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종류'에 대하여 강론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종류라고 해서 십자가 자체가 무슨 엄청난 가짓 수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던 세 개의 십자가를 뜻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두 개의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세 개의 십자가가 갖는 의미가 외형상으로는 같은 십자가지만 내용상으로는 서로 구분이 되는 다른 십자가입니다.
세 개의 십자가는 잘 알다시피 극형의 상징입니다. 당신의 로마법 상 십자가형은 극형에 해당하는 처형법입니다. 십자가 처형법은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앗수르에서도 행해지다가 로마 시대에도 적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기록에는 주후 337년경콘스탄틴 황제가 철폐할 때 까지 십자가 형은 선동죄나 흉악죄를 다스리는 처형법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법은 헤로도투스의 역사서에서도 발견되어지며, 알렉산더대왕 때도 그러한 처형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카르타고와 로마까지 전래되었음을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는 일단의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적이 있으며 (참고. 마카비 1서 1:44-50) 하스모니아 家의 알렉산드 얀내우스는 베톰마을의 반란자 800명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세푸스 BJ i 4.6: Ant 14.2-3)
그런데 당시의 실정법으로는 극형에 해당하는 십자가형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강도들의 십자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를 전혀 달리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한 강도의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의 십자가는 사죄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대속제물로서의 십자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강도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면서 서로 다른 길로 길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욕했던 강도의 십자가는 십자가 처형법의 상징 그대로 극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은혜를 구했던 다른 강도의 십자가는 한 번 찾아 온 기회를 붙잡은 사죄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같은 처형장의 십자가였지만 서로 다른 의미를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는 처형 당신에는 극형의 십자가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변해간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죄패가 붙었습니다.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막15:26)
그런데 바울은 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7-18)
사도들은 이 십자가를 복음의 핵심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죄패가 붙은 극형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달라진 것입니까? 원래 부터 구원의 십자가였으나 세상 사람들에 의해 수치와 조롱거리의 십자가로 오해되어진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오해가 풀려지고 그 본래의 의미가 되살아났습니다. 그 가치가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 때문에 오해를 받고 수치를 당하고 조롱을 당할 때 못 견뎌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수치와 조롱이 구원의 도구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때가 오기까지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믿음이요, 참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아니하면 떄가 이르매 거두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강도들이 지고 갔던 십자가는 기회의 상실과 획득이란 갈림길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비방하는 강도를 꾸짖으며 예수님을 영접하고 낙원에 이르는 약속을 얻었습니다. 누가는 이 일을 자세히 보도해줍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39-43)"
사람들은 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저리 갈까? 또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만나거나 동일한 인물을 만났을 때도 갈림길에 서서 결단을 요청받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언제가 그렇듯이 갈림길이라고 해서 길이 두 갈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산 속의 오솔길을 만난 시인 앞에 놓여져 있는 갈림길일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늘 만나는 인생의 경험은 우리 마음 안에 들어 있는 망설임의 갈림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말설이고 있는 자신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망설임이 결단을 요청받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강도는 결단을 요청 받고 있습니다. 한 강도처럼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수준에서 이해는 경우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을 이해합니다. 예수님을 비방한 강도는 예수님을 극형에 처한 자신들의 처지로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더 심하게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빈정거린 것입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거기에 비하여 다른 행악자는 자기들이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은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두둔하며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강동에게 낙원을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당한 보응을 받는 차원에서 저주의 십자가를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행악자들이 십자가를 질 만한 극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범하였다고 할 지라도 그 일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구원의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기회를 한 강도는 붙잡았고, 한 강도는 놓쳤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만난 같은 유형의 십자가였지만 자신들의 영적안 안목이 달라서 길을 달리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우리의 믿음의 삶이란 이처럼 언제나 내 안에서 망설여지고 있는 갈림길의 요청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구원의 상실자냐 구원의 획득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결단의 요청에 대하여 영적인 안목으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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