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1장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할렐루야!
오늘 나눌 말씀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우리의 영적성장에 가장 중요한 푯대, 기초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한 주간 내내 하나님이 제 마음속에 들려주신 말씀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라, 다시 본질로 돌아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도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서신의 핵심 구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다이나마이트입니다. 능력은 희랍어 두나미스(dunamis)의 번역어입니다. 두나미스는 영어 다이나마이트(dynamite)의 어원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복음의 폭약입니다. 성령의 불이 붙으면 유혹의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날려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로 지음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도 하나님의 능력 곧 하나님의 다이나마이트라고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당연히 복음은 곧 십자가의 도입니다.
바울의 십자가 자랑
사도 바울은 오직 이 십자가의 도만을 자랑했고, 이 십자가의 도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롬1:16) 바울은 십자가외에는 자랑하지 않았고, 십자가외에는 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빌3:8)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는 처음에는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기에게도 자랑할 것이 있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4-6)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겼습니다. (빌3:7)
바울의 육체적 자랑
바울에게는 세 가지의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종교적 가치, 정치적 가치, 문명적 가치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으며(빌3:7),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행25:1-12),가말리엘의 문하였으며(행22:3), 헬라문명에 조예가 있었습니다.(참조,행17장~19장의 전도). 바울이 히브리인이라는 것과 율법에 열심히 있었던 것(빌3:5-6)은 그가 유대교의 종교인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이 체포되었을 때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은, 그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정치적 신분을 말해줍니다. 또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한 것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 그리고 아레오바고에서 종교논쟁을 할 수 있었던 것(행17장)은 그가 헬라문명에 조예가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이렇게 종교적 가치, 정치적 가치, 문명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육체적 자랑거리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시민권이 중요하지만,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황제의 명령이 아니고는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것도 배설물처럼 여기면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땅의 시민권은 자랑할 것 없다.”(빌3:20)고 선언합니다. 그에게는 문명적 가치가 있습니다.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대율법학자 밑에서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고, 그가 사용한 서신서의 글들은 바울이 헬레니즘 문명에 익숙한 지극히 철학적인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상대적 가치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렇게 바울은 종교적, 정치적, 문명적 가치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 모든 것은 배설물과 같은 것이었고, 자기 자신의 유일한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육체적인 자랑거리들은 상대적인 가치들일뿐, 구원을 이루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상대적인 가치들을 존중하며 삽니다. 그래야 성실하고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단이나 사이비처럼 모든 것을 부정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염세주의나 비관주의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바울이 말하는 것은 상대적인 가치들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가치들을 과감히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십시오! 종교적 가치는 경건의 모양이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정치적 가치는 신분을 보장하기게 가치가 있습니다. 문명적 가치는 깨달음을 주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인 가치입니다. 상대적 가치라고 하는 것은 내가 정치적, 종교적, 문명적 가치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을 뿐이지, 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절대적 가치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구원을 말할 때는 십자가 밑에 정치적, 종교적, 문명적 가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붙들라!
이제 십자가의 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어느 사이에 십자가의 ‘본질’은 사라지고 기독교 문명이 우리의 삶에 악세사리처럼 내 삶을 구속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정치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기독교가 힘을 가지고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를 주도한다는 것에 만족하는 순간, 어느 날 ‘십자가의 깊은 맛’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종교적 가치가 추구되면서 우리는 종교생활을 잘하는 종교 기능공이 되었습니다. 언제 예배를 하는지, 회의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묻습니다. 기쁩니까? 즐겁습니까? 사는 것이 정말 기쁘고 즐겁습니까? 매일매일 삶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너무 즐거워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저녁까지 정말 그렇습니까? 종교적, 정치적, 문명적 가치가 다 좋을지라도 상대적 우위에 불과한 것이니, 내려놓고 주님 앞에서 이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고 교회에 오는 것이 기쁘고,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결국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인간을 만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인간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인간을 구원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인간의 미래에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변화의 동력이며, 구원의 능력이며, 미래의 소망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방법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정하시고, 하나님이 실행하신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인간과 화목하십니다. (엡2:16,골1:20,)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자기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드러내셨습니다. (빌2:8).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와 화목하시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임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시면서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이십니다.(히2"17. 히3:1, 히4:14). 예수님은 33세에 죽으셨습니다. 이 33세의 죽음심이 큰 의미가 있습니다. 33은 30+3의 수입니다. 30은 제사장에 취임하는 나이입니다.(민4:3,겔1:1,역대상23:3) 또 모형론적으로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요셉이 바로 앞에 설 때의 나이가 30세였다(창41:46). 그리고 3은 언약의 제물이 숙성하는 나이입니다.(창15:9).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제사장으로 취임하시는 의미로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언약의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에 3년간 숙성하시는 의미로 3년 동안 공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요14:6),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고 불렀습니다.(히8:6).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히10:19~20). 십자가의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행4:12).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이나 감성에 지배되는 우리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다 그릇된 길로 간다고 경고합니다.(사53:6) 십자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방법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변화의 동력
십자가의 도는 변화의 능력입니다. 본문을 제가 묵상할 때 첫 번째로 하나님이 제게 주신 말씀은 ‘변화’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바로 변화의 능력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신 후에 변화되셨습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만나셨다면 당연히 변화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 십자가의 도를 체험하지 못하셨습니다. 목사 때문에 장로 때문에 변화가 안 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킵니다.
바울에게 100% 지지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바울을 대적하고 믿음을 무너뜨렸습니다.(딤후2: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 같이 번져갔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변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스데반은 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들은 청중의 반응은 아주 달랐습니다. 베드로의 청중은 회개하고 성령을 받았습니다(행2:36~38). 반면에 스데반의 청중은 설교자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행7장~8장). 두 사람의 설교는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행7:52)
십자가의 설교를 듣고 미련한 사람은 멸망의 길로 가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회개하고 성령을 받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이 전한 십자가가 정말 변화를 일으키는데, 그 십자가를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 사는 기쁜 느낌을 가져보신 적 있습니까? 십자가를 만난 체험때문입니다.(갈5:24) 그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것은 승리의 길입니다.(고후13:4) 그런데 그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면, 우리의 신앙은 종교적, 정치적, 문명적 가치만 추구했던 것이지, 십자가의 본질적인 능력은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구원의 능력
다시 강조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자들에게는 멸망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이 변화를 통해서 우리가 얻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구원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수없이 듣고 있는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롬1:17)는 말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성경을 알고 있으면서, 우리는 자신이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하는 말씀을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행과 공로는 분명히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이것도 역시 상대적인 것입니다. 나보다 조금 덜 의로운 사람에게 나는 상대적으로 의롭습니다. 내가 마음의 수련을 닦아서 마음과 정신이 맑아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조금 더 낫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서 보면, 63빌딩이나 판자촌 집이나 똑같은 크기입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것에 비해서 조금 더 큰 것이지, 절대적 가치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내세울 수 있는 의가 있습니까? 내가 의롭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의롭다는 얘기죠. 내가 마음의 수련을 통해서 안정감을 가졌습니까? 다른 사람에 비해서 조금 더 낫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 나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면 상대적 우위를 가지고 나를 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마음에 평안이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선행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의 의는 박살이 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 지옥에 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 마음의 수련과 선행의 공로가 부족해도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잊어버려선 안 됩니다.(롬3:10). 그 안에 기독교의 근본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입니다. 그러면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영원히 죄인이기 때문에 더 선행을 하거나 진보할 필요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진보하고 인격적으로 수련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더 온유하고 겸손하고 더 좋은 인품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보할지라도 상대적 우위에 그치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룰만한 절대적 가치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나를 구원함을 믿는 근본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느 날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기독교가 너무 종교적이고 정치적이고 문명적이 되었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 했습니다.(롬1:16~17)
십자가의 도는 미래의 소망
십자가의 도는 미래의 소망입니다. 구원은 소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미래의 소망으로 인도합니다. 가까운 미래인 현실의 미래에는 빛을 주십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에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창1:1~5)는, 출애굽을 지나 지금 여기에 까지 여전히 지속되고 재현되는 소망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은 소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시는 사건입니다.(렘29:11)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고(롬8:24), 하나님은 소망이십니다(롬15:13).
또한 십자가의 도는 영원한 미래의 소망입니다. 소망은 영원합니다.(고전13:13) 우리의 가까운 미래는 현실의 미래이시지만, 우리의 영원한 미래는 내세의 미래입니다. 저는 영생을 믿습니다. 저는 부활을 믿습니다. 저는 천국을 믿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는 천국의 소망을 믿습니다. 이 소망을 사도 바울이 바라보았습니다. (딛1:2, 딤전6:17) 우리의 더 좋은 소망은 하나님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히7:19). 이 소망은 산 소망이십니다.(벧전1:3). 성경의 결론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소망입니다.(벧후3:13,계21:1)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의 말씀처럼 소망에 관한 이유를 마음에 품고 살다가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온유함과 부드러움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이소망은 주님께 둔 소망이고,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요1서3:3)
축복
축복합니다. 이 한주간 십자가의 도를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상대적 우위에 있는 모든 가치들을 십자가 밑에 내려 놓고 오직 십자가만을 굳게 붙들고 십자가의 도만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만이 우리에게 큰 격려를 갖다 줍니다. 우리가 우울합니다. 죄책감과 자책감과 무기력함 그리고 사회의 거대한 벽 앞에서, 늙어가는 세월의 흐름 앞에서, 약해져가는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면서, 배우면 배운 대로 열등감이 있고, 가지면 가진 대로 아픔이 남아있고, 지식과 재산이 다 있는데 자식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부모 때문에 아파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는 생각도 못한 일들이 우리의 삶을 무너뜨려 버립니다. 철저하게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붙들고 이 한 주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붙들고 삽시다.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에 붙들려 사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능력입니다. 갈리디아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사람만이 믿음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변화의 동력이고, 구원의 능력이고, 미래의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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