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성경의 기독론(번역)
번호:1 글쓴이: 말씀강론가 서철 목사
조회:11 날짜:2003/04/0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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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왕국과 자신 이외의 이슈에 관한 말씀에서 예수에 관해 식별될 수 있는 것.
비록, 나는 예수가 자기 역할을 어떻게 생각했고,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관해 해결의 빛을 던져 줄 예수에 관한 모든 복음서 자료를 간파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것을 포괄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할 것이다. 더욱이, 주제별로 세분할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특수한 유형의 자료가 예수에 관해 전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세속적, 종교적 문제에의 예수의 지식에 대한 더욱 일반적인 표시로 이 장(章)을 시작할 것이고, 다음 장에서 왕국 선언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행위와 말씀으로 전환할 것이다.1)이 책들에서 나는 예수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는지에 관하여 초기에 연구하였던 자료들이 담긴 CBQ29(1967),315-45쪽rhk BJGM 38-79쪽의 자료들을 상당 부분 사용하였다.
솔직히, 후반 자료는 책 나머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독자들이 이 장에서 복음서 텍스트에 대한 논의가 너무 어렵다고 느껴지면, 나중에 그것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A) 예수가 평범한 생활 문제에 대해 보여주는 지식에서 식별할 수 있는 것
복음서내의 텍스트는 예수가 생활 문제에 대한 지식에서 평범한 인간 한계를 공유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그런 일상사에서 특별하거나 심지어 초인간적인 지식을 그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돌릴 수 있는 다른 텍스트도 있다.
***제한된 지식을 보여주는 텍스트**
#1. 공생애 기간: 가장 좋은 예는 마가복음 5:30-33이다. 예수는 군중 속을 걷고 있었다; 어떤 여인이 그의 옷을 만지고, 그의 기적적인 힘으로 치유된다. 힘이 그에게서 빠져나간 것을 인식한 후, 예수는 누가 자기 옷을 만졌는지를 묻는다. 제자들은 이것은 군중 속에서 많이 밀고 당기는 상황에서 어리석은 질문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인이 앞으로 나서 고백을 한다. 이야기는 분명히 예수 쪽의 무지를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전제가 거의 이야기 흐름에 부차적인 것일지라도 말이다. 이야기는 누가복음 8:45-47 에서도 비록 어조가 약하지만, 대략 같다, 그러나, 마가복음 9:22는 예수의 질문과 그의 탐색에 대한 기술을 빠뜨리고 있다.이 책을 통하여 나는 학자들이 상식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주장을 말하려고 한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는 각각 다른 사람의 저작을 알지 못한 채 독립적으로 마가복음을 알고 있었으며 사용하였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돌아서서 여인을 바라보고, 무엇이 발생했는지를 안다. 마가복음 형태가 더욱 원형인 것 같고, 마가복음은 마가복음이 예수의 행위로 돌리는 무지에 관한 불편함을 반영하고 있다. 마가복음 자료에서 보도된 “인간적인 연약함”에 대하여 유사하게 수정하는 태도를 볼수 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의 기적생략에서 시각장애인을 치료하려고 했던 부분이 처음에는 부분적으로만 성공적이었다(마가복음8:22-26). 또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거친 태도를 조율하고 있다.(참조.마8:25과 마가복음 4:38)
#2. 소년 시절: 관심을 가질만한 누가복음의 유아시절 이야기에의 두 가지 텍스트가 있다. 누가복음 2:46에서, 예수는 12세 인데, 성전에 나타나 율법선생에게 질문을 한다. 다음 절은 선생들이 예수의 이해와 그가 한 대답에 놀랐다고 이야기되어 있다. 예수는 분명히 배우기를 열망하는 조숙한 아이로 생각된다. 위 장면 이후 누가복음 2:52에서 예수는 키와(statu하나님의 사랑만큼이나 지혜에서도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정형화된 문구이다, 왜냐하면, 유사한 진술이 I Sam 2:26내의 사무엘에 관해, 누가복음 1:80 내의 세례 요한에 관해 되어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시각에서 볼 때, 이 텍스트는 예수 인생에 대한 재구성에서 사용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의 유아시절 이야기 내에서 이 자료를 입증할 과학적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소년으로서 예수에 대한 표준적인 복음서 설명이 없다; 우리는 누가복음 의 출처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러나, 복음전도사가 예수가 (평범한) 지식 속에서 질문을 하거나 성장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정확히 누가복음 유아시절 이야기가 예수를 누가의 개념 첫 순간부터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다.
***특별한 또는 초인적인 지식을 나타내는 텍스트***
#3. 한계성의 부인: 나중의 복음서에는, 예수가 평범한 지식을 얻었다는 어떤 제안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미 상기 A#1에서의 마가복음에서 이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특히 요에 있어서는 분명하다. 요 6:5내에서, 예수가 빌립에게 엄청난 군중을 먹이기 위해 어디서 빵을 찾을 수 있는 가를 묻는다면, 다음 절 내의 삽입된 첨가문구는 예수가 단지 빌립을 시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이미 그가 하려고 했던 일과, 그리고, 암암리에 다섯 개의 보리 빵 덩어리와 두 마리의 생선(6:9)을 가지고 있는 군중 속에 청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예수는 자질이 부족한 몇 제자들을 선택했지만, 초창기부터,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요 6:64). 특히, 그는 가롯유다가 그를 배반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6:71; 13:11). 이 모든 것은 예수를 인간 약점이나 의존성 요소를 없는 것으로 묘사하려는 요의 경향 일부이다.요3:22는 유대에서 예수가 세례를 주는 사역을 하셨다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그가 세례요한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을 지적해주는 관례일수 있다. 요4:2에서는 이것이 조심스럽게 부정된다. 예수는 그 자신이 세례를 행하지 않았고 단지 제자들이 세례를 주었다.
예수는 자기 죽음과 관련해서 10:18에서 말할 수 있다, “누가 내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입니다. 나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습니다.” 비록, 요는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고(1:14)주장하지만, E. Kasermann은, 요의 예수는 자기비하(kenosis), 즉 철저한 낮은 상태까지 비우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빌립 2:6-8에서도 마찬가지로). 육체를 갖춘 예수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아들의 영광은 끊임없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모두에게 빛나고 있다. APPENDIX4dptj 케제만의 견해를 다루 것이다. 여기에서는 과장이 있으나 우리는 요의 예수상만을 취한다면 이것은 어느 정도 예수의 신성에만 치우쳤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요를 마가복음과 균형을 맞춤으로서만 우리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예수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가질 수 있다.
#4.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 모든 복음서는, 비록 사람들이 스스로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고 있는 능력이 예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마가복음 2:6-8 and par.; 마가복음 9:33-35 with 누가복음 9:46-47; 요 2:24-25; 16:19 and 30). 그런 능력은 특별한 종교적인 인물 이야기에서 보통이다. 우리들은, 예수 편에 관해 역사적이라면, 그것은 인간성이나 초인적인 지식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나타내는 것인지를 물을지도 모른다. 요에서 분명히, 그리고 가장 아마도 기타 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서 기자들은 후자를 생각한다.
#5. 원거리에서의 지식 : 모든 복음서는 예수가 인간의 시야를 넘어서,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일을 아셨다고 보여준다
(a) 요한 1: 48-49에서, 나다나엘이 상당히 놀랍게도, 예수는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다.
(b) 마가복음 11: 2 and par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준비를 할 때, 제자들에게 근처 마을로 들어가라고 지시한다. 입구에서 그들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가 매어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마21:2는 두 동물을 말한다. 이 번과 다음에 말해지는 예에서 예수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필요한 사람들을 주선하였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이 사건을 이러한 이성적인 방법으로 거의 해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을 초능력적인 지식의 한 예로 본다.
이 이야기는 요에서는 자세히 이야기되어 있지 않은데, 요의 예루살렘으로의 입성 이야기가 공관 복음서의 이야기보다 어떤 면에서, 더욱 본래적이다. 요 12: 14에서는, 예수 자신이 동물을 발견한다.
(c) 마가복음 14: 13-14 and 누가복음 22: 10-11에서, 유월절 준비를 위해 예수는 다음과 같은 지침과 더불어 제자 둘을 보낸다.
“ 도시로 들어가라 그러면 물동이에 물을 길어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를 따라가서, 그가 들어가는 곳마다, 집 주인에게 말하라.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음식)을 나눌 방이 어디 있느냐?” 마가복음 26: 18에서의 이야기는 마가복음 일어나려고 하는 것에 대한 신비스런 지식에의 힌트가 없다. 마가복음에서의 예수는 단순히 제자들에게 어떤 집에 가서 유월절 준비를 하라고 지시할 뿐이다.
(d) 마가복음 17: 24-27에서 예수가 배당된 세금을 지불하고, 그의 제자들이 절대적으로 지불해야 하는가 라는 이슈가 제기되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갈릴리 호수로 가서, 그가 잡은 첫 물고기가 입에 한 세겔을 물고 있을 터인데, 그것을 꺼내서 자기 몫과 베드로의 몫으로 갖다 내라고 한다. 우리는 베드로가 지시 받은 데로 했는지, 은전을 찾았는지 결코 들어 보지는 못했으나, 그것이 암시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에만 나오는데, 아마도 특히, 마가복음 의, 사도 베드로(14: 28-33; 16:16b-19) 전승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것의 주요 목적은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기독교인의 납세 문제 ; 베드로와 예수의 연합 이 논점에 대하여 더 알기 위하여서는 Peter in New Testament, eds. R.E.Brown et al.(New York: Paulist,1973), 101-5를 보라. 이 책은 개신교와 카톨릭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를 제시해준다
), 동전이 물고기 입에 있을 거라는 예수의 지식은(아마도,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그런 상황에서 자기들의 시민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할 것이다 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부차적인 일이다. 교훈적 목적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헬레니즘 기적 종사자 이야기에 어울리는 마술적 행위와 근접하게 닮은 예수의 몇 가지 기적 중 하나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대중적 이야기로서 간주하고, 유아시절과 수난설화에서, 마가복음은 특별한 사건을 이야기하는 대중적인 극적 자료의 맥(vein)을 두드리는 것처럼 보인다. (유대 왕 탄생을 신호하는 별: 예수 죽음과 부활 시의 지진; 무덤에서 걸어 나오고, 예루살렘에 등장하는 성인들) 이 사건들을 평가할 때, 우리는 문제들에 봉착한다. 사건 (a)와 (d)는 기타 증거가 없고, (d)는 매우 어렵다. 사건 (b)와 (c)에는, 특별한 지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또 다른 구절이 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알 수 있는 예수 능력에 대한 전승이 아주 초기 전승으로 거슬러 올라가는지를 결정하려면, 우리는 여전히 그가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추정하는 신학적 가정에 관해 신중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서는 이런 유형의 지식을 많은 예언자의 것으로 돌리는데, 예를 들어, 바벨론에 사는 에스겔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통찰력이 있다. 멀리서의 초감각적인 시야는 (c)에 인용한 마가복음 14의 사건과 매우 유사한 사무엘 (I Sam 10:1 ff)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추측되고 있다.
우리가 A에서 논의한 텍스트에서 확인한 것을 요약하면, 예수가 평범한 생활 업무에 대해 보통으로 제한된 지식을 가졌다는 것을 주목할 만한 어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고대 복음서 전승이 있다. 마가복음과 요에 의한 이것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억제는 2차적인 신학 변형이다, 이와 반대로 아마도 사람이 전승을 조사할 수 있는 한까지 뒤로 가면, 예수는 타인에 관해 보통 이상의 지식과 지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제시되었다. 상당한 종교적, 예언적 모습에서, 그런 뛰어난 지식은 기타 분야에서의 한계와 무지를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 가지 결합이 예수에게서 거의 기대된다.
(B) 예수가 종교 문제에 대해 보여주는 일반 지식에서 식별할 수 있는 것
A에서 이야기 한 것은, 신학자들의 전제조건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 지식 범위에 관심이 있는 대부분의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지는 않는다, (위 3장 참조) 왜냐하면, 예수가 일상사에서 실험적 지식을 얻어야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은 오늘날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예수가 종교지식에서 제한되어 있을 수 있었다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반면에, K. Rahner, “Dogmatic Conciderration on Knowledge and Consciosness in Christ," in Dogmatic vs. BIblical Theology(Baltimore: helicon,1964), 241-67쪽. 특히 261쪽을 보라.: ”우리는 예수의 영적인, 실로 종교적인 성장에 대하여 자신있고 분명하게 말해도 좋다.“
이 분야에서, 우리는 예수의 공생애, 또는 적어도 공생애에 대한 복음서 설명의 내용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 문헌은 종교적 의미가 거의 없는, 예수가 행한 평범한 일을 훑어보면서 종교적으로 중요한 것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동일한 사건들이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과 바울에 있어서도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위에 집중된 사람들이라는 단순화된 설명그림을 가진다.
(만약 A에서, 우리가 일상사에 관한 특별한 지식 예를 본다면, 심지어 그 사건들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행위와 궁극적으로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왕국을 선언하는 그의 사명에 대한 예수의 파악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텍스트를 다음 장(章)까지 남겨두고, 여기서는 그의 일반적인 종교지식에 집중하도록 하자. 성서, 신학 개념 사용에 있어서, 예수는 자기 시대의 지식을 훨씬 넘어선 지식을 증명한다. 그래서 사람이 이 지식에의 초자연적 원천을 어쩔 수 없이 가정하게 된다. 부디, 이 문제의 어구표현(phraseology)에 주목하십시오. 다음으로, 내가 현대, 과학적 시각과 (복음서에서 보고된 대로) 예수의 시각을 대비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만하게 들리는 게 당연하다. 단호하게, 난 현대, 과학적 세계관의 우수성을 무조건 방식으로 주창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필요에 대답하는 것이나, 이전 시대의 세계관은 자기 자신의 진리를 파악하였다 때때로, 우리가 상실하여 우리에게 손상을 입힌 파악 말이다. 그러나, 그 인식은 중심 문제, 즉 일반적 종교 지식에서의 예수나 그의 시대의 타인들 사이에의 명백한 차이가 있었느냐 라는 것에, 대답을 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성서지식을 보여주는 텍스트***
성서는 유대이즘의 기본, 종교 어휘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만일 예수가 특별한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여기서 증명되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예수가 성서를 사용했다고 이야기하는 복음서 안의 예를 아래에 인용하지만, 우리가 그의 “바로 그대로의 말”(ipsissima verba=The Very Word)" 즉, 바로 그 자신의 말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도 설교에의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예수를 그의 동료 유대인들에게 이해시키려고 구약성서 배경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구약성서에의 그런 의존은 예수 자신의 성서 인용 풍습과 거의 분명히 밀접한 관련이 있으나, 구약성서에의 복음서 언급이 예수에게서, 또는 사도 설교에서 유래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항시 가능하지 않다. 뒤이어 나오는 것에 있어서, 모든 현대 학자는 예수가 알았던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거만하게 보이는 모험을 한다. 여기서 암시되는 성질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수 시절 실천한 해석은 자기 자신의 타당성을 지녔으나, 이슈는 예수가 자기시대 지식너머로 성서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보였는지 여부이다.
#1. 예수에게로 돌린 성서 인용이 잘못이 있는 예가 있다. 우리는 요 7:38에서처럼 그가 성서를 인용하나, 그런 인용을 구약성서에서, 찾을 수 없는 사건으로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예에는, 우리를 위해 보존되어 오지 않은 책을 인용하는, 또는 탈굼(Targum: 아람말로 번역된 구약성서)이나, 어떤 기타 대중적인 형태의 성서 텍스트를 인용하는 가능성이 항시 있다. 신성한 유대인 책들의 정경( 후대에 기독교인들이 구약이라고 부르지만 유대인들은 “율법, 선지서, 성문서(The Writings)” 라고 부름)은 적어도 시편에 있어서는 그 영역들이 확정되지 않았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 예를 들면 쿰란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후의 유대 전통이 정경화하지 않은 책들을 신성한 것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다.
*마가복음 2:26에서,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일 때,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단에 차려놓은 빵을 먹었다고 예수는 말하고 있다. 장면은 I Sam 21:2 -7에서 보여진다. 그러나, 거기선 대제사장이 아비아달이 아니라, 아히멜렉 이다.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어려움을 알아차린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예수에 대한 말에 대한, 자기들의 설명에서 대제사장 언급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2:4; 누가복음 6:4). 마가의 어떤 mss는 역시 이태리체로 쓰여진 구절을 생략하나, 더 나은 mss와 본문비평의 규칙들은 진정성을 선호한다. 마가복음의 복사가들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나타나는 실수를 포함시키는 실수를 포함시키는데 대하여 동일한 주저함을 보여 준다
아비아달은 Ahimelech 보다 더 잘 알려져 있었고, 말년에 다윗과 더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대중적 전승은 두 사람을 쉽게 혼동하였는지도 모르나, 만일, 강독(reading)이 진짜라면, 예수는 부정확한 번역본을 추종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가복음 23:35에서, 예수는 아벨의 피로부터 성소(sanctuary)와 제단사이에서 살해된 바라갸의 아들 스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서 흘린 모든 정당한 피를 언급하고 있다. 이 스가랴에 대한 신원 확인은 혼동을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바라갸아의 아들 스가랴는 ca 520-516 년경, 활약한 소선지자였으나, BC 825년 경, 성전에서 살해된 사람은 Jehoiada의 아들 스가랴 이다.(II Chrou 24:20-22). 만일, 혼동이 저변의 Q에 존재한다면, 분명히 누가복음은 혼동을 알아챘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1:51에서 “바라갸의 아들” 구절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J. M. Ross, "Which Zachaiah?" Irish Biblical Studies9(1987), 70-73.Ross는 이 문제를 현대적으로 다루면서, 예수의 시대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에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미지의 스가랴라는 존재가 있었다고 단정한다. 나는 극단적인 해결이라고 여긴다. 우리가 이러한 구약 인물들의 혼동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코란의 신성하게 계시된 인물들에 대항하는 기독교의 기본 주장들 중의 하나가 모하메드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예수의 어머니 미리암(마리아)과 혼동하였다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그러나 내가 기독교적 사고를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성경이 영감으로 된 것일지라도,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계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정확성을 요구하지 않는 문학 장르에서의 부정확성은 성경의 신성함에 지장을 주는 것이 아니다.
#2 예수에게 돌린 성서 인용이 비판적 의미를 보여주지는 않으나, 그 시대의 부정확한 아이디어를 반영하는 예가 있다.
*마가복음 12: 36 and par에서, 예수는 시편110 ("The Lord said to my Lord.")을 인용하고, 이 시편을 다윗에게로 돌린다. 이것은 단지 일반 귀속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전체적 주장은 다윗 자신이 시편을 작성했다는 사실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랫동안 예수가 시편을 다윗의 것으로 간주함은 다윗이 그 시편을 썼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로써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면 1910년 5월1일자 The Roman Pontifical Commission의 칙령(NJBC72, §27). 현재의 이러한 문제에 대한 카톨릭의 자유에 대하여는 NJBC72, §25를 보라
거의 모든 현대 학자들은, 카톨릭 학자들도 포함하여, 시편을 왕의 대관식이나 연례 기념일에 왕의 신탁(royal oracle)의 선언 자에 의해 언급된 것으로서 생각한다. 다윗에 의한 개인 저작자라는 것은 가장 그럴 것 같지 않다.
*마가복음 12:39-41에서 (또한 16:4; 누가복음 11:29-32), 예수는 예언자 요나 기적이 현 세대에 보여질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신호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요나서에의 예수 언급은 가장 잘 이해된다, 만일 그가 그것을 역사적 설명으로서 생각했다면 말이다. 정말로, 보수학자들은 요나가 역사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거기에 이야기되어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Nineveh 의 과장된 폭을 포함하여), 예수 인용을 사용했다. 현대 성서학자들은 요나를 다른 무명의 예언자, Amittai의 아들 요나 인물을 그린 우화로서 식별하는데 거의 만장일치하고 있다. (II Kings 14: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예를 너무 많이 강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가 요나를 역사적 인물로서 취급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오늘날은 주변적인 것이라고 판명된 것이지만 예수에게 속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다른 성경인용: 적어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기본적인 규범이 가지고 있는 문자적인 의미가, 원래의 저자가 사용했을 때에는 의미상 주변적인 것이었다 라고 판단되는 것을 사용한다. 여기에 대한 정확한 것을 보려면 NJBC 71,§§9-13을 보라
물론, 문자 이상의 해석은 예수 시절 즉, 사해두루마리 작품, 탈굼, 그리고 나중의 랍비의 작품에서, 매우 관습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난 그런 해석의 특징을 모욕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그 시절 지식 이상으로 성서 지식을 보였는가를 정확하게 묻고 있다. 그에게 돌려진 몇 가지 해석 예를 살펴보자.
*요 10 :30-36에서, 스스로가 하나님으로 되었다는 것에 대해 그를 비난하는 “ 유대인” 들에게 반박하기 위해, 예수는 심판관들을 “ 하나님(gods) "으로서 이야기하는 시편 82 : 6을 인용한다. 이와 같이, 그는 , 유대인의 성서 자체가 인간에 대해 ”god“ 타이틀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해석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으나, (BGJ 1. 409-11). 예수가 ”god“ 단어에의 의미 차이를 그럴 듯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유대인들은 대문자 ”G“로 예수가 신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그를 비난하였다. 그는 인간은 응용된 의미로 ‘gods' 로 불려지는 예를 지적함으로써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이 장면은 요 신학의 냄새가 짙기 때문에, 우리는, 인용이 바로 그대로의 말(ipsissima verba, the very word)을 나타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마가복음12:36 구절로 되돌아간다면,(#2 B위 참조), 우리는 다윗의 시편 110이 메시아를 언급한다는 예수 주장에 또 다른 성서해석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 The Lord [=God] said to my Lord” 문장에서, ”my Lord"는 메시아라고 생각한다. 카톨릭 학자를 포함한, 현대 학자들은 시편 110이 작시되었을 때, “the Messiah"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APPENDIXⅠ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들을 성취할 다윗가문의 미래의 특별한 왕에 대한 기대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가서야 형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오히려 그 시절에, 즉위식 또는 성찬식에서 역할을 했던, 시편은 다윗 자손의 왕을 의미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외견상, 그들 역시 시편이 메시아를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해석 가들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서 간주하는 점에 있어서 시편110은 예수의 주장(point)을 구축하지는 않는다.
#4. 예수를 성서를 익힌 것으로 묘사하는 복음서 구절이 있다. 예수 가르침의 권위와 깊이에 대한 일반적인 감탄이 기록되어 있다.(마가복음9: 29 ; 22:16) 특히, 요 7:15는 이 놀람을 그의 성서 지식에 관련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람은 스승이 없었을 때,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가? 유대 아이들에게, 읽고 쓰는 방법에 대한 지식은 성서 지식에 중점을 두었다. 누가복음 4:17은 예수가 성서를 읽을 수 있었다는 전승을 가지고 있다. 또한 복음서는 예수를, 그런 해석이 자기의 역할이나 하나님 왕국 요구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갈등이 있을 때, 통용하는 해석에 주저하지 않고 반박하는 사람으로서 제시한다. 예를 들어, Ps 110의 인용은, 바리새인들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메시아는 다윗 아들 이상이다. 또한 마가복음 5 내의 “ You have heard it said...... but I say to you", 이혼에 관해 바리새인들에의 대답에서의(마19:4), 그리고 부활에 관해 사두개파와의 대답에서 (22:31-32)성서 채택을 또한 참조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성서 사용 관련 ##1-4의 전반적인 영향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그 시절의 아주 탁월한 스승 이상으로서 생각하게 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당대의 종교 개념 이용을 보여주는 텍스트***
여기, 분명히 우리는 선택적임에 틀림없다, 만일 우리가 예수 지식에 관해 조사한다면, 가장 유용한 연구 분야는, 만장일치로 우리가 지금 부적절하거나,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그 시절의 개념에 대한 그의 태도일 것이다. 그가 전지전능하다면 기대되는 것처럼, 이 부적절함을 자각하고 있었는가? 분명히, 그는 그 자신의 사명과(메시아에 관한 생각) 또는 하나님의 요구(결혼, 의식 순수, 형제(그리고 자매)애에 관한 생각과 친밀하게 관련 있는 자기 시절의 생각을 수정하거나 바꾸는 것으로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우선,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을 선언하는 자기의 사명과 친밀하게 관련이 없던 일반적 종교 개념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 관심이 있다. 예로서, 귀신연구, 내세 묘사 그리고 묵시록 (apocalyptic)을 논하여 보자.
#5. 귀신론 공관 복음서는 공생애동안 귀신들림에 대한 특별히 많은 예를 서술하고 있다. 난, 여기서 귀신의 존재와 귀신들림 가능성에 대해, 또는 하나님 왕국이 귀신의 왕국으로 침입하기 전에 귀신들림이 더욱 빈번하게 있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나는 귀신축출과 관련 있는 귀신과의 투쟁에 대한 종교적 중요성을 의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공관 복음서가 귀신들림의 예로서 기술하는 사례 몇 가지는 자연발생적인 질환의 예인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종교적 진리가 우리의 세계관과 다른 세게관으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토론으로서는 BRTOQ 68-69쪽을 보라. 이 세계관은 과학적인 관점으로 볼 때 우리보다 열등할지 모르나, 상징성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보다 훨씬 풍부하다
마가복음 9:17-18에서의 증세는 간질의 증세처럼 보이고, 마가복음 5:4의 증세는 위험한 정신병 증세인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귀신들림과 관련하여 때때로, 복음서 기자와 예수 둘 다 자기 시대의 부정확한 의학-종교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할 수가 없다. 두 번째 예에서, 예수는 미친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나오게 하여 돼지 무리로 몰아낸다. 본래, 귀신 연구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의 예인 목적지. 거주할 장소를 찾으면서, 주위를 방황하는 귀신에 관한 Q 전승(마가복음 12: 43-45; 누가복음 11:24-26)에서 예수로 돌린 우화는 여전히, 유령이 출몰하는 집에 거주하는 귀신과 유사한. 또 다른 원시적 생각의 예이다. 예수는 이따금 질병이나 재난 그리고 개인 죄 사이의 너무 밀접한 관계에 관해 그 당시의 생각을 교정하나(누가복음 13:1-5; 요 9:2-3) 일반 복음 묘사에서는, 귀신에의 질문과 병의 의학 원인에서, 자기시절의 대중적인 견해의 부적절함을 보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없다. 제사복음이 귀신들림의 예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나, 이것은 요한복음서에만 보존된 근본적인 특색은 아니다. 오히려 요한은 예수의 세상 임금으로 구현된 악과의 보다 우주적인 전쟁에 관심이 있다.(12:31; 14:30)
#6. 내세론 예수는 내세에 대해 상세한 기술을 하였다고 보고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런 것을 보이는 것이 자기 사명이 아니기 때문인가, 또는 자기가 내세에 관한 세부사항을 몰랐기 때문인가? 이용가능한 성서 증거에서, 아무도 그런 질문에 답할 수는 없으나, 우리는 그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몇 가지 예에서 사용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주목해야 한다. 마가복음 9:43 ff에서, 예수는 사람들을 한 손, 한 발 또는 한 눈으로 내세로 들어간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치, 미래에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가진 것과 같은, 결함을 포함하여, 육신을 소유하는 것처럼 말이다. 형벌은 끌 수 없는 불(마가복음 9:48; 마 25:41), 게걸스럽게 먹는 벌레(마가복음 9:48), 좌절된 이 갈기, 그리고 울기(마 8: 12; 13:42), 그리고 만족을 모르는 갈증(눅 16:24)의 말로 기술되었다. 상당한 간격(chasm 구렁)이 불이 타오르는 형벌 장소와 더 없는 행복의 장소를 격리시키고 있다. (눅 16:24) 지복한 장소에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호화스러운 잔치를 즐긴다.(마 8:11), 반면에, 부러워하는 저주받은 자들은 바라보도록 강요된다.(누가복음 13:28), 그런 설명이 바로 그대로의 말을 나타내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어려움 외에도, 우리는 여기서 예수가 비유적으로써 언어에 대해 얼마나 많이 의미했는가를 결정해야 하는 추가적 문제에 직면한다. 반면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이 글자 그대로 의미되었는지 가정할 수 없고, 반면에, 우리는 예수가 이런 질문 몇 가지에 관한 우리 자신의 궤변론을-상징적으로 가장 잘 표현된 진리에 반드시 더 밀접하지는 않은 과학적 관점에서의 궤변론- 공유했는지 가정할 수 없다. 예수가 구름 위 천국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가복음 13:26; 14:62), 우리는 그것이 구름 위에 위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가 동의하지 않은 내세에 대한 대중적인 견해를 수정했다는, 한 가지 예에서, 사실은(마가복음 12:24-25 and par; 부활한 죽은 자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언어를 윤색한 기타 대중적인 견해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시한다.
관련 있는 질문은 영혼 불멸성에 대한 예수 지식에 관한 것이다. 내세에의 예수 언급 대부분은, 분명히, 육신의 부활 측면에 있었다. 그러나 묘사는 간단치가 않다: 마가복음 8:36; 마가복음 10:28, 그리고 누가복음 23:43 같은 구절은 더욱 쉽게 설명된다, 만일 죽지 않는 영혼에 대한 생각이 -또는 적어도, 육신 부활 이전 죽은 자들 편에 있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존재에 대한 생각.(빌 1:23; 고후 5:8) -이미 팔레스타인에서 알려졌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가 시대 말에 등장할 예정인 죽은 자들의 부활이외의 어느 것에 대한 기대되는 지식을 보여주지는 않았다는 가정에 관해 신중해야 한다. O. Cullmann, 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London: Epworth,1968),은 신약의 소망은 영혼불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쿨만은 예수가 불멸사상을 가르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단순한 것이 될 것이다. J.Barr는 “ the Garden of Eden and the Hope of Immortality?(Minneapolis: Fortress,1993)”에서 창세기의 남자와 여자는 처음부터 불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Old and New in Interpretation(London:SCM,1966),52ff에서 그는 육신의 부활과 혼의 불멸이 둘 다 복음서의 기대였다고 주장한다. 요11:15-16에서 반영된 복합된 기대들을 보라, 불행하게도 이 구절은 병행구절이 없다.
#7. 묵시록: 내세 묘사에 있어서, 예수에게로 돌린 비유적 언어에 관해 각 직면한 문제는 시대 말에 대한 예수 설명에서 찾는 묵시록 이미지 평가에 반복된다. 우리는 태양과 달이 캄캄해질 것이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듣는다(마가복음 13:24 -25 and par). 전쟁, 지진, 그리고 기근이 있을 것이다.(마가복음 13:7-8, and par) 간단히 말해서, 유대인의 묵시록 기술은 수세기 동안 예언해 온 현상들, 물론, 우리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이미지를 표준이 되어 사람이 최종적인 신의 개입을 달리 설명할 수 없게된 설명, 즉 상투적인 파국의 설명 이상으로서 받아들이려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복음서에의 이 묵시록 설명이 예수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면, 그는 확실히, 성서에게서 양식화된 언어를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순수하게 상징적인 설명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항시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가 그가 설명한 현상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이 구절에는 없다.
## 5-7을 요약하면, 세 가지 분야의 연구 즉 귀신론, 내세론, 그리고 묵시록에서, 예수는 뛰어난 지식 표시 없이, 실질적으로 개념을 수정하지 않고, 자기 시대의 종교 개념을 끌어낸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다음 장(章)에서 확인 할 것처럼, 특히 하나님의 왕국 주창에서, 기타 부문이 있다. 예수 가르침이 자기 시대의 가르침에 도전한, 그러나, 우리는 이 섹션에서 논의 해 온, 광범위한 종교 개념에서 그의 독창성을 찾을 수 없다.
***미래에 대한 예수 지식을 보여주는 텍스트***
어느 정도, 미래 지식이 예수에 대한 복음서 설명 속에서 기대된다, 왜냐하면, 그는 예언자로서 간주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6:15; 눅 7:16; 요 6:14) 에수가 공생애 동안에 선지자로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에수에게 부여한 타이틀에서 의미하는 역할들(메시야,인자등등) 보다 선지자라는 역할이 더 자연스럽게 명배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예언자들이 자기 시대와 관련 있는 주로 종교 개혁가들이었고, 먼 미래를 응시하면서 생애를 보내지 않았다는 점은 현대 성서학의 평범한 일이다. 그런 이해에서, 예언자로서 예수는 반드시 예언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나, 우리는 구약성서 예언 능력에 대한 현대 비판적 이해 견지에서 예언자에 대한 1세기 평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유대인의 바빌로니아 유수 이후의 유대 문화에서(postexilic 539BC 이후) 미래에 대한 예언적인 예언은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 Qumran pesharim, 또는 성서 해석으로 Habakkuk 같은 예언자들이 예언자 시대 수 백년 후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Qumran 공동체에 관해 정말로 작성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동시대인에 의한 예언자로서 예수에 대한 평가는 그가 미래를 알았다는 전승과 관련이 있는 게 당연하다. 로만카톨릭 교인들은 제 1차 Vatican 공의회가 예수가 온전한 예언들을 말하였다고 언급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DBS §3009)
만일 예수가 미래 지식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계획에서의 자기 역할에 대한 이해에 관한 지식에서 우리는 무엇을 식별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은 연구에 대한 매개변수(parameter)를 설정한다. 즉, 우리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어쨌든,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아-개념과 관련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예수 지식에 집중해야 한다. 만일 지식이 매우 상세하다면, 그는 하나님 자신의 지식에 비밀리에 관여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지 모른다. 만일, 그것이 상세하지 않다면, 적어도, 그가 자기 운명이라고 생각한 것에 관한 단서를 우리에게 줄 것이다.
아래에서 논의되는 모든 예에서, 난 예수에게 돌린 미래 지식과 관련된 세부적인 요지(amount)를 연구함으로써 시작할 것이다. 예수가 예언했다고 생각되는 사건 대부분보다 후에 복음서가 쓰여졌기 때문에, - 모든 것이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쓰여졌는데- 평가하는데 주요 어려움이 있다. 마가복음, 눅, 요는 아마도 예루살렘 붕괴 후에 쓰여졌다. 예수 말씀 실현을 나타내기 위하여, 복음서 작가들은 독자가 예언으로서 자기들의 성격을 인식하도록, 세부사항을 더함으로써 자기들의 말을 분명히 하였을 것이다. 옛 이성주의자 해석은 이러한 예들을 Vaticinia ex eventu, 즉 사도적인 목적으로 교회나 복음서저자들에 의하여 사건후에 단순히 창조된 구절들로 보았다. 그 접근법은(종교적인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성경학자들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인데)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수용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복음서 저자들을 속이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판단되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과 타협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으로 발견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예언에 관한 근본적인 이슈는 이성주의자 그대로의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는 없다. 시건이 일어난 후에 각각의 사건을 되새기면서, 복음서 저자들이나 그들의 선배들은 무엇이 예언으로 이미 간주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좀 더 명확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성경을 속이는 것이거나 가치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 교훈적 단계일 것이다.
그 결과, 예수에게 돌려진 예언에서, 사람은 얼마나 많이 바로 그대로의 말을 나타내고, 그 후의 사건의 견지에서, 복음 전도자에 의한 설명을 나타내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미래에 관한 예수의 원래 진술이 지금 나타난 것보다 더 애매 모호하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구축한다면, 어떻게 일이 판명될 것인지에 관한, 확고한 확신과 진정한 예언 사이에 경계선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세부적인 예언은 초인적인 것이다. 흔들리지 않은 확신은 반드시 인간 능력 이상의 것은 아니다.
#8 그 자신의 수난, 십자가에 못 박힘, 그리고 부활 나는 APPENDIX Ⅷ of BDM(2.1468-91)에서 이 자료를 길게 다룬 것을 제시하겠다.
우리는 상세한 예언을 조사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이나 죽음에의 일반적인 예언에는 관심이 없다. 관심사는 사람(who)과 방법에 관한 정확한 예언이다. 모든 복음서는 예수의 직무동안, 상세한 예언에 대해 예수에 돌린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것으로 돌려진 십자가에 못 박힘과 부활에 대한 정확한 예언에 관해, 앞선 의심을 야기하는 문제를 알고 있어야 한다. 즉, 예언을 들었을 거라고 추정되는 제자들은 심지어 십자가 못 박힘이 임박하였을 때조차도, 그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또한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누가복음 24:19-26은 그들의 반응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이다. 이 태만은(failure) 복음서 독자들에게 이해하는데 사도들의 느림에 대한 경고로서 유지하기 위한 복음서 기자의 욕망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원래 예언이 역사적이라면, 우리에게 지금 다가오는 대로 정확한지 아닌지 궁금할 수도 있다. 이 예언에 대한 뚜렷한 몇 가지 예를 좀 더 고찰해 보자.
*마가복음 8:31;9:31;10:33-34, and par 공관 복음서는 사람의 아들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수가 예언함으로, 특별한 그룹의 세 가지 예언 말씀으로서 대부분에 의해 간주되는 것을 기록한다. 만일, 우리가 마가복음 말씀에 집중한다면, 첫 예언에서,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 많이 고생해야 하고, 연장자와 대제사장, 유대인 율법학자에 의해 거부당하거나, 살해당하거나, 3일 후 부활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예언은 덜 구체적이다, 왜냐하면, 정확한 공직자 식별 없이 사람들에 의한 행동을 단순히 말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예언은, 가장 구체적이다; 그것은 공직자를 언급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를 경멸할 것이고, 그를 이교도에게 넘기어 조롱을 하고, 침을 뱉고, 그리고 채찍질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한다.(세 번째 예언에 대한 마가 문구는 십자가에 못 박힘을 언급한다.) 이 세 가지는 사람의 아들이 지상에서 고생하는 사람의 아들 부류에 속한다. 복음서내의 사람의 아들 이슈에 본격적인 논문을 바친 Tödt 와 Higgins 같은 몇몇 학자들은 H.E. Tödt, The Son of Man in the Synoptic Tradtion(Philadelphia: Westminster,1965); A.J.B Higgins, Jesus and the of man(Philadelphia:Fortress,1964). 인자의 사용에 관한 더 깊이 연구한 자료가 다음의 6장, C에서 발견될 것이다.
이 부류의 말을 예수의 진정한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다루는 구절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공유하고 있는 예수 말씀에 대한 Q 전승 속에서 발견되지 않고, 그러므로, 그런 말에 대해, 우리는 단지 마가복음 전승의 권위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기타 학자들은 그런 일반 근거(grounds)에 관한 이 말의 진정성에 반대로 판단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가 확인할 것처럼, 고생하는 사람의 아들 말이 요에게서(아마도 마가복음과 별개로) 발견된다. 중요한 문제는, 예언 말씀이 마가복음 수난 설명내의 사건 묘사와 같은 것 인지이다. 심지어 거기엔 차이점이 있다고, Tödt 도 인정을 하고, 복음서 기자는 처음에 수난과 부활에 관해 작성했고, 다음에 되돌아가 그가 작성한 것의 견지에서 세 가지 예언사항을 창출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아주 쉽지는 않다. 상세한 예언 사항이 예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
역설적으로, 요 증거 두 가지는 세 가지 예언 사항의 유형은 기술된 복음서에 앞서고 정확한 말씀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제시한다. 요 3:14; 8:28; 12:32-34에서,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예수에 대한 세 가지 말씀이 있다. 마지마가복음으로, 요는 이것이 예수가 지상에서 들어올려 질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죽음의 종류를 말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나, 그것은 또한 자신이 부활/승천시 하나님께 승천되는 것을 포함한다.(BGJ 1.145-46) 우리는 요의 예언 말씀은 세부사항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목한다. 오히려, 그것은 Isa 52:13 " Behold my servant.... shall be lifted up." 의 모호한 언어를 울릴 뿐이다. 사람은, 예수 전승 초기 국면에서, 작성된 복음서 이전, -preJohannine(요 이전) 전승 속의 Isa 52 언어, 그리고 preMarcan(마가복음 이전) 전승속 아마도 단7 언어로 이야기된-구약성서 언어 속에서 표현된 사람의 아들의 고통과 승리에 관한 세 가지 예언 사항의 유형이 있었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하나님에게 올려진 “사람의 아들"; 아래 p. 53 참조) 요 이전 발달 속에, 수난 설명의 사실 이후(post factum) 세부사항에 의해 더욱 구체적으로 되지는 않았다. 반면에, 생겨나기 시작한 마가복음 이전(preMarcan) 전승속에서 구체적으로 되었고, 마가복음은 과정을 계속하였다. 적어도 그런 개조는 요한이 세 가지 패턴에 대해 마가를 꾀어들였고, 모든 수난 세부사항을 빠트리고, 이샤야 모티브를 추가한 그 이상이다.
*.마가복음 12:39 -40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요나 기적을 제공한다. “요나가 3일 낮, 밤을, 고래 뱃속에서 보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3일 낮, 밤을 땅속에서 보낼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부활에 대한 예언이다. 그러나, 비교 공관복음서 연구는 기적(sign)에 대한 마가복음 해석은 더 원래의 말씀에 부가적인 추가이고, 아마도 요나 기적에 관해 더 애매 모호한 것이라고 제시한다. 비슷한 구절, 누가복음 11:29-30, 32 속에, 또 다른 해석이 있다, 요나 설교 면에서의 시기; 요나가 니느웨(Nineveh) 사람들에게 기적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에 기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나 설교에 회개하였기 때문이다.(후반 구절은 또한 마가복음12:41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도 이중 해석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마가복음 16:4 속의 세 번째 문구의 말씀은 단순히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기적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것은 원래의 문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지금 마가복음 12 와 누가복음 11 에 등장하는 기적에 대한 두 가지 다른 해석은 초기 교회내의 대안 설명 흐름을 나타낼 수도 있다. - 기독교인들이 요나가 사람의 아들, 예수의 기적이었던 방식을 찾기 위해 요나 커리어를 연구했을 때 생겨난 설명. 그 때 이 말씀은 그의 부활에 대한 예수의 상세한 예언을 구축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
. 예수는 유다가 자기를 배반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전승이 있다. 요한 6:70-71 은 이 예언을 공생애중의 예수에게 돌린다. 모든 복음서에, 다가오는 배반 주제가 마지마가복음 만찬에 나타난다. 그리고 공관복음서에, 이것이 사람의 아들을 넘겨준다는 말로 표현된다. 마가복음 26:25, 요 13:27에서는 예수는 배반자가 유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가복음 14:18-21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나, 눅22:22도 이것을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22:48은 예수가 유다가 무엇을 계획하는지 알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마가복음 14:10-11에서 이미 유다에 관해 독자들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예수가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추측하게 된다. 만일 이 예언이 진정한 것으로 생각되면, 사람은, 그것이 초자연적 예언을 나타내는지 또는 단지 유다 인물로의, (이전에 요 12:6 은 유다를 부정한 사람으로 기술,) 그리고 사건이(특히, 유다가 이미 대제사장들과 계약을 한 후 예언이 이루어진 공관복음서에서) 이끌고 있던 방향으로 꿰뚫는 통찰력만을 나타내는지 여전히 질문해야 한다. 그 때, 이 예언에서, 사람은 거의 예수의 예언 수준을 판단할 수 없다. 비록, 복음서 기자들이 예언이 초자연적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했지만 말이다.
요약해서, 자기의 수난, 십자가에 못 박힘,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 현대 비평은 세부적인 예언에 심각한 회의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의 생명을 난폭하게 잃었지만, 우리는 예수가 미리 확신했다는 복음서 전승의 일반적인 동의를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누가복음 17:25; 마가복음 10:45 참조),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옹호한다. 그런 확신은 예수의 구약성서에의, 예를 들어, 예레미야의 경력 그리고, 주님의 하인에 대한 Deutero-Isciah의 묘사에 관한, 숙고에서 나올 수 있었다. (세례 요한의 가혹한 죽음 또한 예수의 마음을 이 방향으로 전환시켰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서 자료가 역사적으로 연대순으로 배열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제약을 받는다. 막 2:20에서 예수는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한 어떤 기술이 있기 전에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언하였으나, 세 가지 자세한 인자 예언 중 첫 번째는 (막8:31) 세례요한의 죽음 이후에 나온다. 요한복음은(2:19-22; 3:14) 예수가 세례요한이 체포되기 전에조차(3:24) 그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에 대하여 말았다고 했을 것이다.
그 확신은 그리스도론적으로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에게 일어난 것을 왕국에의 신의 계획의 필수 부분으로서 -내가 나중에 돌아 볼 주제 - 이해했다고 의미하기 때문이다.
#9.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에 대한 예지: 공관 복음서 종말론 토로은 예루살렘 파괴에 대한 선 경고로부터 시작하자.(마가복음 13 and par) 마가복음 13:2 and par에서, 예수는 성전의 큰 빌딩이 파괴될 것이고, 돌멩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AD 70,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을 황폐화시켰다. 예수 말씀은 일어난 것에 대해 세부적인 예언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헤롯왕의 성전(Herodian Temple)의 거대한 블록이, 예를 들어, ‘통곡의 벽’ 속에, 여전히 예루살렘에 서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13:14, 마가복음 24:15는 이것과 관련 있는 사건이 일어날 때의 기적을 예수로 하여금 제공하도록 시킨다. “여러분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서 있는 흉측한 우상을 볼 때, “여러분”은 아마도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제자/사도 그룹이다. 이미지는 BC 170년 경, 팔레스타인 시리아 통치자, Antiochus Epiphanes가 제물 성전 제단 위에 설치한 이교도 신의 우상에 대해 이 용어를 사용하는 (마가복음이 지적하는 것처럼) Dan 9:27, 12:11에서 취하고 있다. 따라서, 기적은 예루살렘이 외국인에 의해 파괴될 것이라는 비유적인 표시일 수도 있다. 누가복음 21:20은 기적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즉 여러분이 군대에 의해 둘러싸인 예루살렘을 볼 때, 황폐화가 다가왔음을 알아라. 몇몇 학자들은 이것을 로마인들이 행한 것을 누가가 알았던, 70년 후, 설명된 것으로 판단했다. 기타 학자들은 BC 586년 바빌로니아인 들에게 예루살렘 몰락에 대한 구약성서 설명에서 도출한 언어로, 예수가 표현한 예언의 더 원래의 문구를 누가 보존했다고 주장해 왔다. C.H.Dodd“The Fall of Jerusalem and 'Abomination of Desolation,'” Journal of Roman Studies 37(1947),47-54쪽; More New Testament Studies(ㅎㄱ뭉 Rapids: Eerdmans, 1968),69-83쪽에서 재판됨.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다가올 재앙에 대하여 제공한 원형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에서 유래한 반면, 누가의 원형은 보다 더 고대에 일어난 파괴를 말한다.
어느 설명도, 예수가 미래에 대해 정확한 지식이 있었느냐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예레미아와 구약성서의 에스겔서(Ezekiel of old) 같은, 도시 파괴에 속한 그의 말씀 속에, 예수는 신의 형벌로 반역하는 예루살렘을 위협했고 예수는 이러한 예고에 있어서 그의 동시대인들 중에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ca. AD.62에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는 성전의 임박한 파괴를 경고하였다(Josepus, War 6.5.3; ##300-9). 랍비 사독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기 위하여 AD30년경에 금식을 했다는 후기 유대인 전승이 있기도 하다.(Babylonian Talmud, Gittin 56a; Midrash Rabbah on Lomentations 1:4; #31)
,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전통적인 언어를 사용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그가 재난이 정확히 언제 다른 두 구절들에 있는(마27:25와 눅 23:28) 현 세대 뿐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의 책임과 영향에 대한 언급들이 만일 원형이라면, 예수가 하나님의 심판의 임박한 작동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제시한다.
,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았다는 것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성정 파괴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예수 예언으로 전환해 보자. BDM1.429-60쪽에서 나는 한 단원 전체를 (§20)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수의 언급에 대하여 할당했다.
*. 마가복음14: 57-58 어떤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새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 또한 마가복음 15: 29 에서는, 지나가던 사람이 ”아,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고 한 사람“라고 말하면서 모독하였다. 마가복음 26:60-61 그러나, 마침내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서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또한 마가복음 27:39-40에서는, 지나가던 사람이 ”아,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고 한 사람“라고 말하면서 모독하였다.
*. 사도행전 6:13-14: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웠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은 언제나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나사렛 예수 이 사람이 이 곳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 2:19-21: 예수는 그들(유대인)에게 대답했다, “이 성전을 파괴해 보시오. 사흘 안으로 내가 다시 세우겠소.” 그는 자기의 몸을 비유해서 성전을 이야기하였다.
예수가 이와 같이 이야기를 한 것은 있음직하다. 예수가 죽은 후 약 40년 동안, 성전은 서있었다. 외견상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그 기간동안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성전을 파괴할 수 있거나 할거라고 주장했다는 표현을 거의 창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실행이 안된 예언처럼 보였음에 틀림없는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었다. 마가복음과 사도행전 둘 다, -아마도, 즉, 예수 자신에 의한 물질 파괴 또는 파괴된 성전 같은 물질적 성전 재건을 의미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비웃던, 사람들에 의해 취해진 진술 방식으로 - 예수에의 유대인 표현 속성 속에 거짓 요소가 있다고 제시한다. 재건되는 성전이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즉 기독교인 공동체로 이해되었을 때, 마가복음은 예언에서 진리를 찾아낸다. 이 해석을 지지하기 위하여, 벧전 2:25을 보라: “그리고 산 돌같이, 너희도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리라.“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언어학적으로 아람어보다는 헬라어에 발생적으로 훨씬 더 가깝다)의 마가복음의 첨가는 예수가 그의 적들에 의하여 오해받은 방법을 기독교의 올바른 방법으로 확립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나가는 자들에 의한 예수의 저주에서 두 형용사들이 빠져 있음을 주목하라.
사람은 또한, 손으로 건립한 예수 성전 파괴는 부분적으로 상징적이라고 이해해야 했다. 즉, 그가 죽을 때, 성전 베일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 졌는데 (마가복음15: 28), 그 장소가 신의 존재에서 생겨난 거룩함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가복음은 예수에의 말씀 속성을 거짓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 증인의 확언이 그것에 법적인 지위를 제공한다. 또한 마가가 구별했던 것처럼, 그는 두 유형의 성소를 구별하는 것을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마가복음이 작성되었을 때, 로마 군대는 물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를 파괴하였다. 그래서, 예수 말씀의 첫 부분은 글자그대로의 실행을 가지고 있다. 마태에게, 이것은 두 번째 부분을 실행할 수 있는 예수의 능력(주목: 난 할 수 있다.)을 확인시켜 준다. 자기가 예수 죽음 후에만 이해된 ‘사실 후(post factum)’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요한은 “수정(rebuild)" 보다는 ”건립(raise up)" 이란 동사를 사용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그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이 다양한 해석 과정은 예언의 원 문구가, 비록 그것은 확신을 표명했지만, 하나님만에 의해 주어질 수 있는 상세한 예언을 보여 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행동을 성소에 관한 하나님의 판단과 관련시키고 있다. 만일, 그가 성전 파괴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I"를 사용한다면, 그는 위험에 처한 예루살렘 운명에 관한 구약성서 예언적(그리고 당대 유대인) 경고 이상으로 가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장에서 논의될 다가오는 왕국 속에서 예수의 개인 역할에의 접근을 시작한다.
# 10. 예수 재림(Parousia)에 대한 예지 이런 예수 예언 양상은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자기의 정체성, 역할에 대한 전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반영한다. #8 and # 9에, 위에서 다룬 예들은 실제로 일어난 것들에 대한 예언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예언에 관심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를 예수가 알고 싶어했는지 또는 단시간 내에 그것이 발생하리라고 기대했는지 물어 보아야 한다. 여기서 Parousia 타이틀 하에, 나는 인자의 오심, 예수 재림, 그리고 권능이 있는 하나님의 왕국의 등장에 관한 표현을 분류할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지나친 단순화를 나타낼지 모른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는 인자의 오심을 필연적으로 포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자의 미래에 오심의 언급이 예수로부터 유래하였다고 생각하는 어떤 해석가들은 예수가 그 자신보다는 인자를 기대하였다고(내 판단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게) 주장한다.
등장 시기에 관한 표현 다양성은 우리가 해결하리라고 희망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상황을 제시하나, 그들 안에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속세의 열망을 분류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a) 예수 죽음 직후 임박한 예수 재림에 대한 기대 여기서 취급되는 말씀은 재림을 죽음에 대한 예수의 승리와 관련시킨다.
*. 요 14:3,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자기는 떠나나 그와 함께 한 제자들을 데리러 돌아 올 것이라고 말한다. 피상적인 중요성은 예수 죽음 직후 재림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와 함께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에 대한 유사한 언어가 가장 오래 보존된 기독교 저술, I Thess 4:14-17 에의 재림 구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M. E. Boismard Revue Biblique 68(1961),518-23쪽에서 요한복음서의 종말론의 전개에 관한 불란서 논문에서
는 요 14:3이 요에의 가장 오래된 종말론 경향(strain)중 하나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죽음 직후의 재림에 대한 해석은 마가복음 14:62 내의 대제사장에 대한 예수 말씀 위에 둔다. 즉, “당신들은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마26:64와 눅22:69(이들의 어법에서 각각)는 이 말씀에서 부사절로 동사를 수식한다: 이후에.“누가는 인자의 오심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는데, 아마도 말씀이 임박한 Parousia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가복음 14:25, 누가복음 23:42-43은 만일, 예수가 죽음 후 왕국에서 즉각적인 승리를 기대한다면 더욱 알기 쉬운 구절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가 죽음 후 자기의 승리가 정확하게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 몰랐다는 이론에 들어맞는다. 우리는 유대인으로서, 그가 사람의 아들에 관해 반영하기 사용한 Dan 7의 형상이라는 용어로 승리를 이야기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신약의 기대는 단7:13-14,26-27의 문자적 의미의 변형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한 인자는 상징적 인물이 아닌 것처럼 한 개인이 아니며,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의 성도들을 나타낸다. 다니엘서에서 이 인자는 지상의 사람들에게 오시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래의 ((91,94를 보라.
그러나, 사실상, 부활은 그의 죽음 후 일어났고, 재림은 미래에 남아있다. 이것은 반박되거나 증명될 수 없는 접근방식이다. 위에 주어진 모든 표현은 기타 해석이 가능하고, 해석 어느 것도 사람의 아들의 정확한 등장 순간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b) 예수 청중의 일생 중 재림에 대한 기대 적어도 죽음에 대한 예수 승리와 재림 사이의 세대의 차이를 두는 견해는 교회나 공동체 생활에의 예수 언급에서, 제자들을 이스라엘과 기타로 보낸 데에서, 성장을 묘사하는 그의 우화에서, 그리고 성만찬에서 그를 기념하고 세례를 주라는 명령에서 간접적인 지원을 받는다.
*. 마가복음 10:23에서, 예수는 12 제자에게 이스라엘에 가서 설교하라고 지시한다: 마가복음의 비교되는 절 (6:7, 30)에서, 장면은 갈릴리 주변으로 두 명씩 마을로 그들을 보내는 한 장면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이 박해를 받을 것이고, 그러나 그들에게 확언한다; 여러분이 한 마을에서 박해를 당하면, 다음 마을로 도망치라고. 아멘, 난 여러분에게 말하오,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마가복음판을 결합한 후, A Schweitzer는 예수가, 12 제자가 갈릴리 사명(mission)을 끝마치기 전, Parousia를 기대했다는 유명한 이론을 내놓았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그들이 돌아 왔을 때, 예수는 실망하여 자기 죽음이 하나님의 중재를 가져오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오늘날 이런 해석에 있어 Schweitzer를 추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장면은 결합될 수 없다. 마가복음 10의 배경(vv 17-18 에의 유대교도, 통치자, 그리고 왕에 의한 박해 언급)은 나중의 교회 배경이다. 그리고, 적어도, 현 문구10:23에서, 그 분위기로 이해되어야 하고, 예수의 공생애내의 기대에 대한 의미로서가 아니다. 시리아-팔레스타인(Syro-Palestinian )교회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박해가 사람의 아들이 오기 전, 보존의 모든 가능성을 고갈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 마가복음 13:30 and par, '진실로‘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나기 전, 이 세대는 소멸하지는 않을 거라고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현 문맥으론, "이것들“은 13:26에 기술된 사람의 아들 등장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문맥은 말씀의 원 의미를 결정하는데 가치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가복음 13에서의 종말론 담화는 한때의 독립된 말씀 모음집이다라고 인식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들"의 원래 의미는 13:2-4에 언급된 성전 파괴였다고 주장한다. “이 세대”는 전 인류를 의미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말씀의 일시적 한계를 해명하려는 노력은, 내 판단엔, 마가복음 9:1, "진실로“ 난 분명히 말합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 나라가 큰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죽기 전에 볼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에서 밀접한 비교되는 말씀으로 반박된다. 마가복음 16:28 ”그들이 그의 왕국에서 오는 사람의 아들을 보기 전.”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절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해석을 제공한다. 예수가 Parousa가 그의 청취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의미를 피하기 위하여, 많은 학자들이 마태의 해석에 의문을 던지고, 그 말씀이 Parousa를 의미하지 않거나 진정성이 없는 것이라고 하거나, 혹은 그것은 막 13:30을 이차적으로 다시 고쳐 쓴 것이며 원래는 성전의 파괴를 의마한다고 제시한다.
*. 요 1:51 : "진실로. 진실로“ 당신들은 하늘이 열려있는 것을 볼 것이며 하나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인 요한복음 경향은 실현된 종말론 면으로 Parousia가 기대 되는 것들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즉 말씀이 육신(flesh)이 되는 것처럼, 예수가 천국에서 내려올 때, 예수가 공생애에서 했던 것 안에서 기대되는 것들이 실행되었다. 복음 시작시 나오는, 논의 중인 말씀은, 아마도 이어지는 공생애에 기술될 것을 언급한다. 그러나, 원래, 그것은 아버지에게로 들여 올려지는 가운데, 예수 죽음 후 일어날 것을 언급한 독립적인 말씀이었을 것이다. (BGJ 1.88-P1)
. *요한복음 21:22 : 설사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가장 사랑하는 제자)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말씀의 분명하고 중요한 복음성은 예수가 제자의 일생 중 돌아올 것이고,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해석한 방법이다. (21:23)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가 요한복음 21이 쓰여졌을 때 죽어가고 있거나 죽었기 때문에,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의 약속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궤변을 채택한다.
마가복음 13:30이나 9:1 아무것도 늦은 창작은 아니었다 : 60대 이후, 사도 세대가 죽어가고 죽었을 때, 빠른 복귀 표현은 정확하게 그 표현들이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세기말에 초래하였던 대환란은 요21:23에서 함축적으로 그리고 비웃는 자들이 Parousia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는데 이것을 사용한 벧후 3:4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같은 내용이 요한복음 21:22에 대해서도 주장된다. 이것들은 상당히 예수의 바로 그대로의 말이나, 1세대 창작(composition)이다, 나중의 사례에서, 사람은 예수가 즉시 돌아오지 않은 사실로 당황한 1세대가 Parousia가 적어도, 많은 세대가 여전히 살아있는 동안 올 것이라는 확신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막9:1에 의하면 “어떤 자들은”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전에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며, 살전 4:13-18에 의하면 Parousia 전에 죽는 사람들에 대한 과제가 있다
(c) 무한히 지체된 Parousia를 암시하는 것으로 표현된 기대
. *묵시록 징조가 앞서는 Parousia 이전의 전조에 대한 언급은 그것이 너무 빨리 오지는 않을 거라는 인상을 준다. (근거로 # Thess 2:3 ff 참조) 마가복음 13, 마가복음 24-25, 그리고 누가복음21 내의 종말론 담화는 사람의 아들 등장에 앞설 기적을 열거하는데, 예를 들어, 거짓 메시아, 박해 전쟁, 그리고 우주 대폭발(cosmic cataclysms), 말이다. 이 장(章)들이 성전 파괴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동안에, 그것들은 예루살렘에 대한 처벌, 그리고 Parousia를 논의하고, 다양한 묵시록 기적이 원래 앞선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말씀이 예수에서가 아니라, 유대인 묵시록 언어를 사용하고, 주인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스스로 위안을 구하는 팔레스타인 교회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묵시록을 환기하지 않고 특히 Parousia 지체를 언급하는 말씀의 그룹이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24:48 ; 25:59 말이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것이라는 제자들의 믿음을 수정하는 눅 19:11을 첨가할 수 있다. 또한 인자의 날들 중의 하나를 기대하는 제자들 쪽에서의 미성취된 바램에 대하여 에수가 이야기하는 눅17:22도 첨가할 수 있다.
*. 예언될 수 없는 시간으로서의 Parousia 한 그룹의 말씀은, 제자들이 주님이 언제 오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그의 등장은 한밤의 도둑 등장이나 기대치 않은 주인 귀향 같은 것과 같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가복음 24:42-44 = 누가복음 12:39-40; 마가복음 24: 50 = 누가복음 12:46; 마가복음 25:13) 누가복음 17 : 20-21은 상기 인용한 묵시록 기적에의 언급에 비추어 특히 재미가 있다. 하나님 왕국은 관찰되는 기적과 함께 오지는 않는다. ...하나님 왕국은 당신들 안에 있다.“ 훨씬 더 유명한 것은, 마가복음 13:32인데, 예수 자신이 이 모든 것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를 몰랐다 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즉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십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말씀을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W.G.Kümmell, Promise and Fulfllment(SBT 23; Naperville: Allenson,1957),42,은 막 13:32이 비록 표현법이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가장 오래된 전승에 속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저자들의 목록을 열거한다. 더 앞서서 P. W. Schmiedel, in Encyclopedia Biblica(New York: Macmillan,1901), Vol.2,col.1991.은 막 13:32를 예수에 대한 복음서의 “가장 신뢰할만한 ”:일반적인 언급들 중의 하나나로 열거한다.
그것은 예수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the Son" 으로서 말하는 마가복음에서의 유일한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로, 말기의 특징(late feature)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주저했다. 다른 이들은 초기 교회가 예수 예언 중에서 외견상 모순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말씀을 예수의 탓으로 돌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지를 예수에게로 돌리는 부활후기간 성질(grain)에 반대로 달려가는 것이다. 교회 경향이 사도행전 1:7에 보여지고, 시대의 무지를 언급하나 아들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모든 언급을 생략하는 마가복음 24:36의 어떤 원고에(mss) 보여진다.
그런 혼란스런 기대사항 중에서, 사람은 어떻게 Parousia에 대한 예수의 원래의 견해와 하나님의 목적의 최종 달성을 구축할 수 있는가? 물론, 외견상의 모순 몇 가지는 현대 연구자들이 복음 구절에 종속시킨 미시적 분석으로 창출되었을 지도 모른다. 분명히, 역시, 지금 보이는 약간의 혼란은 자신의 전통적 종말론 기대에 비추어 예수의 말을 재해석한 초기 기독교인들이 야기하였다. 특히,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중 사람의 아들 강림에의 언급된 표현이 영광후의 Parousia를 언급하기 위해 재해석된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사람은 예수 자신의 입장이 분명하였다는 것을 믿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 신약성서 서신들은 Parousia에 관한 1세기 생각 속에 지배하고 있던 증거를 제공한다. 살전을 살후와 비교해보라; 고전 15을 고후5과; 벧전4:7을 벧후 3:4-13과 비교해보라
그리고 예수 역시 Parousia의 마가복음연한 지체에 관해 알았고, 그 주제에 관해 분명히 자기 입장을 표명했다면, 그런 혼란은 거의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대안을 남겨준다. 첫째는 예수가 Paronsia에 관해 알았으나, 어떤 알지 못할 이유로, 스스로 모호하게 표명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사람은 거의 기타 대안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심지어 Ma가 13:52 확언하는 것처럼) 즉, 예수는 Parousia가 언제 발생하는지 몰랐고, 그 점이 그의 진술이 모호한 이유이다. 주후 553년 교황 Vigilius아래에서 (DBS §419) 네스토리안의 제안들을 정죄하였는데, 그것은 예수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진정한 사람의 아들로서, 미래의 일들과 마지막 심판의 날을 몰랐으며, 마치 또 다른 사람(개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시는 신성만큼만 알 수 있었다는 제안이었다. 이 오류는 그리스도안에 두 개의 인격들 혹은 두 존재들이 있다는 네스토리안의 이론에 너무 연동되어 있어서, 그 정죄는 현대의 비네스토리안적인 문제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ca.600에 교황 Gregory(§§474-75쪽)는 막 13:32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말에 적응한 것으로서 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그의 인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재림의 때를 알았으나, 이 지식은 그의 인성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주장은(믿음안에 묶여지지않는 것으로 보여지는) 그 구절의 해석으로부터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신학적 차이점을 제기한다. 나는 막13:32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금지하려고 했던 카톨릭 교회의 주장이 구속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이들은 예수가 가르친 것(즉, 그가 Parousia의 시기를 몰랐다는 것)과 묵시록 배경 속에서 희망했던 것 (즉, 빠른 Parousia) 사이를 구별했다. 그러나, 단 시간내의 Parousia에 언급하는 표현은 특히 종말론적이지 않고, 예, 그들은 “Amen, I say to you"이 앞선다고 배운다. 타인들은 예수 청중 일생 중 일어날 것에 대한 약속 중 Parousia에의 모든 언급을 해석으로 해명하였다. 만일 우리가 그것 해결책의 절망적인 특징을 인식한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언제 왕국 최종 승리를 가져올 것인가를 몰랐기 때문에, 그는 곧 그것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것에 알맞게 이야기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많은 신학자들은, 그런 지식은 예수 사명의 본질이 아니라고 제안한다. 그들은 또한 예수가 묵시록 견해에의 본래의 혼란스런 시대 견해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해석학자들은 그에게 돌려진 표현 속에 부인할 수 없는 혼동을 단지 지적할 수는 있다.
이 장(章)에서 예수에 대한 복음서 설명 속에 명백해진 보통, 종교적 지식 범위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전체에 걸쳐 한계 표시가 있었다. 예수가 "진정한 하나님의 진정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라는 신학적 전제(priori) 주장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그런 한계를 설명하는데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들은, 그가 청중(聽衆)들을 혼란케 하거나 놀라 키지 않으려고 그가 알고 있는 것을 감추었고, 일부러 한계를 보였다는 명제에 의지해야 한다. 아들은 모른다고 예수가 말하는 적어도 하나의 기록된 표현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그런 설명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고, 전지전능에 대한 최우선 주장의 타당성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묘사의 다른 측에서는, 심지어 지금까지 고찰된 예수 말씀의 일부 범위에서조차도, 예수가 스스로를 단지 또 다른 인간으로서 보였다고 가정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어려움이 있다. (A)에서, 우리는 예수가 평범한 인간 인식 넘어서 지식을 분명히 보였다는 전승을 확인했고, (B)에서, 우리는 성서 주해에서의 예수의 권위와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처벌할 것이고, 예수로 하여금 고통에도 불구하고, 승리자로 만들 것이라는 절대적 확신을 확인하였다. 이 모든 것은, 계약된 사람들을(covenanted people) 자극하기 위해 하나님이 특히 보낸 사람들 중 한 사람, 예언자로서 일생동안 자기에 대한 반복된 평가와 잘 일치한다. 스펙트럼의 '진정한 인간(true man)' 측에서 예수에의 아마도 가장 최우선 접근 방식은 "예언자"를 예수에 대한 역사적 자기 평가로서 수용하나, 그가 그 이상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장(B##8-10)에서 논의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서에서, 묘사가 더욱 복잡해진 표시가 이미 있었다. 예수는 자신을 아주 중요한 복음화 인물로 보아, 자기에 대한 거부는 (하나님 메시지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불리한 신의 행위 원인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정말로, 그는 “난 파괴할 것이고(할 수 있다.)" 라고 말한 것으로서 기억되었다. 예수는 자기가 승리자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 부활 면에서, 아마도 사실 후(post factum), 추종자에 의해 번역된)하나님의 직무 중 시작한 것을 완성할 때,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로서) 최종 역할을 한다. 이것은 구약성서 예언자 주장 너머이고, 예수의 자기 평가에의 독창성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이 파견한 사람 중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으로 이끈 사람이다. 이제 독창성이 전면에 부상하고 분명한 표현을 찾는 행위와 말씀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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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생기바다
글쓴이 : 서 철 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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