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가장 파격적인 사건이 '성전정화 사건'이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 가서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셨다. 이 성전 정화 사건은 몇 번 있었을까? 한 번인가 아니면 두 번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성전정화 사건을 보도 하고 있는 복음서의 날자가 서로 틀기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성전정화를 수난주간중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도 하고 있지만, 요한 복음은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일로 보도 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성전정화 사건을 비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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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장수 부터가 쉽게 비교된다. 공관복음서는 뒷 부분(마21장, 막11장, 눅19장)에 성전정화사건이 나오지만 요한복음은 2장에서 나온다. 구체적으로 보면 더 분명해진다.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 부터 시작된다(마21:10). 성전정화는 그 후에 일어난 사건이다(마21:12). 마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 들어 가셨다가 나오셔서 베다니에서 거하신 후(막11:11), 다시 베다니에서 나오신후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막11:14), 다시 성전에 들어가시어 성전정화를 하시었다.(막11: 15-18). 누가복음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눅19:41), 성전에 들어 가셔서 정화를 하셨다(눅19:45-46)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성전정화사건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사흘 되던 날에 가나의 혼인잔치 표적을 행하신 후(요2:1), 가버나움에 내려가 거하신 다음에(요2:12), 성전정화를 행하셨다(요2:13-22)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셨다는 요한복음 2장 12절의 말씀을 고려하면 요한복음의 성전정화는 공생애 초기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 지 입장을 취하게 된다. 하나는 요한복음서가 공관복음서의 시간을 의도적으로 편집했던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상관하지 않았던 지 간에 공관복음서와는 분명 틀린 이갸기를 하고 있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정화 자체가 두 번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앞의 입장을 취하면 성경비평학의 입장을 취하는 편집사학적 관점을 갖는 것이고, 뒤의 입장을 취하면 성경의 정경성을 인정하는 복음주의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다. 입장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사람마다 다르고 뜻도 제 각각 다르기에 서로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 이렇게 시간이 다르다는 것은 일단 정확하게 읽을 수 있어야 성경의 깊은 맛을 알 수 가 있다. 나는 한 번 있었던 성전정화를 요한이 의도적으로 편집하며 시간을 앞으로 끄집어 내어 요한공동체의 분리를 강조한다는 편집사학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존중한다. 그러나 성전정화가 두 번 있었다고 있는 그대로 읽고 가나의 혼인잔치 표적의 '결례의 항아리'와 연관지어 읽으면 예수님의 사역이 성전정화와 결례에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복음적이고 깊은 영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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