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뉴엘 칸트의 종교론과 신존재 증명”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의 근본악 논쟁을 중심으로-
【이마뉴엘 칸트,ꡔ이성의 한계안에서의 종교ꡕ,신옥희 옮김(서울: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2001)】
펴는말
이 글은 이마뉴엘 칸트의 종교이해와 신존재 증명에 관한 작은 발제이다. 칸트의 책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제기하고 있는 종교론과 신존재 증명을 요약하여 보고하는 것이 중심 과제이다. 칸트의 종교 이해는 “실천이성비판”과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데 서로 지향하는 논점이 다르다. 칸트의 종교론과 신존재 증명은 전자 보다는 후자를 통해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인간 이해도 전자에 비해 후자가 보다 더 현실적이며 실존적이다.
이 둘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칸트의 종교론과 신존재 증명을 엿볼 수 있는 주제어는 ‘근본악’이다. 실천이성비판의 인간이해가 낙관적이라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의 인간이해는 비관론적이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이하 ‘종교론’으로 약칭)가 보다 비관적이라 함은 인간의 내면에 근본악이 있어서 자유로운 도덕적 실천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칸트의 비관적인 인간 이해의 근거가 되고 있는 근본악은 은혜를 필요로 하고 그래서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접촉점을 갖는 귀한 단초를 보여 준다.
1.근본악과 도덕
칸트에게서 근본악은 인간이해, 종교이해 그리고 신존재 증명을 한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이다. 인간은 도덕을 추구하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그 명령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도덕적이지 못하도록 억제 당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이성 뒤에 숨어 있는 비이성적 경향성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이 악하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인 악함이 근본악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원죄이다. 이 근본악이 이성의 참 자유를 가지고 도덕적인 정언명령을 수행하려는 인간을 부패시킨다.
따라서 근본악을 가진 인간은 보다 더 이성적인 삶을 살고 보다 더 도덕적인 정언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서 도덕적 심성의 원형(Urbild)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가장 원형에 부합되는 사람은 예수이다. 그는 도덕적 선을 완전하게 구현한 원형이다. 그리고 그 원형은 우리가 나아가야할 이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원형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내부의 적이 이성적인 도덕적 선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은 ‘의(Gerechtigkeit)'를 이루지 못한다. 때문에 칸트가 주장하는 도덕적 인간의 이상은 근본악에 의하여 저지 당하고 부정된다. 이 근본악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선과 악의 투쟁을 하는 것이다.
칸트의 “근본악을 가진 존재로서의 비관론적 인간이해”는 그 당시의 계몽주의적 시대 사조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가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을 경험적 제약성에서 독립한 예지적 자유의 존재로 부각시켰었는데 반해 종교론에서는 근본악의 영향 밑에 있는 인간 존재의 어두운 비참성을 부각시켰다. 따라서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은 감성적이며 이성적인 이중성을 가졌지만 순수실천이성인 양심을 통하여 보다 더 이성적인 도덕적 최고선에 이를 수 있었지만 종교론에서는 악에의 성향(Hang zum Bösen)이 선천적으로 뿌리를 박고 있어서 자기 스스로는 감성적 경향에서 자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근본악을 가진 비참한 존재이다. 이 근본악은 보편적인 본성이며 생래적인 본성이다. 따라서 자유도 순수 실천 이성이나 순수 의지로서의 자유가 아니다 이는 관념론적인 가상적 자유일 뿐이다. 근본악이 있기 때문에 이 자유는 선하려고 하는 자기 자신에 때하여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자유이다
2.근본악과 종교론
이런 근본악의 본질은 세 가지의 문제점에 기인한다. 첫째는 추구하는 선과 출발한 악과의 거리의 무한성 즉 도달 불가능성 때문이고, 둘째는 자연적 행복이 아닌 선을 향한 심성의 현실성과 지속성의 도덕적 행복관 때문이며, 셋째는 신 앞에서의 영원한 불의함 때문이다. 이와 함께 칸트는 罪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의 뜻으로 전향한 인간의 義認化의 가능성을 묻는다. 칸트에게서 義認化는 실현성의 문제이기보다는 근본악을 가진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필요사항이며 희망사항이다. 근본악 때문에 제기되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인간 스스로에게서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차지 못하고 인간 이외의 길에서 찾게 되는데 바로 종교다, 그런 점에서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보다 종교론에서 보다 더 적극적인 종교수용의 입장을 내 보인다. 근본악을 가진 인간은 신의 은혜아래에서만 책임을 면할 수 있으며 보다 더 완전한 도덕적 정언명령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칸트가 종교론에서 이처럼 종교를 옹호하고 나서면서 비록 우리가 요구하는 것만큼의 종교 이해는 아니지만 아담의 타락, 예수의 성육신등을 새롭게 해석하고 기독교의 역사적 계시신앙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경향은 근본악과 도덕적 정언명령상의 긴장관계에 기인한다. 근본악이 있다면 도덕적으로는 불가능한 타락의 존재인데 어떻게 인간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도덕적인 정언명령이 나오는가? 이것은 신이 심어 놓은 선험적 전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이 명령은 신이 인간 안에 심어 놓은 명령이다. 이 점에서 칸트의 근본악은 신존재 증명으로 나아간다.
3.근본악과 신 존재 증명
근본악을 가진 인간의 신존재 증명은 실천이성 비판에서 보여 주는 신존재 증명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최고선을 가지고 신존재를 증명하지만 이것은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하는 인간은 낙관론적이고 순수의지 즉 순수 순수 실천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신의 존재가 없이도 무제약적 선의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의 무제약적 선의지는 도덕법의 존재 근거가 되며 도덕법은 선의지의 인식 근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의 무제한적 권위는 이성의 선천적인 자율성과의 관계에서 확립된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인간은 신 없이도 순수 의지를 가지고 도덕적 정언명령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론에 와서 칸트가 제기한 근본악은 신존재 증명의 틀거리를 바꾼다. 순수 의지를 가진 인간은 완전하고 낙관론적이기에 신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근본악을 가진 인간은 비참하고 유한하며 도덕적으로 불완전하고 신의 은헤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절실하게 요청한다. 따라서 근본악을 가진 인간 존재는 신을 요청하는 역동적인 실존의 주체인 것이다. 근본악 때문에 제기되는 준칙에 이르지 못하는 불가능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신에게 있으며, 선을 향한 현실성과 지속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도덕적 행복도 신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으며 끊임없는 죄책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신의 은혜로만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칸트의 종교론에서는 실천이성비판의 신존재 증명을 보완하고 수정한다. 종교론의 주제인 근본악의 개념은 실천이성비판의 최고선 보다 더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도덕과 종교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고 있다. 또 실천이성비판은 신을 피안적이고 추상적으로 접근했지만 종교론에서는 차안적이고 시간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천이성비판은 신존재 증명이 단순히 순수 예지의 측면에서 파악된 개체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의 이념이 최고선을 매개로 해서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반해 종교론에서는 도덕적 인격의 협동적 공동체의 이념이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신의 존재의 필연성에 도달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론에서의 도덕적 인격이란 고립된 인격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하는 윤리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론에서는 신의 존재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종교론에서 말하는 칸트의 인간이해는 근본악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인간이기에 신의 도움 없이는 도덕적 선을 추구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 곧 타락한 존재로 방치되기 때문이다. 이 비참한 방치를 철저하게 깨닫고 도덕적 정언명령의 선을 수행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인간의 실존 속에 신의 존재가 요청되고 신존재가 증명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복이란 신을 요청하는 실존의 자각이다. 자기의 근본악을 인식하고 자기의 한계를 고백하고 그 한계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에 이르려고 하는 몸부림의 실존이 인간의 최고 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원형이셨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것이 칸트에게서는 실존을 향한 자기 번민이요 고통이었으며 신과 함께 존재하는 길이었다.
이렇게 보면 칸트의 신존재 증명은 신 자체를 긍정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신의 존재를 필연적인 요청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는 관념론적인 이해일 뿐이다. 실천이성 비판의 최고선을 주제로 하는 관념론적인 신존재 증명보다는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이 강하지만 여전히 신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실존론적 존재 현실에서 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신은 여전히 관념론과 언어 유희속에 갇혀 있을 뿐이다. 때문에 그리스도 계시 사건도 부정되고 있다.
결국 칸트에게서 신은 인간의 도덕적 약함을 메워주는 부차적인 기능의 수행자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계시성이 약화되고 신존재의 자기 존재성이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인간의 실존론적인 요청 안에서만 존재하시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존주의 철학의 입장으로 나아가며 신을 인간을 위한 요청의 응답으로 전락시켜 갔다. 이것은 근본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며 동시에 한계성이다. 근본악을 가진 인간의 신에 대한 요청은 신의 측면에서 신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측면에서 신을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인간 안에 갇힌 신존재 증명이 되었고 인간의 논리적 관념적 심리적 투사체로서의 신존재 증명으로 까지 나아간다.
4.신존재 증명의 흐름
이런 시각에서 보면 칸트의 신존재 증명은 앞서의 신 존재 증명들에서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스콜라주의 신존재 증명이 신존재의 확신에서 시작하였다면 칸트에 이러는 신존재의 확신이 신존재의 요청으로 바뀌어지며 신존재의 존재양태가 의문시되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데카르트와 베이컨이 신존재를 인간의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했던 일련의 시도들이 점진적으로 깊어진 결과라고 하겠다
신존제 증명의 대명사는 스콜라주의 철학이었다. 개념이 있으면 존재가 있다. 신의 개념이 있으면 신의 존재가 있다. 그리고 그 신은 창조자이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된다. 여기서 부처 모든 존재를 이해하여야 한다. 신의 입장에서 바라 본 신존재 증명이다. 이 신존재 증명이 중세시대를 풍미하다가 근대로 넘어 오면서 계몽주의 인간중심의 신존재 증명의 도전을 받게 된다. 이 도전의 선두에 데카르트와 베이컨이 서 있다.
데카르트에게서 신은 단순한 전제 곧 Aprioi일뿐이다. 회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회의하다 보니 존재하는 것은 회의하고 있는 인간의 생각만이 확실하고, 이 불확실한 인간의 회의가 도달 할 수 없으며 더 이상 회의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존재가 있다는 전제를 한 것이 곧 전제로서의 신존재 증명이었다. 이것은 신존재 자체의 존재성을 불변으로 보고 신의 입장에서 존재의 근원으로서 신을 이해했던 스콜라주의의 신존재 증명과 일정 부분 타협하면서 인간편으로 신존재 증명을 옮기어 놓은 근대사상의 전환점이었다.
베이컨은 이 보다 한 발 더 인간편으로 나아간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그리고 극장의 우상등에 갇혀 편견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지식은 왜곡되어 있으니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하고 실험한 후에 인식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런 실험과 경험을 통한 편견없는 지식추구의 베이컨은 신존재를 경험되지 않은 편견의 소산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런 경험 위주의 베이컨식 귀납법적 신존재증명은 데카르트에게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전제로서의 신존재 자체도 부정하게 맏들었다.. 베이커에게서 신은 단순히 가상이거나 편견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인간 중심의 신존재 증명은 필연적으로 칸트식의 신존재 증명을 나았다. 신은 인산의 필요에 의한 요청일 뿐이다. 그럴듯한 언어 구사가 있긴 하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신존재를 긍정하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칸트의 신존재 증명은 인간 실존 중심의 이해가 되었고 신을 인간의 실존론적 자각의 틀 속으로 가주게 되었다.
다만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전제로 인식한데 반해 베이컨이 경험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고 반박하는 것과는 달리 제 3의 길을 제시 해주고 있음이 근대 철학과 신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은 높게 사야 하겠다. 존재는 경험으로만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경험할 지라도 경험된 것이 실재하는 존재로 이해되려면 그 이해를 가능케 하는 전이해가 이해자의 이성 속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존재를 증명할 때 단순히 전제한다는 관념론적 사유나 경험한 것만을 진리로 인식함으로 무신론적 자연철학으로 경도된 경험론과는 다르게 신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 전 이해가 훗날 신학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는 점에서 더 가치가 있다. 전이해가 있을 때 이해가 된다. 신도 전이해가 있으므로 이해할 수 있디. 칸트에게서 신을 향한 전 이해는 신이 이성 속에 삽입해준 선을 향한 순수의지이며 정언명령이다. 이런 전 이해 개념은 실존론적인 인간 중심의 신존재 증명과 함께 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게 되었다.
닫는말
칸트의 신존재 증명은 최고선과 근본악을 매개로 하는 증명이다. 실천이성비판은 최고선을 매개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고, 종교론은 근본악을 매개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이 둘은 도덕적 선의 추구라는 점에서 서로 공유하는 점이 있지만, 인간 이해의 시각 때문에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최고선의 인간 이해는 낙관론적이고, 근본악의 인간이해는 비관적이다. 따라서 실천이성비판은 최고선을 매개로 신을 최고선을 이루는 피안의 추상적인 존재일 뿐이지만,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는 근본악을 매개로 신을 최고선을 이루도록 은혜로 도와주는 차안적이며 시간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들 다 논리를 세워 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필요성의 신존재 증명이기에 신 자체의 증명에는 약점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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