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랑하는 교회
<요한복음3:16~21>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성경본문은 요한복음 3장 16절로 21절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교회가 금년에 “사람을 살리는 교회”라고 하는 주제를 내걸고 그 첫걸음을 “사람을 사랑하는 교회”에서 시작을 하려고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우리의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천만 명의 기독교의 신자가 아니라 사천 만의 불신자에게까지 그 사랑이 더 뻗혀야 되겠다고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요점입니다. 좀 다른 말로 말하면 기독교인이 자기들만의 리그에 더 이상 안주하지 말고 교회끼리 교인 뺏기 전쟁에 함몰되지 말고 세상 사람을 불신지옥이라고 하는 낙인으로 정죄하지 말고 정말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어린 시절에 교회에 다니셨던 기억을 한 번 되살려보십시오. 옛날에는 교회 나오면 지금 같이 어떤 미디어의 활용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간단한 노래들이었는데 제일 먼저 배웠던 노래가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한 번 불러보실까요? 오늘 좀 마음을 열고 한 번 요한복음 3장 16절 찬송을 해보십시다. 반주가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한 번 시작합니다. 시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영생을 얻으리로다”
할렐루야! 이 짧은 노래가 우리 기독교인들의 공동분모였습니다. 초대교회는 로마의 박해 속에서 기독교인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익스테오스’라고 하는 물고기 그림을 표시했다고 한다면 요즈음 태평세대에는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첫 번째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이 노래를 아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노래가 세상에서도 많이 불리어집니다마는 술집에서도 거침없이 불리어지는 복음성가 가운데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웃는 사람들은 다 술집에서 한 번씩 불러본 것 같아요. 생일잔치든 또는 무슨 자기들의 친목회든, 어떤 사람을 축하할 때에 교인이 아니더라고 이 노래를 익숙하게 아시는 것 같아요. 사람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을 때 살고 싶은 힘을 얻게 되지요.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강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제가 좀 성경이야기를 좀 중단하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해볼까요. 사람들이 제게 영화를 좀 한편 보라고 자꾸 권유를 해요 그런데 뭐 시간이 없어서 볼 수가 없고 다 안되겠어서 저희 집에 텔레비전을 이용을 하면 신청하면 볼 수 있는 영화가 있어서 어느 날 작심을 하고 늦은 시간에 집에서 혼자 영화를 봤어요. ‘도가니’라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얼마나 화가 나는지 얼마나 서럽고 슬픈지 확 분노가 치밀었어요. 또 공교롭게도 주인공이 장로님이시고 사회법정에서 실상이 들어나는데 그를 위해서 목사님이 기도회를 인도하고 계속 십자가를 비추고 막 화가 나는 거예요. 서럽고요. 제가 서럽고 화가 난 것은 영화가 기독교를 폄하해서 서러운 게 아니고, 그 장애우들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비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서러움 막 찾아왔어요. 그래서 혼자 좀 울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 페북에 다가 그 대사 가운데 몇 개를 올렸어요. “우리가 싸우는 건 세상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고 싸우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말 중요한 것은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도록 싸워야 된다는 거지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습니다마는 제가 오늘 “사람을 살리는 교회”라고 하는 이 설교주제에 비춰본다고 그러면 사람을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이 완악한 세대와 싸워야 되겠다. 끝까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교회.
남자 주인공 강인호 선생님의 말도 깊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어 오직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거야” “겨울이 추운 것은 소중한 사람의 온기를 알게 하기 위해서다.” ‘전민수’라는 아이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요. 그 아이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요. 안에 누구 있어요? 무슨 일이지요? 그는 문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순간 그는 다시 한 번 이곳이 청각장애인 학교이고 화장 안에 있는 사람이 정상인이 아니라면 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손에서 힘이 빠졌다. 듣는다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일일 줄 그는 미처 몰랐다.
주인공은 안에 있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안에 누구 있어요? 라고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요. 없는 줄 알고 돌아갔지요. 나중에 깨닫게 되요. 그는 들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 들을 수 없는 사람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무참하게 자기의 욕망의 도구로 삼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많은 국민들이 분노를 했습니다. 도가니법을 만들자고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됐지요. 물론 그 소설이 좀 과장됐다고 하는 반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설교시간에 영화평론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느낀 느낌 한 가지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집단적인 분노가 있었고요. 그리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해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는 거지요.
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까요? 사랑입니다. 종교학자들은 종교의 변천사를 이야기 할 때 자주 쓰고 있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희생제사의 변천사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던 종교로부터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짐승을 죽이는 희생제사로 발전한 것이 종교의 변천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람도 죽이지 않고 짐승도 죽이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하는 철학적인 물음, 사회의 윤리적이고 집단복지적인 질문들을 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여기서 이러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예를 들면 전설따라 삼천리에서 동네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한 사람을 뒷산에 구렁이에게 준다든가, 지네에게 준다든가 또는 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 용왕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처녀를 물에 던진다든가 이런 인간희생제사로부터 고사를 지내는 짐승을 대신 잡아 바침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 좀 고등한 종교의 형태로 발전해가다가 아 이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하는 것을 복지의 차원에서, 생명존중의 차원에서 또는 인간 공동체의 유지차원에서 이해를 하는데 기독교는 한 가지 남다른 것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죽이면 이것은 불신앙이고 엄청난 반역인데 하나님을 누가 죽이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죽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일반종교변천사에서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십자가의 독특한 구원의 교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멸망당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 같이 지식을 논하는 사람에게는 말이 안 됩니다. 신은 죽지 않는데 신이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신입니다. 그런데 신이신 예수가 죽었습니다. 이것은 풀리지 않는 논리적 모순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풀 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신이면 죽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가 죽었으면 그는 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는 인간도 되고 신도 되며 죽기도 하니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짜로 죽었다고 하는 가현설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는데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희화화시켜서 하나님의 값싼 자살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야말로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이 자기를 내어준 대상이 누구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한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자연만물도 되겠지마는 그 뒤에 누구든지 이를, 또는 저를 믿는 자마다 하는 것을 보면 사람입니다. 동물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소나무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표현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이 구절만 딱 떼어 내가지고 어떤 생태계의 설명처럼 환경운동의 증거처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속성을 잘 설명하고 있는 요한1서 4장 7~21절을 묵상해보면 이것이 명료하게 들어납니다.
<요일4:7~21>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도올 김용옥 선생의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서는 영지주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안다고 하는 이 지식, ‘그노시스’라고 하는 지식에서 나온 ‘know’라고 하는 ‘안다’고 하는 말을 가지고 아는 것, 지식의 빛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고 초월을 알고 구원을 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안다’라고 하는 말 속에는 그 당시 지식을 추구하던 영지주의자들의 흔적이 묻혀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
만약 우리 가운데 누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교회를 다닌 연조와 그리고 교회생활에 대한 제도적인 여러 가지 익숙한 자신의 법리적인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 상당한 조예가 있어서 그러신 것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요한이 요한1서 4장에서 하고 있는 이 말을 인용해보면 그가 사랑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 사랑을 알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치 아무리 큰 숫자도 영을 곱하면 제로가 된 것과 일맥상통할 것입니다. 단식 백, 천이 가 가지고 억, 조, 경, 해 무량대수가 됐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영을 곱해보세요. 다 제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느냐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안에 거하시길 원하십니까?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요즈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 가운데 하나가 제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한 주간 세상에 나가 살아가시는데 그냥 듬성듬성 엄벙덤벙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라시잖아요. 요한1서 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18절) 사랑은 두려움도 몰아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20절)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3장 16절과 요한1서 4장 7~21절에 담겨져 있는 요한의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제자 가운데 제일 장수했다고 하는 요한이 죽을 때 관 속에 들어갔는데 제자가 물었대잖아요. 요한 사도님 한마디 하시지요 그랬더니 사랑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주후 50년 데살로니가전서를 시작으로 해서 신약성경이 A.D. 90년 얌니아에서 결정될 때까지 기록됐다고들 합니다. 빨리 잡아도 복음서는 주후 60년 이전에는 기록이 안됐던 것 같고 늦게 잡으면 A.D. 70년에 로마의 침략이 반영된 것으로 봐서 주후 70면 이후까지도, 심지어는 주후 90년까지도 추측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주후 30년으로부터 최소한 30년이 흘렀거나 또는 60년이 지난 후에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기록됐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경이 기록되었을 당시에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기록할 당시에 이야기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난리에 재앙에 이야기 가운데 보면, 말세의 징조 가운데에는 기근과 지진과 난리의 소문과 함께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마24장 3절~14절> 재난의 징조(막 13:3-13; 눅 21:7-19)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태복음 24:12) 이 말을 읽으면서 우리는 상반된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아 사랑이 식어지는 구나 그러니 말세가 됐구나 그러면 내가 잘 내 믿음을 지켜서 천국가야지” 하는 생각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세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이 말을 하실 때에는 “아 사랑이 식어지면 말세가 오니까 너 혼자 잘 지켜가지고 천국 빨리와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세의 징조를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이런 말세가 오지 않게 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이 식어지는 이 현상에 대해서 이러한 말세의 징조를 주님께서 예견하실 때에는 사랑이 식지 않게 하라고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하는 것은 교회의 이미지입니다. 천만 명의 교인들 가운데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그저 아주 유치하게 생각하면 “우리교회는 사람이 많아, 돈이 많아, 교회가 커, 건물이 좋아. 그렇게 자기 교회를 자랑하면서. 아 이번에 옆에 교회가 시험 들었는데 그 교회 교인들이 우리교회로 왔어 우리교회 좋은 교회.” 그렇게 만족해하는 마음들을 우리 스스로가 갖고 있습니다. 감리교회 감독회장 선거가 나니까 우리 임마누엘교회 교인들이 옆에 오륜교회로 많이 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옛날에 금 그어 놓고 사기 그릇 조각을 가지고 땅 따먹기 하던 오른발 들고 왼발로 땅 따먹기 하던 거 생각합니다. 교회가 교인 뺏기를 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교회의 본질이 깨졌다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교회의 건물이나 사람 숫자가 이제 중요하지 아니하고 적어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될 것입니다. 요한1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3:13~19>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13~14절) 오늘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생명인데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교회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보여주지 못하고 사망밖에는 보여주지 못할 것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6절) 결국 교회가 보여주어야 될 것이 있다고 하면 사랑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23절) 요한1서 3장 23절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가 누구냐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대로 사랑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7~8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1장 22절>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교회를 야고보와 함께 이끌었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많이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짤막한 베드로전서에서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는 말을 반복합니다. 그냥 사랑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하라. 순위까지도 첫 번째로 합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 그것이 종말을 기다리는 교회의 모습이다. 2000년의 기독교가 세상에 보여주었던 중세시대의 위력도 있고 초대기독교의 박해받았던 모습도 있지만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고상한 이미지는 무엇인고 하니 뜨거운 사랑입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보내 사랑의 띠로 묶여지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 12~14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이 더하여 지면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매는 띠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회복해야 될 가치가 있다고 그러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번 한 주간 동안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삶을 내가 한 번 제대로 살아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또 우리교회가 금년에 정한 주제에 따라서 나도 좀 동참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하면 또 우리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함께 묶여져야 됩니다.
3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마지막으로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냈던 자유와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갈5:1~15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요점은 뭔고하니 아까 제가 서두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자유를 얻었지만 복음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이 되어서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방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갈라디아서 5:5~6)
여러분 제가 지난번에 사도행전 15장을 같이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치열했습니까. 교통도 발달이 안됐는데 예루살렘교회에 있는 교회지도자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이 얼마나 멉니까. 지금 비행기 타고 가도 한참 가는데 그 먼 거리를 그때는 걸어서 왔습니다. 왜 걸어서 왔느냐? 안디옥교회에서 부흥해서 교회가 잘되고 있는데 예루살렘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너네는 예수를 잘 못 믿고 있어 네 우리가 왜 예수를 잘 못 믿어요? 너희가 세례를 줄 때 할례 받지 않는 자에게 세례를 주고 있잖아. 그러니 너희 좀 와. 우리가 대빵이거든. 예수님 살아계실 때 우리는 임명받았어. 너 하고 좀 수준이 달라. 우리는 수제자가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야.” 아무 소리 못하고 아이들 말로하면 짹소리 한 번 못하고 꼬랑지를 내린 바나바와 바울 곧 이 안디옥 지도자들이 그 안디옥에서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대화가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다퉜다고 그럽니다. 다툼과 변론이 있었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서로 교리적인 다툼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선언했습니다. 저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사도행전 15:1~11)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게 편지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거 목숨 걸고 싸우지 마세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라디아서 5장은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설명하는 성경구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자유를 얻어서, 어디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부터 자유했다고 해서 우리가 자유했으니까 방종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종노릇하자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사랑으로 종노릇하자.
바울은 아주 심한 말을 합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절) 할례파든지 무할례파든지 이것이 굉장히 신앙의 목숨과도 같은 가치라고 생각하고 다퉈봤자 피차 멸망한다. 할례도 무할례도 소용없다. 바울은 어디까지 전진하냐 하면 할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할례 받고 세례 받아라. 할례를 받지 않고 싶냐 그러면 할례 받지 말고 세례 받아라. 그런데 저 사람들이 꼭 할례를 받으라고 하느냐 그러면 우리는 그냥 할례 받아주자. 그런 이야기까지도 합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성입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2절) 할례가 문제가 된다고 그러면 할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고 할례를 싫어하는 사람은 하지 말고, 그런데 할례를 안받고 싶지마는 저 사람들 시기한다 그러면 귀찮으니까 또 할례 받아도 괜찮아 왜? 어차피 다 중요한 것이 아니야.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은 내 백성이 아닌 자도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호세아서 2장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로마서 9:25~26>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호세아2:14~23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사랑>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