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로운 믿음과 신성한 성품
<베드로후서 1:1~4>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송구영신>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송구(送舊)란 옛 것을 보내는 것이요, 영신(迎新)이란 새 것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맞이할까요? 각자가 깊이 묵상하시면서 보내야 할 옛 것은 잘 보내시고, 맞이해야 할 새로운 것은 잘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송구영신을 예배하면서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시간도 하나님과 함께 살았고, 다가올 시간도 하나님과 함께 살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송구영신은 무엇일까요? 감사와 순종입니다. 지나온 한 해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감사하고, 다가올 새 해도 더더욱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진정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새 해 첫 발걸음을 내 딛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요 모든 것이 감사다]
모든 것이 은혜요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돌이켜 보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숨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지나온 한 해를 생각하면 진심으로 마음 깊이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참 어수선한 한 해였습니다.
교수신문은 2013년도를 시작하면서 '제구포신'(除舊布新)을 택했었습니다. 제구포신이란 춘추좌전에 나오는 말로 <묵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해가 지난 후 교수신문이 택한 사자성어는 '도행역시(倒行逆施)'입니다. 도행역시란 <사기>에 나오는 고사성어입니다. 춘추 시대에 오자서가 신포서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말로 <순리를 거스려 거꾸로 행동을 했다>는 뜻입니다.
제구포신으로 시작해서 도행역시로 끝난 한 해였습니다. 올 한 해를 시작할 때는 제구포신의 희망을 가지고 시작하였는데, 한 해를 지나고 보니 도행역시의 아쉬움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도행역시의 세상에서, <순리를 거스려 거꾸로 행동하니 세상이 탁해졌다>는 험한 세상살이의 한 가운데서, 그래도 숨쉬며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게 감사거리뿐입니다. 돌아보면 돌아볼 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는 생각뿐입니다.
국제 정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별히 미국발 경제위기론, 일본발 아베의 군국주의와 신사참배, 그리고 중국발 방공식별구역(ADIZ)은 우리의 평화와 안정이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붙들려 있다는 점 때문에 기분 나쁘고 불안했습니다.
게다가 북한의 정세는 늘 불안합니다 . 3대에 걸친 김정은 세습의 폐해와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의 처형에 따른 권력투쟁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합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도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가 있을 때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예배도 자유롭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각각 나름대로 각자의 상처와 아픔을 갖고 한 해를 지나 왔습니다. 질병으로 시달리신 분들도 계셨고, 사업의 부침을 겪기도 하고, 가족들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원치 않는 명예퇴직, 실업, 부도 등으로 아파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드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쉬운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든 게 은혜요 모든 게 감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고비 고비를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겼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오늘 이자리까지 왔습니다. 새 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송구영신 에배를 하면서 야곱의 신앙고백을 합니다.(창28:15)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구나!> 야곱은 고향을 도망쳐 나왔기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비록 외삼촌의 집을 향해 가고는 있었지만, 무엇을 할 지 어떻게 살지 알 수 없었기에, 불안한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돌베개를 취하여 잠들었을 때, 자기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감탄합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구나>
우리가 야곱처럼 살았습니다. 우리가 야곱처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감탄의 고백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구나> 우리가 고백할 말은 이것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송구영신 예밸ㄹ 하면서 믿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게 은혜요 모든 게 감사입니다.>
[그래도 신앙은 순종이다]
그래도 신앙은 순종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순종하는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 2014년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 위에서 순종의 신앙으로 새롭고 진지하게 시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수신문이 택한 2014년도 새 해의 사자성어의 의미는 <깨달음과 깨끗함과 즐거움>입니다. 깨달음을 얻어 깨끗한 삶을 살자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함께 이를 즐기자는 뜻입니다.
교수신문이 택한 2014년도의 첫 번 째 사자성어는 전미개오(轉迷開悟)입니다. 전미개오는 <구를 전, 미혹할 미, 열 개, 깨달음 오> 곧 '어지러운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의 깨달음에 이른다'는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전미개오와 함께 많은 교수들이 선택한 두 번 째 사자성어는 '격탁양청'(激濁揚淸)'입니다. 격탁양청은 '흐린 물을 씻어내고 맑은 물을 흐르게 한다'는 뜻으로 '당서'(唐書)의 '왕규전'(王珪傳)에서 나온 말인데, 마음의 깨끗함, 사회의 깨끗함을 뜻합니다.
교수신문이 택한 세 번 째 사자성어는 '여민동락(與民同樂)입니다. 여민동락은 '백성과 함께 즐기다'라는 뜻입니다. 권력자, 기득권자 일부만 즐기는 것이 아니고 백성이 더불어 즐긴다는 공동체적인 즐거움의 말입니다. 더불어 함께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세 개의 사자성어를 생각하면서 우리 성도들이 올 한 해 깊은 신앙심으로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탁한 물을 씻어내고 맑은 물을 흐르게 하는 <깨끗함>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또 그런 <깨달음과 깨끗함>을 우리 모두가 더불어 함께 누리는 즐거움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런 <깨달음과 깨끗함과 즐거움>은 <순종의 신앙>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 말입니다. 성경은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깨달음과 깨끗함 과 즐거움>의 지름길입니다. 순종은, 순종을 오용하는 자들과 순종을 오해하는 자들에게, 간혹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만, 아닙니다. 순종은 최고의 신앙심입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가장 깊이 깨닫는 길이며, 가장 깊이 깨끗해지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진정성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또 우리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연합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것입니다. 순종은 철저하게 주님과 연합하는 체험을 가진 성도들이 갖는 신앙입니다. 주님과 친밀함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가 십자가의 연합을 체험하고, 십자가의 연합을 체험한 성도가 , 복음의 능력을 누립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누립니다. 무엇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되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베드로 후서의 말씀은 순종하는 성도들, 주님의 십자가와 연합한 성도들이 이르게 되는 가장 깊은 깨달음의 경지와 깨끗함의 경지를 말합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경지입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고, 깨끗함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함께 주님의 깊은 임재를 나눌 때 더불어 함께 누리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보배로운 믿음]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거룩한 성도들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절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은 베드로 같은 사도들도 받은 믿음이고, 베드로 후서를 읽고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받은 것이고, 지금 여기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오래된 고고학 유물의 진가나 명품을 아십니까? 엿장수에게는 한가락 엿 값 밖에 안되지만, 고고학자에게는 전 재산을 바쳐서 사고 싶은 보화나 명품일 때가 있습니다.
믿음은 귀한 것입니다. 보배로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엿가락 한 개의 값밖에 안되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영혼을 아는 사람들, 영적 세계를 아는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성도들에게는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이요 보화이며 최고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우리가 잘아는 성경구절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자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보배로운 믿음은 아주 소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믿음을 갖고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의 주님이십니다.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삽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믿음이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보베로운 믿음으로 주님꼐 나아가 주님과 연합합니다. 보배로운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합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성도]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이루어야 할 신앙의 목적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1장 4절은 우리 성도들이 이루어야 할 믿음의 이상향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설명합니다.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표준새번역 성경입니다.
4 그분은 그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세상에서 정욕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스승이었던 교부들은 즐겨 묵상하던 성경 구절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편 82편 6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시82:6)에 기록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요10:34)
초대 교회를 잇는 동방정교회는 신앙의 최종 목적을 하나님처럼 되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이를 신화(테오시스 θεοσιs Theosis)라고 합니다. 신화는 성령의 변혁으로 세속성과 죄성이 소멸되어 온전히 주님을 닮은 수덕(修德) 혹은 완덕(完德)으로 신적 성품을 얻게 되는 영성의 궁극적 목표이며 목적입니다.
교부들의 어록입니다.
*만일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면, 인간은 신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레니우스-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일이 가능해졌고, 인간의 최고의 소망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 대 바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으므로, 인간은 신들이 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
(동방정교회 개론 198쪽)
이런 동방정교회의 신화신앙 은 예전과 기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동방정교회의 예전적 삶이 테오시스의 교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동방 교회의 전통에서 그 교리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을 증거 해주는 또 다른 예이다. 교리와 믿음(lex credendi)뿐만 아니라 예배와 기도(lex orandi)가 신화의 이상을 선포한다.
교회는 성 목요일의 아침기도에서, 예배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나라에서 나는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신이 되리라”는 말씀의 규칙을 암송한다.
(동방정교회 개론, 216쪽)
성 야고보(Saint James, 450년경 사망)의 기도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 합니다
【오 주여, 당신은 당신의 신성을 우리의 인간성과, 우리의 인간성을 당신의 신성과,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의 죽을 목숨과, 우리의 죽을 목숨을 당신의 영원한 생명과 연합시키셨습니다. 우리 영혼에 생명과 구원을 주기 위해서, 당신은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이셨고, 우리에게는 당신의 것을 주셨습니다. 영원히 당신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동방정교개론 216쪽에서 재인용)
동방정교회의 신화는 <본질상 합일>이 아닌 <성령의 충만>을 의미합니다. 동방정교회는 신화신앙이 갖는 범신론적 오해에 대하여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범신론적 오해는 인간성을 상실하고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의 본질이 된다는 오해입니다. 그래서 범신론을 경계하면서 테오시스를 정의하기 보다는 신비로 남겨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화되는 것은, 우리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가 되어서 우리의 인간성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으로 하나님 안에 참여하는 교제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는 헬라어는 코이노노이(κοινωνοι)로 교제라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에서 왔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신화는 인간과 신이 본성적으로 일치하는 범신론(汎神論)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함으로 인간이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가는 믿음의 이상(理想)을 말합니다.
존 웨슬리는 이 동방정교회의 신화신앙을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자신을 변혁시킴으로 점점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가는 ‘믿음의 이상향’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존 웨슬리의 성화신앙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마음을 거룩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과정입니다. 성화신앙과 신화신앙은 그 출발점이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요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신화신앙을 발전시키면서 성령에 의한 내적 변혁을 통한 거룩함을 성화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
이후정 박사는 존 웨슬리의 성화와 동방정교회의 신화를 잘 설명합니다.
【즉 웨슬리에게 있어서 , 참된 종교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 혹은 호의의 회복인 사죄하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을 거쳐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인류가 갱신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성화와 완전 즉 [신성으로 충만]해지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인 성숙에까지 진보하는 것이다. 이것은 웨슬리의 구원관이 인간의 신화(divinization)로 이해되어야 하는 중요한 관점인데, 곧 멸할 것에서 불멸의 것으로, 죄로 가득함에서 영광의 충만으로, 불행의 비참에서 [행복과 거룩함]에로 변모된다고 묘사된다는 점에서 동방교부들의 신화 중심의 구원론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웨슬리가 말하는 성화는 비록 그가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화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신적인 삶, 즉 하나님과의 온전하고 충만한 교통과 합일의 삶을 종말론적으로 누리는 것이다. 여기서 신화는 흔히 오해되기 쉽듯이 실제로 신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화], 즉 참 인간성의 실현과 완성을 뜻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판단할 때, 우리가 본 논문에서 강조해 왔듯이 웨슬리가 동방교부들의 영성, 특히 마카리우스의 영향아래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 이후정, “성령론”, 한국웨슬리신학회, 「웨슬리와 감리교신학」,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1999) 35쪽~136쪽]
웨슬리의 성화신앙의 뿌리인 동방정교회의 신화신앙은 신적 성품에의 참여입니다.그리스 정교회 신학자인 크리스토포로스 스타브로폴로스는 테오시스( 헬라어 θεοσιs) 곧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교회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거룩한 성서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분명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너희들 모두는 신들이라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라고 나는 말했다(시82:6, 요10:34)
우리는 그 음성을 듣고 있는가?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는 사실상 테오시스에 이르는 여정 중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가? 인간으로서 우리는 각각 테오시스를 성취하라는 하나의 독특한 부르심을 받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각각 신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을 닮고, 그 분과 연합하게 될 운명, 사도 바울은 삶의 목적을 지극히 명료하게 묘사한다. :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다”(벧후1:4) 이것이 당신의 삶의 목적이다. 즉, 당신은 하나님의 본성 및 신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될 운명 – 하나님처럼, 곧 진정한 하나님 자신처럼 되는 것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니엘 B. 클렌데닌, 「동방정교회 개론」, 김도년 역, (서울: 은성, 2002년) 203쪽~204쪽]
[하나님을 아는 자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앎, 아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성도들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2절입니다.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절입니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을 알고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았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생명과 경건이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안다는 것!
하나님을 알고 주님을 안다는 것!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안다는 것!
이 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신앙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모릅니까? 성경을 모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앎-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깊이>입니다. 하나님을 알더라도 깊이 알고, 성경을 알더라도 깊이 알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정도나, 수준의 높낮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체험의 확신입니다. 체험을 통하여 확신을 갖게된 <앎-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깨달음을 얻는 체험의 깊이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체험을 하지 못한 신앙은 자칫 <하나님에 대하여 > 아는 것이지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신앙,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참된 신앙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아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반을 둔 체험신앙만이 하나님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가 체험신앙을 통하여 하나님 자체를 좀 더 깊이 알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좀 더 깊이 알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깊은 영적 깨달음과 의로운 깨끗함과 거룩한 즐거움을 얻습니다.
[새 해 새로운 발걸음]
우리는 2013년도를 감사하며 2014년도를 믿음으로 새롭게 시작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게 감사임을 고백하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발검음을 내딛습니다.
새로움의 시작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목적, 새롭게 추구할 이상향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기 만들기>입니다.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거룩한 성도들이기 때문에 믿음의 목표를 가지고 삽니다. 올 해, 2014년도에는, 우리 상동교회와 더불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기 만들기>의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자기 만들기>는 자기를 돌아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거룩한 연합을 말합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를 신화라 불렀고, 웨슬리는 성화라 불렀습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구도자의 수행>입니다. 신화-성화-수행이 똑 같은 말은 아니지만 근본에 있어서 일맥 상통하는 <같음>이 있습니다. <자기 만들기>입니다.
대학 교수들은 2014년도의 바램으로 <깨달음과 깨끗함과 즐거움>을 선정했습니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이제는 물질만능주의에서 벗어나서 <참된 가치>를 추구하며 맑고 깨끗하게 살기를 바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 나누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영의 생각을 가지고,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영적인 성도들이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이야 말로 <영적인 깨달음>을 추구하고, 맑은 물이 흐르도록 <마음의 깨끗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신앙적인 행복을 더불어 함께 누리며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 모두에게 함께 임하는 길로 새롭게 출발해야 않겠습니까?
그 길이 바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믿음의 길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거룩한 자기 만들기 말입니다. 올 한 해는 무엇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무엇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무엇을 얻으려 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님과 하나 되는 거룩한 체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호세아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새 해 첫 발걸음을 내딥습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자> 올 한 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하나님을 더 생생하게 만나시는 체험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새 해 첫 날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신 성도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과 사랑과 긍휼이 성도님들의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새 해 첫 발걸음 부터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시면서 믿음으로 시작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도여러분! 힘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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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복음으로]<기독교방송 운영이사회 창립 감사예배> 2013-1128 CBS (0) | 2013.11.28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히10:21~22 ) 2013-0613 연세조찬기도회 (0) | 2013.06.12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행1:12~14) 2013-0101 송구영신예배 (0) | 2012.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