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굳게 서서 (2010-0905 설교) 전문
"믿음에 굳게 서서"
담임목사 서 철
(골로새서 2:6-8)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할렐루야!
오늘 같이 나눌 말씀은 ‘믿음에 굳게 서서’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7) 믿음에 굳게 서라고 하는 바울의 권면은 한 가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않고 있다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사람의 전통을 따라가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세상의 초등학문을 쫓아가는 것이라고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골로새 지역은 오늘날의 터키, 시리아 지역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세 가지의 큰 사상이 흘러들어왔습니다.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의 사상, 북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의 사상, 서북쪽으로는 헬레니즘의 문명이 이들에게 흘러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일찍부터 동방의 사상과 헬레니즘의 다양한 철학 사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는데, 시간이 흘러서 그들에게 어떤 신앙생활을 하는지 살펴보니까,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전통을 따른 것이고, 세상의 초등학문을 쫓아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없게 하는 장애물들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보다 지금은 철학이 더 발달했습니다. 사람의 전통도 더 깊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철학과 전통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동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없도록 붙들고 있는 이 세상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사람의 전통과 초등학문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당시의 상황을 보면 가말리엘 문하에서 법을 전공했던 법률학자였고, 헬레니즘 문명에 정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국제적인 사람이었으며, 태어나서 활동했던 길리기아 다소와 안디옥은 당시에 서방과 동방을 연결하는 사상과 문화에 중심지였습니다. 이것을생각해보면, 바울은 나름대로 자기 자신의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 할 수 있는 소중한 가치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와 지식, 철학을 따라서 자기의 인생을 세워 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전공과 삶의 패턴과 사회적인 지위와 역할을 감안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교회에 모여서 예배합니다. 저는 이러한 점이 대단히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그냥 왔다가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오는 것이 불편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시험에 빠져서 부담이 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와서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소중한 가치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영과 진리의 이끌림을 받아서 예배하시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지금 이 곳에 와서 예배하는 이 시간 때문에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동력을 얻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쉬운 메시지를 준비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여러분들이 믿음에 굳게 선다는 말을 그냥 편안하게 받아들이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갖고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세계를 움직이고 계시고, 삶의 역사 가운데 관여하고 계심을 믿으면, 그리스도를 따라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의 성경구절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도처에 우리가 믿음 갖기를 원하고 있음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요3:16)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눅18:8)고 하시면서, 예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세상의 잣대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이 분은 사회적으로 역할이 중요하신 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과 견주었을 때 비중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에, 여기 와있는 것이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와 있어서 예배한다고 하는 이 사실은, 세상적인 잣대로서의 크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있다고 하는 것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은총 가운데 세상을 넉넉히 이겨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하는 이 자부심을 분명히 가지시고, 믿음위에 분명히 서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위에 굳게 선다고 하는 말은 느낌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분명히 가지고 있으면, 그 다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으면,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 담긴 말씀을 자세히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골2:7), 여러분 이 뿌리라고 하는 이야기를 교회 역사가 오래된 교회는 자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는 결코 우리 교회를 다닌 연조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뿌리는 견고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뿌리가 교회의 연조에만 두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를 다니기 이전에 다른 교회에서 이명해 온 사람들이 이 교회를 대를 이어 다닌 사람에 비해서 믿음이 없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120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 역사를 자랑한다고 하면, 우리보다 훨씬 역사를 오래 가지고 있는 천주교에 비해서는 역사가 짧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초대교회로부터 기독교의 역사를 생각한다 할지라도, 이 천년의 역사가 유대교의 육 천년의 역사와 비교해서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교회에 다닌 연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가치가 있고 소중한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그리스도 안에 내릴 때에만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기능공의 신앙처럼 교회 생활에 익숙한 기능공의 정도로 건축을 한다면, 어림잡아 대충 우리의 신앙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저 부모와 주일학교를 따라, 여름이 되면 수련회를 하고, 겨울이 되면 성탄절을 하고, 부활절이 되면 계란을 나누어 먹는 이런 정도에 우리들의 습관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어느 정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를 따라가면서 깊은 은혜 가운데 모시기를 원하신다면, 그런 교회 신앙에 익숙한 종교 기능공의 자세로는 우리 인생에 위대한 신앙의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넘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시험이 닥치면 여지없이 말라 비틀어져서 신앙생활이 바닥이 드러나고 맙니다. 언제나 핑계를 대는 사람들은 많은 이유를 바깥에서 갖기 때문에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근거를 잘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인생의 빌딩을 제대로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정교하게 짓기 위해서 교회 생활에 익숙한 종교 기능공의 자세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아주 좋은 정교한 설계를 할 수 있는 건축사에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예수를 만난 사람들
우리 신앙의 뿌리가 교회 습관이나 교회 역사, 모태 신앙에 두는 것도 좋습니다. 교회를 올 때, 친구를 따라 오는 것도 괜찮습니다. 우리 교회는 유관기관이 많기 때문에 교회를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예수를 만난 과정을 보면, 그들이 처음부터 구도자의 자세를 가지고 ‘나는 예수를 잘 믿겠다’는 생각으로 예수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에 앉았을 때, 예수께서 먼저 알아보시고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를 잡는 그들의 어촌에 가서 주님께서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예수를 만난 과정은 결코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자세를 가지고 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고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예수를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를 따라간 것은 아주 다양합니다. 어떤 때는 구경을 하러 왔다가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만난 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수를 찾아 왔지만, 그들이 돌아갈 때는 다른 길로 갔다고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자기의 인생을 걸었던 것은 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백그라운드에 페르시아의 전승에 나오는 점성술적인 신앙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찾아왔던 동기는 점성술적인 별의 움직임이었지만,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별자리를 보면서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이 꿈에 현몽하여 지시하는 데로 다른 길로 갔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께 나오는 과정이 어떻든지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서 제대로 믿어보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 식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식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우리의 지식과 계획과 지성이 발달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됩니다. 오늘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있을 때만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0)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시는 데 만만치 않습니다.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종교인으로서는 멋있는 예배를 하러 나오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받아야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오늘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여러분의 신앙의 뿌리를 그리스도에게 내리셔서 거기서 여러분이 영의 양식을 받아 마시고 믿음에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세우심을 받으라
그 다음은, 그리스도 안에 세우심을 받아야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도행전 13장을 생각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지도자가 5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들도 교회 안에서는 충분히 봉사를 하고 사역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13:1-2) 안디옥 교회에 있었던 많은 지도자와 교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선교의 대장정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세움이라고 하는 것을 사람의 조직 속에서 세워가는 공헌도나 연조, 역할의 비중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안디옥 교회에 있었던 사도들과 교사들, 이런 사람들이 좋은 지도자이지만,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 13장 이후에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은 성령이 따로 세운 자였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권사, 집사가 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산을 넘어가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머무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위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를 따라 가려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역할이나 비중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둔해서 성령의 뜻을 간파하지 못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성령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세우심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따로 세워주시는 진정한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주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굳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자에게는 아름다운 지혜와 믿음의 큰 담력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성령께서 막으시니까 순종했습니다. 성령이 세운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성령의 뜻앞에 내려 노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성령의 뜻 앞에 자기를 내려 놓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에 순종하는 사역자에게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힘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끝으로, 오늘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주는 말씀을 보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7)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골로새 교회는 오늘과 같이 화려한 예배당이 없었습니다. 국가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제국주의는 황제 숭배사상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주 복잡한 사상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삶의 뿌리는 여러 전통에 있고, 로마 제국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아마 나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며 그리스도를 따라갔습니다.
오늘 여러분 사는 것이 참 힘들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오셔서 무엇을 구하시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목사의 마음으로 초대교회의 인사말로 여러분을 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오늘 여러분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이 필요하신 분들입니다. 어떻게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설 수 있을까요? 오늘 여러분, 이 한 주간을 살아가시면서 힘드시겠지만, 주께서 나와 함께하실 것을 믿으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성경말씀대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과실을 많이 맺게 함이라.”(요15:16)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게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실 줄 믿습니다.”(롬8:30) 여러분 이 한 주간도 그리스도를 따라가시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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