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을 기억하라”
-경술국치(庚戌國恥) 100주년 나라사랑 주일-
2010년 8월 29일 서 철 담임목사
:: 신명기 32:7 ::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한일합방(韓日倂合)
오늘은 우리가 경술국치 100주년 나라사랑주일로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100년 전인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병합(倂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 병합이라고 하는 말을 쓰기까지 일본에 있는 외무성의 국장이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던 일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서 우리는 을사(乙巳)보호조약 그리고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말을 썼는데 철이 들면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리고 한일합방, 또는 한일병합은 무리 없이 사용하였는데 나중에 보니까 우리 쪽에서 결코 그런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1909년 바로 병합이 있기 1년 전에 구라치 데쓰키치(窘知鐵吉)라는 외무성 관료가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에게 이런 글을 보냅니다. “한국이 완전히 폐멸(廢滅)로 돌아가서 제국 영토의 일부가 되는 뜻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그 어조가 별로 과격하지 않은 문자를 골라 쓰고자 합니다.” 사실은 양국 간의 대등한 입장에선 합방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 것이 옳지만 일본입장에서는 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폐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서를 자극할까봐서 폐멸대신에 대등한 입장이라고 하는 합방도 쓰지 않고 생각 끝에 고안해 낸 단어는 병합(倂合)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멸망시켰다는 자국인의 자긍심도 반영하면서 그러나 상대방에게는 “너희들을 우리가 폐멸시킨 것이 아니라 너희들을 우리의 영토에 일부가 됨으로 보호해 준다”는 위장전술을 써서 병합이라는 말을 채택했다고 합니다.
한일병탄(韓日倂呑)
이것에 대해서 우리 한국에 있는 사학자들과 또 사상가들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결코 병합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되고 폐멸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합방은 외교적 대등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하다가 병탄(倂呑)이라고 하는 말을 쓰기로 했답니다. 아우를 병 또는 나란히 병자를 혼용하는데 보통 “아우를 병”자에 “삼길 탄”자를 써서 상대방에 의해서 멸망당한 삼켜져버린 의미로 병탄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쪽에서 보면 병합이라는 것이 옳고 우리 쪽에서 보면 한일병탄이 옳다고 하는 논쟁입니다.
더 이상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글자 한자를 선정하면서까지 고심을 해서 한국을 자기 나라의 일부로 귀속시킨 사건이 바로 경술국치, 한일병탄이라고 하면 우리민족에겐 치욕적인 날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경술국치일을 맞이해서 설교의 제목을 “옛날을 기억하라”로 정했습니다.
기억(記 憶)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33장은 모세의 축복이고 신명기 34장은 모세의 죽음의 내용입니다. 신명기서는 레위기서와 쌍을 이루고 있다고 소위 듀엣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영어의 듀엣이라는 의미인 “듀트로노모스(Deutronomos)”입니다. “노모스”는 법이라는 뜻이고, “듀트로(Deutro)”는 레위기와 듀엣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기에서 했던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반복해서 신명기에서 다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며 신명기 34장의 마지막 결론 부분을 모세는 노래와 축복과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죽음을 기록한 것이 가능하냐의 문제 때문에 신명기 34장을 신학자들은 편집사적인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모세의 사후에 누군가가 붙였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신명기 32장은 모세가 죽기 직전에 그리고 축복하기 직전에 노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솔로로 자신의 노래를 잘하기 위해서 자신의 노래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노래가 아닙니다. 그 노래를 보면 노래의 형식을 빌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면합니다.『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신명기 31:30』고 합니다. 노래는 노래인데 이스라엘 총회에서 읽어준 노래입니다. 그 내용의 핵심이 기억입니다. 신명기 32장의 핵심적인 단어는 기억입니다.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임종직전의 말들은 사람들에게 가장 진실하게 들려집니다. 모세는 죽기 직전에 자기 민족에게 축복을 했습니다. 그런데 축복을 하기 전에 기억하라고 하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읽어줍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억하라고 했으며 왜 기억하라고 했을까? 이것은 이제 광야의 시대가 끝나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의 축복이 시작되는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옛날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머리를 써서 살아라, 저자: 정원식, 출판사: 샘터사』와 현용수 박사가 지은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 출판사: 쉐마』을 확인해 보니까 유대인의 가정교육의 장점이 다른 민족에서는 볼 수 없는 3대가 모여서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5년도 아니고 1년만 지나면 낯 모르는 동네가 생기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적어도 30년 정도의 차이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손자가 모여서 대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유는 대화의 공통분모가 있고 이것이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겁니다.
망각(忘 却)
신명기 32장의 말씀에 주목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모세가 33장에 축복하고 34장의 죽음 직전에 그가 하고 싶었던 유언과 같은 말은 옛날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은 당연히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유월절의 출애굽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함축됩니다. 종살이의 고통, 황무지의 고통, 출애굽의 고통이 있으며 이 고통가운데 민족을 이끄신 생생한 하나님에 대한 간증이 있습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잊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그 옛날을 잊어버린 혹독한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들이 잊어버리는 현상에 대해서 모세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성경을 읽어드립니다.『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신명기32장 13,14절』하나님께서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서 큰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45장 15절은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이 반석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름지게 하고 살찌게 하시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니까 그들이 이제 비대하고 윤택하고 잘사니까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렇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17절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너희가 하나님 때문에 이 종살이의 고통을 벗어나고 출애굽의 고난을 이겨내고 황무지의 고통을 이겨냈는데 너희가 막상 가나안에 들어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등 따습고 배부르게 되면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제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아주 재미난 구절이 나옵니다. 신명기 32:17에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근래에 들어온 다른 신들”이란 표현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근래에 들어온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을 섬기고 근래에 들어온 다른 신들을 섬기는 하나님을 떠난 우상숭배가 판을 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린 시절의 구호가 생각났습니다. 학교에서는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고 했고 교회는 더더욱 우상숭배를 버려야 이 민족이 잘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무역의 10대 국가가 되고 어떤 분야에서는 1위를 차지하는데 우리 민족이 민족문화를 보존한다는 것 때문에 귀신들에게 제사하는 일을 이제는 문화재 차원에서 장려하다보니까 문화의 사건을 뛰어넘어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김철손 박사의 저서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에서, 초대교회는 박해하는 자가 노골적으로 박해하기 때문에 순교가 가능했는데, 21세기에는 박해하는 자가 박해한다고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교회 내부에 침투해서 교회를 개혁한다고 교묘하게 교회를 어지럽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는 명분조차 주지 않아 21세기에는 순교가 불가능 하고, 그래서 교회가 교회를 지키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을 각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차라리 순교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고 교회 외부에서는 기독교와 정치를 연결시켜서 교회를 공격하는 안티 사이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신학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의미에서의 신학적인 성찰을 한다고 시작을 했지만 결국 혼합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꼭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느냐”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인데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해서 기독교의 신앙을 상대화시키는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430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 40년의 광야생활을 그들이 견딜 수 있도록 그들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얻은 것은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며 그곳에서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고생했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새 젊은이들은 가나안의 풍요 속에서 가나안의 바알리즘과 야합하기 시작합니다. 농경문화를 통해서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가나안의 신과 근래에 들어온 바알 신에게 그들은 경도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너희가 옛날을 기억하지 아니하면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하게 되면 귀신들에게 제사하고 근래에 다른 신들에게 제사할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신명기 32:19, 20』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움이 사라지고 그 자녀들에게 진노하셔서 얼굴을 거두어 버리시겠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풍요의 시대가 지나고 남과 북의 분단의 시대가 오더니 BC 587년을 전후로 해서 바벨론의 침략을 받고 AD 70년에 로마의 침략을 받으며 완전히 나라가 망합니다.
세계관(世 界 觀)
우리에게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학문의 성향과 지성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얼마든지 경술국치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합병, 병합, 병탄이라는 말과 폐멸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수준에서 설교의 서두를 장식 했습니다. 저는 성경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경적으로 우리가 오늘 옛날을 기억해야 될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이냐? 그것은 역사를 해석하는 세계관입니다. 오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민중도 영웅도 시민의 힘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역사를 해석하는 세계관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중심의 해석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주관하는 동인이, 또는 역사를 주관하는 ‘프리마 카우자’라는 제1원인(prima causa)이 결코 물질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민중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믿는 우리들은 오늘 경술국치일에 옛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모세의 마지막 권면을 유념해야 합니다.
문답(問 答)
어떻게 옛날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성경의 내용을 보면 그 방법은 묻는 자와 설명하는 자의 관계성입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 신32:7』오늘 젊은이들은 아버지에게 물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어른에게 물어야 하고 어른들은 젊은이들의 물음 앞에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역사가 단절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독일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풀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충분한 사과와 배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충분한 사과와 배상도 안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태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용서는 하자 그러나 잊지 말자”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용서해주지도 않았는데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반일감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감정의 끓어오름이지 진정한 역사의 기억이 아닐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의 종살이와 노예생활을 하던 식민통치의 삶을 벗어나게 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면서 그들은 우상숭배를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어른들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옛날 부모들이 가졌던 그 어려운 시절의 기억과 고통의 삶의 현실들과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셨던 이야기들을 모두 잊었습니다. 그들은 망각의 질병 속에 놓여있었습니다.
여러분!
“차라리 용서를 하십시오. 그리나 잊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모세는 말합니다. -10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 신명기 32장 10절』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황무지는 창세기의 1장에 땅이 혼돈하며 공허한다는 단어와 어근을 같이 합니다. 출애굽의 상황을 지나고 모세오경을 기록했기 때문에 창세기부터 레위기까지의 성경의 모든 단어들은 출애굽 이후의 단어들을 차용해 쓰게 됩니다. 창세기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빛이 오기 전에 있었던 혼돈과 공허의 땅과 그들이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40년 동안 걸어간 광야의 황무지라는 땅이 오버랩 되며 결국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의 땅에서 빛을 주셨고 하나님은 황무지의 땅에서 그들을 만나사고 호위하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묻는 자도 설명하는 자도 없습니다. 오직 그들은 가나안의 풍요로운 문명에 도움을 받아서 윤택한 삶으로 귀신들에게 제사하는 삶과 근래에 들어온 다른 신들을 섬기기 시작하고 종교혼합주의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돌리시고 진노하시고 그들을 만나지 않으시고 그들을 호위하고 보호하지 않으시겠다고 등을 돌리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기 전에 그들에게 노래를 읽어줍니다. 옛날을 기억하라..오늘 경술국치라는 치욕스러운 병탄의 날을 맞이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은 것과 우리 민족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근대에는 미국사이에서 당했던 여러 가지의 고통들을 잊지 않고 이 민족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으로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을 꼭 기억해야 할 거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묻는 젊은이와 설명하는 어른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까? 가나안의 풍요로움을 맛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배부르고 비대하고 윤택한 가나안의 풍요로움을 누리라고만하고 그 풍요로움 속에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귀신들에게 제사하고 그들이 근래에 들어온 다른 신들과 야합하여 종교 홍합주의에 빠진 것을 방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어른들과 그 하나님에 대해서 물을 수 있는 가정과 나라가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물을 수 있는 젊은이가 있는 사회가 건강합니다.
보호(保 護)
저는 이제 설교를 성경구절을 하나 읽으며 마칩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32:11,12』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해서 자기의 새끼를 떨어뜨리고 동시에 새끼를 보호해주는 이 표현은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셨다는 히브리어 “메라헤페트”와 그 어근이 같습니다. 하나님의 운행하심은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강한 독수리가 되도록 떨어뜨린 다음에 날개를 펴서 보호해주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을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보호하도록 그렇게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듯이 하나님은 창조한 세계를 끌어안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대해졌고 살이 찌고 윤택해졌고 가나안의 풍요로움 속에 그들의 신앙이 바닥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배부름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고통스러운 우리의 역사를 망각하게 하면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진노할 것이고, 우리의 자녀를 향해서 진노할 것이고, 우리의 삶 속에서 얼굴을 돌려버리시고, 우리에게 다시 고난의 삶으로 우리가 전락하도록 방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서 옛날을 기억하는 그래서 옛날에 우리를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고 우리의 아버지와 어른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물을 수 있는 젊은이들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가정과 나라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시고 역사를 이끌어 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붙들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시고 다시 하나님 앞에 올곧게 설 수 있는 믿음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 기도함으로 다시는 경술국치와 같은 병탄의 고통이 이 민족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새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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