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묵상(默想)/유쾌한 묵상

룻기 성서연구 <1월 3일> “하나님의 섭리” 룻기 1: 1-5

우순(愚巡) 2022. 3. 10. 21:08

 
룻기 성서연구 <1월 3일>          “하나님의 섭리”    룻기 1: 1-5


정독>
 1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시기) 흉년(경제적 상황) 유다 베들레헴 사람(등장인물)
 2절: 엘리멜렉(시부) 나오미(시모) 말론과 기룐(나오미의 두 아들) 모압지방 거주(지역)
 3절: 엘리멜렉 (나오미의 남편)의 죽음
 4절: 말론과 기룐의 결혼 : 오르바와 룻을 아내로 얻음
 5절: 말론과 기룐의 죽음


묵상>
  룻기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주는 구속사의 책이다. 룻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룻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섭리를 만난다. 룻기는 언뜻 보면 아름다운 글로 이루어진 문학책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담고 있는 구속사의 역사서이다. 사사 시대를 이어 왕의 시대로 넘어가는 연결 고리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를 드러내주고 있다. 그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예수님은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에 있는 것이 모두 다 예수님을 위한 글이라고 가르치셨다(눅 24:27;44)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님 중심의 성경 읽기를 해야 하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해야 한다. 성경은 구속사의 경전이기 때문이다.
  룻의 가족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룻기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모델로 등장시켜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룻기의 서론 부분인 1장 1절로 5절은 룻기서 전체를 읽는 안목을 제시해준다. 그것은 룻의 등장이다. 룻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는 네 명의 여인 중 한사람이다. 마태복음은 다말(1:3),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1:6), 마리아(1:16)와 함께 룻을 예수님의 조상으로 명기하고 있다. 룻은 예수님의 조상이다. 룻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이는 구속사의 중심 테마가 선민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섭리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위하여 이방 여인 룻을 선택하심으로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었다
   룻의 시대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룻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역사에 등장했다(1절) 그 때는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살던 때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경건하게 믿음의 길을 유지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다윗 왕가를 세우시고 메시야를 다윗왕의 후손으로 보내시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다윗왕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룻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알려주는 구속사의 울림이다


실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 구원의 대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룻 같은 이방 사람도 선택하신다. 성도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구속사의 중심인물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존중히 여기고, 자기 자신의 삶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기긍정의 삶’을 살자.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중심인물이다.


룻기 성서연구 <1월 10일>          “하나님의 인도”    룻기 1: 6-22


정독>
 6절-7절: 나오미, 오르바, 룻의 귀환
 8-14절: 나오미의 설득과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의 선택
 15절-17절: 룻의 고백 “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8절-21절: 나오미의 고백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22절: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도착함


 묵상>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땅으로 인도하신다. 룻기 1장의 중심 화두는 모압과 베들레헴이다. 모압은 이방 땅이고 베들레헴은 하나님의 땅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땅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땅으로 인도하신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나오미는 엘리멜렉을 따라 모압 땅으로 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은 남편과 자식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게 된다(1:2;5) 결국 나오미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된다.  성경은 언제나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시작하고 있다. 룻기는 다시 한번 베들레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면서 예수님의 탄생의 이유를 암시해주고 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 와야 떡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땅에서 살아야 한다. 베들레헴의 이름 뜻은 ‘떡집’이다. 성경에는 일관성과 통일성과 점진성이 있다. 성경 전체는 구속사의 일관된  흐름이 있고, 구약과 신약이 동일한 모형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수렴하고 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다(요6:35) 성찬식은 떡이신 예수님의 몸을 먹는 예전이다(마26:26) 이것은 시내산 언약식에서 보았듯이 언약을 맺은 후에 먹는 언약식사이다(출24:1-11)
   하나님은 떡집을 떠난 나오미의 가족들을 떡집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이는 결국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살아야 할 땅이요 집임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가 살아야 할 생명의 떡집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인도하신다. 교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우리들이 교회로 나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생명의 떡을 나누어 주시길 원하시고 계시다.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떡집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신다. 성도는 순종하면 떡집의 축제에 참여할 수 있다.


실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땅 베들레헴에서 살아야 한다. 사람들은 종종 세상적인 풍요로움을 좇아 모압으로 내려가고 애굽으로 내려간다. 심지어는 소돔과 고모라로 가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수모를 겪는다. 자식을 잃어버리기도 하였고(룻1장), 노예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며(출1장), 불의 심판을 당하기도 하였다(창19장).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땅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야 할 하나님의 땅 떡집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는 꿈을 파는 비전마트요,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주는 사랑의 성소이며, 인생의 역전극을 연출하는 믿음의 경주장이다. 교회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베들레헴이며 생명의 떡이 풍성한 떡집이다. 교회를 중시여기고 교회를 떠나지 말자.


룻기 성서연구 <1월 17일>          “하나님의 연결”    룻기 2:1-7


정독>
 1절: 보아스-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
 2절: 은혜를 입으면 -룻의 요청, 나오미는 룻을 내 딸이라 부름
 3절: 우연히-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름
 4절: 마침-보아스가 마침 추수하는 자리에 나타남


묵상>
   하나님은 사람을 연결시키시는 중매자다. 아담과 이브를 중매했고 보아스와 룻을 중매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갔다. 그러나 보아스는 때 마침 룻이 이삭을 주으러 나온 그 밭에 나갔다. 룻과 보아스의 우연과 마침의 만남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필연적인 만남이다.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으며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마1:5-6) 그리고 그 다윗 왕의 혈통에서 예수님이 출생하셨다(마1:16) 결국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만남이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을 연결하시는 중매자이시다.
   하나님은 연결하시는 분이시다. 그물망을 만들듯이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룻의 우연과 보아스의 마침처럼 이방 사람의 우연 속에 하나님의 필연이 들어 있다. 인간의 위기 속에 하나님의 기회가 들어있고, 인간의 우연 속에 하나님의 필연이 들어 있다. 인간은 사과 속의 씨앗 개수를 세지만 하나님은 씨앗 속의 사과 개수를 세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사람을 만날 때 우연한 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구속사의 필연적인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연결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신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은 예수님과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만남과 같은 모형이다.(막7:24-30) 성경에는 구약과 신약을 잇는 비슷한 모형들이 있다. 구속사의 신학에서는 모형론이 깊은 의미를 갖는다. 보아스를 만나는 룻은 ‘은혜를 구하는 자(2절)’이고, ‘이삭을 줍는 자(7절)’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수로보니게 여인은 ‘간구하는 자(막7:26)’이고 ‘부스러기를 구하는 자(막7:28)’이다. 은혜와 간구, 이삭과 부스러기는 구속사적 모형이다. 두 여인은 가족들인 나오미(룻)와 귀신 들린 딸(수보보니게 여인)를 살렸다. 은혜를 구하는 룻은 유력한 보아스를 만났고, 치유를 간구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다. 결국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하심으로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심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연결 가운데 으뜸은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실천>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의 연결로 사람을 만나라! 사람의 지혜와 술수를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에 세우시려 특별한 만남을 연결하신다. 사람을 만날 때 하나님의 연결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깊이 음미하며 살자.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기회를 믿고, 우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필연을 신뢰하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만나 은혜의 삶을 살아가자.
 
룻기 성서연구 <1월 24일>          “하나님의 보호”    룻기 2:8-16


정독>
 8절: 내 딸아 들으라 - 보아스는 룻을 ‘내 딸’이라고 불렀다
 9절: 보아스의 당부 - 소년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함
10절: 룻의 고백 -나는 이방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11절-12절: 보아스의 대답 - 룻을 칭송하고 축복함
14절: 떡 조각 -보아스가 룻에 떡 조각에 초를 찍으라 권함


묵상>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지키는 보호자를 세우신다. 룻의 보호자는 보아스이고 우리의 보호자는 예수님이시다. 모형론적으로 이 둘은 떡 조각을 통해 연결된다. 룻에 대한 보아스의 태도는 자비와 선행 이상이다. 보아스는 룻을 자기의 식사 자리에 초대한다(14절) 보아스는 유력한 자였다. 유력한 자는 히브리어 기뽀르 하일(Gibbor Hayil)로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덕망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룻은 이삭을 줍는 모압여인 이방여인이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의 보호자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언제나 돕도록 보호자를 세우신다
   하나님의 준비는 언약식사인 성찬예전을 통해 예수님을 우리의 보호자로 세우셨다. 떡을 나누는 그 식사 자리는 ‘떡’ 과 ‘떡 조각’을 통해 예수님의 성찬예전(마26:26)과 연결된다. 마가복음의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귀신들린 딸을 고쳤다. 그 것은 결국 귀신의 세력과 싸워 이긴 것이다. 마가복음 6장~8장은 떡을 주제로 떡 조각의 영성을 제공해준다. 6장은 오병이어의 표적이고 8장은 칠병이어의 표적이다. 가운데 7장은 떡 조각을 구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사다. 그리고 열 두 바구니와(막6:43) 일곱 광주리에(막8:8) 풍성히 남은 떡 조각들은 보아스 보다 더 ‘유력한 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떡 조각이다. 그런데 그 떡 조각은 결국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시기 때문이다(요6:35). 우리는 예수님의 성찬예전에 참여 하여 그 떡 조각을 먹음으로 ‘은혜를 입는 자’가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시키고 훈련하신다. 보아스와 룻의 대화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보아스는 룻을 ‘내 딸’ 이라고 불렀으며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자신의 소녀들과 함께 머무르라고 한다(8). 나오미도 룻을 ‘내 딸’ 이라고 불렀고(2:2), 룻에게 보아스의 소녀들과 함께 머물며 다른 밭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고 한다(22). 또 보아스는 밭의 소년들에게는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한다.  룻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기 위하여 다윗 왕가의 조상이 될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룻을 보아스의 소녀들과 보아스의 밭에만 머물게 함으로 성결함을 준비하셨다. 룻은 보아스와 나오미의 말에 순종하였다(23)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하여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시고 성결케 준비하신다. 스스로 성결케 되면 하나님은 기사와 표적을 베푸신다(수3:5)


실천>
  하나님의 구속사의 사역자로 선택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밭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살며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 또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의 보호자로 세우셨음을 믿고 예수님의 떡을 먹어야 한다. 예수님이 나누어 주시는 떡 조각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언약식사에 초대된 축제의 축복이다. 모세도 시내산 언약식 후에 언약식사를 하였다(출24:1-11). 성찬예전에 꼭 참여하고 하나님과 날마다 언약을 새롭게 확인하며 살자.


  룻기 성서연구 <1월 31일>          “룻의 순종”    룻기 2:17-23


정독>
  19절: 돌본 자 - 보아스는 룻을 돌 본 자
  20절: 기업 무를 자 -유대의 전통에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기업무를 자를 둠(레25:25)
  21절“ 모압 여인 룻 - 룻이 모압 여인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22절: 나오미의 권고 -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
  23절: 룻의 처신 - 보아스의 소녀들과 가까이 있음


묵상>
   하나님의 구속사는 룻의 순종으로 절정에 이른다. 룻은 보아스와 나오미의 권고를 받아 다른 밭에 가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않는다. 이 순종이 룻을 하나님의 구속사의 주역으로 세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순종시키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룰 수 있는 성결한 사역자를 세우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은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며 다른 사람을 만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22). 룻은 순종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가난한 이방 여인 룻이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상황은 자기를 지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보아스가 소년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한 것은 역설적으로 건드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9) 나오미가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말라고 한 말은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22). 룻은 이런 유혹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성결하게 지켰다.(23). 이런 룻의 순종과 성결이 룻을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에 세웠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구속사는 완성되고 절정에 이른다. 존 웨슬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라고 설교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인간의 철저한 순종이 수반됨으로 완성된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우리들 밖에서 일어나는 ‘extra nos'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는 ’in nobis'의 사건이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의 구속사를 인간의 역사와 연결해서 언급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Qui fecit nos sine nobis, non salvabit nos sine nobis) 그렇다고 이 말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모자라서 인간의 그 무엇인가가 더해져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완성시키시는 데 인간의 힘을 전혀 필요하지 않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을 배려하시어 인간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참여와 책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파생되는 능력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책임적인 은혜’의 액센트는 책임이 아니라 은혜에 있다. 선행적 은총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다.


 실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유혹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하여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밭에 가지 말며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에게 다른 밭은 예수의 복음이 아닌 다른 교훈이며 다른 남자는 우리가 만나서는 안 될 다른 신이다. 예수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날마다 고백하자.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심을 선포하고 신뢰하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의 길이 있음을 믿고 예수복음 안에 머무르며 살자
  
  
  룻기 성서연구 <2월 7일>          “하나님의 안식”    룻기 3:1-5


  정독>
    1절: 안식할 곳 -나오미는 룻에게 안식할 곳을 주선
    2절: 나오미의 예측 - 보아스의 등장 예고
    3절-4절: 나오미의 권고 -룻을 단장한 후에 숨김
    5절: 룻의 대답 - 순종을 약속


  묵상>
    오늘 말씀의 핵심은 ‘안식할 곳’이다. 나오미는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해주겠다고 말한다. 안식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우주의 축복이다. 하나님은 창조 때에 안식일을 제정하시어 쉬시므로 인간을 위한 안식제도를 만드셨다.(창2:2-3) 출애굽 때는 모세를 통해 사막의 규례로 정착시켰고(출16:23-30), 마침내 십계명의 하나로 완전한 율법이 되었다(출20:8-11) 또 안식일 제도와 함께 안식년 제도도 제정됐고(레25:5-6),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에는 안식년의 안식년인 희년 제도가 생겼다(레25:8-12)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은 모두 다 안식의 시간들이다. 하나님은 자신도 안식하셨고 인간도 안식하시게 하셨으며 땅도 안식하도록 법제화 하셨다. 그러므로 안식이란 우주의 법칙이며 우주를 존재케 하는 힘의 근거이다.
   나오미는 룻에게 ‘안식할 곳’을  찾아 주려고 했다(1절) 그 안식할 곳은 보아스의 품이었다(4절) 언뜻 보면 이 것은 비윤리적인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정교한 하나님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다윗 왕가의 조상인 보아스의 품에서 이방 여인이 안식할 곳을 찾는 것은 이방인의 안식할 곳이 다윗 왕가 즉 메시야 가문에 있음을 예표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성경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다윗왕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품이 인간의 안식할 곳이 되고 있음을 본다. 모형론에 따르면 보아스와 룻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 받은 성도들을 뜻하는 거룩한 신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이 안식일 논쟁에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 성도들의 안식할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마12:8). 우리는 십자가의 그늘에서 쉼을 얻으며 예수님의 품 안에서 평안을 얻는다
   안식할 곳은 쉴 수 있는 곳이다. 룻의 안식할 곳은 보아스의 품이었지만 우리의 안식할 곳은 예수님의 품이다. 예수님은 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에게로 오라고 명령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예수님에게 나오는 자는 그의 마음이 쉼을 얻는다. 룻은 나오미의 말에 순종하여 자신을 단장하고 보아스의 곁에 가 누웠다(3:7). 룻의 철저한 순종이 룻에게 안식할 곳을 얻게 하였고 구속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실천>
   룻처럼 안식할 곳을 찾기 위해 떡 집인 베들레헴에 가서 예수님의 품에 안기자. 예수님의 품은 성도들이 안식할 곳이다. 예수님의 품은 그 분의 몸이신 교회이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쉼을 얻을 수 있으며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예수님께 맡기고 쉼을 얻자. 교회는 영혼의 쉼터이며 민중의 쉼터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쉼을 얻는 아늑한 쉼터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쉼을 얻으며 세상을 이기자


 룻기 성서연구 <2월 14일>          “하나님의 파격”    룻기 3:6-18


정독>
 7절: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누운 룻
 10절: 보아스의 축복 - 룻을 축복함
 11절: 현숙한 여자 - 룻의 이미지
 12절-13절 : 기업 무를 자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우선 순위를 따짐
 14절-15절: 룻의 기상과 보아스의 선대(보리쌀을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줌)
 16절-18절 : 룻의 귀가와 보고 (나오미에게 보고함)


 묵상>
  하나님의 은혜는 파격적이다. 룻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룻의 신분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파격을 설명해주고 있다.  ‘유력한 자’ 보아스와(2:1) 모압 여인 룻(1:4)은 어울릴 수 없는 주종의 관계였다. 룻은 보아스에게 어찌하여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며 자신을 돌보아 주느냐고 묻는다(2:10) 룻은 자신이 보아스의 하녀보다도 못함을 알고 있었다(2:13) 그러나 보아스는 룻을 선대하여 축복한다.(2:11-12). 보아스가 룻을 ‘현숙한 여자’라고 부르는 대목은 대단한 시각의 전환이다.(11) ‘현숙한 여자 (에쉐트 하일)’은 잠언의 결론이다(잠31:10-31) 현숙한 여자는 ‘유력한 자(기뽀르 하일)’과 어울리는 적절한 호칭이다. 이방 여인 룻이 유대 왕가의 혈통에 어울리는 여인으로 파격적인 신분상승을 했다. 이는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요 자비이다.
  하나님의 파격적인 은혜는 룻의 자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룻이 보아스의 마음에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룻의 인애 때문이다(10) 인애라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룻기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요 은혜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빈손을 채우신다. 모압에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 온 나오미와 룻에게(1:21) 보리 여섯 되를 주어 빈손을 채우신다(17). 하나님이 자비의 하나님이요 룻이 자비의 여인이다. 자비라는 단어 헤세드로 연결된 하나님과 룻의 연속성은 룻기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전하는 구속사의 책임을 나타낸다. 떡 집인 베들레헴에는 떡이 풍성하게 남아 있으며 구하는 자들에게 떡을 충분하게 나누어 준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성도의 빈손을 채우신다. 모압 여인 룻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이방 여인에게도 차별 없이 베푸신다.
  하나님의 파격적인 은혜는 옷자락으로 덮듯이 성도들을 날개 아래 보호하신다. 9절의 옷자락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날개를 의미하는 말로 종종 사용된다(sakenfeld) 이 단어는 에스겔16장 8절과 신명기 22장 30절에서도 나타나는 데 결혼약속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룻의 요청은 일종의 청혼의식이다. 이방 여인이 다윗 왕가에 청혼할 수 있는 자격을 하나님이 부여하셨다. 성도들은 거룩한 신부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혼인잔치를 벌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파격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파격적이며 신분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아들과 대등한 자격을 얻게 한다.
  
실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신 은혜가 파격적임을 깨닫고 감격으로 살며, 거룩한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잔치를 베풀 날을 위하여 처음 보다 나중이 더한 인애와 자비의 삶을 살자


룻기 성서연구 <2월 21일>          “하나님의 성취”    룻기 4:1-22


정독>
 1절-10절: 룻의 기업 무를 자 선정을 위한 예식
 11절-12절: 백성들과 장로들의 증언 -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허락
 13절-17절: 보아스와 룻의 결혼과 오벳의 출산 -메신야 가문이 이루어짐
 18절-22절: 베레스의 계보 -다윗왕가의 계보와 보아스의 위치


묵상>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성취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유대인만의 역사가 아닌 이방인의 역사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리시려고 보아스와 룻의 혼인 계획을 성취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섭리하시고 준비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구약의 예언이 신약의 성취로 이어진다. 언약의 축복은 후손의 성취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하신 말씀 ‘ 다 이루셨다’는 말씀도 성취의 표현이다.(요19:30). 하나님의 성취는 인간의 구원이다. 보아스와 룻의 결혼은 한 가정의 혼인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요 언약의 성취며 예언의 성취다
    하나님의 성취는 다윗왕의 출생을 선포함으로 더 분명해진다.(22). 이는 다윗 왕의 자손으로 태어나시는 마태복음의 예수님 계보로 이어지는 복음의 전조이다.(마1장). 보아스와 결혼한 룻은 가문의 축복을 받는다. 성문의 백성과 장로들은 라헬과 레아와 유다의 복을 빌었고(11-12), 여인들은 여호와께 찬송을 불렀다(14), 베레스의 계보는 가문의 축복의 절정이다.(18-22). 다윗 왕가의 가문이 되었다. 룻기서가 다윗 왕 시대 이후의 책인 점을 생각해 보면 이방 여인이 다윗 왕가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큰 축복의 성취다. 또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메시야 가문의 성취를 이룬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은 남편을 잃고 먹을 것이 없어 슬픔으로 살던 이방 여인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하셨다.
   하나님의 성취는 성경의 핵심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해가는 경전이다. 율법, 예언, 역사, 복음, 그리고 성문학 등을 포함하고 있지만 핵심은 하나다. 구원의 성취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아들 곧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어 가시는 구원의 성취다. 룻기를 역사서로만 읽으면 사사시대의 농경문화나 왕정직전의 시대 상황만을 읽게 된다.  또 룻기를 문학서로만 읽으면 괴테가 말했듯이 잘 짜여진 완벽한 한 편의 소설을 읽게 된다. 그러나 룻기를 구속사의 관점에서 바라다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가 보인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셨다. 룻은 그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중심인물로 선택받았고 순종과 성결로 충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다.


실천>
  성도는 하나님을 구원의 성취자로 믿어야 한다. 룻처럼 남편을 잃고 가난에 찌들려 낯선 곳으로 이주하더라도 땅만 보지 말고 하늘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성도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시기 위하여 메시야의 왕가를 세우시는 놀라운 계획을 진행하시기 때문이다.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보자! 인생을 중간 결산하지 말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인생은 중간을 끊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보자!


  룻기 성서연구 <2월 28일>          “전체강론: 하나님의 축제”    룻기 1: 22


   룻기는 하나님의 축제의 책이다. 룻기는 보리와 밀의 추수와 연결되어 있다.(1:22; 2:23) 나오미와 룻은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1:22)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밀 추수를 마칠 때 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한다(2:23). 룻기의 배경은 추수의 축제다. 완벽한 축제의 상황이다. 괴테는 룻기를 ‘사랑스런 작은 완결품’으로 평가하면서 소품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괴테에게 룻기는 확고한 신념과 영감의 대표적인 구약성경이었다. 룻기는 작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구성을 갖춘 영감의 책이고 축제의 책이다. 유대인들의 보리 추수는 유월절에 시작하여 오순절에 끝나면서 밀 추수를 한다. 그러니까 룻기는 유월절의 축제부터 오순절의 축제까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형사취수혼(兄死就嫂婚)의 ‘레비리트(levirate)’나 기업무를자의 ‘고엘(Goel)’ 이야기도 흥미를 끄는 관심사이지만 룻기의 진짜 중요한 핵심은 추수의 축제에 있다. 유대인들은 룻기를 메길로트(Megillot)의 하나로 읽었다. 메길로트는 유대 달력의 성일에 읽는  축제용 두루마리로 아가서, 전도서, 애가서, 에스더, 룻기를 말한다. 비록 기독교 성경이 룻기를  헬라어와 라틴어 사본의 전승을 따라 사사기 뒤에 놓아 역사서로 취급하고 있지만 보리와 밀을 추수하는 축제의 성격은 변함없다
  룻기에는 유월절의 축제와 오순절의 축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해방의 절기이고, 오순절은 시내 산에서 십계명 즉 토라의 말씀을 받은 날이다. 룻기는 유월절에 시작한 축제가 오순절에 절정에 이르러 혼인을 이루는 축제의 책이다. 유대인들은 이 책을 오랫동안 오순절 축제의 책으로 읽어 왔다(Herzberg) 유월절은 예수님의 구속사로 이어지며 오순절은 성령님의 구속사로 이어진다. 다윗 왕의 등장은 메시야의 등장을 말하는 것이고, 룻이 얻은 안식할 곳은 주님의 품이며, 추수의 축제는 성령강림의 교회설립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이루어졌고 철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완성되었다. 룻은 그런 구속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면서 자신을 지켜 갔던 성결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축제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가 성취되는 곳에서 믿음의 성결을 지킨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다. 그 곳에 성도의 안식할 곳이 있다. 그곳에 성도가 머무를 쉼터가 있다.
   룻기는 하나님의 축제에 대한 희망의 선포를 담고 있다.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 오라는 강력한 권면이자 희망을 담고 있다. 양식은 모압에 있지 않고 베들레헴에 있다. 모압은 사람을 잃어버린 땅이지만 베들레헴은 사람을 얻은 땅이다. 일시적인 기근이 있었지만 여전히 축제는 베들레헴에서 베풀어진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한다. 떡 집으로 돌아갈 때 다시 하나님의 축제를 경험한다. 떡 집에는 떡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오순절 추수 때에는 성령감림의 축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희망은 하나님의 축제에 참여 하도록 예수님께 돌아가는 것이고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다. 성령체험-성령세례-성령충만은 웨슬리 신학의 핵심이다
  룻기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의 축제가 진하게 배어 있다. 룻기를 읽으면서 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축제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기업 무를 자, 형사취수혼, 사사시대의 기근, 청혼방법등의 문학적 특성이나 문화적 배경만을 읽는 것은 룻기의 영적 측면을 도외시 하는 것이다. 룻기는 문학성을 가졌으나 문학작품이 아니다. 룻기는 문화성을 가졌으나 문화소개서가 아니다. 룻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복음서다. 룻기는 성령충만함을 입는 자들이 경험하게 될 축제의 복음서다. 룻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안식할 곳을 찾아야 하고,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속에서 축제의 기쁨을 경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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