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13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제가 지난 화요일 새벽기도회 와서 기도하던 중 갑자기 이 말씀이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해야 되겠구나 생각을 했는데, 이 설교가 대단히 양면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쉬운 설교입니다. 목사들이 이 말씀을 주제로 설교를 준비한 자료도 많고 설교도 많은 자명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굉장한 짐으로 다가왔고, 주보를 위해 확정해야 하는 금요일까지 고민했습니다. 그것은 머리로 깨달은 사랑을 설교하긴 쉬워도 가슴으로 느낀 사랑을 설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고, 손과 발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설교하기엔 더더욱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가슴으로 전해지는 사랑
또 사랑을 설교하기에는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병도 있어서 사실은 쉽지 않았습니다. 목회자들의 직업병 중의 하나는 가정구원입니다. 목회자들은 당연히 가정 모두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처럼 아버지가 목사님인 저의 아들도 목사님의 자식이니 당연히 잘 믿어야지요. 현재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목사님들이 목회를 하며 매스컴이나 교회에서 받는 환대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고통을 토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목사님뿐만 아니라 믿음이 좋은 성도님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교회를 다니고 어리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못 느껴봤는데, 아이가 사춘기를 지날 때 진진하게 한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것은 자식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 고통을 받던 목사님들이 공통적으로 내린 결론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런 목회자와 성도의 자식들이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못 느낀다는 겁니다. 심각하게 고민할 만한 상황을 지난 적이 없었지만, 선배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세계 최고 교회의 목사님이거나 한 교파의 최고의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거나 믿음도 좋고 설교를 잘하는데 자식들이 교회를 안다닌다면. 왜 그럴까요? 부모의 신앙은 자식들에겐 철저하게 위선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고 종교적인 열정만 있지 자식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이것이 목사님들에게 아주 큰 고통입니다. 그 고통은 여러분의 상상 이상입니다. 제 선배 목사님은 자살하고 싶다고 까지 했습니다. 말이 안되지요? 목사가 자살하고 싶다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 주일이면 수 천명 앞에서 설교를 하고 매스컴에서 아주 인기 있는 목사가 돼서 설교하고 돌아오는데 막상 자기 자식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모습을 보면 죽고 싶었다는 겁니다. 아마 장로님들 중에서도 믿음이 굉장하지만 자녀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 고통을 느끼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저는 고통을 이야기 하려는 것도 아니고 자식을 구원시키지 못했다 질책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저 자신도 거기서 더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주일 아침 새벽기도를 인도할 때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지극히 작은 자 중에도 작은 자요, 죄인 중에 괴수니라"란 바울의 고백처럼 정말 사람을 사랑했느냐? 머리로 이해한 사랑이 아닌 가슴으로 체득한 사랑. 더 나아가서는 손과 발로 구현한 사랑. 그런 사랑을 체험하고 승화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은 죽을 때까지 설교 할 수 없는 말씀일 것입니다. 목사님들, 장로님들의 고통이 내린 결론이 뭔고 하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컸는데 자식에 대한 진지한 사랑은 없었다는 거죠. 여기에 동의 할 분이 계실까요? 저도 두 아이의 아버지인데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 자식에게 물어보면, 제가 강단에 서지 못할 대답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킹스 키즈(왕의 아이들) 훈련이라고 하는 예수전도단의 훈련에 초등학교 6학년짜리 둘을 보냈었습니다. 그 중 내적치유 프로그램 중 가족치유 프로그램이 있는데 부모들을 초청해서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기도 시간에 앞에 있는 간사가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중 부모님에게 상처를 받은 아이가 있으면 일어나 보세요. 그때 예수님을 믿기 전 술에 취하면 방과 장롱에 오줌을 싸던 집사님이 예상을 했습니다. 내 딸은 분명히 일어 날거다. 아니나 다를까 아주 자신있게 일어났습니다. 나는 아빠와 엄마에게 상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빠도 감수했고 엄마도 감수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그런데 그 옆에 새 가족을 맡는 사람으로 굉장히 의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새 가족이 오면 교회와 신앙생활에 대해 설명 해주던 청장년 내외였는데 그 둘은 아이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일어난 겁니다. 왜 일어났냐는 질문에 딸이, 아빠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지 얘기하기 시작하는데. 그 후 교회로 돌아온 아버지는 그 날부로 모든 직책을 사임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딸을 통해서 충격을 받았는데, 청장년 회장과 속장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딸을 사랑하는 것 이것 하나만 해야겠습니다." 그 뒤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다음날부터 새벽기도에 나오면서 딸의 입에서 아버지가 날 사랑합니다, 상처가 치유됐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사랑이 제일이다. 왜 이런 선언을 했을까요? 고린도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는 유명한 운하가 있는 곳이고 찬란한 헬레니즘 문명을 받아들였던 곳입니다. 그곳에 세워진 고린도교회는 지식에 있어 탁월했고 거기에 무역을 하고 문화가 발달되면서 사회의 주류들도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령의 은사가 굉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통역을 합니다. 이건 뒤집어질 일입니다. 정말 신령한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이 교회는 놀랍도록 큰 축복을 받는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누구도 그 교회에 가서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게바파라 하고,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파라 하고, 바울파라 합니다. 더 황당한 것은 예수님이 파를 만드신 적도 없고 바울 자신도 절대로 자신의 파를 만든 적이 없는데 교회가 평안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은 지식이 출중하여 판단이 분명한 사람들이었고, 문화적으로 교양과 소양이 분명한 시대의 주류였기 때문에 예법과 전통에도 충실한 사람들이었으며, 성령의 은사까지 받아 방언과 예언까지 하니 이건 말할 수 없는 역동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제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무슨 소립니까? 기독교 가치의 문제입니다. 교회는 투자를 해서 이득을 남기는 세상의 경영원칙으로 바라보는 곳이 아니고 가치를 바라보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가치, 기독교의 가치, 우리 감리교의 가치가 어디 있습니까?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길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치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청동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맞대면 하여 바라볼 때가 오면 그런 것들은 다 가치판단에 있어 2순위, 3순위로 물러나는 것이고 정말 위대한 가치가 뭔고 하니, 사랑인 것입니다. 더구나 이 말을 전하고 있던 바울에게는 유대교의 율법 속에 살던 유대교 신자들과 새로운 문명의 주류라 자처하는 헬레니즘 문화 속 이방인들이 다 염두에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 인이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다." 그는 유대교의 가치도 인정하고 헬레니즘의 가치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가치 앞에 서면 그것을 상대적으로 배설물처럼 여기는 가치하락이 있다고 새로운 가치를 제시했습니다. 그 복음의 가치 속에 바울이 제일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설득은 당했다는 생각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해는 지적으로 동의했을 뿐이지 마음이 아직 안 열립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냥 감동되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는 중 우연찮게 고인이 되신 강권석이라는 전 기업은행장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중 기업은행 직원도 있고 저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에 할 말이 없습니다. 2010년 12월 29일 기업은행장으로 취임한 조준희행장이 제일 먼저 한 일이 故강권석 기업은행장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쳔으로서 인재경영과 윤리경영을 내걸었던 강권석 기업은행장이 동작동의 국립묘지와 같은 성역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보니 그 분이 취임을 하고나서 2005년 1월 19일에 유성호텔에서 인터뷰 내용을 보니 알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올 때는 절대로 우산을 뺐지 않겠습니다." 은행의 생리를 잘 모르지만 여러 자료를 모아보니 돈을 버는 곳이기에 원칙에 따라서 처절하게 기업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것이 은행이었습니다. 중소기업가들에게 돈이 필요 없을 때에는 돈을 쓰라하고 돈이 정작 필요할 때는 돈을 환수할 수 없다고 기업을 외면하는 은행의 생리 앞에 힘들어 하고 있을 때 강권석 은행장이 한 말이었습니다. "비가 올 때는 절대로 우산을 뺐지 않겠습니다."
실제 은행에서 종사하시는 분들이 듣기에 마냥 옳다고만 볼 수 없는 말 일수 있지만, 무엇이 이 인터뷰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립박수를 치게 하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고 있을까요? 그것은 약자를 살려야 되겠다는 감동입니다. 여전히 이 사회가 무수히 많은 모순과 부조리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힘은 뭔고 하니 근본적인 인간애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어디든 없겠습니다만 근대 문화 안에서 사랑을 외치는 대표는 바로 기독교입니다. 서구사회의 국기 속에 담긴 박애, 평등 같은 사상의 사랑은 기독교 문화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치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동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느껴집니다. 솔직히 그것을 설교하는 제 자신이 죄인처럼 느껴집니다. 제 자신이 이 사랑을 느끼게 했을까? 이것이 진정한 가치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고 전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사회에서 교회가 감동을 줄 수 있는 가치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아닌 사랑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내부적인 이야기입니다. 소망은 자신의 열매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밖으로 흘러넘쳐 이 사회를 붙들어 가는 힘입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모래알도 시멘트가 붙여져 건물이 됩니다. 만약 기독교가 사랑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헌신한 모든 것들이 다 모래알처럼 허물어져 버릴 것입니다.
저도 깨달았습니다. 내 아이에게 믿음이나 소망을 가르치기보다 사랑을 느끼게 해줘야겠구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동의입니다. 어찌보면 지적인 동의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구원의 개입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그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바라라 했으니 날 구원해주실 줄로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 바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하며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뭐냐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동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 신학의 마지막 결론은 결국 사랑입니다. 웨슬리 목사가 위대했던 점은 루터처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지적으로 동의하는 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무시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칼빈처럼 책상에서 성경을 해석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내안에 들어와 내 삶을 바꾸시는 그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걸 깨달았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역사하심이 중요한 걸 깨달았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채워지게 되면 사랑의 열매가 맺혀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신비한 합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신이 될 수 없지만 성령의 교통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서로 통할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웨슬리 목사님에게 새로운 에너지가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걸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는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가치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사랑의 언덕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가 영국을 변화시킨 것은 그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함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바라본 것입니다. 돌을 던지고 모욕하는 사람들 앞에 사랑으로 섰을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가치를 회복하고 우리의 힘을 회복하여 사랑의 에너지로 이 한 주간 승리하십시오. 고린도 교회를 새롭게 했던 힘은 그 어떤 것도 아닌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시고 성령의 교통 안에서 가슴에 모시고 이 한 주간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꼭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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