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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하나님의 뜻(2011-0123) 주일 설교

우순(愚巡) 2011. 1. 27. 16:15

2011. 1. 23

하나님의 뜻!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 행복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주제로 말씀을 섬기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상징적인 언어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복잡하고 다양한 많은 생각들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란 생각에서부터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 정통교리에 입각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까지 우리는 아주 다양하게 하나님의 뜻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하나님의 뜻을 종교적인 가치에 직면해서 구도자의 자세라는 말로써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드리게 된 동기에는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인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으로부터 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구도자의 자세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구도자라는 말은 인해 벽면수도 하는 고승이나 중세의 수도사들을 연상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종교인으로서의 장점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신은 행복한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또한 그것은 종교인 모두에 대한 물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당신이 행복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당신이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당신은 행복한가?’ 질문을 던질 때, 구도자의 자세로 볼 때 행복하다고 대답해야 하는 데, 정말로 행복한지에 대한 자문을 해보면 선뜻 대답하기가 수월치가 않습니다.

 

   우리는 종교인입니다. 사람들은 종교인을 좁게는 성직자로 넓게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해석하는데 직업으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한 방식입니다. 우리는 종교인입니다.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종교인이 아니고 신앙을 가진 삶의 방식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당신은 종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장점이 무엇이냐?’하고 묻습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하여 거창한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이 아닌 평범한 의미로서 대답한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행복입니다.

 

  제가 전도를 하면서 기독교를 전할 때에, 그들이 저에게 되물었던 질문은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데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난감함을 느낍니다. 그것은 기독교신앙을 비난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기독교 신앙을 가졌을 때 진정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는 구도자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는 종교적 가치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 종교적 가치, 구도자의 자세로서 데살로니가전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예수를 믿은 햇수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우리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연도를 생각해보시면서 여러분이 정말 기뻐하셨는지, 항상 기뻐하셨는지 생각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가 신앙생활이나 봉사를 잘하느냐 못 하는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 깨달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 마음을 오래도록 누르고 있었던 시간속의 눌림이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나는 목사니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들이 거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을 거창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창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만, 갑자기 제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뜻은 바로 기독교인은 말할 것도 없고 비기독교인들에게 제가 종교적 가치를 느끼고 사는 사람처럼 보여지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보여지는 것은 못하더라도, 보여지는 것을 넘어 내가 그것을 품고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을 내려놓고 더 좁게 생각해보니 내 자신이 정말 항상 기뻐하고 사느냐는 강한 울림이 제 마음 속에 찾아왔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으니까 이것저것을 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기도 합니다. 미국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와서 간증을 하였을 때, 신앙적인 부분에서 은혜를 받고 회개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뜻 동의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라크를 공격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십자군 전쟁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었는지에 대한 교회사가들의 시각이 다양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의 여러 가지 거창한 일들을 내려놓고, 제 마음에 든 것은 ‘네가 교회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데 네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가치가 무엇이냐?’, ‘정말 예수 믿고 나서 네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직설적으로 ‘너는 행복한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고 하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이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3. 항상 기뻐하는 마음을 품고 삽시다

 

   오늘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것입니다. 정치적이고 사회 정의이며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의 여러 활동과 봉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거창한 것들은 잠시 내려놓고 아주 간단한 진리를 살펴본다면,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기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인생을 사시면서 주님의 전에 나와서 교회에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내 삶을 기쁘게 만들고 있다는 보여지면 좋고, 혹시 보여지지 않을지라도 그 기쁨이 품어진다면 신앙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몇 개월째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요즘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비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뜻이 거창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굉장한 헌신과 열정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내면적인 기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내가 걸어다니면서 내 입술로 내 얼굴의 눈빛으로 내 마음의 온기로 주변사람들 앞에서 내가 정말 기쁘게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이 남들에게 나타나진다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여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할지라도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 내 마음 속에 기쁨을 품고 산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명되어진 이 하나님의 항상 기뻐하는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있지 아니한다면 그 나머지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거창한 것들은 어떻게 보면 앞뒤가 안 맞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강요에 못 이겨서 억지로 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어떠한 대가를 바라보고 하는 열심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서 성실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엘리트가 되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엘리트답게 성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활동이 우리의 성실성에서 나오는 우리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아주 깔끔하게 보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 자신이 신앙적으로 불신앙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기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에는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당신이 세상을 살아온 방식처럼 성실한 것 말고, 당신이 엄청나게 거창한 사회정의와 정치와 사회적 신분에 따른 판단과 행동이 신앙적인가 하는 것을 제쳐놓고 한 인간으로서 이 질문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대단히 존귀한 존재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생명을 지금까지 유지해 오신 것은 정말 귀하신 역사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고에서 볼 때 내가 장수하던지, 육체에 가시를 가지고 장수하던지 모든 생명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내 스스로 생각할 때 육신의 기력이 쇠하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가 염치없고 짐처럼 느껴질 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직도 이 세상에 남아있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존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나를 있게 하신 존재의 목적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아주 존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존재의 목적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친구들은 대부분은 목사입니다. 목사 가운데 좋은 목사와 나쁜 목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목사임에도 다른 목사를 보았을 때, 존경을 갖게 되는 분이 있습니다. 일을 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어려운 상황, 울어야 될 상황임에도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같은 목사임에도 저는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뭐가 있구나.’ 그래서 그 목사 옆에 가서 뭔가 있는 그것을 알아보려고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언제나 만나는 공통분모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4. 기쁨과 기도와 감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원래 성경을 읽을 때, 오늘 본문의 성경말씀을 개별적인 세 개의 주제로 읽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그런데 제가 몇 개월째 이 말씀에 붙들려 있는 가운데 이 말씀이 세 가지의 개별적인 것, 즉 기뻐하는 것, 기도하는 것, 감사하는 것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의 사실로 연결되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때때로 기뻐하게 됩니다. 골라서 기뻐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기뻐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때는 굉장한 슬픔이 옵니다. 제 친구 목사들, 선후배 목사들을 바라보며, 존경하는 목사님들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그를 기쁘게 하였는가 하고 다가가보면 그들의 공통분모가 바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분들의 마음속에 담겨져 있는 기쁨을 보았습니다. 그 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지난 몇 개월간 저를 붙들고 있었던 이 말씀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가 끊어지면 기쁨이 끊어집니다. 기도가 끊어지면 기사와 표적도 끊어집니다. 기도가 끊어지면 그 순간부터 틈이 생기는데 마치 부실 공사한 담벼락에 그곳으로 물이 흘러갔다가 겨울에 얼면 동파가 되면서 담장이 무너지듯이 나의 삶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이유는 많습니다. 내가 기뻐할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보실 때 어떻습니까? 저는 매일 기뻐할 이유가 많겠습니까? 슬퍼할 이유가 많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옆에 계신 분은 어떻습니까? 보실 때에 기뻐할 이유가 많겠습니까? 슬퍼할 이유가 많겠습니까? 가늠하기 힘듭니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통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 모두는 슬퍼할만한 이유를 한 가지 이상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말 못하는 아픈 마음들과 약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 그 다음의 구절도 항상 기뻐하는 삶을 뒷받침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요 근래에 이 범사라는 말이 아주 강하게 와 닿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잔잔하게 저의 마음속에 범사라고 하는 말이 오는데 모든 일에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항상 기뻐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게는 세 개가 나누어진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사건으로 와 닿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사람,기도자의 자세,구도자의 자세,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신앙의 기본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가 되고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는 감사가 되는데, 어떤 일에는 짜증이 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굉장한 고마움이 드는데,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신경질이 나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이 달려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가 설교할 자신이 들지 않을 때, 강단에 설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위로를 주었던 ‘피터 뵐러’라는 모라비안 교도의 말을 힘입어서 오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네가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얻기 위해서 설교하고, 믿음을 얻었으면 믿음을 간증하기 위하여 설교하고, 설교할 자격이 없으면 설교할 자격을 위하여 설교하고, 설교할 자격이 생기면 설교할 자격을 간증하기 위해서 설교하라.’고 했을 때 웨슬리 목사가 다시 위로를 얻고 강단에 섰던 것입니다.

 

5.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저도 오늘 동일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제 마음에 한 가지 탈출구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 이 말씀이 이 혹한기의 추위에 제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바람처럼 들려왔습니다. 그전까지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세 개로 나열되어 있고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주후 50여년경에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열심당원들에게 박해를 받아서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으로 인하여 직장을 잃고 많은 고난을 당하여 생계 수단을 잃어버리는 엄청난 일이 벌어질 때였습니다. 그 때에 바울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일지라도 절대로 기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들을 따돌리고 핍박하고 고난을 줄지라도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고 그것조차도 감사하면 기쁨이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까? 바로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이 말씀을 드리고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 한 주간 성령을 소멸치 마시고 성령님에게 도움을 구하십시오. 아주 솔직하게 성령님께 내려 놓으십시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말씀에 위로를 얻었습니다. “성령님, 저는 할 수 없어요. 저는 범사에 감사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성령님 저를 도우셔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 때 제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여러분, 이 한 주간 성령님과 함께 범사에 감사하시고 쉬지 말고 기도하시면서 항상 기뻐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