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011-0227) 주일 설교

우순(愚巡) 2011. 3. 3. 22:4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 마음속에 가장 힘든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 우리 앞에 왔을 때입니다. 마틴 하이데거는 ‘이 세상 사람들이 부인할 수 없는 공리가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고 하는 진리다. 그런데 그러한 공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한 가지 공통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은 자신과는 아직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언젠가는 죽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간격 속에서 인간이 실존적인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죽음이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되면 당황하게 되고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그리고 그것으로 힘들어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닥쳤을 때에 우리가 겪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이 선포를 들으면서 우리 자신들이 아주 분명하게 생각해야 할 신앙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1.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

   

   요한은 일곱이라는 숫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곱교회를 이야기하고 일곱나팔, 일곱천사를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외에도 일곱집사의 이야기나 칠병이어의 표적에 나오는 일곱이라는 숫자는 이방인을 구원하는 숫자로 초대교회가 상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일곱을 좋아한 요한의 특징을 따라서 일곱 개의 표적과 일곱 개의 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 이다.’라는 문장이 일곱 개로 크게 구성이 되어 있고, 그 일곱 개의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일곱 개의 표적이 일곱 개의 선언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곱 개의 선언 가운데 한 가지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이 선언이 가지고 있었던 말씀은 당시 예수님 곁에 몰려왔던 많은 사람 가운데서 유대인들 두 파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는 맘에 들지 않지만 부활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은 구약 성경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며 부정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던 이방인들, 사마리아인들은 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당시의 헬레니즘 문명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또 다른 의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이 선언이 가지고 온 이 울림은 지축을 흔들만한 울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문제 때문에 모든 인간이 힘들어 하는데 그 죽음을 해결할 수 있다는 대 선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라고 정의하시고 자신을 생명이라고 정의하시면서 죽음이라고 하는 이 인간의 엄청난 고통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변질 되면 계급화되고, 경직화되고, 제도를 고수하고자 하는데 그 비용을 부담하게 되고, 다음에 의례히 따라오는 것이 성직자 수의 증가와 건물의 광대화가 따르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는 권력을 향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직자 수의 증가, 건물의 광대화, 교회의 계급화, 그리고 권력의 향유라고 하는 종교 말기 현상이 이 기독교 내에도 스며들 때마다 언제나 교회는 진정한 기독교의 가치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껍데기만을 붙들고 교회가 허울 좋은 회칠한 무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천년 역사동안 이것은 반복되면서 언제나 순수한 본질이 꽃을 피우다가 그것이 지면 다시 교회는 경직화 되고 계급화 되고 건물과 성직자 수와 권력에 관심을 갖게 되다가 이것에 심판이 와서 무너지게 되면 다시 순수의 꽃이 피어나서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게 되고 다시 무너지는 순환의 고리를 이어왔습니다.

 

    저는 지금이 어느 시기인지를 분석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잘못하면 너무 우울하고 잘못하면 저의 짧은 단견이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을만한 소지를 남길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보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볼 때 우리가 지금은 어느 때인지 즉, 순수의 꽃을 피우고 있는 초기인지 아니면 가장 절정에 이르러서 기독교가 만개한 때인지 아니면 기독교가 이 사회 속에서 몰락해 가고 있는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와 같은 마지막 때를 가고 있는지 그러한 분석은 뒤로 하고, 또 공통적으로 우리 교회가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가치 -부활과 생명 -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2.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 

 

    오늘 기독교는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를 잊어버린 채,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도 잊어버리고, 성령님의 역사도 잊어버리고, 오직 한 가지 기독교라고 하는 허울 좋은 껍데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예수님의 선언 속에 이어지고 있는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미국의 유명한 신학교인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이 부활에 관한 또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신비스러운 일들에 대해서 인간적인 시각으로 부정을 하게 되었을 때에, 거기에서 배운 학생들이 나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신앙을 가지고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거기에 반발한 맥 체인 같은 신학자들이 나가서 웨스턴민스터 신학교를 세우면서 필라델피아에서 예수의 복음의 순수성을 회복하자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어 보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짧은 시간에 어설픈 논리로 신학적인 논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제 마음 속에 와 닿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고 있는 생생한 체험과 그리고 신앙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선언이, 그리고 예수님의 선언에 따라나온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는 질문이 오늘 우리의 가치요, 우리의 자산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하는 이 질문 앞에 우리가 다 ‘아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과학적인 사고나 이성적인 판단이나 또는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오늘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사랑이 없이도 가정을 유지하는 부모님처럼 사실은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어떤 전통을 위해서,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안일을 위해서 또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여전히 기독교 신자로 남아있을 수는 있습니다. 또 자신이 받고 있는 수입의 어느 정도를 사회에 기부하는 셈으로 교회에 헌금하여 자기의 멤버쉽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또 더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더 심한 경우에는 교회에서 일정한 직분도 받아서 교회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죽음이 찾아왔을 때에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아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습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진리를 포기하게 되고,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게 됩니다.

 

 

    미국의 콜로라도 덴버에 있었던 고등학교에서 1999년도에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총을 든 범죄자가 캐쉬 버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느냐?’ 다른 사람들이 주저하고 있을 때에, 캐쉬 버넬은 ‘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녀는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용기 있는 신앙고백을 본받아서 다른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이 신앙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캐쉬 버넬을 기념하는 기도회가 세계로 번져 나가서 지금도 국기게양대 밑에서 기도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3. 부활신앙은 생명의 찬가

 

    부활신앙은 생명의 찬가입니다. 부활신앙은 생명의 승리를 선포하는 거룩한 찬가입니다. 부활신앙은 죽음을 이깁니다. 부활신앙은 죽음을 극복하게 합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죽음이 우리를 힘들게 할 지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4:7~12)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사람들은 변질하게 되고 죽음 앞에 서게 되면, 그 밀려오는 아픔과 상처와 슬픔의 쓰나미 속에서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 부활 신앙이 우리에게 있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예수가 선언했던 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는 이 선언이 단순한 예수만의 독백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앞에 이 죽음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큰 위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빠르고 늦은 차이 뿐입니다. 여러분, 일년은 십년의 십분의 일입니다. 백년의 일년은 백분의 일입니다. 천년의 일년은 천분의 일입니다. 그리고 영겁의 일년은 제로와 다를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 시간들이 우리가 볼 때에는 길고 짧은 것 같지만, 영생하는 시간에 비유하여 보면 갓 난 아기나 백세가 되신 연로하신 장로님이나 실상은 찰나를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 찰나를 살고 있는 이 때에 이 찰나의 시간을 잠시 끊어버리는 이 죽음 앞에서 오늘 우리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영생의 시간에 들어갈 수 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치는 기독교인의 축복입니다. 기독교의 이 가치가 축복인 이유는 우리의 시간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이 우리의 삶 가운데 엄습하여 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생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요한은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은 자는 이미 죽음 가운데서 생명 가운데로 옮겨졌다고 했습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이것을 믿습니까? 여러분 정말 예수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우리가 그를 따라서 부활할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썩을 것을 심고 썩지 아니할 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고전 15:42) 우리는 찰나의 시간에 씨를 심었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시간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시간 어떻게 결단해야 합니까? 이 예수님의 선포와 예수님의 질문 속에는 우리의 결단을 요청하시는 예수님의 요청이 있습니다.예수님은 무엇을 요청하고 있습니까? 죽음 앞에 담대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죽음 앞에서 이 삼일절을 기념할 때마다 우리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일절이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흔들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아니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바로 죽음에 대한 이해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하면, 만약 우리가 죽음 앞에서 낙심한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릴 것이고, 우리 자신들이 우리의 신앙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그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놓인다할지라도 바울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그 어떤 피조물일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느니라.”(롬8:35~3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런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롬 7:24~25)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시고 여러분 앞에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어려운 환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92주년 삼일절 이 기념식은 우리에게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고 과거를 팔아먹는 시간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에 닥쳐오는 우리의 시간 속에서 우리 자신이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축복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근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우리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 예수님의 말씀을 이어받아서 바울이 말합니다. “주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느니라.”(고전 15:20) 그리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가치입니다.

 

4. 부활신앙은 가장 순수한 믿음

 

    기독교의 가치는 건물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비대해진 권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가장 순수했던 시간은 그러한 권력을 누리던 시간이 아니요, 또 큰 건물이 있던 시간이 아닙니다. 교회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복지와 제도가 있던 시대가 아닙니다. 교회가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고,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던 때는 바로 건물도 초라하고 나눠가질 계급도 존재하지 않고, 교회에 가도 얻어먹을 수 있는 빵 한 조각이 없지만, 주님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주님이 선포하신 이 부활 신앙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 붙들고 내가 죽을지라도 살아날 것을 믿을 때에 환난이 올지라도 교회는 이겼습니다. 핍박이 와도 교회는 이겼습니다. 박해가 와도 교회는 이겼습니다. 그 순간에 교회는 가장 순수했고, 교회는 가장 아름다웠고,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하는 것을 빌리자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역사(히11:38)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끝으로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 앞에 ‘아멘’하시고 우리가 결단하게 될 때에 중요한 메시지 한 가지는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봄이 되었습니다. 싹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이번 겨울 얼마나 추웠던지 환경의 재앙이 온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의 온 나라가 추위에 떨었습니다. 또한 전 세계가 기상이변으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찾아왔고 돋아날 것 같지 않던 싹들은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마음에 여유를 가지시면, 들에 나가 보십시오. 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안되면 여러분의 아파트와 여러분의 집 앞에 있는 작은 개나리 하나라도 유심히 보십시오. 꽃이 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속에 주님께서 심어 놓으신 생명이 있음을 다시 확인하셔야 합니다. 아니 확신하셔야 합니다. 아니, 확실하게 이 생명을 누리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죽어 없어지고 썩어 사라질 것에 연연하지 마시고 이 생명을 붙드시고 이 생명을 누리시고 이 생명과 함께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겨울이 되면 잎이 떨어집니다. 꽃이 떨어집니다. 열매가 떨어집니다. 가지가 앙상해집니다. 심지어 어떠한 것들은 이 땅에 자취를 감추는 듯 보입니다. 그래도 살아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 덧없는 것들이 낙엽처럼 떨어질지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마른 가치처럼 내 인생이 조금 마른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 마십시오. 우리 속에 생명이 살아있습니다. 이 생명이 영생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반드시 부활할 것입니다. 이 생명이 살아서 역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죽은 자와 살지 말고 산자와 함께 생명을 누리시면서 부활 신앙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믿음을 가지시고 오늘 강하고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부활의 믿음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