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인 성서관에 대한 소고:
이 글은 성서관에 혼란을 겪고 있는 지성적인 평신도들에게 "신학적 사유에 근거한 그리스도교적 성서관"을 갖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본 소고를 통해 구약과 신약에 대한 관계성및 유대교와 공유하고 있는 현재의 구약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신학적으로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현재,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록한 구절이라고는 단 한 구절도 없는 구약성경을 현재 유대교와 같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서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포괄적인 언명에 휩싸여 구약에 관한 신학적 한계선을 분명하게 긋지 못하면 아류 유대교를 자청하는 모양새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원래, 유대교인을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직시하므로서 "그리스도인이 단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은 구약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 사고를 통해 그에 기반한 성서관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이번의 소고와 다음번의 소고를 통해 그리스도교적 성서관을 신학적 차원에서 분명히 확정짓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구약이 예고한 메시야가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확신하는 것은 매우 건실하고 굳건한 성서관에 따른 건전하고도 좋은 믿음에서 나오는 고백일 것 같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신학적 성서관의 터 위에서 구약과 신약의 한계선에 관한 개념이 정리되고 메시야에 대한 시각에 성서적, 신앙적으로 분명한 선이 그어지지 않으면 그런 확신은 오히려 매우 부실한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만을 드러낼 뿐이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예고된 메시야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시각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 입지와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신앙적 위치를 유대교의 아류로 추락시키는 모양새를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문서로 남긴 영감받은 성서 저자들에 대하여 경이로움을 갖고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사람이 기록한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 21세기 현대 삼위일체론자의 위치에서 보는 구약과 신약, 거기에 더하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와 아류 그리스도교(혹은 그리스도교의 이단)를 구분해 내는 신학적 구별선을 그을 줄 모르면 정체성 불분명한 유사 그리스도교인에 머물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성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입장을 건실하게 가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입장에 든든히 서서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구약과 신약을 통찰하므로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단단하게 고양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 구약은 유대인을 위해 유대인에게 영감되었던 유대인을 위한 말씀
하나님께 영감받아 구약을 기록한 유대인 구약편저자들은 나중 시대에 태어나게 될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하여 구약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대인 저자들을 들어 쓰실 때 나중 시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서도 말씀을 주신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신학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믿음에 따른 주장일 뿐이다. 그런 분별없는 주장을 하면 그리스도인 신약편저자들이 신약을 기록할 때에 하나님은 나중 시대의 재림주교인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이 되도록 영감을 주셨다면서 그 말씀이 곧 재림주 아무개를 가리킨다고 외쳐대는 재림주교인들의 논리에 감정적인 대응만 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약은 처음부터 유대인에게 영감되었고 유대인에 의해 기록된 유대인을 위한 유대교의 경전이라는 변할 수 없는 이 분명한 사실을 명확하게 직시한 후, 그런 성격을 갖는 구약이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경전일 수 있는 것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럴 때 신약이 재림주 아무개를 예고했다는 재림주교인들의 주장에 맞서서 그리스도교의 재림주관을 분명히 갖고 신학적인 논리에 근거하여 쐐기를 박을 수 있게 된다.
2. 구약을 공유하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입장 차이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 중에는 그리스도교인이 계시받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단 한 구절도 없다. 그리스도교인은 현재 유대교인들의 구약을 통째로 그리스도교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 스스로를 아류 유대교인으로 전락시키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 기록한 말씀이라고는 단 한 구절도 없는 구약을 통해 그리스도교인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것은 유대교인과 같은 입장에서 구약의 말씀을 받겠다는 의미가 아님이 분명하다.
바로 여기서, 유대인 구약편저자들이 영감받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교인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기 위한 신학적 작업으로서의 필터링 과정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 필터링 과정은 구약의 말씀을 그리스도교인을 위한 영감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연적인 신학적 작업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현재도 여전히 유대인의 경전인 구약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그리스도인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하면 그것은 그 즉시 아류 유대교인임을 자청하는 꼴이 될 뿐이다.
3. 구약을 공유하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성 문제
그러면, 같은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사용하는 두 종교의 관계는 무엇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비록 구약을 공유하고 있을지라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다른 타종교이다. 어째서 그런가? 그 이유 역시 간단하다. 신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삼위일체론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유대교는 그리스도교를 향해 세 하나님을 믿는 다신교라고 말한다. 이렇게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와 신관이 다르므로 구원관도 같을 수 없다.
이처럼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와 신관이 다르고 구원관이 다른 타종교이므로 메시야관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구약편저자들이 영감받아 기록했던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성서의 저자들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이라는 이유를 들어 구약의 본문을 액면 그대로 그리스도교인을 위한 말씀으로 보면 안된다. 왜냐하면 신관도 다르고 메시야관도 다르게 나타나는 유대인을 위한 구약의 본문을 그리스도교인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학적 작업으로서의 필터링 과정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신학적 필터링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근거로 구약의 말씀을 필터링한단 말인가? 그것은 혹, 자의적으로 자기 입맛에 따라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하므로 영감있는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번의 글에서 기술한다.
4. 구약의 메시야, 신약의 그리스도, 그리고 재림주
구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받는 유대교는 구약에 예고된 메시야가 아직 오지 않았다며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유대교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이미 왔다.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유대교는 어이없어 한다. 그래서 유대교 당국은 그런 주장을 하는 유대교내 그리스도파인들을 유대교에서 일찌감치 내쫓아버렸다. 이것이 약 2000년 전인 1세기 말엽에 일어난 일이다(요9:22참조).
*여기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드러난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 메시야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구약에서 예고된 메시야가 왔다’고 주장하면 유대교의 이단이다. ‘구약에서 예고된 그 메시야가 나사렛 예수’라고 하면 그것은 유대교에서 축출되어 쫓겨난 그리스도교이다. 유대교에서 쫓겨난 그리스도교는 나사렛 예수의 말씀과 사역, 그리고 구약이 예고한 메시야가 바로 신약의 예수임을 고백하는 신약편저자들의 신앙고백을 기록한 신약을 추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정통 그리스도교와 재림주교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드러난다.
정통 그리스도교는 “신약이 예고하는 재림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임을 자청하면서 ‘신약에서 예고된 재림주가 왔다’고 하면 아류 그리스도교이다. 따라서 “신약에서 예고된 재림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할 때 정통이다. 그런데도 ‘신약에서 예고한 재림주가 왔다’며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면 이단이다. 정죄의 수순을 거쳐 그리스도교에서 쫓겨나게 된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에서 쫓겨난 여러 재림주교 계열의 집단들은 구약과 신약에 그들이 주장하는 제3의 경전을 추가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여 도표화시키면 아래와 같다.
ㅇ 유대교 -구약편저자들이 예고한 메시야는 아직 오지 않았다. -구약의 말씀에 다른 말씀을 더하면 안된다(신4:2; 12:32).
ㅇ 그리스도교 -구약에서 예고된 메시야는 왔다.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것을 말하는 경전이 신약이다(이것은 유대교에서 볼 때 구약 이외에 다른 말씀을 더 한 것이 된다). * 참고로, 유대교에서는 구약 이외의 다른 말씀을 추가하지 못하도록 1세기말경(90 년경) 얌니야 회의에서 지금의 구약 39권을 정경으로 결정했다.
-신약이 예고한 재림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신약의 말씀에 다른 것을 가감하면 안된다(계22:18~19). * 참고로, 그리스도교는 4세기말(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신약 이외에 다른 것이 추가되지 못하도록 현재의 27권을 정경으로 결정했다.
ㅇ 재림주교 -신약편저자들이 예고한 재림주가 이미 왔다. 그가 바로 아무개이다. 그것을 말하는 책이 모모무슨 경(經)이다(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볼 때 구약, 신약 이외 에 다른 것을 가감한 것이 된다).
*이 때 정통, 비정통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된다.
유대교가 정통이라고 할 때 그것은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유대교의 경계선 밖으로 쫓아냈다는 의미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가 정통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재림주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리스도교의 경계선 밖으로 내쫓아버렸다는 뜻을 갖는다.
이렇기 때문에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영감받은 성서편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성경이라는 언명에 잠겨 그리스도교의 입지를 선명하게 확립하지 못하면 그리스도교는 아류 유대교로 전락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아류 그리스도교에 대응할 적절한 신학적 명분을 찾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말하길, ‘구약은 유대교뿐만이 아니라 나중 시대의 그리스도교를 위해서도 계시된 말씀’이라고 하면서 ‘신약은 나중 재림주교인들을 위해서 계시되지 않았다’라고 주장할 때에 그 신학적 논거는 무엇이냐는 것에서 논리적 구멍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분명히 구별하는 신학적 성서관을 확립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유사종교, 근접종교와의 차이를 분명하게 부각시키는 선을 긋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영감있는 말씀”이라는 포괄적 언명에 휩쓸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을 향해 주시는 유대인을 위한 말씀을 받는 모양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리스도인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단 한 줄도 없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을 그리스도교의 신약과 동등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무엇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한 구약을 통째로 받아들여 그것을 그리스도인을 위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인가? 그것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면면히 흐르면서 구약과 신약을 잇는 기조, 바로 그 기조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한 필터링의 문제와 함께 다음번의 글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