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출5:1~3)

우순(愚巡) 2013. 12. 29. 08:38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출5:1~3) 1  그 후에 모세아론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송년주일입니다.

2013년도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예배하러 오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한 해 예배하러 오시는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2013년도 마지막 주일에 예배하면서, 담임목사로서 교회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인천, 수원, 남양주, 그리고 의정부 등  먼 거리에서 예배하러 오십니다. 제가 동서남북을 그려보니 우리 성도님들이 먼거리에 많이 사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먼거리에서 예배하러 오시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성도님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다행히 전철이나 버스를 한 번만 타고 오시면 됩니다만,  많은 분들은 여러번 바꿔 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안산에서 오시면서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시기도 하고, 용인 쪽에서 오시면서 버스를 두 세 번 씩 갈아타시기도 합니다.  인천에서 두 번 세 번 갈아타고 오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또 같은 서울이라도 의정부 쪽에서 오시는 성도님들,  예를 들면 강북구,도봉구, 노원구 쪽에서 오시는 분들은 아주 먼거리에서 오십니다. 두어시간씩 걸립니다.

 

주일에 강단에 서면 먼거리에서 예배하러 오시는 성도님들을 바라보면서 아주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반갑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하고 예배를 잘 준비해야겠다는 무거운 책임감도  느낍니다.  지난 일 년간 그 먼거리에서 주일마다 예배하러 오신 것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역사부담비용]

 

 

요즘 동대문 교회 일로 감리교회 내에 논쟁이 많습니다. 요지는 존치와 이전입니다. 뜻있는 분들은 역사를 지키기 위하여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존치), 교인들 다수는 95% 이상이 교회 성장을 위하여 수원 광교 신도시로 이전을 하자는 것입니다(이전). 존치를 주장하는 측은 명분이 강해서 외부 후원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을 주장하는 측은  현실성이 강해서 실제 교회를 다니시는 동대문 교회 성도들이 아주 많습니다. 

 

저는 어느 편을 들기 보다 오죽하면 이전을 생각했을까 하는 공감을 느낍니다. 저는 역사를 지키기 위하여 그 자리에 동대문 교회를 유지하자는 존치측의 입장도 존중하지만,  오죽하면 수원 광교까지 이사를 가서라도 큰 교회를 해보자고 할 까 하는 동대문 교회 성도들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우리 교회 정문에는 국가보훈처가 독립기념관을 통해 우리 교회 건물을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저와 우리 상동교회를 한 껏 칭찬하시면서,  서철 목사와 상동교회는 역사의식이 있는 좋은 교회이고 좋은 목사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애기를 듣고 나서  그 목사님에게 진지하게  "우리 상동교회가 126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오기까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아시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우리 상동교회나 동대문교회나 도심지의 오랜 교회들은 역사를 지키는 비용을 아주 많이 지불해야 합니다. 도심 공동화로 인한 불편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부담비용 가운데는 주차비용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차장 시설이 아주 불편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도표를 가지고 우리 교인들의 주차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직접 가 본 것은, 남대문 교회 뒤편 힐튼 호텔 입구와 남산 순환도로와 길 건너입니다. 주일에는 이 세 곳은 무료 주차가 가능한 곳입니다. 좀 멀지만  태평로의 국제호텔 앞 길도 있습니다. 어떻게 셔틀 버스라도 운행해서 성도님들의 주차문제를 도울 수 있을 까 생각했습니다. 인근 상가들이 주일만이라도 주차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면 타협이라도 해 볼 수 있는데 그러지를 않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이 성전에 예배하러 오시는 것을 보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난 한 해 먼거리와 주차난에도 불구하고 예배하러 오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바라기는 조금 불편할지라도 시험에 들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새 가족들을 생각해서 다른 곳에 주차하시고 예배하러 오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역사를 지킨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 상동교회를 지키시기 위하여 또 예배하기 위하여 매 주일 교회에 오시는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기]

 

 

오늘 제가 준비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입니다.  올 한 해 참 많은 설교를 들으셨지요? 주일만 해도 오십 번이 넘고,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까지 하면 수 백번이 되기도 합니다.  새벽기도회 까지 합하면 훨신 더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셨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또 기도하시면서 응답을 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말씀을 들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저는 올 한 해 동안 <진정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믿음의 진정성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깊은 사모함을 가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니까  존경하는 눈 빛으로 <와우> 하며 너무 신비스럽게 생각합니다.  또 반대로 어떤 분들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대? ㅋㅋ 어떻게 들었을까?"  수근대기도 합니다.

 

그런데 진지하게 생각해 볼까요?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정상인 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 것이 정상인가요? 

 

 너무 신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을 신화화 해서도 안되지만, 반대로 너무 비아냥 거려서도 안되는 것 아닌가요? 목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그런 것이 아닌가요?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를 나눕시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요 겨룩한 성도들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성도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나요? 거룩한 성도라고 할 수 있나요?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것을 다 때려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한 가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서 여기에 앉아 있다고 하면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의 믿음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들려지지 않는데 여기 앉아 있다만 간다?  그러면 예배에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사느냐 못사느냐 것은 두 번째 주제입니다. 첫 번 째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예배에 실패한 것이요 신앙생활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24시간 교제하면서 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려 하시고 우리와 깊은 교제를 나누시려고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서 이 자리에 와서 예배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교회에 등록해서 한 2년 돠면 집사 직분도 주고, 집사된 지 5년이 지나면 권사 직분도 줄 수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다시 5년이 지나면 장로도 될 수 있습니다. 선거인단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인기몰이를 할 수도 있고요, 심한 경우에는 어떤 교회처럼 선물공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주 심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든지 어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들과 이야기 하고 싶어 하십니다.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성경을 묵상해보십시다.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눅15장)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린 적이 없어요.

 

"불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마28:20)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 거할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며 주의 손으로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139:9)

 

야곱이 루스라는 척박한 땅에서 잠을 잘 때 깜짝놀랐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6)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을 돌보시고, 우리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계시며,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을 때, 하나님이 가시떨기 가운데 타는 불로 나타나심을 체험합니다. (출3:1~12)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인도하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뿐이요,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을 뿐입니다.

 

곤충학자의 이야기입니다.

곤충학자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왔는데 문 앞에서 개미 때들이 지나가더랍니다. 곤충학자는 개미 떼들에게 말합니다.

"애들아 길 좀 비켜라. 내가 너희를 정말 사랑한다. 너희가 안 비키면 내가 밟을 것 같다."

그래도 개미 떼는 듣지 못합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그 때 곤충학자에게 그 순간 깨달음이 왔답니다. 하나님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애타시면서 말씀하시는구나.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못 알아들으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깊은 사랑과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 우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좀 진지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대하여 냉소적으로 희화화 하거나 비아냥 거리지 마시고 진지해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려지시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말씀대로 살려는 용기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모세는 애굽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 앞에 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용기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모세는 용기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섰습니다.

 

처음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바로 앞에 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말을 잘 못한다고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의 표적, 나병의 표적, 나일강물의 표적을 보여주시면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을 붙여주시면서 모세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 앞에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용기를 주시사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내 백성이 더 이상은 태양신을 섬기면서 살 수 없으니 내 백성을 보내라!

 

제가 올 한 해 깊이 생각한 단어는 <진정성>이었습니다. 믿음의 진정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제게 주신 마음 한 가지는 용기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바로 앞에 용기를 가지고 섰습니다. 바로 앞에 선다는 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앞에 서는 순간 체포되어 즉결처분을 당할 수도 있고 사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앞에 선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을 자리에 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담대하게 섰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섰습니다.

 

성도에겐 믿음의 진정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말씀대로, 말씀에 의지하여, 살겠다는 믿음의 진정성이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합니다. 모세는 용기를 가지고 바로에게 말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애굽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백성, 자신의 자녀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에 새로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는 말합니다. 여화와가 누구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을 내 보낼 수 있느냐? 여호와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 바로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모세와 하나님을 모르는 바로가 마주 서 있습니다. 긴장감을 가지고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모세는 아주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알기에 바로에게 정면으로 맛섭니다. <우리를 가도록 허락하소서>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그 대척점에서 결단을 요청받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VS <내가 보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을 모르는 바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내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내 보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자]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가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우리를 이틀 후에 살리시며 제 삼일에 일으키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자 . 하나님을 힘써 알자."(호6:3)

 

 지금 삶이 힘들어 어려움에 직면하신 성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장벽에 막혀서 멈칫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자들은 일어납니다. 살아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는 여호와를 아는 것에 대하여 중요한 메세지를 전합니다.

 

<호6:1~3>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알면 <광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광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녀도 하나님을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겉으로만 알고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안다면 우리는 떠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안다면 우리가 떠나야 할 자리를 박차고 떠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곳이 광야일지라도,  죄악의 삶을 떠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자들에게 홍해가 갈라지고 마라의 쓴 물이 생수가 됩니다. 이 마지막 주일에 이제 애굽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가시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두 사람이 대척점에 서서 긴장감을 나타냅니다. 죽을 자리임에도 용기를 가지고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하는 모세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곧 닥쳐 올 재앙이 엄습함에도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바로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모세와 하나님을 모르는 바로의 대결입니다. 모세는 죽음을 각오하고, 죽을 자리에 스스로 들어가서,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하나님을 아는 성도들이 용기를 가집니다. 믿음의 진정성이 있습니다.

 

 

 

[체험신앙]

 

이제 마지막으로 <체험신앙>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모세의 이런 용기, 이런 신앙적인 확고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체험신앙>입니다. 모세의 신앙은 체험신앙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정면으로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체험신앙> 때문입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강력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체험은 우리의 신앙을 공고하게 합니다.  가장 좋은 신앙은 성경의 근본 위에서 체험적인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모세는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을 내가 체험했습니다. 호렙산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신비한 체험을 통하여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체험했기 때문에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출5:3) 

 

출애굽기 3장과 4장과 5장에 보면 하나님이 계속해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지팡이를 던져 보아라 그리하면 뱀이 되리라. 네 손을 품에 넣어 보아라 나병이 되었다가 깨끗해질 것이다. 나일강 물을 떠다가 쏟아 보아라 피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표적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분명하게 체험했습니다.

 

 

 

 

 

 

신앙은 말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험입니다. 성경에 기반하여 하나님을 체험할 때 우리는 분명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감리교회 신앙의 가장 좋은 근간은 성경과 체험입니다.

 

 

체험을 얻기 위하여 삶을 단순화 시키십시오! 감리교 목사인 데이비드 왓슨은 '제자도'에서 단순함의 가치를 말합니다. "당신이 진정성을 가지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삶을 단순화 하십시오!"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고, 진정한 믿음을 얻기 원한다면 단순함이 필요합니다.  삶을 단순화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단순화하여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립시다.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용기를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하여 체험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심을 체험하기를 사모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용기를 가지고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2013년도를 잘 마무리 하시고 2014년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말씀을 들은 대로 사시는 용기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아시고, 우리 앞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만나는 체험신앙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