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묵상원

<시84:5> 주님께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강론(講論)/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강론

믿음의 진보 (빌립보서1:22~30) 2014-0112 주일

우순(愚巡) 2014. 1. 11. 22:32

 

믿음의 진보

 

 

<빌립보서1:22~30>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새로운 출발]

 

새 해 둘 째 주일입니다.

새로운 새 출발을 잘 하고 계신지요?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 전덕기와 함께 새출발!> 을 내걸고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 전덕기와 새출발>을 하자고 할 때는 몇 가지 전제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고백>입니다.  전덕기 목사님도 추모하지만 전덕기 목사님을 세우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추모사업을 섬기려고 합니다.

 

둘째는, 전덕기 목사님 개인도 존경하고 추모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전덕기 목사님 시대의 상동교회의 시대적 소명을 깊이 돌아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단순히 박물관적 추억의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전덕기 목사님과 상동교회의 <믿음과 섬김>을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승화시키려고 합니다.

 

성도님들은 어떻게 새로운 출발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간의 매듭>을 주신 것은 <새로운 출발>을 향한 은총입니다. 새 해, 새 달, 새 날을 주셔서 <시간>을 매듭 짓게 하심으로 중간 중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새로움을 향한 여정의 출발은 <새로운 세상의 창조>였고, 목적지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창세기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통하여 빛의 세상을 만든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새로움> 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영원한 새로움, 완전한 새로움을 바라보는 <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피조물>을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성취하는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며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다시 복음 앞에]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피조물>은 언제나  <복음 앞에> 서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복음에 대하여 선포합니다. 

 

<롬1:16~17>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성도의 <새로운 출발>은 언제나 이 복음 앞에서 시작합니다. 복음 앞에서 우리는 진정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자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습니다. 복음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복음 앞에> 서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고, 복음의 전도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성을 가지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출발은 <다시 복음 앞에> 서는 것입니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하나님과의 화해> 입니다. 복음 안에는 의가 있습니다. 로마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롬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인을 용서하시고 부여하신 <의롭다 하심의 의>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용서하신 의> <화해하신 의>입니다. 그레서 복음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빌립보서는 성도들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합니다.

 

<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생활하라>는 헬라어의 뜻은 <시민노릇>을 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하늘나라의 시민노릇을 하며 삽니다.

 

성경은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빌1:27~28>  27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런데 우리의 가장 큰 갈등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지식과 복음의 전도 사이에서 복음의 누림을 건너 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알고 복음을 믿기에 복음을 전하자는복음전도에 대하여 머리로는 아멘 합니다.  가슴으로도 아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제 친구 목사님이 교회에 부임하시자마자 장로님들에게 노방전도를 가시자고 하니까 당황하시면서 전도하러 가시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이런거 안하면 안되나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도 잘 지키고 헌금도 낼 태니 전도하러 가자고만 하지 마세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실 그게 갈등이지요? 

 

왜 그럴까요? 복음의 누림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과 복음 전도에 대한 의무만 배웠지 복음 안에서 복음을 누리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화해의 경험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나도 예수 믿는 것이 즐겁지 아니한 데 남보고 이 고통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복음 앞에> 서려고 하는 것은 복음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라-

 

예수님만이 길이십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시는 길입니다.

 

 

[믿음의 진보]

 

<빌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오늘 나눌 마지막 말씀은 바로 이 <복음의 누림>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진보>입니다. 성도는 믿음의 진보가 있아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나야 합니다. 올 한 해 믿음의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앞으로 믿음이 성장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복음을 알고, 복음을 믿고, 복음의 능력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진보입니다.

 

 

<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런데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 복음을 누리는 것은 결국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한 마음으로 한 뜻을 가지고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복음의 누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믿음의 진보는 믿음과 함께 고난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이 성장할 수록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습니다. 믿음의 진보를 이룬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