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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講論)/부흥회와 세미나 강론

풍족한 부스러기 떡 <마태복음 15:21-28>

우순(愚巡) 2007. 3. 9. 09:28

설교제목: 풍족한 부스러기 떡

 

성경본문: 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막 7:24-30)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오늘은 풍족한 부스러기 떡에 대해서 같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표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기적과 표적은 같은 모양새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신학에서는 기적이라는 말보다는 표적이라는 말 “세메이온(σημειον)”을 쓰게 됩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다, 참 놀랍다.” 이렇게 끝나버리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 오병이어라는 작은 것을 통해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었다는 것이 도대체 하나님의 섭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세메이온”이라고 하는 표적이라는 말로 설명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섯 개의 떡 덩어리와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였는데, 남았습니다. 그래서 모아봤더니 그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그런데 14장을 지나고 15장에 들어서게 되면, 29~39절 사이에 일곱 개의 떡과, 두어 마리쯤(few) 되는 생선을 가지고 사람들을 먹이는 또 하나의 표적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혹시 칠병이어를 주제로 한 설교를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제 기억으로는 제가 들었던 주일학교 설교에서부터, 제가 읽었던 설교집까지 오병이어에 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어서 달달 외우고 있었지만, 칠병이어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득중 교수님이 쓰신 “복음서 신학”을 보면, 이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는 가치에 의해서 등가성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오병이어는 중요하고, 칠병이어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유대인을 위한 이야기이고, 우리들을 위한 이야기는 칠병이어의 표적이기 때문에,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칠병이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옳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에 남은 떡을 담았다.”라는 말 속에 등장하고 있는 다섯과 열둘은 전형적인 유대인의 숫자입니다. 먼저, ‘다섯’은 모세오경에서부터 시작된 숫자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다섯 권의 책은 토라라고 하는 율법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열둘’은 12지파의 숫자입니다. 또 열두 바구니라고 하는 이 말은, 우리가 읽을 때는 단순히 그릇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화법을 따지면, 일종의 히브리 사투리와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마태복음 14장을 지나서 15장 32~39절에 나오는 칠병이어의 이야기를 보면, 떡의 숫자가 다섯에서 일곱으로 바뀌어 집니다. 우선 신약성경에서 일곱이 가지고 있는 수의 의미는 하늘과 땅의 수 3과 4를 더해서 이루어진 완전수인데, 철저하게 이방인을 구원하는 수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를 도와주는 일곱 집사 이야기, 또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의 이방인교회입니다. 일곱 나팔, 일곱 천사 등등 이루어지는 모든 성경의 숫자는 철저하게 이방인을 의미하고 있는 숫자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부스러기라도 담는 그릇이 마태복음 15장 37절에 보면, 바구니에 담지 아니하고 광주리에 담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영남지방의 언어와 호남지방의 말이 다른 것처럼, 그것은 지역적 언어입니다. 지금 우리는 문화적 간격을 뛰어넘어서 성경을 듣다 보니까 잘 모르지만, 성경을 원어로 읽는 학자들의 눈에는 확연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에 담았다.” 이것은 철저하게 유대인을 위한 떡입니다.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였다.” 4라는 숫자는 당시 성서의 언어였던 헬레니즘의 “코이네 (Koinē)”라는 희랍어를 쓰는 문화권의 사상적 기반이 동서남북의 사방숫자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광주리라는 것도 바구니와 달리 헬레니즘 문화의 사투리입니다. 따라서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에 담았던 마태복음 15장의 떡은 철저하게 이방인을 위한 떡입니다.


      평행 본문이 마가복음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더 재미난 것은 6장의 오병이어와 8장의 칠병이어 사이에 있는 7장 24~31절까지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게 귀신들린 딸을 고치러 왔을 때에 면박을 당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줄 수 없다.” 그러자 그 유명한 대답을 이 여인이 합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래,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네 딸이 나았다.”라고 말씀하셨고, 집에 돌아가 보니 자기 딸이 나았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렇게 장이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14장 오병이어 이야기가 지나고, 15장 21절부터 28절까지에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수로보니게라고 말하지 않고, 가나안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게 됩니다. 마가복음이 좀 더 이방인적인 포커스를 가지고 이방인의 시각에서 수로보니게를 부각시켰다면, 마태복음은 보다 유대인적인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에 가나안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둘 다 떡을 구하게 되고 면박을 받게 되지만, 그 면박에도 불구하고 딸을 건지려고 하는 어머니가 전혀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 간청을 해서 드디어 자신의 딸을 고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머릿속에 그려보시겠습니까. 마태복음은 14장에 오병이어가, 15장 21~28절까지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32~39절까지에는 칠병이어의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조금 더 명료하게 마가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가, 7장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8장에는 칠병이어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김득중 교수님의 신학적 방법론에 따르면 샌드위치 방법입니다. 양쪽에 떡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떡을 구하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절묘하게 캐스팅을 하셨는지 그 여인은 가나안에 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조금 더 정확하게 수로보니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데, 예루살렘 쪽으로는 유대인들이, 북쪽 사마리아 쪽에는 이방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국경선에 놓여 있는 도시가 수로보니게입니다. 국경선에는 다중문화, 또는 이중국적자들이 많이 살게 됩니다. 혼혈인들이죠.


      순혈주의를 고집하는데 있어서는 유대인들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접경지대인 수로보니게에 살고 있는 다중 국적자들, 또는 이중국적자들을 전부다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얘길 한 것입니다. “너는 개 취급을 받는 동네에서 왔기 때문에 자녀의 떡을 먹을 자격이 없다.” 이것은 문화적 편견일 뿐만 아니라 지역감정이고, 굉장한 인격모독의 언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이 모든 것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딸을 구원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의 자손들이 구원받기를 정말 원한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딸이 정말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귀신들림의 현상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면 이 수로보니게 여인, 또는 가나안 여인처럼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문화적 편견이나, 지역감정이나, 인격적 모독까지도 다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맞습니다, 저 개 같은 놈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라고 그렇게 간청하는 집중력, 그리고 정말 간청하는 몰입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습니다. 문화적 편견이나, 인격적 모독이나 또는 갈등을 당하게 되면 견딜 수 없습니다. 때려치우고 싶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견뎌야 합니다. “주님, 저 개입니다. 맞습니다. 자녀가 아니고 개입니다. 그러니 저는 상위에 있는 자녀의 떡은 먹지 않습니다. 그것 구하지 않겠습니다. 상아래 떨어지고 있는 부스러기를 주시면 개처럼 핥아먹겠습니다. 그거라도 주십시오.” 그렇게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려 간청을 하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구원받을 것이고, 여러분의 손자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이렇게 절묘하게 유대인의 떡을 좌편에, 이방인의 떡을 우편에 놓고, 가운데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사는 국경지대 여인을 캐스팅한 주님의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떡이 남았다는 겁니다. 유대인을 위해서는 열두 바구니가, 이방인을 위해서는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열둘은 많아 보이고, 일곱은 적어보이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수 3과 땅의 수 4를 곱한 열둘이나, 그것을 더한 일곱은 둘 다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숫자입니다. 풍족한 숫자입니다. 유대인을 위해서도 떡이 충분히 남아있고, 이방인을 위해서도 떡이 충분히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에게 지금 떡이 남아있습니다. 부스러기 떡이 남아있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고칠 수 있는 떡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떡을 구하시면 됩니다.


      끝으로 떡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은 희랍어로 읽으면 7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철저하게 이방인을 구원하는 일곱 문장입니다. 그리고 그 일곱 문장의 첫머리는 “에고 에이미(Egwv eijmi)”라는 희랍어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나는...이다”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떡이다” 무슨 떡입니까? 생명의 떡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납니다. ‘벧’은 집입니다. 뒤에 나오는 ‘을레헴’은 떡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은 떡집입니다. 왜 떡집입니까? 떡이신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떡이 풍족하다고 하는 것은 예수 자신입니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부스러기 떡으로 남아 있다는 얘기는 우리에게 이천 년 전에만 주님께서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고, 그리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응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어느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줄 수 있는 은혜의 떡이, 생명의 떡이 풍족하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 예전에 나와서 그 떡을 먹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성찬을 참여할 때에, 기도를 하실 때에,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주실 수 있는 은혜가 풍족히 남아있음을 확신하시고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이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주의 축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