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타임즈에서...
<웨슬리 영성의 출발과 그 진수>
이후정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 웨슬리 영성으로 거듭나야 교회갱신 가능 -
우리는 흔히 존 웨슬리를 18세기의 위대한 전도자, 부흥운동가로 알고 있다. 이러한 통상적인 이미지는 웨슬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그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는 부족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자신을 단지 하나의 복음적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로만 정의되도록 허용하지 않는 좀더 다양하고 포괄적인 상(像)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웨슬리의 진면목은 어떻게 파악될 것인가?
그와 같은 웨슬리 이해를 위해 우리는 영성이란 주제를 택해 보려고 한다. 오늘날 영성이란 말은 매우 다양하게, 때로는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막연히 사용되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기독교적이란 한정이 없이도 일반적인 종교들, 사상들, 문화적 가치들에 걸쳐 광범위하게 대중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라는 종교가 추구하고 체현하는 영성의 독특성에 대한 인식, 내지는 역사적 정황에 따른 자리매김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될 때,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적 자기계시에 대한 인간존재의 영적 체험을 주제로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영성의 본질적 주제인 신비와 금욕(수덕)주의, 투쟁을 통한 영적 진보와 발전, 그리고 그 목표로서의 성화와 완전의 제 양상을 상세히 언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웨슬리가 바로 이러한 영성의 일반적인 차원에서 매우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으며, 그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볼 때에야 웨슬리의 진면목이 충분히 감지,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웨슬리를 부흥사로, 혹은 전도자로 보아온 이미지나, 그의 신학을 구원론의 도식에 주로 맞추어 해석해온 시도들은 이와 같은 총체적 영성의 비전 아래에 수렴되어야 할 것이다.
웨슬리의 영성은 한 마디로 말해서 ‘새 창조’의 영성이다. 웨슬리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서 이미 새로운 해석의 열쇠로 드러난 이 말은 그의 영성을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데, 그 형상의 회복과 갱신인 새로운 창조의 빛 속에서 그의 영적 실재가 충만히 드러나고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영이시고 우리가 그 형상인 영적 존재이므로, 원래적 의미에서 인간은 영성을 본질로 한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에게 그 영성은 왜곡되고 혼미에 빠지고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서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 없이는 인간에게 구원도 영생도 불가능하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웨슬리에게 새로운 창조는 그의 복음적 회심과 영적 체험의 독특한 맥락에서 힘차게 드러났다. 철저한 회개와 죄에 대한 깊은 용서의 희구 속에서 웨슬리는 실존적으로 살아있는 참된 신앙의 영성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곧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바울과 어거스틴을 통해 전해온 복음적 칭의의 차원을 회복한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에게서 중요한 것은 그 회심의 체험이 개혁자들에게서처럼 단지 법적, 관계적 칭의에 그치지 않고, 더 풍부한 영성의 차원에로 열렸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웨슬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적으로 체험되는 영적 변화와 새롭게 창조되는 중생의 현실이 칭의에 못지 않게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경건주의자들과 같이 웨슬리는 중생의 새로운 삶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웨슬리의 중생의 영성의 핵심인 성령론적 체험의 중요성은 그가 초대교부들 특히 동방교부인 마카리우스에게서 도출한 것이다. 이미 그의 젊은 시절부터 그에게 깊이 각인된 이 심오한 초대교회의 영성은 웨슬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에로의 진지한 소명을 강화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성숙한 그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체험과 거룩한 사랑의 완전에로 향한 영성의 기초를 굳건히 해주었다.
이러한 웨슬리의 영적 체험은 진정 전인적인, 전 존재에 걸친 변화의 체험이었으며, 그에게 새 창조에 입각한 변형의 영성을 형성해 주었다. 그가 올더스게잇에서 체험했던 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 졌다고 느꼈던 영적 체험은 후에 웨슬리에게 독특한 영성주제인 “영적 감각”이란 형태로 표현된다. 마치 인간이 자연적, 신체적 감각에 의해 바깥 세계와 대상을 감지, 인식하듯이, 새롭게 창조된 인간은 초자연적, 영적 감각인 믿음에 의해 하나님과 영적 세계를 감지, 체험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성령 안에서의 체험이다.
그런데 이 체험에 관해서 웨슬리는 비록 개인적인 확증 또는 확신의 영성을 강조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주관주의의 위험에 빠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변형의 체험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 객관적 원천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원천에의 관계성을 놓칠 때, 곧 감정주의, 주관주의의 유혹이 찾아온다. 또한 웨슬리는 이 체험이 반드시 목표인 완전한 사랑에로 진보, 발전하는 성화의 체험에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렇게 볼 때, 그 체험은 결코 순간적, 수직적인데 고착될 수 없다. 반대로 그것은 역동적인 목적론적 과정을 통해 성숙되고 성장하는 체험의 영성으로 보아야 한다.
동시에 웨슬리는 성령의 체험이 능력과 은사에 치우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영성은 그 주체이신 하나님이 인격적인 교제요 거룩한 사랑이시듯이, 우리 인간도 인격적인 열매인 사랑으로 성화되어야 하는데 초점이 있다. 웨슬리는 누구보다도 더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였고, 그 열매들로 인해 형성되는 덕있는 성품, 품격인 성화된 인격의 삶, 거룩하고 순결한 사랑으로 충만한 삶에 목표를 두고 정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의 주된 역사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여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닮고 일치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화의 역사이다. 여기서 웨슬리는 산상수훈에 대한 설교들의 전체적 요약을 마음의 종교와 그 마음의 순결(정결)에서 발견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초대 동방교회의 영성의 핵심주제인 마음의 정화를 통한 순결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와의 합일(일치)이 웨슬리에게서 나름대로의 실천적 강조점과 함께 재현되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죄된 악한 정욕들에서 점점 더 자유케 되어 그리스도의 순결과 거룩에로 변형되어갈 때, 인간은 이제 옛 사람의 육적 존재양식에서 새로운 빛의 자녀의 영적 존재양식에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충만한 생명에로, 빛에로, 순결하게 변화되어 가는 기독교 영성의 본질이다.
웨슬리는 성화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태에로 일치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과 정신을 본받아 그와 하나로 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셨듯이,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셨듯이, 우리도 순결하고 거룩하게 되어야 할 것을 성화의 원리로 천명하였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합일 없이는 성화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성화는 그리스도와 같이 그리스도처럼 변형되는 길이다. 마음이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빛으로 우리 존재 전체가 환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겸손, 온유, 자비와 의로 채워지지 않을 때, 성화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변화되는 길은 무엇일까? 웨슬리는 십자가의 길, 고난을 통한 실천적인 정화의 길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거룩한 기도, 순결하고 신령한 성화의 기도의 길을 제시했다. 웨슬리가 일으킨 부흥운동은 이제 성화의 운동이 되었다. 그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 어떻게 성도들이 되어야 할지에 온 마음과 뜻을 쏟아 부어 진력하였던 것이다. 기도, 말씀탐구와 묵상, 금식, 성찬, 예배와 모든 집회, 공동체적, 사회적 성화의 훈련. 이러한 모든 영성수련의 통로들을 받아들여, 신자들은 성화의 길을 정진해 나아가야 한다. 웨슬리의 위대한 영적 공헌은 철저히 경험적, 실천적 숙련과 지혜를 가지고 성화를 위한 영성수련에로 자신의 감리교 공동체를 인도한 것이다.
결국 성화의 목표인 완전은 무엇인가? 웨슬리의 영성에서 궁극적 관심은 바로 거기에 놓여 있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전통에 일치하여, 그는 완전이 사랑의 완전임을 재확인하였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지만 거룩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그 완전한 사랑을,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아,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향해 계속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 사랑은 물론 우리에게서 우리의 인간적, 피조적 한계 때문에 정도와 분량에 따른 완전으로 실현될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그러한 상대적인 완전이야말로 자신이 믿고 가르치는 완전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에게 허락된 완전한 사랑,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모든 죄를 점점 몰아내고 우리가 주님과 일치함에로 나아가면서 점점 더 우리를 지배하고 주관하게 된다. 이 사랑의 증가는 죄의 감소와 비례한다.
웨슬리에게 이 완전한 사랑의 영성, 성화의 영성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오늘 한국의 감리교회, 아니 세계의 감리교회는 이 유산을 얼마나 진지하게, 깊이 있게 계승하고 있는가? 우리가 오늘 관심하고 있는 한국 감리교회의 갱신과 회복도 이러한 웨슬리의 영성의 회복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더 이상 감리교회는 권력과 이념, 제도와 형식에 속박된 채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그 원래의 정신, 웨슬리의 원천적 영성에 따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성도로서 순결하고 완전한 사랑에로 변화되기 위해, 철저히 자기정화의 수련과 연단에 투신하는 교회로 개혁하는 쇄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만, 성령의 향기로운 열매, 그리스도의 빛나고 아름다운 형상이 회복되는 거룩하고 영광된 교회로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비전과 희망을 품고 오늘도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웨슬리 영성의 출발과 그 진수>
이후정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 웨슬리 영성으로 거듭나야 교회갱신 가능 -
우리는 흔히 존 웨슬리를 18세기의 위대한 전도자, 부흥운동가로 알고 있다. 이러한 통상적인 이미지는 웨슬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그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는 부족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자신을 단지 하나의 복음적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로만 정의되도록 허용하지 않는 좀더 다양하고 포괄적인 상(像)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웨슬리의 진면목은 어떻게 파악될 것인가?
그와 같은 웨슬리 이해를 위해 우리는 영성이란 주제를 택해 보려고 한다. 오늘날 영성이란 말은 매우 다양하게, 때로는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막연히 사용되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기독교적이란 한정이 없이도 일반적인 종교들, 사상들, 문화적 가치들에 걸쳐 광범위하게 대중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라는 종교가 추구하고 체현하는 영성의 독특성에 대한 인식, 내지는 역사적 정황에 따른 자리매김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될 때,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적 자기계시에 대한 인간존재의 영적 체험을 주제로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영성의 본질적 주제인 신비와 금욕(수덕)주의, 투쟁을 통한 영적 진보와 발전, 그리고 그 목표로서의 성화와 완전의 제 양상을 상세히 언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웨슬리가 바로 이러한 영성의 일반적인 차원에서 매우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으며, 그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볼 때에야 웨슬리의 진면목이 충분히 감지,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웨슬리를 부흥사로, 혹은 전도자로 보아온 이미지나, 그의 신학을 구원론의 도식에 주로 맞추어 해석해온 시도들은 이와 같은 총체적 영성의 비전 아래에 수렴되어야 할 것이다.
웨슬리의 영성은 한 마디로 말해서 ‘새 창조’의 영성이다. 웨슬리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서 이미 새로운 해석의 열쇠로 드러난 이 말은 그의 영성을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데, 그 형상의 회복과 갱신인 새로운 창조의 빛 속에서 그의 영적 실재가 충만히 드러나고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영이시고 우리가 그 형상인 영적 존재이므로, 원래적 의미에서 인간은 영성을 본질로 한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에게 그 영성은 왜곡되고 혼미에 빠지고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서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 없이는 인간에게 구원도 영생도 불가능하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웨슬리에게 새로운 창조는 그의 복음적 회심과 영적 체험의 독특한 맥락에서 힘차게 드러났다. 철저한 회개와 죄에 대한 깊은 용서의 희구 속에서 웨슬리는 실존적으로 살아있는 참된 신앙의 영성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곧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바울과 어거스틴을 통해 전해온 복음적 칭의의 차원을 회복한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에게서 중요한 것은 그 회심의 체험이 개혁자들에게서처럼 단지 법적, 관계적 칭의에 그치지 않고, 더 풍부한 영성의 차원에로 열렸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웨슬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적으로 체험되는 영적 변화와 새롭게 창조되는 중생의 현실이 칭의에 못지 않게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경건주의자들과 같이 웨슬리는 중생의 새로운 삶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웨슬리의 중생의 영성의 핵심인 성령론적 체험의 중요성은 그가 초대교부들 특히 동방교부인 마카리우스에게서 도출한 것이다. 이미 그의 젊은 시절부터 그에게 깊이 각인된 이 심오한 초대교회의 영성은 웨슬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에로의 진지한 소명을 강화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성숙한 그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체험과 거룩한 사랑의 완전에로 향한 영성의 기초를 굳건히 해주었다.
이러한 웨슬리의 영적 체험은 진정 전인적인, 전 존재에 걸친 변화의 체험이었으며, 그에게 새 창조에 입각한 변형의 영성을 형성해 주었다. 그가 올더스게잇에서 체험했던 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 졌다고 느꼈던 영적 체험은 후에 웨슬리에게 독특한 영성주제인 “영적 감각”이란 형태로 표현된다. 마치 인간이 자연적, 신체적 감각에 의해 바깥 세계와 대상을 감지, 인식하듯이, 새롭게 창조된 인간은 초자연적, 영적 감각인 믿음에 의해 하나님과 영적 세계를 감지, 체험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성령 안에서의 체험이다.
그런데 이 체험에 관해서 웨슬리는 비록 개인적인 확증 또는 확신의 영성을 강조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주관주의의 위험에 빠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변형의 체험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 객관적 원천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원천에의 관계성을 놓칠 때, 곧 감정주의, 주관주의의 유혹이 찾아온다. 또한 웨슬리는 이 체험이 반드시 목표인 완전한 사랑에로 진보, 발전하는 성화의 체험에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렇게 볼 때, 그 체험은 결코 순간적, 수직적인데 고착될 수 없다. 반대로 그것은 역동적인 목적론적 과정을 통해 성숙되고 성장하는 체험의 영성으로 보아야 한다.
동시에 웨슬리는 성령의 체험이 능력과 은사에 치우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영성은 그 주체이신 하나님이 인격적인 교제요 거룩한 사랑이시듯이, 우리 인간도 인격적인 열매인 사랑으로 성화되어야 하는데 초점이 있다. 웨슬리는 누구보다도 더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였고, 그 열매들로 인해 형성되는 덕있는 성품, 품격인 성화된 인격의 삶, 거룩하고 순결한 사랑으로 충만한 삶에 목표를 두고 정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의 주된 역사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여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닮고 일치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화의 역사이다. 여기서 웨슬리는 산상수훈에 대한 설교들의 전체적 요약을 마음의 종교와 그 마음의 순결(정결)에서 발견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초대 동방교회의 영성의 핵심주제인 마음의 정화를 통한 순결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와의 합일(일치)이 웨슬리에게서 나름대로의 실천적 강조점과 함께 재현되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죄된 악한 정욕들에서 점점 더 자유케 되어 그리스도의 순결과 거룩에로 변형되어갈 때, 인간은 이제 옛 사람의 육적 존재양식에서 새로운 빛의 자녀의 영적 존재양식에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충만한 생명에로, 빛에로, 순결하게 변화되어 가는 기독교 영성의 본질이다.
웨슬리는 성화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태에로 일치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과 정신을 본받아 그와 하나로 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셨듯이,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셨듯이, 우리도 순결하고 거룩하게 되어야 할 것을 성화의 원리로 천명하였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합일 없이는 성화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성화는 그리스도와 같이 그리스도처럼 변형되는 길이다. 마음이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빛으로 우리 존재 전체가 환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겸손, 온유, 자비와 의로 채워지지 않을 때, 성화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변화되는 길은 무엇일까? 웨슬리는 십자가의 길, 고난을 통한 실천적인 정화의 길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거룩한 기도, 순결하고 신령한 성화의 기도의 길을 제시했다. 웨슬리가 일으킨 부흥운동은 이제 성화의 운동이 되었다. 그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 어떻게 성도들이 되어야 할지에 온 마음과 뜻을 쏟아 부어 진력하였던 것이다. 기도, 말씀탐구와 묵상, 금식, 성찬, 예배와 모든 집회, 공동체적, 사회적 성화의 훈련. 이러한 모든 영성수련의 통로들을 받아들여, 신자들은 성화의 길을 정진해 나아가야 한다. 웨슬리의 위대한 영적 공헌은 철저히 경험적, 실천적 숙련과 지혜를 가지고 성화를 위한 영성수련에로 자신의 감리교 공동체를 인도한 것이다.
결국 성화의 목표인 완전은 무엇인가? 웨슬리의 영성에서 궁극적 관심은 바로 거기에 놓여 있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전통에 일치하여, 그는 완전이 사랑의 완전임을 재확인하였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지만 거룩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그 완전한 사랑을,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아,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향해 계속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 사랑은 물론 우리에게서 우리의 인간적, 피조적 한계 때문에 정도와 분량에 따른 완전으로 실현될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그러한 상대적인 완전이야말로 자신이 믿고 가르치는 완전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에게 허락된 완전한 사랑,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모든 죄를 점점 몰아내고 우리가 주님과 일치함에로 나아가면서 점점 더 우리를 지배하고 주관하게 된다. 이 사랑의 증가는 죄의 감소와 비례한다.
웨슬리에게 이 완전한 사랑의 영성, 성화의 영성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오늘 한국의 감리교회, 아니 세계의 감리교회는 이 유산을 얼마나 진지하게, 깊이 있게 계승하고 있는가? 우리가 오늘 관심하고 있는 한국 감리교회의 갱신과 회복도 이러한 웨슬리의 영성의 회복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더 이상 감리교회는 권력과 이념, 제도와 형식에 속박된 채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그 원래의 정신, 웨슬리의 원천적 영성에 따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성도로서 순결하고 완전한 사랑에로 변화되기 위해, 철저히 자기정화의 수련과 연단에 투신하는 교회로 개혁하는 쇄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만, 성령의 향기로운 열매, 그리스도의 빛나고 아름다운 형상이 회복되는 거룩하고 영광된 교회로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비전과 희망을 품고 오늘도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웨슬리 신학, 역사 연구원
글쓴이 : sola-grati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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