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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神學)/웨슬리 신학

[스크랩] 웨슬리의 생애와 윤리 2부

우순(愚巡) 2006. 4. 17. 13:40

안녕하세요, 생기나라 동역자 여러분,

웨슬리의 생애와 윤리 두 번째 부분을 올립니다. 괜히 시작했나 싶어서 그만 둘까 하다가 시작했으니 언제고 끝을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올리는 글은 저희 카페의 동역자 분들이나 개 교회에서 혹시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사용하셔도 좋지만, 사용하실 때, 나중을 위해서 출처는 반드시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글을 읽으실 때, 제가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했던 부분이라든지, 다르게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댓글이나 제게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야 저도 긴장하고 잘 살펴보고, 제대로 배울 수가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제 글이 아직은 거칠어서, 틀린 철자라든지, 문장의 표현이라든지, 문법이 틀린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주십시요...고맙게 생각하고 고치겠습니다.

혹시라도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원본 파일을 한글2004 버전으로 올립니다. 문제가 있으신 분들은 연락주시면 조치를 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존 웨슬리의 생애와 윤리 2부: 사회 윤리의 전제들


1. 선행은총 (Prevenient Grace)

존 웨슬리의 생애와 윤리 2부에서는 웨슬리의 윤리가 근거를 두고 있는 전제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웨슬리의 윤리의 전제를 논할 때, 가장 처음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마르쿠바르트에 따르면 웨슬리의 윤리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웨슬리의 “선행은총”에 대한 신학적 견해이다.  이 부분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감을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은 웨슬리를 다른 많은 종교 개혁의 전통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들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은 우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신학적 인식에 근거한다.  이 점은 다른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웨슬리는 인간의 타락과 원죄의 영향으로 자연적 인간은 도덕적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쿠바르트에 의하면 자연적 인간의 선행에 대한 무능력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에 대한 무능력과 하나님에 대한 무지”1)이다.  얼핏 보기에 이런 인간의 타락과 원죄는 인간의 구원과 도덕적 회복 능력의 획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마틴 루터는 “인간을 향하여 의를 찾는 하나님”을 강조하였고, 존 칼빈은 “인간을 향하여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은 루터의 경우는 “진노의 하나님”이었고 칼빈의 경우에는 하늘 저 멀리 먼 곳으로부터 “높은 권위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2)이었다. 

그러나, 웨슬리가 이 두 종교개혁자들과 다른 점은 웨슬리가 믿는 하나님은 따듯한 보편적인 사랑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인간은 타락하고 원죄에 빠졌지만, 이런 인간 안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기 이전에도 이성이나 자연적 양심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 등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어느 정도는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웨슬리의 주장인 것이다.3)  또한 웨슬리는 “선행은총 없는 인간이 없다”4)라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마르쿠바르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요청도, 인간적인 행위들의 도덕적 가치의식도 그리고 윤리적인 결단의 영역 내에 있는 그의 한정된 자유의지도 모두 궁극적으로 선행은총의 활동으로 소급되어질 수 있다”5)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안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더불어 타락과 원죄에 빠진 자연적 인간이 도덕적 능력을 회복할 수 있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의 능동적인 도덕 능력 회복보다는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총에 의한 수동적 도덕 능력의 회복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범위 안에서의 협동설, 복음적 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이다”6)라는 말은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적 인간의 도덕적 능력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만을 놓고 생각한다면 웨슬리 역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본성의 타락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개입 없이는 치유가 불가능하다”7); “인간은 자신의 어떤 노력,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노력을 통하여 자기 본질의 변화를 달성할 수 없다.”8); “자연적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가 행한 모든 것 속에서 범죄 하는 자유일 뿐이다.”9)  이런 주장들 속에는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가 머물 자리가 없는 듯하다.  만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제한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아주 존재 하지 않거나 또는 존재한다 하더라도 극히 미약한 인간의 도덕적 능력은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의해서 여전히 수동적이지만, 예전의 상태보다는 보다 능동적인 상태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웨슬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수동적 의미의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비신앙인에게도 하나님의 선행 은총은 존재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비신앙인들의 자유인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마르쿠바르트는 “인간이-포기할 경우에는 거절되는-선행은총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하나님의 선행적인 활동에 상응하게 행동해야 한다. 벌써 여기서 은총이 실체적으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이해되어진하든 점과 어떤 공적도 제외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동참이 필연적이라는 점이 암시되고 있다”고 주장한다.10)  더 나아가서, 마르쿠바르트는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이 가지는 이중적인 기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비신앙인으로 하여금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며, 도 그를 윤리적 호소의 대상이 되게 한다. 이 호소는 선행은총의 활동이 없이는 무의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11)  어떻게 보면 비신앙인을 신앙인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역시 자연인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은 신앙인을 더욱 고양된 도덕적 신앙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새롭게 하는 은총인 것이다.


2. 새롭게 하는 은총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웨슬리는 “인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의인을 어느 정도로 예비하는 선행은총의 활동으로만 제한되지 아니하고 인간을 완전히 갱신한다.12)  즉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킨다.13) 의인과는 달리 이 갱신은 한 순간에 일어나지 아니하고 성화의 전 생애적인 과정으로 일어난다.”14)  인간의 갱신, 다시 말하면 자연적 인간의 의인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다.  한편, 김홍기는 의인과 거듭남이 동시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김홍기에 의하면, 의인화와 거듭남의 차이는 “시간적 순서가 아니요 논리적 순서이다 (thinking). 의인은 상대적 변화라면, 신생은 실제적 변화다.”15)  결국,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의인화와 갱신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동인(moral agency)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에 의해 일어난 갱신(새롭게 됨)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인간의 실제적인 변화의 출발점과 영원한 전제는 “모든 인간을 위하여 일어난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와 믿음으로 이 화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16)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행은총과 비록 수동적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참여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갖는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Richard P. Heitzenrater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For Wesley, an understanding of both Christ's passive and active obedience or righteousness (as a man "who went about doing good") as the meritorious cause of justification was more adequate and allowed a place for prevenient grace, free will, and universal atonement.  Wesley did not want to separate the active and passive righteousness ("what Christ hath done and suffered for us") and therefore claimed that it was with regard to these two conjointly that Jesus is called "the Lord our righteousness."17)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의로움의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두 가지 모습을 다 발견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여된 하나님의 의(imputed righteousness)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른 참여한 의(imparted righteousness), 이 두 가지 의로움이 인간의 구원과 갱신에 있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웨슬리는 이해한다.  기독교 윤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마르쿠바르트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선한 행위를 가져오는 것은 “신앙의 힘이 아니라 믿는 자를 통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영의 힘이다”18)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령의 힘에 의해서 신앙인의 선한 행위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웨슬리에게는 “선한 행위는 은총에 의한 거듭남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의 성화를 촉진하고 완성시키는 도구이다.”19)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하게 만들고, 신앙인들이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꼭 필요한 도구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활동과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은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기독교적인 삶의 포기할 수 없는 요소”20)라는 것이다.  비록 웨슬리가 영국 국교회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신앙과 그에 합당한 믿음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이 웨슬리의 윤리, 특히 웨슬리의 사회 윤리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겠다.  조금 과장하면, 웨슬리는 회심한 이후, 죽는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imputed righteousness(부여된 의)와 imparted righteousness(참여한 의)를 분리하지 않고 자신의 죽는 날까지 실천하고자 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 M. 마르쿠바르트, 『존 웨슬리의 사회 윤리: 그 실천과 원리들』, 144.


2) 박충구, 『기독교 윤리사』 (대한기독교서회, 1994), 255-256.


3) 마르쿠바르트, 150.


4) John Wesley, The Letters of John Wesley, VI, 239, 마르쿠바르트, 151에서 재인용.


5) 마르쿠바르트, 151.


6) 김홍기, 『평신도를 위한 세계 기독교의 역사이야기』, 172.  사실 웨슬리의 이런 견해는 당시의 다른 종교 개혁자들이나 후대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이 논의가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대한 강조가 인간의 타락과 원죄에 대한 웨슬리의 신학적 인식 그리고 인간을 최소한이나마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이성과 양심 같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와 때때로 충돌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평신도들이 읽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쓰여지기 때문에 더 이상의 깊은 논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저의 판단입니다.  


7) Wesley's Standard Sermon II. 222-223; The Works of John Wesley VII, 338-339; IV, 286; 마르쿠바르트의 책에서 재인용, 145.


8) Works VII, 352-353; 271.; 마르쿠바르트, 145


9) Sermon I, 188.; 마르쿠바르트, 145.


10) 마르쿠바르트, 155.


11) 위의 책, 155.


12) Works, VIII, 351, Sermons I, 186-187.


13) Works, VIII, 279.


14) Works VIII, 279; VII, 346-347. 각주 번호 12-14까지는 마르쿠바르트 157에서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15) 김홍기, 175.


16) 마르쿠바르트, 158.


17) Richard P. Heitzenrater, Wesley and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5), 222.


18) 마르쿠바르트, 164.


19) 마르쿠바르트, 164.


20) 마르쿠바르트, 165.


출처 : 생기묵상원
글쓴이 : 김충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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