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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神學)/웨슬리 신학

[스크랩] 요한 웨슬리의 성화 신학에 대한 고찰

우순(愚巡) 2006. 4. 17. 23:14

    요한 웨슬리의  성화 신학에 대한 고찰

 I . 본론

   1 . 웨슬리 신학 형성의 배경.

    A) 요한 웨슬리 신학의 시대적 배경.

  웨슬리가 상았던 영국은 "Three Rs' Age"라고 일컬어진다. 첫째는 理 性의 시대(the age of erason), 둘째는 復興의 시대(the age of reviv-

al), 셋째는 革命의 시대(the age of revouition)였다. 이성의 시대란 유럽 대륙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독일의 合理主義(rationalism) 혹은 啓蒙主義운동(enlightenment)에 이어 프랑스의 浪漫主義(romanticism) 혹은 自然主義(naturalism)의 바람이, 영국에서는 理神論(deism)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合理的 이성 중심의 哲學은 聖書의 합리적 해석, 구속주 그리스도보다는 歷史的 예수, 道德的 유토피아, 宗敎간의 대화,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배제하는 인간 중심의 역사 해석등을 강조하였다. 그런가 하면 합리적 이성 중심의 철학에 반기를 들고,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ism)가 스콜라주의적 경향을 띠는 것에 도전하면서 경건주의 부흥운동이 독일에서 시작하여 스페너, 프랑케, 진젠돌프를 거쳐 웨슬리에게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집중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상황은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산업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슬리의 시대는 인류의 역서적 운명을 바구어 놓은 산업혁명의 시대였다.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 발전하는 역서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1760년 경 제임스 하그리브스(Jmaes Hargreaves)는 실 짜는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섬유산업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하그리브스의 기계로 더욱 튼튼하고 더욱 좋은 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10년 만인 1778년에는 실 짜는 기계가 영국 전역에 2만 개나 되었다. 에이브라함 다알비(Abraham Darby)가 1708-9년에 철 제련에 석탄을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여 개발시킴으로 석탄 생산이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1775년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엔진이 발명되어 시장에 나옴으로써 증기의 힘이 철공업 발전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어것은 산업혁명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철공업과 섬유공업이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자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랱커셔(Lancashire)의 인구가 한 세기동안 세 배로 증가하였고, 인구 8,000명의 맨체스터(Manchs-

ter)가 9만 5,000명으로 증가하였다.

  따라서 산업화에 뒤따르는 부작용으로 노동자의 처우 개선이 문제시되게 되었다. 노동운동은 산업혁명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노동운동의 수천 명의 지도자들이 감리교도들이었고, 그들에 의해 노동자들이 정의감과 권리의식을 갖도록 의식화되어 갔을 뿐 아니라 감리교도들은 노동자들에게 조직화해 가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1). 감리교는 초기 산업혁명의 열악한 노동조건속에서 웨슬리의 종교적 영향으로 당시 사회의  노동자들에게 어둠속에서 빛을 던져 주었다.

 또한 산업혁명과 함께 격동과 변환의 시대에 감리교는 광부, 산업 노동자, 농부의 사회속으로 참여함으로써 박해로 시작된 적은수의 신도들이 1800년의 교인수보다 1850년 교인수가 6배로 증가하였으며, 구성원은 광부, 노동자, 농민들로 가득찼다.

    B) 웨슬리의 생애

  이제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기독교의 또 다른 장을 펼친 웨슬리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웨슬리(1703-1791)는 감리교회의 창시자이며, 엡위트의 목사인 사무엘 웨슬리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나 옥스포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726년 옥스포드 대학 링컨 컬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선발되었으며, 1727-29년까지는 부친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재직했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시절에 진지하고, 경건하고, 학구적인 크리스찬들을 모아 신성구락부(Holy Club)를 조직하고, 신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윌리암 로오(William Law,1686-1761)와 헨리 모어(Henry More,1614-1687), 토마스 아켐피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161

3-1667)등의 영향을 대학 시절에 받았다. 그는 1738년 5월 24일 올더스 게이트가의 한 모임에서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론이 낭독될 대 회심의 경험을 갖게 되었으며, 1739년 킹스우드 공부들 앞에서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1744년에 평신도 설교자들의 회의를 열었으며, 1760년 미국에서 감리회 조직이 소규모 형태에서 점차 발전하여 1768년에 감리교회가 뉴욕에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에 웨슬리는 토마스 코크박사(1747-18914)를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감리회 조직이 영국 성공회안에서 하나의 신앙운동이 되기를 바랐으나 점차적으로 독립적 조직으로 성장해 나가게 되었다. 그는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반대했으며, 1741년 조지 화이트 필드와 단절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웨슬리의 사망당시, 영국은 194명의 설교자와 71,668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선교부에는 19명의 선교사와 5,300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미국에는 190명의 설교자와 43,265명의 회원이 있었다. 그는 동생 찰스와 화이트 필드보다 더 감리회 전도의 중심인물이었으며,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크리스찬들 주의 하나였다는 The Oxfo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에서는 말하고 있다.

    C) 올더스게잇(Aldersgate)체험

  웨슬리가 웨슬리 되게한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논란이 있으나 우리는 그의 올더스 게잇 체험을 중요시 하지 않을수 없다. 먼저 그의 1738년 5월 24일의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 5월 24일 수요일 "그는 그 영광과 덕으로 가장 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읍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신의 성품을 함께 가지는 자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베드로 전 1"4) 내가 성경를 펴서 이 말씀을 읽는 것이 오늘 아침 5시경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나오기 직전에 읽은 말씀은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마가12:34)는 말씀이었다. 오후에 나는 세인트 폴 교회에 오라는 청을 받았다. 거기서 부른 찬송가는 이런 것이었다. "여호와여 내가 싶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귀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저녁에는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은 채 올더스게이트 가(Aldersgate street)에 있는 어느 회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전쯤 되어서 그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고 설며을 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나는 악의적으로 나를 이용했거나 박해한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생전 처음 내 마음속에 느낀 것을 거기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터놓고 간증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원수같은 마귀는 넌지시 이렇게 속삭였다. "이것은 믿음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기쁨은 어디 있냐?" 그때에 나는 배웠다. 평화와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의 구원의 대정되시는 주님을 기쁨 특히 깊이 애통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기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때로는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주지 않으시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집에 돌아온 추에 나는 여러가지 시험으로 몹시 괴로웠다. 그러나 큰 소리로 외쳤더니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 시험은 자꾸 되풀이되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눈을 들어 주님을 향하자 주께서는 "주의 거룩한 곳으로부터 나에게 도움을 보내주셨다." 나는 여기서 이런 체험과 주로 전에 일관되었던 나의 신앙상태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싸웠다. 그렇다. 나는 율법아래서 뿐만 아니라 은총 아래서 역시 있은 힘을 다하여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자주 그런것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승리하였다. 그러나 현재에는 늘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다2).'

  우리는 여기서 올더시게잇 체험을 두가지 측면에서 보고자 한다. 하나는 이 체험으로 인해 웨슬리의 윤리관의 변화와 다른 하나는 의인관의 변화를 알아 보고자 한다.

      ①사회 윤리에 대한 체험 이전과 이후의 윤리

  웨슬리는 신앙을 윤리로부터 분리 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사회 윤리는 크리스찬의 완전과 성화에 관한 그의 신학으로부터 분리될수 없으며, 특히 올더스게잇 이전과 이후의 그의 윤리관이 차이가 있음을 알수있다. 쉽게 말하자면 올더스게잇 이전의 웨슬리의 접근방법은 카톨릭적 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신앙과 윤리와의 관계를 복음주의적 의미에서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의 실천적 의의를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올더스게잇 이전에 웨슬리의 맏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신앙)와 사람과의 관계(사회 윤리)에 매우 실제적인 영향을 주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오는 길이 그의 인격과 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웨슬리는 이해했다. 그리고 올더스게잇 이후에 그는 이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했다. 단순히 표현하면, 이것이 바로 다른점이다. 올더스게잇 이전에 그의 사회윤리는 그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깊은 관심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올더스게잇 이후에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된 새로운 애정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야 자기 자신을 내어줄수 있게 되었다. 전에, 그는 의인의 은총과는 별도로 聖火를 구했다. 크리스찬이 되기 위하여 그는 기도, 금식, (조지아에로의)순례를 통하여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봉사를 통하여 거룩한 삶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펠라기아니즘(Pelagianiam)이었다. 그러나 그는 1738년 체험이후 그는 하나님을 얻기 위하여 선을 행하고자 하던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 사로잡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의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것이 되었엇다. 그의 선행(사랑)이 믿음을 낳은것이 아니라, 그의 속에서 역사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믿음이 사랑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3). 즉 동기부여에 있어서 올더스게잇 이전에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했으나 체험 이후에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하게 되었다.

      ②올더스게잇 체험 전.후의 의인관의 변화

  먼저 올더스게잇 이전의 웨슬리의 사상에는 인간은 도덕적인 선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복종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를 짐킴으로서만 구원받는다는 기본적인 원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노력과 그 노력의 도덕적 영적 결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말하자면 웨슬리는 하나의 의식주의자(Methodist)였다4). 이와 같은 행위에 의한 구원관은 웨슬리 부모의 의인관에 기인한다5). 이런 그가 런던의 올더스게잇 가(Aldersgate Street)에 있는 신앙 동지들의 집회6)에서 참석하여 「로마서 서문」낭독을 듣고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즉 이 경험는 자신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다가 실해한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종교개혁자의 교리로 돌아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7).

  이로서 웨슬리의 신학의 시대적 배경, 생애, 그리고 회심의 계기가 된 올더스게잇 체험의 바탕 아래 웨슬리는 그의 중심신학인 성화사상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으며, 다양한 신학을 정립해 나갔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성화 신학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2. 웨슬리의 성화 신학

     A)성화 신학의 배경

      ①성서적 배경

  웨슬리의 성화신학은 강한 성서적 배경속에 기초하고 있다. 웨스리에게 있어서 성서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원천적인 근거가 된다. 네가지 신학적 기준 - 성서, 이성, 전통, 경험 - 중에서 성서가 가장 근본적 기준이 된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에서 성서적 해석 없이 성화의 교리를 취급하지 않는다. 그의 두 중요한 논문 "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1725-77)과 "Original S- in"(1756)은 그가 성서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8). 그리고 그의 신학의 교과서는 산상수훈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완전이란 점진적 성장 과정이 개념이다. 이런 과정의 개념은 빌립보서 3장 12절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완전한 성화의 과정이다. 그의 설교 "On Perfection"의 본문이 히브리서 6장 1절 "...성숙한 경지(완전)로 나아갑시다"이다. 그는 우리가 끊임없이 완전으로 달려가지 않으면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9).

      ②역사적 배경

 웨슬리는 동방교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게되어 인간이 완전에 관계되는 은혜와 선행의 상호협조를 강조한다10). 그리고 성화개념은 동방교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 347-407)의 영향을 받아 그를 통해 구원의 신인 협조질서를 배웠다. 하나님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구원의 질서이다. 인간의 책임성은 신앙과 회개로 구성되어 있다. 크리소스톰에게 있어서 신앙과 회개는 자유 의지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은혜가 먼저 역사하면 자유 의지(신앙과 회개)가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회개만이 인간의 책임이다. 이점이 웨슬리가 크리소스톰과 다른 점이다11). 크리소스톰이나 웨슬리에게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으며,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의 개념은 어거스틴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웨슬리 신학의 역사적 배경은 동방교회적 배경 - 성화의 점진적 과정과 은총과 자유의지의 신인 협조적 구원관 - 과 서방교회적 전통 - 어거스틴과 루터의 신앙의인화 - 을 종합한 제3의 변증법적 신학을 형성 하였다12).

     B) 선재적 은총

 웨슬레이 선행은총론은 "1)구원에 있어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고 있으며, 2)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다. 3)또한 이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므로 우리는 전도해야 한다"13)는 것으로 귀결된다.

 선행은총은 웨슬리 은총론의 출발점으로서, 그의 은총론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웨슬리의 은총론을 보편적 은총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만인을 위해, 만인안에서"역사한다. 선행은총에 응답하고 자기 양심에 복종하는 인간이 그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회개, 칭의, 중생의 은총으로 인도되어 갈 것이며, 은혜에서 은혜로 더욱 나아가면 성화의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신 선행은총의 불꽃을 더욱 돋우어야 한다.

 선행은총에 의한 자유의지의 회복으로 오늘날 인간은 "책임적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책임사상은 기독자 윤리읭 중심이 된다. 이 점에서 선행은총은 기독교 윤리의 전제가 된다. 그러나 인간의 응답과 책임은 언제나 "은총 안에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웨슬리의 신학이 인본주의로 오해받는 이유가 "은총 안에서의 응답"이라는 것을 모르는데서 기인한다14).

 웨슬리의 이러한 선재적 은총은 "불가항력적"이 아닌 "가항력적"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역사하는 그리고 온총에 응답하는 복음적 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임을 알 수 있다.

     C) 성 화

 웨슬리는 의인화의 은총을 제1의 복이라고 보았고, 성화를 제2의 복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의인화의 은총만을 강조하고, 칼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주는 의인화와 성화의 두 차원적 은총을 말한다. 웨슬리는 칼빈이 이해한 성화의 교리를 더욱 발전시킨다. 칼빈은 성화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은혜라고 해석했지만, 웨슬리는 의안화는 그리스도의 은혜요, 성화는 성령의 은혜라고 해석한다15). 계속해서 그는 거듭남과 성화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거듭남의 순간에 겸손하나 은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성도의 겸손은 자만과 섞여 있다. 거듭난 성도는 온유하나 때때로 분노가 그의 온유를 부숴버린다. 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용해되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거듭남이 순간적 탄생이라면, 성화는 태어난 아기가 계속 자라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계속 성장하고 성숙하지 아니하면 온전한 겸손, 온전한 온유, 온전한 순종은 불가능하다.

 웨슬리는 의인화가 믿음으로 이루어지듯 성화도 믿으??으로 출발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함을, 믿음의 본질은 내적이지만 믿음의 증거는 사회적 행동임을 강조한다. 루터는 로마서를 높이 평가하면서 - 믿음의 책이기에 - 야고보서의 행위의인화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위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행위이기에 행위의 중요성을 중시했고 선행으로 역사하는 믿음, 사라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로마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75세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의 믿음을 뜻하는 것이요, 야고보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행위는 100세 때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칠 때의 헌신적 행위를 말하기에 야고보서의 행위는 믿음을 전제한 행위하고 해석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행동을 강조하는 산상수훈을 중요한 설교본문으로 택했다. 산상수훈 설교는 그의 성화 신학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16).

 칼빈과 더불어 산상수훈 등에 나타난 율법을 성화생활의 좋은 교훈과 채찍질로 생간한다. 칼빈은 율법을 단순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제1의 용법)이나,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공민법을 어긴 악한 사람을 다스리는 것(제2의 용법)으로만 생각하지 아니하고, 성화의 생활을 훈련시키기 위한 채찍질로서도(제3의 용법)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는 제1의 용법이나 제2의 용법으로만 이해했다. 웨슬리는 제3의 용법까지도 받아들였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구원의 확증과 풍성한 구원 또는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행함과 사랑을 배제할 수 없는데 율법의 제3의 용법은 산상수훈 같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선행을 싱펀하도록 채찍질한다. 성화를 통한 구원의 완성이 있음을 웨슬리는 히브리서 12장 14절을 통해 강조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거룩함, 성화)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17).

 웨슬리는 순간적으로 부어지는 성화가 성화의 출발점이지만, 그후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는(impartation) 과정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D) 성화의 특징

 웨슬리 신학의 특징은 크게 '성결', '사랑', '사회 참여로의 성화'르 구분할수 있다.

      ① 성결

 웨슬리는 행동 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순간에 용서함을 받고, 내적 죄는 성령의 역사로 성화의 과정에서 성결함을 받는다. 이 내적 죄는 교만, 자기 의지, 분노, 불신앙, 언갖 욕망 등이다. 이 내적 죄는 죄의 뿌리 혹은 원죄라고 웨슬리는 이해한다. 행위의 죄들은 용서받았다 할찌라도 - 의인화의 순간에 - 내적 죄악은 계속 성도들에게 남아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죄가 더 이상 성도들을 지배하거나 다스리거나 조종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도들도 완전의 은혜에 의해 성결함을 받을 때까지 우리의 내적 죄악을 계속 회개해야 한다. 완전의 은혜는 모든 죄악으로부터 크리스찬을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18).

 웨슬리에 있어서 의인화가 행위의 죄를 용서하는 객관적 은총이라면, 거듭남과 성화는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주관적 은총이다.  거듭남은 성화의 출발점이요, 거기서부터 성령이 우리 안에 계속 역사하여 완전한 성화로 영적 성장을 이룬다. 의인화는 거듭남과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다만 논리적으로(in thinking) 의인화가 거듭남에 앞서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동시에 성화가 시작한다. 의인화가 상대적, 관계적 변화라면, 거듭남과 성화는 실제적 변화를 말한다. 까닭에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는 의인화로부터 전적으로 구분되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은사이다19).

웨슬리에게 있어서 완전은 이 세상세서도 - 죽음 이전에도 -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 지상에서 절대적 완전이 가능한 것은 믿지 않는다. 그 완전은 상대적이요, 동기적이다. 죽음 이전의 완전한 성화의 개념은 사랑과 선행을 온전히 실천함을 의미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의 소극적 의미는 성결 혹은 죄 없음이지만, 볻다 적극적 의미는 사랑이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성결잉 성화의 한 요소이지만, 세상으로 찾아가는 성육신적 행동과 사회 참여로서의 사랑과 선행이 성화의 또 한 요소이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상하고, 하나님을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완전한 성도의 궁극적 목표이다20).  

      ② 사랑

 무엇이 성화요, 무엇이 완전인가? 웨슬리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단순한 마음이다. 그 사랑은 모든 죄를 싫어하고 영혼의 모든 가능성를 마음속에 채우는 것이다. 이것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랑이다(살전 5 : 16-18). 이 사랑이 신앙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신아이다. 신앙 없이는 어떤 인간도 성화되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그가 믿을때까지 성화될수 없다. 신앙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인가 하면, 사랑은 신인 협조적인 행동이다.

 이 사랑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 : 19). 웨슬리는 모든사람을 섬기는 사라의 종노릇을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설교"The Important Question"에서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방문하고, 눈먼 자에게 눈이 되어 주며,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고,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감리교도들의 회심 경험은 인간 존재에 대한 선교적 봉사로 직접 연결되게 되었다. 세리, 창녀, 죄인, 소외된 자들이 대우받던 예수시대처럼 웨슬리시대에도 인간답게 인정받게 되었다. 루터에세서 사랑은 신앙의 나무에서 저절로 맺히는 열매이지만, 웨슬리에게서 사랑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신인 협조적 응답으로서의 선행이다. 루터는 사랑을 주어지는 은총으로 강조하지만, 웨슬리는 사랑을 주어질 뿐 아니라 참여하는 은총으로 보았다21).

      ③ 사회 참여로서의 성화

 웨슬리는 사랑의 성화를 성육신 즉 사회참여(Incarnationol Soci- al Participation)로 해석한다.

 크리스찬의 선포는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크리스찬 공동체는 사회 개혁에 책임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게 해달라는 주기도문을 공허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지금 여기에서 정의, 평화, 그리고 사랑의 뜻이 성취되어야 한다. 매일읭 생활속에서의 사회적 증거는 내적 신앙의 어떤 내재적 체험의 필연적 확신이다. 웨슬리의 성화교리를 통하여 불건전한 복음주의(unhealthy-evangelism)를 비판한다. 불건전한 복음주의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만을 강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주장하는 신앙 유형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당신은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하늘나라에 가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질문만을 던진다고 아우틀러는 비판한다. 그러나 건전한 복음주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질문할 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질문하는 것이다22).

 웨슬리는 이 역사안에서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개념을 설교하였다. 또한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바꾸는것이 기독교를 파괴시키는것이라고 말한다.

III. 결론

 이제 웨슬리의 성화 사상을 맺고자 한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웨슬리가 교회에 미친 공헌을 살펴보고, 웨슬리 신학의 특색과 함께 한국 교회의 과제를 끝으로 이 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3. 웨슬리 신학의 공헌

 웨슬리는 오늘의 교회에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선교(mission of the church)에 주는 바 신학적 의의가 크다고 본다.

 첫째로, 선교 특히 인간 구원에 있어서의 사랑의 협력은 가능성과 責任의   를 認定한다. 인간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재강조하는 현대 改新敎神學(Luther나 Calvin 神學)은 구원에서의 인간과  도덕적 책임을 거의 等閑視한다. 以信得儀의 교리를 保護하기 위해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追從者들은 사람을 아주 무능한 자로 몰아 놓고 만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호응할 'point of contact"가 없다고 주장하는 일부 신정통주의  신학은 선교라는 수고를 무익한 것으로 만들 염려가 있다. 그러나 웨슬리에 의하면 사랑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행적 은총의 역사로 이미 이니시어티브를 취하고 계시지만 사람은 회개하고 믿을 책임이 있다고  한다23).

 두번째로, 이와같은 웨슬리의 사상으느 기독교의 他界와의 대화의 근거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법이나 종교는 중립적이 아니요, 은종의 보편적 역사의 영향아래서 생겨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웨슬리는 교회는 세속세계라고 일컬어지는 일반문화, 철학, 과학과의 대화의 문을 열고 있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진리는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소示에 의하여만 온전한 진리인 바, 이것이 문화, 타종교안에 있는 것들은 分別하는 표준이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함으로 웨슬리는 교회와 세상과의 계속성을 인정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유독성(uniqueness)을 주장한다.

 세번째로, 이와같은 웨슬리의 사상은 교회 선교에 대한 소망과 힘을 제공하고 있다. 웨슬리읭 신학은 교회선교에 있어서의 비관주의에서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 곧 하나님이 역사하시매 가능하다(possibility in grace)라는 믿음으로 대치에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웨슬리으이 사상의 특징은 그의 성화에 대한 이해에서 보다 具體的으로, 그리고 힘차게 表現되어 있다고 본다24).

     4. 웨슬리 신학의 특색

 웨슬리 신학의 특색은 우리가 알아온것처럼 그 신학의 독특성에서 찾아 볼수 있다. 웨슬리가 宗敎改革者들 처럼 신약성서에 있는 중요한 要素들을 강조하되 그 신학형성에 있어서 교회안에 있는 여러 학파의 장점들을 창의적으로 종합(Creative Synthesis)하였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와같이 웨슬리는 참으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그들의 신학을 재해석 내지 是正하여 보다 성서적이고 인격적인 기독교 복음의 Dunamics를 되찾는데 이르렀다고 본다.

    5. 한국 교회의 과제

 위와같은 웨슬리 신학의 장점과 더불어 지금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의 편협되고, 개인 아집이 강한 자세에서부터 나오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종교다원주의이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하며 세상은 우리에게 문을 활짝 열고 있는데 비해 우리들은 我와 非我를 엄격히 구분하여 대립시키는 이분법적이며 배타적인 단선적 투쟁사로서의 역사 이해를 극복하는 일이고, 자신이 속한 교단에의 애정은 가지되 그 한계를 넘어설 줄 아는 열려진 마음과, 신앙고백적인 성령운동에 대한 관심 내지 그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과제이다. 더불어 성령운동에 있어서도 십자가 없는 성령운동 내지 하나님 없는 성령운동의 많은 문제점들을 밝히 보면서도, 그 자체가 안고 있는 아주 좋은 유산인 체험적이며 축제적인 요소를 잘 간직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 한 가운데에서 역사의식을 가지고 관심을 두어 결단하고 행위하는 능력있는 교회가 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III. 나오는 말

  "요한 웨슬리", 나는 그이 성화신학의 독특성에 대해 특별한 느낌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 특히 본인이 소속되어 있는 예장 통합측의 사회 참여에 대한 수동적 모습과 교회들의 피상적이며, 주체성 없는 사회선교 모습에 안타까운 현실인 반면에 웨슬리의 신학은 색다르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한 더욱더 나를 놀라게 한것은 웨슬리가 노동자들, 농민, 광부들과 함께 호흡하고, 어두운 사회 구석 구석에 도움의 손길과 더불어 호흡하는 모습이후, 박해 받았던 감리교가 '부흥의 시대'를 맞이 하였다는데 있어서 지금이 우리도 과거 초기 한국교회의 네비우스 선교정책으로 인해 정치 불간섭주의를 이제는 깨뜨려 버려도 하나님의 의는 변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참고 문헌>

。김 홍기, 「기독교 사상사」, 대한 기독교서회, 1992,11.

。------ , 「요한 웨슬리·신학의 재발견」, ------ , 1993.

。John Weslwy, 「요한 웨슬리의 일기」, 김영운 역.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1.

。레온 O. 힌슨, 「웨슬리의 윤리사상」, 이희숙 역. 전망사,1987.

。송 흥국, 「요한 웨슬리 신학과 구원론」, 기독교서회, 1975.

。한 영태, 「웨슬리의 조직신학」, 서울:성광 문화사, 1975.

。조 종남, 「요한 웨슬리의 신학」, 서울: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4.

。------ , 「신학사상」, 한국 신학 연구소, 1973, 3.

 

1)김홍기, "요한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신학에 대한 역사신학적 고찰(I)" 「기독교사상사」(1992,11) p 90-91.

2)John Wesley, 「THE . JOVRNAL OF JOHN WESLEY」ed. by Perey Livingstone Parker (Chicago, IL.; Moody Press), 김영운 역, 「요한  웨슬리의 일기」,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1), p 69-70.

3)레온 O. 힌슨,「웨슬리의 윤리사상」, 이희숙 역. (전망사,1987), p 38-40.

4)Methodist : 신성클럽 회원들의 규칙적인 생활 태도와 종교적 의무에 대해 규칙적일 정도로 엄격하게 지킴을 비난삼아 이런 별명이 붙게 되었다.

5) 송흥국, 「웨슬리 신학과 구원론」, (기독교서회, 1975), p 30.

6) 이 집회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였던 듯하다. (송흥국, 「요한 웨슬리 신학과 구원론」), p 40.

7) 한영태「웨슬리의 조직신학」,(서울: 성광 문화사, 1975), P 30.

8)김홍기,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신학에 대한 역사적 고찰(I)"「기독교 사상사」,   1992, p 95.

9) 김홍기, 「요한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대한 기독교서회,1993), p 70

10) I bid .,71

11) I bid ., 73

12) 김홍기, 「기독교 사상사」, p 105

13) 조종남, 「요한 웨슬리의 신학」, (서울: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4), p 102.

14) 한영태, 「웨슬리의 조직신학」, (서울: 성광 문화사, 1975), p129.

15) 김홍기, 「요한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p 102.

16) I bi . , 103.

17) I bid . , 104 - 105.

18) 김홍기, 「기독교 사상사」, (대한 기독교서회, 1992, 11), p 106.

19) I bid . , 107.

20) I bid . , 108.

21) I bid . , 109 - 110.

22) I bid . , 112.

23) Wesley는 사도행전 5 : 31의 강해에서 말하기를 "어떤이들은 悔改와 믿음이    모두 赦罪의 선물이라고 하나, 事實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믿음을 선물로 받    으나 그에 앞 선 悔改에 있어서는 더불어 協力하여야 한다".

    Cannon은 "사람은 先行的 은총으로 인하여 悔改(스스로 깨달음)의 能力을    받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실 때 悔改라는 두 팔로 그것을    받아야 한다"고 說明하고 있다.

24) 조종남, 「신학사상, 1973.3」(한국 신학 연구소), p.181-183.

출처 : 웨슬리 신학, 역사 연구원
글쓴이 : sola-grati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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