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규 목사

-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 기독교 대한 감리회 동부 연회 단양지방 올산감리교회 담임전도사.
- 육군 군목.
- 서울 돈암동 감리교회 부목사 역임 1985년 감리교 목사 안수,
- 1988년 정회원 허입.
- 1990년 유학차 도미, 텍사스 주 달라스에 소재한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졸업(92' M.Div., 98' Ph.D.)
- 달라스 임마누엘 연합감리교회 개척.
- 네브라스카 연회 Aurora UMC 부목사 및 Nebraska Wesleyan University
- 종교학부에서 가르침.
- John Moore Fellow, Dempster Fellow
- 성루가 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 역임.
- 현재 내리감리교회 담임목사.

◎ Prolegomena to a Christian Theology of Religions (Lanham, Marylan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Inc., 2000)

◎ Joseph L. Allen, War: A Primer for Christians (Nashville: Abingdon Press,1991). 기독교인은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 Charles M. Wood, Vision and Discernment: An Orientation in Theological Study (Atlanta: Scholars Press, 1985). 환상과 분별력: 신학연구 입문 (서울: 도서출판 감신, 1996).
◎ 미주 신문 크리스찬 헤럴드, 크리스챤 뉴스위크 크리스찬 투데이 등에 고정 칼럼 기고
I. 들어가는 말 "여우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단 하나의 거대한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이사야 베를린(Isaiah Berlin)이 톨스토이에 관한 논문에서 두 가지 상반된 사상가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인용한 희랍 시인 아킬로쿠스(Archilocus)의 시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7-8). 그는 이 시에서 '여우형 사상가'와 '고슴도치형 사상가'를 착안해내면서 전자가 매우 세밀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찾아내는 '분별형'(discernment)이라면 후자는 하나의 큰 체계를 파악할 줄 아는 '환상형'(vision)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여우형 사상가들은 거대한 숲 안에 들어가 있는 모든 초목들 하나 하나를 주도면밀하게 파악하는 일에 뛰어나다고 한다면, 고슴도치형 사상가들은 온갖 잡초와 잡목들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숲을 이루어 내는 것을 볼 줄 아는 큰 시야를 가진 사람입니다. 여우형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 가지는 연결성과 총체성을 간과하는 일반적 경향성 때문에 원심적(centrifugal,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현상)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고, 고슴도치형 사람들은 너무 큰 숲에만 집착한 나머지 나무들이 가지는 개별적 차이점들을 경시하는 구심적(centripetal, 중심을 향하여 쏠리는 현상) 한계가 있습니다. 베를린은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성이 한 인격체 안에서 서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보면서 이른바 균형잡힌 사상가가 되기 위하여 양자를 조화시킬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제가 초두에서 왜 이런 비유를 말씀드리는가 하면 요한 웨슬리를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여우의 예민한 미시적 분별력'과 '고슴도치의 거시적인 비전' 모두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 자유주의적 신학배경을 가진 선생님들로부터 웨슬리야말로 철저하게 이성적이며 개방적인 아르미니우스적 자유주의 신학의 원조쯤 되는 분으로 배웠습니다. 특히 웨슬리의 '선행은총' 사상이 타종교와의 대화는 물론이고 타종교인들의 구원가능성을 적극 긍정하는 무슨 중요한 렌즈가 되는 것쯤으로 영향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로 돌아오면 해마다 웨슬리 회심 주일 설교를 하는 목사님들로부터 웨슬리는 18세기 영국 사회를 피의 혁명에서 구원한 위대한 전도자요 조직의 명수요 체험의 신학자라는 설교를 자주 들었습니다. 상아탑에서는 웨슬리의 이지적이고 개방적인 신학 경향성을 주로 강조함으로서 배타적인 칼뱅주의와 대립시키려고 했고, 지역 교회에서는 웨슬리의 열광주의적 성결 운동을 주로 강조함으로서 한 사람의 위대한 부흥사로서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앨버트 아우틀러(Albert Outler)가 "웨슬리는 제대로 읽혀지기 보다 숭배되기에 급급했으며 바로 이해되기보다는 찬양받기에 더 바빴다."(Rowe, 5)라고 한 말은 그 동안 한국에서의 웨슬리학에 대한 편파성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편향된 시각은 비단 한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서양인들에 의해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웨슬리 당대는 물론이고 사후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웨슬리에게는 어떤 신학사상같은 것이라고는 아예 찾아볼 수 없는 바 실천적 조직가나 열광적 부흥사에 불과하다고 혹평하는 사람에서부터, 웨슬리에게 신학이 있다고 할지라도 영국 국교회나 가톨릭 교회 혹은 루터-칼뱅 선상의 개혁신학의 아류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웨슬리 해석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Lindstr m, 1―18과 Rowe, 1-7을 참고하라.)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19세기 초 영국과 북미의 감리교인들은 웨슬리의 가톨릭적인 연결고리를 할 수 있으면 끊어버리고 개신교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1738년의 얼더스게잇트의 회심체험을 일방적으로 강조했습니다. 그 후 한 세대가 지나서 어떤 이들은 웨슬리의 하이 처치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서 가톨릭적인 시각에서 이해하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특히 북미 감리교도들--웨슬리의 전례나 성만찬에 대한 관심은 무시한 채 로우 처치적인 측면, 즉 일반대중의 회심에만 관심을 기울인 복음 전도자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슐라이어마허의 자유주의 신학이 대륙을 휩쓸었을 때 어떤 신학자들은 웨슬리를 자유주의적 경험 신학의 선구자로, 또 어떤 이들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바르트적인 반동으로 산출된 신정통주의 신학 입장에서 웨슬리를 루터나 칼뱅의 개혁주의적 빛에서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웨슬리를 영국 국교회주의적 시각이나 아니면 웨슬리가 초대교회 교부들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특히 동방정교회주의적 시각에서 읽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유럽대륙의 경건주의와 청교도주의가 웨슬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웨슬리와 감리교도들을 경건주의나 청교도주의의 한 분파로 이해해보려는 작업도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비록 저의 전공이 웨슬리 신학은 아니었지만 웨슬리에 관한 서적들을 두루 읽으면서 이와 같이 편향된 시각에서 웨슬리를 읽어 내려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외눈으로 사물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웨슬리의 총체적 모습--88세의 긴 생애와 특히 66년의 목회사역 기간 동안 약 400여종의 저술물들을 남긴 웨슬리 사상의 연속성(continuity)과 변화(change)--을 공평하게 조망할 수 없게 됩니다. 마치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질 때 어떤 사람은 그 몸통을 만지고서는 뱀과 같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귀를 만지고서는 부채와 같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다리를 만지고서는 나무와 같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꼬리를 만지고서는 빗자루와 같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는 어떻게 하면 웨슬리를 어떤 특정 신학적 입장이나 조류에 의해서가 아니라 웨슬리 본인과 그 시대적 삶의 자리의 시각에서 한편으로 초기(1733-38), 중기(1738-65), 후기(1765-91)의 세 국면들에 있어서의 웨슬리 사상의 변화를 미시적으로 밝혀내고, 다른 한편으로 웨슬리 신학의 근저에 유유히 흐르는 하나의 불변하는 고유 광맥을 거시적으로 발견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웨슬리를 바로 이해하고 교회사에 있어서 그의 바른 자리를 찾아 주기 위하여 여우의 예민한 후각과 고슴도치의 듬직한 시야 모두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이 제한된 지면에서 '교회사에서의 웨슬리의 위치'를 개괄적으로 해명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천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교회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은 물론이고 웨슬리를 어떤 범주속에 집어넣어 그가 무슨 독특한 공헌을 해냈는가를 분석해 내는 과제 역시 많은 시간과 지면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의 발제가 웨슬리의 원서에 정초한 충분한 예증이나 논증을 결여한 채 어떤 논리적 비약이나 일반화 경향성을 띠는 것이 거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 감리교도들을 비롯하여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웨슬리안들에게 있어서 웨슬리의 위치는 너무나 명약관화하며 이미 절대적인 권위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웨슬리는 감리교 운동과 모든 종류의 웨슬레아니즘의 부동의 교조(founder)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명한 진리로 일단 전제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왜 웨슬리가 이와 같은 교조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웨슬리 학회에서 저에게 부여한 논제는 '교회사에 있어서 웨슬리의 위치'이기 때문에 저는 다음의 세 가지 명제를 서술함으로서 웨슬리의 자리매김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저는 웨슬리가 강단 신학자가 아니라 재야 풀뿌리 신학자(folk theologian, 논자는 '민중'이라는 개념이 다분히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웨슬리는 결코 지배자에 대항하는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민중에 관심을 두지 않고 모든 계층을 뛰어 넘어서 만인을 구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로서 신학의 실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으로서 주장합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신학은 삶을 변혁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랜디 매닥스(Randy Maddox)가 주장한 것처럼 웨슬리에게 있어서 "신학은 신자의 기질과 삶의 실천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세계관"(16)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저는 데이빗 켈시(David Kelsey)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품성 도야, 즉 파이데이아(paideia)를 목표로 하는 '아테네형 신학'과 엄격한 과학 연구정신(Wissenschaft)을 강조하는 '베를린형 신학'으로 구분하는 것에 착안하여 웨슬리가 전자의 흐름 위에 서있는 위대한 실천 신학자로 자리매김을 하려고 합니다.
둘째로, 저는 웨슬리가 기본적으로 종교개혁주의 전통 위에 굳게 서있는 개신교 신학자로서 유럽대륙의 개혁신학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루터(1483―1546)에서부터 발원하여 쯔빙글리(1484―1531), 에라스무스(1466?―1536), 칼뱅(1509―1564) 등으로 이어진 개혁주의 신학의 씨앗과 가지가 웨슬리라는 나무에서 만개한 것으로 주장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웨슬리의 구원론을 살펴 볼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겠지만 그의 '이신득의'(justification by faith)에 대한 부동의 확신에 근거한 주장입니다.
셋째로, 저는 웨슬리가 비록 개혁주의적 노선 위에 서 있었지만 개신교의 치명적인 약점--흔히 반율법주의적 경향성(antinomianism)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한 인간의 무력화 현상--을 가톨릭적인 장점--흔히 인간 편에서의 율법적인 구원협조(synergism)와 성결화 과정에 대한 강조--을 받아들임으로서 양자간의 갈등을 절묘하게 화해시킨 접속의 신학자(conjunctive theologian)로 주장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절충주의적인 양상 때문에 웨슬리는 신교나 구교 모두로부터 오해와 공격을 당할 여지가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어 왔지만 저는 이와 같은 '웨슬리적 종합'이야말로 교회사를 그토록 오랫동안 양분해 온 '신앙과 선행,' '의인과 성화,' '개신교주의'와 '가톨릭주의'의 첨예한 긴장을 결정적으로 해소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웨슬리가 '의인'과 '성화'의 불가분의 관계를 적극 긍정하면서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faith working through love, 갈 5: 6)을 확고히 붙잡으려고 했다는 사실에서 결정적으로 입증될 것입니다.
이제 저에게 주어진 과제(burden)는 이와 같은 세 가지 주장을 논증하는 일입니다. 이 목표에 달성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저는 웨슬리적/감리교적 신학 전통의 특징을 분석하려고 합니다. 이 첫 번째 작업은 제가 위에서 제기한 제 1명제, 즉 "웨슬리는 '아테네형 신학'을 집대성한 대표적인 실천 신학자요, 재야의 생활 신학자였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제 2와 제 3의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저는 웨슬리의 구원론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웨슬리가 평생동안 씨름했던 인간 '구원의 길'(via salutis), 혹은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의 매 국면을 분석함으로서 한편으로 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려내고,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신/구교적 요소들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성결의 세계적 확장'이라는 두 차원에서 변증법적으로 지양 화해시켰는지 밝혀내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작업을 근거로 해서 우리 웨슬리 후예들이 어떻게 하면 지엽적이고 편파적인 웨슬리 이해가 아닌 통전적이고 공정한 웨슬리 이해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간략히 언급함으로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II. 웨슬리적/감리교적 신학 전통의 특징
"신학이란 무엇인가?" 대답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또 하나의 복잡한 신학적인 질문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현대 신학의 신학 이해'에 대한 언설은 피하고 우리의 과제에 적절한 논점들만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슈버트 아그덴(Schubert Ogden)이나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전형적으로 '간증'(witness)과 '신학'(theology)을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Ogden, 3-19; Kaufman, 1-20). 간증이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체의 실천 양식과 관련된 제 일차적이고 직접적으로 주어진 신학하기의 자료(data)인 반면에, 신학은 이와 같은 간증 자료에 대한 제 이차적이고 간접적이고 비판적인 방법으로 반성(reflection)하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첨예한 양자 분리가 신학의 전문화와 독립성, 그리고 고도의 엄밀성을 위하여 크게 공헌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신학교와 목회현장, 신학자와 목회자 혹은 평신도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사실에서 지대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저는 웨슬리가 신학과 목회현장의 양극을 특유의 실천 신학으로 통전시켰다고 봅니다. 아우틀러가 지적한 것처럼 웨슬리는 루터나 할레(Halle)의 경건주의자들과같이 대학과 같은 어떤 학문적 기반도 갖지 못했고, 칼뱅이나 낙스와같이 어떤 정치적 기반도 없었으며, 새로운 교파를 창립할 의도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열심히 갱신 운동과 성결운동을 하다보니 저절로(spontaneously) 감리교 운동을 촉발시킨 민초 신학자였습니다(13). 이와 관련하여 아우틀러는 1960년대 초만 해도 웨슬리 신학이 단지 강단 신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풀뿌리 재야 신학이라는 사실만 주장했는데, 80년대 중반부터는 웨슬리의 실천 신학적 모델은 이미 그 자체로서 건전하며 창조적인 까닭에 오늘의 강단 신학과 부정적인 비교를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강단 신학들이 기독교인들의 일상 생활이나 실제 예배, 전도 등에 일탈되는 현실을 염두에 둘 때 웨슬리 신학은 오히려 이러한 강단 신학을 교정하고 갱신할 수 있는 하나의 주요 모델이 될 수도 있음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한 설득력을 좀더 높이기 위하여 저는 켈시의 구분을 여러분에게 간단히 소개한 후 웨슬리 신학의 특징을 정리하겠습니다.
켈시는 오늘날 수많은 신학교들이 최상의 신학교육을 제공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는데 크게 'paideia'를 강조하는 '아테네형 신학교육'과 'Wissenschaft'를 강조하는 '베를린형 신학교육'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희랍어 'paideia'는 '영혼을 훈육하는 과정'(a process of culturing the soul) 혹은 '인격형성의 교육'(schooling as character formation)을 의미하며, 독일어 'Wissenschaft'는 매우 엄격한 학문적 규범과 리서치 연구 방법, 즉 '과학적 학문성'을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본래 파이데이아로서의 교육 목적은 고대 희랍 도시 아테네의 청소년들에게 덕성과 인성 훈련을 시켜 책임적인 민주시민으로 육성하는데 있었습니다. 이제 정치적이고 공중적인 동기에 의하여 행해졌던 세속적인 파이데이아 교육이 초대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는 거룩한 의미의 기독교 인격교육으로 전환되어 기독교인들의 거룩한 기질과 덕성, 영성을 함양하는 일에 치중하게 된 것입니다. 켈시에 의하면 파이데이아로 상징되는 아테네형 신학교육의 네 가지 특징은 "직관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며, 피교육생의 인격적 영적 회심을 요구하며, 개인적이며, 제한적인 의미에서--즉 공중 사회 속에서 책임적 기독교인으로 살도록 교육한다는 사실에서--또한 공중적"이라고 했습니다(73-5). 반면에 베를린형 신학은 1810년에 세워진 독일 베를린 대학이 계몽주의 이후 합리적 경험에 근거하여 잘 정돈되고 훈련화된 역사 비판 연구 방법을 채택하게되었다는 사실에서 전문화된 대학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강단 신학의 전형을 말합니다.
이제 켈시의 구분에 의거해 볼 때 웨슬리의 신학은 다분히 아테네형 신학에 속합니다. 웨슬리는 먼저 신학을 교회 현장이나 교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부터 유리시키지 않았으며 일체의 추상적인 신학작업을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신학은 하나의 거대한 기독교 진리주장의 체계를 세우거나--즉 조직신학적 작업--기독교를 경멸하는 문화인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변명하는데--변증론 혹은 호교론--있지 않았고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로서 성결하게 살 수 있는 삶의 원리와 지침을 전달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그 자체로서의 목적이 아니라 거룩한 회심을 위한 하나의 불가피한 수단이었습니다. 토마스 랭포드(Thomas Langford)가 말하는 것처럼 "웨슬리에게 있어서의 신학은 설교되고 찬송으로 불러지고 삶으로 살아져야 할"(21) 실천적 영성(practical divinity)의 문제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신학은 분명히 아테네형 신학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성서의 권위에서 출발하여 배우는 사람의 기독교적 인격과 영성 형성에 필요한 채널일 뿐, 인간의 공통 경험과 자율적 이성에서 출발하여 비판적 반성에만 집착하는 베를린형 신학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한 마디로 그의 신학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약을 처방하는 것과 같은 치유적인(therapeutic)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웨슬리 신학의 일반적 성격을 더욱 명백히 하기 위하여 몇 가지 세부적인 특징들을 열거할 차례입니다.
첫째로, 웨슬리의 실천 신학은 찰스 웨슬리가 어린이를 위한 자신의 찬송시에서 읊었던 노래처럼, "그토록 오랫동안 따로 떨어져 놀았던 경건과 지식을 하나로 결합한"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신학이었습니다. 웨슬리는 당시 유행했던 이신론(deism)과 같은 사변신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하면 타락한 영혼을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을까 하는 실천적 성결의 문제와 씨름하면서 기독교 복음을 "평민을 위하여 평이하게"(plain truth for plain people) 전달한 신학적 목회자 혹은 목회적 신학자였습니다. 둘째로, 웨슬리 신학의 근저에는 '하나님 은총의 낙관주의'가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웨슬리 신학의 기저에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며 끝없는 성결과 자기혁신의 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기독자의 완전에까지 이르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심으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gift)인 동시에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완성에 인간편에서 동참하도록 재촉하는 요구(demand)입니다. 그러므로 매닥스가 잘 표현한 것처럼 웨슬리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진수를 규정하는 두 가지 명제는 "하나님의 은총없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우리의 참여(은총으로 능력이 부여되지만 결코 강압적이지 않은 바) 없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19) 다음 장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웨슬리적 은혜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주권하에 전적으로 무상으로 베푸시는 초월적 선물로 보는 개신교적/하향적 은혜 개념과 인간편에서의 책임적 결단과 윤리적 동참을 요구하는 가톨릭적/상승적 은혜 개념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매닥스가 웨슬리적 구속론을 '책임적 은혜'(responsible grace)라는 키 워드로 풀어내려고 한 것은 매우 통찰력있는 시도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웨슬리 신학은 철두철미 성서적 신학입니다. 웨슬리는 자신을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 즉 '성경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웨슬리와 그 후예들은 '성경고집쟁이들'(Bible-bigots), '성경벌레들'(Bible-moths)이라는 조롱을 자랑스럽게 여긴 성경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웨슬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성서적 기독교'에 천착했는가는 그가 집필한 거의 모든 설교와 신학 논문들이 수많은 성구 인용으로 넘쳐 난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증명됩니다. 웨슬리는 전통이나 이성, 경험, 영국 국교회의 교리 같은 권위들을 충분히 받아들였지만 성경의 권위를 항상 절대적인 우위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웨슬리의 가장 중요한 설교중 하나인 1765년에 나온 요약 설교 '구원의 성서적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도 '구원의 이성적 길,' '구원의 체험적 길,' '구원의 전통적 길'이라고 명명하지 않은 것은 성서의 절대적 우선성을 강조했던 웨슬리의 의도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넷째로, 웨슬리 신학은 교회일치를 지향하는 보편주의적 신학입니다. 웨슬리는 1725년 영국 국교회의 사제로 안수받은 이후 결코 자발적으로 국교회를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영국 국교회 안에서 '교회안에서의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로 교회내 갱신운동을 하기 원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영국 국교회의 "39개 강령"과 공동기도서, "설교집" 등을 그대로 고수하고자 했던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웨슬리는 1748년 어떤 로마 카톨릭 교도에게 보낸 공개 편지(Letter to a Roman Catholic)에서 보편 정신(Catholic spirit)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여, 오십시오. 그리고 우리 서로 토론합시다. . .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하여 오직 사랑의 언어만 사용함으로서, 부드럽고 온유하게 말함으로서, 진리와 신실성에 합한 가장 사랑스러운 표현 방법으로, 대화 안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합시다." (Wainwright, 13에서 재인용). 웨슬리는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자비를" 주장하면서 종교적 관용과 신학적 다원성을 적극 긍정하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웨슬리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두 세트의 개념, 즉 '즉각성'(instantaneousness)과 '과정성'(process or gradualness), 그리고 '전가성'(imputation)과 '분급성'(impartation)의 역동적 관계성은 웨슬리 신학의 독특한 위치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즉각성과 전가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하에 값없이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성과 관련되어 있고 과정성과 분급성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인간편에서의 윤리적 참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전가성과 분급성의 개념 세트는 주로 기독론과 관련되어 있지만 즉각성과 과정성의 개념 세트는 단지 의인화뿐만 아니라 성화를 비롯한 거의 모든 구원 신학적 주제에 있어서 한편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편에서의 책임적 동참을 강조하기 위하여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되는 장치입니다. 즉각성과 과정성의 개념 세트는 불교에서 탈각(脫覺)하여 성불(成佛)의 경지, 즉 확철대오(廓徹大悟)에 이르는 것이 '돈오'(頓悟)--즉 별안간 깨닫게 되는 것인가--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점수'(漸修)--즉 점진적인 수행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인가--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흥미로운 논쟁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교적 개념으로 환치해 볼 때 웨슬리 신학의 구속론적 주제들 중 어떤 부분은 거의 '돈오돈수'(頓悟頓修)-- 즉 일순간에 득도에 이르는 과정--에 비견할 수 있으며, 또 다른 부분들은 '돈오점수'(頓悟漸修)--한번 깨달은 것으로 그쳐서 안되고 평생 동안의 수행과정을 통하여 도의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함--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주지할 것은 웨슬리가 즉각성을 강조할 때--심지어 성화와 '전적인 성화'로서의 '기독자의 완전'에 있어서까지--자칫 자신의 구속론이 인간의 공적주의나 율법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는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초월적 은혜의 선물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매우 정교한 신학적 장치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의 즉각성과 과정성의 관계는 단지 시간순서상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구속의 주도권(initiative)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웨슬리 신학은 양극을 절묘하게 화해시키는 접속의 신학입니다. 웨슬리 신학은 양자택일의 신학이 아니라 상극적 대립을 창조적으로 통합하는 연결의 신학(connectional theology)입니다. 실로 웨슬리는 머리와 가슴, 자연과 은총, 의인과 성화, 믿음과 선행, 신학과 교회, 텍스트와 콘텍스트, 가톨릭주의와 개신교주의 등등의 대립되는 요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한결같은 주제로 지양 화해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72년 아우틀러에 의하여 처음 제안된 이래 웨슬리 신학을 상징하는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린 '사중규범'(quadrilateral)은 웨슬리 신학의 통전성과 조화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인디케이터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웨슬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quadrilateral'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웨슬리의 전 저술물 속에는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의 네 가지 규범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채 상호보완과 견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웨슬리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의 진수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전통에 의하여 밝혀졌고, 개인의 체험을 통하여 활기를 띠게 되며, 마침내 이성으로 확증이 됩니다. 그러므로 웨슬리 신학은 성경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가톨릭과 구별되며 전통을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개신교와도 다릅니다. 또한 체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하이 처치인 영국 국교회의 형식주의와 다르고 이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모라비안주의와 같은 정적주의나 신비적 열광주의와 구분이 됩니다. 요약하면 웨슬리 신학은 성경의 우선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가톨릭과 같이 전통과 교리를 절대화하려는 시도를 막아줄 수 있으며, 전통은 과거의 유산을 돌아보아 오늘의 신앙을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에서 개신교적 뿌리없음을 보완해줄 수 있으며, 이성은 무분별한 열광신비주의나 미신주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으며, 체험은 극단적 이성맹신주의로부터 뜨거운 가슴의 종교를 지지해 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성적 열광주의자'(reasonable enthusiast)로서의 웨슬리는 그 후예들이 기독교 신학이 빠질 수 있는 모든 편향적/극단적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중용과 조화, 일치의 신학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III. 웨슬리적 구원의 길
아우틀러와 마틴 슈미트(Martin Schmidt)는 교회사에서의 웨슬리의 위치를 주로 '의인'과 '성화'의 빛에서 조명하려고 합니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아우틀러는 '웨슬리적 신드롬'(회개―의인―신생―성화의 과정)과 '반율법주의에 대한 혐오감,' '개신교적 원리와 가톨릭적 진수의 결합'이라는 빛에서 엄청나게 절충적이고 혼합적인 웨슬리 신학의 자리매김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웨슬리가 '오직 믿음만으로'(faith alone)라는 개신교적 대원리와 '성결의 삶'(holy living)이라는 가톨릭적인 대주제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했다는 사실에서 웨슬리 신학의 고유한 위치를 찾고자 합니다.
"당대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예전의 종교개혁적 양극성이 기독교의 미래를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깨달은 사람은 바로 웨슬리--개신교적 고뇌를 그대로 간직했지만 보다 더 오래된 그리고 풍부한 성서 및 전통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으로서의--였다. 이와 같이 개혁운동의 부흥과 이것의 변칙적인 운동에 대한 반동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에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적 소명이 '오직 믿음만으로'라는 원리 및 '성결한 삶'이라는 주제의 그 모든 극단화된 형태를 부정함으로서 양자 모두를 철저히 긍정하는 데 있음을 파악했다. 우리가 교회사에 있어서 웨슬리의 '위치'를 논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이와 같은 시도에 있어서 과연 웨슬리가 성공하고 있는지 아니면 실패하고 있는지--그리고 어떤 의미에서이든지 이러한 시도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하다는 사실에서--에 달려 있다"(Outler, 16).
또한 슈미트는 개혁주의 신학의 빛에서 특히 루터와 웨슬리 신학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석함으로서 웨슬리의 특수한 위치를 찾아보려고 합니다(67-93). 슈미트에 따르면 먼저 루터와 웨슬리는 성서에 접근하는 근본적인 자세에 있어서 서로 달랐다고 합니다. 즉 중세의 교조적-존재론적 세계관(dogmatic-ontological view)이 판을 치고 있던 시대에 살았던 루터는 계몽주의가 동터오던 시대에 성서를 예수와 사도들의 개인적 증언(personal testimony)으로 보았던 웨슬리보다 성서를 더욱더 교조적인 문서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루터가 주로 율법적인 맥락에서 교회구조가 결정되었던 중세말 로마 가톨릭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무서운 율법의 족쇄를 끊어버려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에 지배를 받고 있던 반면에, 웨슬리는 율법과 신앙의 긴장이 상당히 이완된 보다 자유로운 시대에 율법폐기에 대한 강한 충동보다는 오히려 기독교 복음에 대한 무관심과 싸워야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서 신학을 전개했다는 사실에서 다르다고 했습니다. 셋째로, 루터나 웨슬리는 모두 단순히 신학적 사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적 진리에 대한 확신을 실행하기 위하여 신학 논증을 추구했다는 사실에서 같습니다. 넷째로, 웨슬리가 초지일관 성서를 하나의 위대한 약속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에서 루터와 어떤 영적인 친족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웨슬리 신학의 출발점이 초대 교회(primitive Christianity)의 신앙 원리를 체험적으로 복원시키는데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이 중심에 '신앙의인'과 '성화'(사랑안에서의 완전)가 놓여있음을 발견했는데 반하여 루터에게는 신약 성서의 객관적 메시지가 주된 관심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여섯째로, 루터와 달리 웨슬리에게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상은 개인의 신생 체험에 대한 유별난 강조라고 합니다. 슈미트는 이와 같은 개인의 신앙 체험을 강조한 것이 중세 말 신비주의의 발전과정에 까지 소급해 갈 수 있지만 성서적 가치에 대한 확증으로서의 체험에 대한 새로운 권위는 18세기에 활발히 일어나기 시작한 불란서의 정적 신비주의, 독일 경건주의, 영국의 감리교주의에서 비로소 분명해졌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체험을 중시하는 신학 전통에 웨슬리가 혁혁한 공헌을 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일곱째로, 웨슬리는 기독교인들의 공동 생활을 중시한 연대주의(connectionalism) 신학자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슈미트는 웨슬리가 빈곤, 문맹, 노예제도, 알콜중독 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들에 대하여 예민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여덟째로, 슈미트는 웨슬리의 교회사에서의 두드러진 위치는 그의 선교와 복음화에 대한 열정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저는 아우틀러와 슈미트의 주장들을 거의 수용하면서 웨슬리적 구속론의 요체를 정리함으로서 서론에서 제기했던 두 명제--'개혁신학의 완성자로서의 웨슬리'와 '신교적 장점과 구교적 장점을 종합한 화해의 신학자로서의 웨슬리'--를 보다 분명히 밀고 나가려고 합니다. (논자는 이 작업을 시도함에 있어서 케넷쓰 칼린스[Kenneth J. Collins]의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The Heart of John Wesley's Theology에 결정적인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며 아울러 웨슬리의 원전에 대한 주는 모두 이 책에서 중인한 것임을 밝혀둔다.) 이러한 시도는 웨슬리 자신이 자신의 신학을 말하게 함으로서 자신이 마땅히 찾아야 할 교회사에서의 자신의 위치 설정을 꾀하기 위함일 뿐 아니라 부분적인 웨슬리 이해가 아니라 총체적인 웨슬리(the whole Wesley)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1. 은혜, 창조, 그리고 인간의 타락 (Grace, Creation, and the Fall of Humanity) 웨슬리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간이 하나님 형상의 세 가지 양상 중에 '자연적 형상'(natural image, 이해력과 의지력, 자유로 표현되는 바)과 '정치적 양상'(political image, 피조 세계를 통치할 수 있는 권위로 표현되는 바)의 극히 미미한 잔영만 남긴 채, 가장 주요한 형상이며 인간이 죄를 저지를 수 있는 통로가 되는 바 도덕적 형상(moral image, 하나님의 의와 성결에 참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으로 표현되는 바)을 완전히 망실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웨슬리는 아담의 죄악이 인류에게 영적, 도덕적으로 전가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담과 대립되는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인류에게 역시 전가되었지만 단지 '의인'과 '용서'의 차원에서만 그럴 뿐 '성결'과 '성화'의 차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웨슬리 신학이 여타의 개혁주의 신학과 다른 점이다. 즉 성결과 성화는 자동적으로 신자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책임적으로 참여해야 할 양상이라는 것이다.) 비록 웨슬리가 아담이 인류의 죄의 대표자나 연대적 우두머리(federal head)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칼뱅적 연대책임주의(Calvinist Federalism)에 근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웨슬리에게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자연적인 상태에서 무신론자요 우상숭배자요 자기의로 충만한 교만자로 남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웨슬리는 개혁 신학의 중요 주제 중 하나인 '자연적 인간의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원초적 하나님의 의를 상실하고 끝없이 죄로 향하는 경향성으로서의--에 그대로 동조한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이나 루터, 칼뱅 선상에 있는 신학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를 다른 개혁신학자들로부터 결정적으로 구분시켜주는 것은 선행 은총 개념입니다. 웨슬리는 하나님 은총이 미치지 않는 인간과 세계는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의 영혼이 죄안에서 자연적으로 죽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변명의 구실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단지 자연적인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완전히 끄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 그 누구도 통속적으로 말하는 '자연 양심'(natural conscience)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이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더 적절히 말할 경우 '선행 은총'이다"(Outler, Sermons, 3: 207,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
물론 웨슬리에게 있어서 '자연적 인간'은 순전히 실제 인간과 상응하지 않는 논리적 추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재 은총 더하기 자연적 상태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원죄의 결과가 여전히 미치고 있지만 결코 전적으로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기반을 둔 선행 은총은 기독교인이고 비기독교인이고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우주적으로 또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웨슬리는 다른 개혁 신학자들과 달리 이와 같은 선재 은총의 가능성이 없이는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이 결코 자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웨슬리를 루터나 칼뱅이 피할 수 없는 결정주의(determinism, 인간편에서의 도덕적 책임을 제거함으로서 생기는 함정으로서의)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적인 당신의 주권하에 베푸시는 선행 은총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의 자유 의지가 초자연적으로 만인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웨슬리가 하나님의 자발적인 은혜로 회복된 자유 의지를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기도 전에 이미 자유 의지를 행사할 수 있다고 보는 아르미니우스와도 구분됩니다(Outler, Sermons, 2: 157, n. 3,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중요한 것은 웨슬리의 이와 같이 미묘한 선행 은총 이해는 칼뱅주의의 약점을 극복하면서도 인간의 공로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주도하에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임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동일한 개혁주의 선상에 서 있다 하겠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칼린스가 적어도 '구원의 길'에 있어서 칼뱅주의와 웨슬리주의를 명확히 갈라주는 분기점은 전자가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은총이 '성화시키는 은총'에 있다고 보는 반면에 후자는 '선행 은총'에 있다고 지적한 것(44)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칼린스는 비록 웨슬리가 대륙의 개혁주의자들과 '인간의 전적 타락'에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은혜에 대한 상이한 이해 때문에 구속론의 네 가지 중요한 주제들--'전적인 타락,' '은총으로 주어지는 구원,' '인간의 책임,' '만인 구원 가능성'--을 모순 없이 모두 잡을 수 있었지만, 루터와 칼뱅으로 대표되는 개혁신학은 '예정론'이라는 암초 때문에 오직 처음 두 가지의 주제들만 붙들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45). 웨슬리의 유명한 말,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당신이 일할 수 있습니다. . .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제 당신은 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Outler, Sermons, 3: 206, 208,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는 선행 은총의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에서 펠라우기우스적 신인협동설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칼뱅적 결정론도 넘어 서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역에 있어서 펠라기우스는 하나님 50% 인간 50%를, 칼뱅은 하나님 100% 인간 0%를 각각 강조한다고 할 때 웨슬리는 구원의 전과정이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에 펼쳐지는 선물성이라는 사실에서 '하나님 100%'와 인간의 책임적 결단과 참여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효화된다는 사실에서 '인간 100%'를 강조한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웨슬리가 인간 본성에 관해서는 철저히 비관적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는 철두철미 낙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2. 죄를 자각케 하는 은혜와 최초 회개 (Convincing Grace and Initial Repentance)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최초의 회개를 하게 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초월적 은혜로 시작됩니다. 그는 두 가지 종류의 회개를 말합니다. 즉, 신자가 신앙 생활을 시작할 때 일어나는 바 실제적인 죄의 철저한 자각으로서의 율법적 회개(legal repentance)와 의인과 신생후에 모든 죄를 씻고 전적으로 성결하게 되어 심령의 변화를 포함하는 '복음적 회개'(evangelical repentance)가 있습니다. 전자가 초신자의 자범죄에 대한 최초의 자각과 관계되어 있다면 후자는 보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성결의 문제와 씨름할 때 갖게 되는 보다 높은 차원의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속론적 국면, 즉 '최초의 회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율법적 회개만이 해당됩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회개는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심령이 가난한 상태가 되는 것 등 심령의 내적 변화뿐만 아니라 참회의 외적 표현인 '회개에 합당한 선행'(works meet or suitable for repentance)--예를 들면, 형제를 용서하고 죄짓기를 중단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일--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1738년 얼더스게잇트 체험(논자는 이 회심사건을 웨슬리 생애에서의 유일회적 회심으로서의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보기보다는 일생에 걸쳐서 일어난 연속적인 회심의 한 중대한 국면으로 이해하는 아우틀러의 견해에 동의한다. 논자는 이 회심 사건 후 웨슬리가 비로소 '믿음'을 '성결'보다 우위에 둔 것으로 본다.) 이후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대해서는 웨슬리의 입장이 여러 차례 수정되었지만 기본적으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선행'이 신앙의인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웨슬리가 신앙의인이 일어나기 전 특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강조할 때 가톨릭적인 공적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매우 미묘한 신학적 논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웨슬리는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신앙의인을 위하여 어떤 의미에서(in some sense)는 필수적이지만 둘 중에 어느 하나도 신앙과 똑같은 의미(in the same sense)나 똑같은 정도(in the same degree)로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Cragg, Appeals, 117). 오직 신앙만이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신앙은 의인화를 위하여 근사적으로(proximately) 필요하지만 '회개'는 좀더 원격적으로(remotely),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회개'보다 더 원격적으로 필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이와 같은 언어적 장치를 통하여 한편으로 오직 믿음만이 의인화의 절대적 필수요소임을 긍정할 수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의인화가 일어나기 위한 인간편에서의 사전준비와 참여를 동시에 강조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와 그리고 시간이 주어질 경우 '회개에 합당한 열매'조차도 항상 필요하지만 믿음에 비교해볼 때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격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그러할 뿐인 것입니다. 웨슬리는 '똑같은 의미에서가 아니라'(not in the same sense or in some sense)라는 표현으로서 의인화 이전의 회개와 회개의 열매의 필요성을 긍정할 수 있었으며, '똑같은 정도가 아니라'(not in the same degree)라는 말을 통하여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 그 자체가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인간을 의롭게 한다고 주장하는 사실에서 웨슬리 신학은 철두철미 개혁적이며 그 자신도 적어도 신앙의인론(sola fide)에 관해서는 칼뱅과 머리털 하나의 차이도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Telford, Letters, 4: 298). 그러나 개혁 신학이 가지는 반율법주의적 경향성의 우를 뛰어 넘기 위하여 웨슬리는 또한 '어떤 의미'에서 비록 신앙과 똑같은 정도로는 아니지만 '회개의 열매'가 의인화 이전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글에서 웨슬리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의 완성으로서 근본적으로 신교적 전통 위에 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칼뱅적 반율법주의와 모라비안적 정적주의에 끝없이 반감을 표하면서도 '오직 믿음으로만'의 대전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의 필요성이 이와 같은 그의 개혁주의적 대원칙을 결코 수정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신앙의인화 (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 개혁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신앙의인화에 결코 선행하지 않으며 단지 뒤따라 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회개가 있는 곳에 언제나 의롭게 하는 신앙도 함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하여 죄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물론'(of course) 저절로 의롭게 됩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여기서 '물론'이라는 말을 뺍니다. 대개의 경우 회개는 의인화 바로 전에 일어나거나 아니면 거의 동시에 일어나지만 웨슬리 자신의 경우와 같이 회개한 다음에도 의인화를 체험하는 것이 때로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화'와 '회개'가 동일시되어서는 안되며 전자가 필연적으로 후자를 뒤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회개가 있는 곳에 의인화가 즉각적으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회개'는 물론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총에 의하여 이루어지지만 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하나의 인간적인 응답이며, 반면에 '의인화'는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의 특권일 뿐입니다.
사실 1738년 이전에 웨슬리는 자주 '의인화'와 '성화'를 혼동했습니다. 다시 말해 경건과 자비의 실천이 의인의 결과라기보다는 의인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극적 회심 이후 그는 의인을 체험하기 전까지 선행의 열매를 거둘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설교 '신생'(New Birth)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의인화)"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성화)을 구분합니다. 의인이 하나님과 우리의 외적인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바 상대적 변화라면 성화는 우리 내면의 변혁을 가져다주는 진짜 변화입니다. 한편 의인은 과거에 지은 '죄의 용서'를 말하는데 웨슬리에게 있어서 의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imputed)되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칼뱅적 반율법주의자들이 '그리스도적 의의 전가'에 대하여 지나친 오해--즉, '수동적 노예주의'와 같은 오해--를 많이 했던 까닭에 웨슬리는 점점 더 이 용어를 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18세기의 일부 칼뱅주의자들이 그리스도 의의 전가를 성결화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구실(cloak)로 삼았기 때문에 웨슬리는 '전가'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차원에서만 강조했습니다. 특히 루터교적 배경을 가진 영국 모라비안들은 성화를 의인화에 해소시킴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한 죄의 용서(imputed righteousness)를 죄로부터의 자유(infused righteousness)로 확대시켜 버렸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구원 혹은 진정한 회심의 필연적 표시가 '죄없는 완전성'(sinless perfection)에 있다는 수동적/정체적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루터와 같이 믿음에 비해 선행과 성화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신앙지상주의(solafidianism)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오직 믿음'만이 의인화의 단 하나의 필요 충분의 근거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에서 철저한 개신교 신학자였습니다. 웨슬리 자신의 말대로 하면, 믿음은 "용서받기 위하여 즉각적으로(immediately), 불가결하게(indispensably), 절대적으로(absolutely) 요청되는 단 하나의 요소입니다"(Outler, Sermons, 1: 196, "Justification by Faith"). 이러한 맥락에서 웨슬리는 또한 의인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인간편에서의 점진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선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인화의 즉각성을 강조합니다. 바로 이와 같이 즉각성을 강조할 때 웨슬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칼뱅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웨슬리의 전 구원론은 즉각성과 과정성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자가 개신교적 강조점으로서 인간편에서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주어지는 무상의 선물성과 은혜의 현실화(actualization)를 강조하는 반면에, 후자는 가톨릭적 강조점으로서 인간편에서의 은혜의 선물을 받을 준비와 책임적 동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텍사스 오스틴에서 LA까지 여행을 한다고 할 때 여행하는 과정(process)이 반드시 있지만 최후에 이르게 될 도착점(a point of arrival), 즉 여행의 목적이 실현되는 즉각적인 순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웨슬리 신학의 과정적인 강조점만 붙들고 즉각적인 성격을 간과할 경우 인간의 노력이 하나님의 은총을 무색케 하며 마치 구원이 어떤 순간에 주어지는 초월적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점진적 노력의 결과로 생각하게 되는 바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웨슬리를 읽게 될 위험이 있으며, 반면에 과정성을 무시한 채 즉각성의 차원에만 눈을 돌릴 경우 인간편에서의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전과정에서의 준비와 노력을 무시한 채 수동적 노예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4.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주어지는 신생 (Regeneration by Grace Through Faith) 웨슬리의 천재성은 16세기의 개혁주의자들과 같이 '의인화'와 '용서'의 문제만 관심 가진 것이 아니고 로마 가톨릭 교회나 동방 정교회에서 관심 가졌던 '신생'이나 '성결'의 문제까지 해결하려고 했던 데 있습니다. 신생과 의인화는 연속선상에서 함께 이해되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면서도 계속 죄를 짓는다면 의인의 상태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상대적인 변화를, 신생은 진짜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신생은 죄인의 상태(being)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죄의 힘(the power of sin)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생이 성화와 같이 일생동안에 걸쳐서 지속되는 과정이 아니라 일순간에 이루어지는 바 성화에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 혹은 문지방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산모에서 태어날 때 일순간에 혹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태어난 후 어른으로 천천히 자라나듯이 신생 역시 일순간이나 혹은 매우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인 반면에 성화는 일생에 걸쳐서 이루어져야 할 연속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신생의 결과 믿음과 소망, 사랑의 세 가지 기독교적 덕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기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편 세례와 신생은 결코 동일하지 않으며 외적인 사인에 불과하므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신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5. 구원의 확신 (Assurance of Salvation) 칼린스는 감리교주의가 18세기 기독교에 끼친 가장 획기적인 공헌이 바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에 있다고 주장합니다(131). 다시 말해 웨슬리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구원의 내적 확신까지 강조했습니다. 후자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사실에서 웨슬리는 18세기 비판자들에 의해서 '열광주의자'(enthusiast) 혹은 '광신자'(fanatic)로 오해되었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확신'은 두 가지 초점을 가집니다. 즉, '용서받았다는 확신'과 '죄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말합니다. 또한 이와 같은 확신은 아우틀러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주관적인 측면--즉, 우리 자신의 심령의 증거--과 기독교적 확신의 객관적인 근거--즉 하나님의 영의 증거--를 포함합니다(Collins, 131-2에서 재인용). 이러한 맥락에서 웨슬리는 구원의 확신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두 가지 극단적인 위험--첫째로, 신자들이 성령의 열매나 이성적 증거를 무시한 채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에만 집착할 경우 광신주의 혹은 열광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 둘째로,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으로 성령의 열매나 다른 간접적인 증거에만 몰두할 경우 형식주의(formalism), 율법주의(legalism),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빠질 수 있는 바 이성주의자들의 위험--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초기 웨슬리 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영국의 모라비안들은 '회심'을 '기독자의 완전'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이들과 달리 웨슬리는 초기의 성화는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의인화)와 죄의 능력으로부터의 자유(신생)만 포함할 뿐 죄적인 존재부터의 자유(즉 전적인 성화 혹은 완전)를 말하는 것은 아직 아닙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신앙의인의 교리를 '완전한 확신'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확신'(a measure of assurance)이라는 이름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6.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성화 (Sanc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 웨슬리는 회개가 종교의 현관이라면 의인화는 종교의 문이며 성화는 종교 그 자체라고 말함으로서 성화의 중요성을 갈파했습니다. 성화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본래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인간의 내적 기질을 변혁시키는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의 성화시키는 은혜에 대한 인간편에서의 동참으로 이루어집니다. 웨슬리 구속론의 신인협동적 양상--물론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지만--은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신생이 이루어질 때 시작되어서 하나님께 협조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의무까지 지워줍니다. 다시 말해 '이미 얻은 하나님의 은혜'(gain)를 '보유'(retain)해야 할 책임이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문제는 자기가 이미 받은 은혜를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향상시키지 않고서는 보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구속론은 다분히 목적론적입니다.
죄책감(guilt of sin)은 의인화에서 다 해결되었고, 죄의 힘(the power of sin)으로부터의 자유는 신생에서, 죄의 존재(being)로부터의 자유는 이제 전적인 성화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의 두 축은 '경건의 선행'(the works of piety)과 '자비의 선행'(the works of mercy)으로 이루어지는데 전자는 '하나님 사랑'과 관계되어 있고 후자는 '이웃 사랑'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진정한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올바른 기질," 즉 두 마디로 말해서 '감사'(gratitude)와 '선행'(benevolence)이라고 했습니다(Outler, Sermons, 4: 66-7, "The Unity of the Divine Being").
의인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웨슬리는 성화론에서도 '복음적 회개'와 '회개의 열매'가 전적인 성화 이전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회개와 그 열매 자체가 성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복음적 회개와 그 열매는 만일 시간이 주어질 경우 성화에 원격적으로 간접적으로 필요하지만, 반면에 신앙은 근사적으로 직접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제 은혜가 점진적으로 증가될 수록--즉 선행 은총으로부터 죄를 확신케 하는 은혜, 의인화시키는 은혜, 신생케 하는 은혜, 성화시키는 은혜 순으로--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향상시키기 위한 인간편에서의 책임도 증가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적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의인화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복음적 회개와 열매는 전적인 성화를 위하여 더 한층 필요하게 됩니다. 웨슬리는 의인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같은 의미에서가 아니라'(not in the same sense)는 표현으로 복음적 회개와 회개의 열매가 전적인 성화 이전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똑같은 정도가 아니라'(not in the same degree)는 논리로서 복음적 회개와 열매가 비록 필요하지만 그 자체로서 성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성화시켜주며 오직 믿음만이 성화의 단 하나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에서 웨슬리는 철저히 개신교적입니다. 또한 성화에도 즉각성과 과정성이 공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웨슬리의 천재성은 과정과 현실화, 점진성과 즉각성 모두를 붙잡음으로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위험--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 의한 불가항력적 성화만을 강조하는 칼뱅주의적 우나 점진적 과정성만 강조함으로 인간적 공로주의에 빠질 수 있는 가톨릭주의적 한계--을 모두 비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기독자의 완전은 신자가 그리스도나 혹은 천사처럼 그 존재가 자체가 완전히 신성화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 순수한 동기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내적인 기질과 버릇의 변화, 즉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모든 죄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난 기독교적 인격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독자의 완전에 도달한 사람은 어떤 지식의 완벽성이나 실수로부터의 자유로움, 심신적 연약함으로부터의 자유로움, 혹은 유혹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웨슬리는 또한 정체적인 완전(static perfection)을 거부합니다. 한번 완전의 상태에 도달했다고 해서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화되어야만 합니다. 웨슬리의 성화론에 있어서 'imputation'보다 'impartation'이 강조되고 어떤 영적 엘리트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웨슬리는 가톨릭주의나 대륙의 개혁주의자들과 달리 전적인 성화가 연옥(purgatory)이나 사후의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적인 성화의 가능성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현재 주어져 있지만 목회적인 관점에서 바로 죽기 직전에 대체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웨슬리는 전적으로 성화되어 기독자의 완전에까지 도달한 사람이 다시 죄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기독자의 완전 이후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7. 최후 의인화 (Final Justification)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구속의 궁극적 목적, 즉 '천국에서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속론은 종말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구원의 길은 전적인 성화에서 급작스럽게 끝나지 않으며 신자를 천국의 영생으로 인도하는 다리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두 번째 의인화가 최후 심판 때 일어난다고 보았으며 성화의 과정이 최후 의인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성화가 최후 의인의 단서가 된다는 웨슬리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부여하고 개인의 성결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적격자가 되도록 만든다"(Collins, 199). "그리스도의 의가 없이는 우리는 영광받을 수 없으며 성결 없이는 영광에 적합하지 않다"(Outler, Sermons, 4: 144, "On the Wedding Garment"). 이제 지상에서의 완전은 상대적이지만 최후 의인화를 통한 영화의 단계에서 우리는 절대적 완전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IV. 나오는 말: 통전적인 웨슬리 이해를 향하여
비록 지면 관계상 웨슬리 원전을 좀 더 풍부하게 인용하지 못함으로서 논리적 비약과 일반화를 피할 수 없었겠지만 저는 이 글의 서론부에서 주장한 세 가지 명제들을 거의 다 충족시켰기를 희망합니다. 웨슬리는 교회현장으로부터 유리된 강단 신학자가 아니라 의심할 여지없이 신학적 목회자요 목회적 신학자였습니다. 웨슬리는 또한 '오직 믿음만으로'라는 개신교적 대주제를 그의 전 구속론에서 철두철미 붙잡았다는 사실에서 프로테스탄트적이며 16세기부터 시작된 대륙의 종교개혁적 구원론을 더 한층 성숙한 차원에서 완성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웨슬리는 개신교적 약점을 가톨릭적 장점으로 보완하면서 오랫동안 교회사를 양분시켜 왔던 주제들을 특유의 정교한 논리 장치로서 화해시켰습니다. 제가 볼 때 이 세 번째 주장이야말로 교회사에서의 웨슬리의 위치를 가장 확실하게 보장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웨슬리는 개신교에서 소홀히 여기기 쉬웠던 성화론과 가톨릭에서 약화시켰던 의인론을 구원론의 양대 축으로 삼음으로서 율법과 복음, 신앙과 성결, 은총과 선행,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서의 은혜와 인간편에서의 참여를 요구하는 추진력으로서의 은혜, 즉각성과 과정성, 전가성과 분급성,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책임적 응답, 최초의 의인과 최후의 의인, 등등의 모든 대립되는 요소들을 모순 없이 창조적으로 통전시켰던 것입니다. 웨슬리의 눈부신 공헌은 가톨릭적인 공로주의와 개신교적 신앙지상주의라는 태생적 양극성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제 3의 대안을 변증법적으로 제시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우틀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깊이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명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옛날 "개신교적인 것"과 "가톨릭적인 것"을 따로 분리시켜 놓은 것은 더 이상 생산적인 양극이 아니다. 이제 단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독교적 미래는 진정으로 가톨릭적이며, 참으로 개신교적이며, 진실로 개혁적인 교회를 찾는 것에 달려 있다. 요한 웨슬리--가톨릭적 정신을 가진 개신교인이요, 사랑 안에서 열매맺는 신앙에 의해서 창조된 기독교적 삶의 영웅적 비전을 가진 개혁자요, 성경과 기독교 전통 안에서 살았고 이들로부터 사고했으며 자신의 모든 판단들을 경험과 이성의 법정 앞에 갖다 놓은 신학자--바로 이러한 웨슬리가, 만일 무시할 경우 더욱 빈곤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바, 내일의 교회를 위한 하나의 보배를 제공한다"(32-3).
이제 우리 웨슬리 후예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어떤 편견 없이 웨슬리의 진면목을 성실하게 탐구하는 일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특정 신학적 전통이나 현대 신학적 조류의 빛에서 웨슬리를 조명하는 것은 양자간의 대화를 위해서는 생산적이겠지만 결코 '웨슬리의 총체적 모습'을 밝히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발제가 누릴 수 있는 작은 보람이 있다면 여하한 종류의 편파적이고 국부적인 웨슬리 이해의 위험성을 충분히 경고하는 데 있다 할 것입니다.
"이 위대한 빛이, 전 세계를 비추고 그가 전도와 저술을 통하여 반세기 이상 끝없이 옹호하고자 했던 바 초대 교회의 순수한 사도적 교리와 실제를 부흥시키고 강화시키고 변호하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일어 났도다. 또한 그가 수 천명의 사람들 가슴과 삶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 전체와 서방 세계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이 확장되고 효력이 입증되는 것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지켜보았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능력이나 기대를 훨씬 뛰어 넘어 미래의 모든 세대들이 기뻐하도록 자신의 사역이 지속되고 확립되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만들어진 성직 서임을 그는 보았다. 이 비문을 읽는 자여, 그대가 어쩔 수 없이 이 하나님에 의해 쓰여진 도구를 축복하고 싶거든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찌어다." ("영국 런던의 City Road Chapel 뒤에 있는 웨슬리의 묘비에 새겨진 비문")
참고 도서 목록(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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