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의로운 행실
<마태복음 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감리교회 성만찬 예문의 인사는 평화의 인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삶은 평화의 삶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평화로운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평화로 가는 지름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평화 그 자체입니다. 평화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평화의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오늘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준비한 말씀은 <너희의 의로운 행실>입니다.
지난 전교인 수련회(2015년 8월 3일~5일) 때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태복음을 읽기 시작해서 한 달간 복음서를 일고 또 읽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에서 시작하여, <광야의 시험>과 <한 가지 부족한 것>의 말씀을 묵상하고 전했습니다. 오늘은 그 연장선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에 이르는 <의로운 행실>에 대하여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설교제목을 <의로운 행실>이라고 정했습니다. 이는 개역 개정 성경에는 <너희 의>라고 되어 있지만 표준 새 번역 성경은 <너희의 의로운 행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표준 새 번역으로 마태복음 5장 2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마5: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인의 행동이 율법학자나 바리새파보다도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의로운 행실>이 천국에 들어가게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습니다.(18) 율법은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거나 소홀히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19) 기독교는 율법을 존중하고 말씀의 계명을 존중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고 완전케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 기독교 신자들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더 나아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 같은 율법주의자들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기독교인을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의로운 행실>은 위선적이고 거짓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주의자라고,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라고 경원시하는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확대하면 비기독교인들 보다도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고, 다른 종교의 사람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흔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불신자보다,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 가는 사람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만 구원받는다는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을 잘 못 받아들여 율법무용론자가 되기도 하고 도덕폐기론자가 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 마태복음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말하는 복음서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게 기독교는 무엇이며 기독교인의 교리는 무엇인지를 가르친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교리복음서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리하였습니다. 복음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 율법은 초기 기독교의 갈등문제였습니다. 율법은 십계명을 포함한 구약성경의 계명들입니다. 넓게는 10개의 십계명과 613조의 법률과 법률을 해석한 판례법인 장로들의 유전까지 다 포함하는 유대교의 계명들입니다. 기독교의 처음 교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 기독교는 의롭게 사는 공동체이며, 의로운 행실을 위하여 율법을 지키는 공동체입니다.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전케 합니다. 그럼으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게 율법으로 인한 갈등을 정리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십니다.
율법을 완전케 하는 복음의 행동원칙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결과적 범죄 이전에 동기적인 범죄조차 하지 말라는 마음의 율법을 지키는 내적심화의 원칙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몇 가지 행동규범들이 있습니다. 살인금지, 간음금지, 맹세금지, 복수금지 등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율법 보다 더 깊은 행동규범을 말하고 있습니다. 살인이 아니라 욕설도 하지 말고, 간음이 아니라 음욕도 품지 말고, 헛 맹세가 아니라 아예 맹세를 하지 말고,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 하였으나 복수를 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5:21~22>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유대교인의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는 결과적 범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살인은 물론이고 욕설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라가’는 히브리어 욕설입니다. 결과적 범죄만이 아니라 살인을 유발시키는 욕설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분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욕설을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힌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복음 안에서 내면적으로 더 깊어졌습니다.
<마5:27~28>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
간음금지에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율법은 간음이라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지만 복음은 간음을 유발시키는 음욕자체를 금지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5:33~34>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맹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헛맹세는 하지 말라고 하지만 복음은 아예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맹세할 때 하늘을 담보삼아 맹세를 하는 데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기 때문입니다.
3. 사랑이 율법을 완전케 합니다.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전케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마5:43~44) 마태복음 5장의 결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결정판입니다. 율법은 범죄금지와 복수형벌을 강조하지만 복음은 범죄예방과 무한사랑을 강조합니다.
동태복수를 금지하는 성경말씀을 읽겠습니다.
<마5:38~39>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율법은 동태복수를 허용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당한대로 갚아주는 동태복수(同態復讐)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은 고대의 율법인데 예수님은 동태복수를 사랑으로 바꾸셨습니다. 사실 엄격하게 적용하면 사람의 눈이 다르고 이가 다르고 신체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곳을 같은 곳으로 복수하는 논리 자체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 복수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결론은 무한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복수를 금지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43~44>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무한사랑입니다. 복음의 법은 바로 이 <사랑의 법>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에게 방종 하라거나 불법을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말하는 것보다 한 차원 더 깊이 생각하고 한 차원 더 높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할 때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의 내적심화 곧 외면의 행위 이전에 내면의 마음을 중시하는 복음의 법인 사랑의 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롭게 살기를 바라셨고 더 깊은 마음의 법을 지키시기를 바라셨으며 사랑의 법으로 완전해지시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법>과 <사랑의 법>의 원칙은 마태복음 6장의 3대 영성에서도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6장은 유대교의 3대 영성인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하여 기독교의 복음적인 영성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전에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선포형식으로 새로운 기독교의 영성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은 유대교의 3대 영성인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하여 <너희는 이렇게 하라.>고 유대교와는 다른 기독교의 행동규범과 삶의 방식을 선포합니다.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인정받도록 은밀한 구제를 하고, 골방의 기도를 하고, 밝은 금식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성도 외면적인 행위보다 내면적인 마음을 중시하고,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중시하는 쪽으로 심화시키셨습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유대교의 영성을 마음으로 더 깊이 심화시키면서 마음을 중시하고 진심을 중시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고 말씀하십니다. (히10:22)
예수님은 한 평생 율법을 듣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으로 판단하면서 살아온 유대교인들에게 기독교의 입장을 밝히셨습니다.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 이 말은 율법을 존중하고, 예수님 스스로도 율법적인 행동을 하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율법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공생애 내내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내면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지키되 한 차원 높은 행동을 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문자적인 율법만 강조하다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사랑의 옷을 입을 때만 율법은 완전해집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정죄의 수단이 되고 사망의 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율법은 스스로 지킬 때는 최고의 가치이지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면 최악의 흉기가 됩니다. 결국 율법은 예수님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자신을 죽이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전케 합니다.
4. 율법을 완전케 하는 사랑은 관용의 용서입니다.
율법을 완전케 하는 사랑이란 관용의 용서를 말합니다. 너그럽게 용서하는 데서 사랑이 있고, 이 사랑 안에 율법의 완전케 함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율법학자보다 바리새파 사람들 보다 더 의롭게 산다는 말은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게 살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게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거꾸로 삽니다. 자기는 범죄고 불의하게 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의롭게 살라고 강요하면서 조금이라도 율법을 어기면 죽이기도 합니다. 그런 율법은 복음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율법의 적용이 중요합니다.
결국 관건은 율법의 적용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적용하느냐가 율법을 완전케 하는 성패를 결정합니다. 그 핵심은 <자기 적용과 타인 적용의 이중원리>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는 지키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지키라고 강요하거나 아니면 자기는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율법을 어기면 즉시 형벌을 가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사는 복음주의자들은 자기 스스로는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거나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게 적용해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할지라도 용서합니다. 이 차이점에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을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적용하는 것이 율법을 완전케 하는 길입니다. 이 <자기 적용과 타인 적용>의 간격 속에 사랑의 마음이 있고 관용의 용서가 있습니다.
성경은 <관용-너그러움>에 대하여 자주 말씀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성도들의 관용을 알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주님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빌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또 바울은 자기 제자인 디모데에게 감독을 세울 때 <관용>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세우라고 권면합니다.
<딤전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한 자들을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고 말합니다.
<담전6:17~18>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야고보서는 관용은 위로부터 난 지혜라고 말합니다.
<약3:17~18>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을 너그러운 성도라고 말합니다.
<행17:11~12>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선지자 이사야는 너그러우신 하나님의 용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용서하십니다.
<사55:6~7>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다윗은 너그러우신 하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그럽게 대해셨고, 다윗은 하나님의 그 너그러우심을 인하여 기도했습니다.
<시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독교인의 행동규범이 있고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살지 말고 복음주의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한 삶을 사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러운 사랑을 베푸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전케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마5:43~44) 마태복음 5장의 결론은 <원수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그 사랑은 율법을 양면적으로 적용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스스로에게는 아주 엄격하게 율법을 적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처럼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지키라고 강요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자기는 율법을 지키지만 다른 사람이 지키지 못할지라도 너그럽게 용서합니다. 그 사이에 사랑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스스로는 율법을 존중하고 지키되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너그럽게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너그러움은 위로부터 온 지혜이며(약3:17) 교회는 주님이 가까이 오시니 너그러운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합니다.(빌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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