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기쁨” 느헤미아8:1-10, 누가복음4:14-21(인도네시아 박티아르 감독 설교 통역원고 번역문)
느헤미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기쁨”
주님, 우리의 심령의 열망과 마음의 평온함 가운데 이곳(성전)에서 말씀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회자들은 오랫동안 특별히 설교의 길이와 더불어 유머들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유머이야기) 어떤 한 설교자가 그의 설교를 끝마치면서 성도들에게 너무 오랫동안 설교한 것에 대해 사과했던 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시계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뒷자리에서 소리쳤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달력은 가지고 있습니까?
누가복음의 오늘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과격한 적대자 들에게 가셨고, 역사상 가장 짧을 수 있는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라났던 나사렛에 있는 회당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회당장으로부터 이사야 두루마리를 받으셨고 이사야서 61장을 읽으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개역성경-이사야61:1-2)”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개역성경-누가복음
그리고 나서 그는 앉았습니다. 랍비가 앉았을 때 그것은 그들이 끝났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르치며 전파하기를 시작하는 위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앉아서 말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너희들이 들을 때 이루어졌다.”
그것이 다였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것은 매우 짧은 설교였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의 구약본문 말씀은 매우 다른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매우 특별한 날입니다.
바벨론 포로로부터 50년이 지난 후 약속의 땅으로 최근에 돌아왔던 백성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마당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Water Gate 옆의 뜰에 모였습니다.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이 그들에게 읽혀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한낮까지 거의 6시간 동안
여러분 중에 몇 명은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이 억압당하고 지루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놀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 그것으로부터 사실 사람들은 그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은 손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땅에 엎드리어 그들의 머리를 낮추어 절하며 기도했습니다. 다시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완전하게 그들의 듣는 말씀 속에 빠져들어갔습니다. 말씀은 그들을 깊이 어루만졌다.(감동시켰다.)
마지막 시간이 되었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감동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을 울게 만들고 또 여러분의 무릎을 꿇게 만들고 또는 여러분이 감사하며 손을 들어 올렸던 이유입니다. 또 아멘 아멘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라고 기쁨으로 열정에 빠져 말하던 이유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너무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 왔습니다. 또는 아마도 우리는 그 말씀과 충분히 가까이 하지 못했거나 갈망하지 못했습니다. 또는 아마도 우리는 단순히 신령한 어떤 것에 대해서 필요한 감각을 잃어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오순절 또는 카리스마적인 운동으로의 예배처럼 예배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한 목회자가 설교할 때 그들은 아멘 할렐루야로 응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쉽게 잊어버립니다. 우리의 놀람을 이해하는 감각과 우리의 지식을 위한 욕망(지식욕)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자랐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단어인 “왜?”라고 말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아빠, 왜 어린 소녀들은 취침시간에 자야 하나요?”
“엄마, 왜 벼락이 있나요?”
“아빠, 왜 하늘은 푸른색인가요?”
“엄마, 우리는 어린 아기를 안 낳아요?”
가끔씩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쉽게 더 많은 질문들을 가져옵니다.
“아빠, 왜 콩깍지들은 녹색인가요?”
“왜냐하면 그때 그것들은 아직 초록콩이 아니기 때문이지”
“왜 그것들은 초록콩이 아닌가요?”
“왜냐하면 그것들은 파란색이거나 어떤 것이기 때문이지”
“왜 그것들은 파란색일까요?” 등등
물론 가끔은 이것은 놀이와 같습니다. 아빠가 참는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매우 흥미롭고 놀라움을 벗어버립니다. 자라나는 생각은 이해를 갈구합니다. 그러나 네 살의 이해는 질문이 약해집니다. “왜?” 를 온전히 포위하여 나타나는 질문들이 약해집니다.
지식을 향한 욕구가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아이들이 그들의 방식을 받아들일 정도로 아이들이 컸다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는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호기심이 멈추고 물건들이 익숙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것들이 이해되어질 때 우리들에게 무슨일들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뜻을 깨달아 졌을 때는 언제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관하여 얘기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언제인가요?
그것들이 익숙해 졌을 때입니까? 또는 우리는 그 질문들이 우리를 넘어선 요점이 된 요구가 없다는 것에 두려워 할 때 입니까?
우리가 질문에 이해를 잘 했다고 두려워 할 때입니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 변화되어진 우리들의 질문에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에스라의 말씀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회가 너무 오랫동안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압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길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것입니까?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손길의 선하심으로부터 수년간을 얼마나 많이 어긋난 것입니까? 2500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좋은 생활을 살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들에 즉 성경에 쓰여진 것에는 정말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약속들 그리고 그들과 그들 나라를 위해서 요구 되어지는 것들에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유배(포로)시기 전에 돌보아 주겠다는 거래가 있었습니다. 즐겁게 할 친척들 살아남은 자는 찾아지고 그리고 물론 얼마 후에는 완화되었습니다. 안식일 예배는 남아있는 몇 명에게는 충분했습니다. 유월절 동안에 성전으로의 매년 여행은 충분했습니다. 오늘날 몇몇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예배로 만족하는 것과 같은 종류입니다. 또는 부활절에 참여하는 것과 성탄절 촛불 예배에 참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유배기간 동안에 여러분이 노예상태일 때 오래된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이 얼마나 쉬울지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명상하는 것 오래된 두루마리에 기록된 것처럼 또는 제사장들이나 선생님들에 의해서 암송 되어진 것처럼. 하나님을 단순히 믿는 것은 충분했다.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은 정말로 그분이 말씀하신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나???
나는 여러분이 그런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할지 모른다.
만일 우리가 한 친구나 친척의 사랑으로 1조의 루피아(인도의 화폐단위)를 상속받는데 여러분이 그의 유언장을 읽기를 거절하고 어느 은행으로 가서 그 돈을 요구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올 때,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다시 모였다. 오늘날 성경의 처음 다섯에 해당하는 바로 그 형태로 모여진 하나님의 말씀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그것을 들음으로 창조로부터 출애굽의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았고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부터 금송아지 이야기에서는 그들 조상들의 죄를 알았다.
그들은 그들이 축복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어주신 그들 자신이 수행해야 할 율법을 들었으며 그들이 얼마나 율법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깨달았으며 왜 그들이 그렇게 고통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와 왜 그들의 토지와 그들의 삶이 여전히 빈궁하게 된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잘못 행한 것에 대한 슬픔으로 울었고, 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화나게 했는지에 대한 것과 그들이 그 이유를 잊고 살았던 것에 대한 슬픔으로 울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여러분이 또한 우리의 나라가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관하여 말씀하셔야만 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항상 일하시는 것과 예배의 중요성에 관하여 말씀하셔야만 했는지 아십니까? 왜 우리가 심지어 우리가 싫어하는 우리의 정치가들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여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관해서 아십니까?
여러분은 용서하는 것은 잊는 것이란 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거룩한 책은 결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그러나 오히려 매 페이지의 해석 속에서 그것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그리고 진실로 남을 돕는 사람을 도우십니까?
“목숨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목표와 나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잃은 사람은 그들을 구할 것이다.”
“여러분은 어두움에서 여러분을 광대한 빛으로 이끌어내신 그의 힘있는 행동을 선포하기 위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미 있습니다. 내 형제 자매들이여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말해야 하는 가를 인식할 때 놀라운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의식할 때 놀라운 것이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수 년 동안에 처음으로 말씀을 들었을 때 통곡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에 처음으로 듣게 되었을 때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셔야만 했던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했던 백성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그들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훨씬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되어버렸음을 인하여 한탄하였으며, 통곡했고, 도우심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선자자들 중의 마지막인 에스라 그리고 그와 함께 공무원으로서 나라의 통치자인 느헤미야는 그들이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접하게 되는 것과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과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시인해야 하는 것에 대해 우리 모두는 한번씩은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존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체험
“이 날은 주 하나님께 거룩한 날이며 이 때는 하나님께 특별한 때이니 슬퍼하거나 울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가서 축하하며 최고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십시오. 먹거나 마시지 않고 있는 자들과 함께 나누십시오. 이날은 주님의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에 잠겨있지 마십시오. 비통해 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기쁨은 여러분의 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이러합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고 우리 하나님께 거룩한 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듣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주리고 목마른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의로움에 있어서
완전함에 있어서
구원에 있어서
지금이 바로 거룩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심지어 지금 이순간도 여러분의 귀에 들려지고 있으며, 여러분은 손에 붙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일하시고 계시며 또한 일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말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는 그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견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및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였던 자들이 모든 시대를 걸쳐 선포하였던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며 오늘날 이 말씀을 여러분이 들음으로 성취되어 졌습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요,
오늘이 주의 은혜의, 용서의, 희년의 때 입니다.
빚이 사하여 지고 땅이 반환되며 민족들이 함께 되돌아오고 포로들이 자유를 누리게 되고 눈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되며 저는 자들이 걷게 되는 때입니다.
오늘날 말씀은 여러분이 그것을 들음으로써 성취 되어졌습니다.
여러분의 귀를 더욱 여십시오.
여러분의 갈망에,
요구들에,
바램에,
여러분이 붙잡는 것을 설명하도록 도울 수 있는 친구에,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실 성령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위해 그에게 간구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은 가장 확실하게 우리의 죄에 대하여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또한 동일한 말씀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더욱 사랑을 이해하고, 사랑 안에서 기뻐하고, 그로 인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어 우리 자신을 시인하며 더욱 강해지고 더욱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그는 여러분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있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세우기 위해 있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문을 열기 위해서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여러분을 너무도 사랑하십니다. 그는 그의 오직 하나뿐인 독생자를 여러분과 세상을 위해 보내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를 믿고, 기쁘시게 하고,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를 따르기 위하여 나아온다면 여러분은 멸망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 주님의 기쁨은 우리의 힘이 됩니다.
-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안내자가 됩니다.
- 날마다 말씀을 읽는 가운데 말씀을 기뻐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성도들을 위한 기도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말씀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여러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방법을 보여주심 감사합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방법과 우리들 가운데 치유하시는 능력을 허락하심도 감사합니다. 신실하게 말씀을 선포하며 여러분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도록 하는 자들을 우리에게 주심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살아있는 말씀 주심을 인하여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말씀은 육신이 되셨고 우리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여러분의 은혜의 때를 선포케 하시는 자 되게 하심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자신의 몸까지도 바치는 자로 삼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가장 귀한 이름을 높이며 찬양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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